雜/무제

아플 수 있어서 청춘이다.

同黎 2015. 1. 2. 00:15

아플 수 있어서 청춘이다.


1. 대학에 들어와서 2008년까지 학사경고를 2번 받았다. 대학에 입학하니 운동권 선배들이 있었고, 나는 매일 술을 먹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아직 한총련도 있었고 5월이면 여기저기서 대학생들의 커다란 데모판도 있었다. 약간의 중2병과 소영웅주의에 빠져 있던 나를 선배들은 학회에 데려가 두들겨 패기 시작했고 (물리적인 폭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매일 술을 먹였다.

그렇게 나는 대학사회에서 완전히 개조되었다. 자신이 중산층인줄 착각하는 서민층들이 모여사는 작은 동네에서 공부 깨나 했다고 폼을 재던 어린애는 수업을 밥먹듯이 빠졌다. 점심부터 낮술하느라 빠졌고, 데모가느라 빠졌고, 학회 세미나 커리를 못읽어서 빠졌고, 선배들이랑 얘기하다가 빠졌고, 날씨가 좋아 빠졌고, 날씨가 나빠 빠졌고, 그냥 빠졌다. 막차를 타지 않고 집에 간 적이 없었고, 집에 가지 않는 날도 비일비재했다. 그게 대학생활이었다.


2. 이것이 2005년의 모든 대학생들의 생활이었던 것은 아니다. 모두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두려워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내가 운동권 선배들을 따라다녔던 이유는 그네들이 술을 많이 사주기도 했고 고민을 많이 들어주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나에게 아파하는 법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공부를 꽤나 했고 집안도 그리 가난하지 않는 박세연이라는 아이는 굉장히 이기적이었고 남의 아픔에 동감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네들과 함께 술먹고 자고 얘기하면서 세상에 얼마나 많은 아픔이 있는지 알앗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잘 살기 위해 노력한다고 해서 피할 수 없는 것들인것도 알았다.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알게 되면서 하지 않았던 고민들을 하게 되었다. 너무 많은 고민은 다시 술을 불렀고 집에 들어가지 않고 학교에서 지내는 날이 계속되었다. 그런 와중에 갔던 농활은 천국이었다. 열흘동안 눈만 쓰면 옆에 고민을 나눌 동기와 선배들이 가득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이없는 이야기도 많았지만 그렇게 2005년 여름의 첫 농활은 즐거웠던 기억으로 남아있었고, 05학번 중에는 힘들때 농활가고 싶다는 말을 중얼거린 친구들도 많았다.


3. 어쩌면 안암동에 이렇게 오래 눌러앉게 된 것은 그때의 기억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쨋든 나는 꽤나 잘사는 집안에 살고 있는 SKY 출신의 남성이다. 내가 아무리 돈도 안되는 인문학을 공부하고 남루하게 살고 있는지를 강조해도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지난 몇년 간의 경험은 남의 아픔에 공감하며 같이 아파하는 마음과 나에게 주어진 환경을 "내 노력과 능력으로 얻은 것이다."와 같은 염치없는 말과 생각은 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나와 같이 살았던 친구들은 대부분 담담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고 있다. 우린 사회를 너무 일찍 알았고 거기서 우리가 겪을 경험들도 막연하게나마 알 수 있었다. 적어도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사회라는건 알았으니까. 취업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현장에서 활동하거나. 하는 일은 제각각이지만 적어도 나는 그 친구들이 모두 남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고, 또 아파하는 것을 미리 두려워하지는 않는다는 친구들이라는 것은 확신한다.


4. 아프니까 청춘이다. 이 말이 주는 의미가 "남들도 너만큼 아프니까 안심해라" 이든 "지금 아픈것은 당연하다" 이든 이런식은 자위는 유쾌하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에게 닥치지 않은 아픔을 피하기 위해 도망치고 있지는 않을까? 겁을 미리 집어먹고 저 앞에 아른거리는 아픔을 피해서 전력질주하고 있는건 아닐까? 오히려 내가 혹은 남이 당하는 아픔을 담담하게 맞아들이고 아픔에 대해서 천착하면 생각해본적은 있는가? 그런 고민의 기회는 지금은 너무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다.

청춘이라는 것을 20대라는 시간적 의미에 잡아두고 싶지 않다. 내가 아는 청춘을 사는 사람은 20대가 없다. 그들은 적어도 아직 나에게 오지 않은 아픔때문에 좌우에 있는 다른 이의 아픔을 외면하지는 않았다. 청춘이 아닌 사람은 남의 아픔에 완전히 둔감하고 자신의 상황에만 골몰한다.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것이다.

지금 아픔을 피하기 위해 질주하는 이들을 탓하려는 것은 아니다. 왜냐면 온 사회에 그들에게 그럴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걱정되는 것은 나의, 또 남의 아픔을 느끼지 않기 위해 도망간다면 반드시 언젠가 나에게 닥칠 아픔을 맞닥트렸을 때는 어쩔 것인가의 것이다. 슬픔을 평생 외면하기위해 살아온 사람은 그 아픔을 극복하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은 결국 나의 아픔을 위한 대비이기도 한것이다.

긴긴 이야기 끝에 내가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아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그것이 나의 것이든, 남의 것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