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무제

운동권 (하위)문화에 대한 간단한 소회

同黎 2016. 10. 22. 01:57

이제는 잘 기억도 안나는... 2009년 고대 동연을 할 때 민중가요 악보집을 만든 적이 있었다. 당시 민중가요 노래집 생산이 거의 사라지고 있을 때였다. 전남대 교지편집위원회에서 <오월의 코스모스>라는 노래집을 매년 내고는 있었지만 아무래도 여러가지 예산이나 인력 문제도 업데이트가 늦었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노래는 멀리멀리>라는 민중가요 악보집을 내고 있었지만 그건 사료로의 성격이 강했고, 연도순으로 노래가 정리되었기 때문에 현장에서 불려지는 노래들이 실리기에는 너무 요원했다. 관악에서는 여남이 평등하기 위한 민중가요 노래집이 나왔고 남성 옥타부 위주의 민중가요 악보를 상당수 고치기는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여성과 남성이 모두 부르기 애매한 옥타브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한 2년 동안 노래를 모으고 모아서 노래의 대중성과 역사성, 정치적 올바름 등등을 고려해서 600 여 곡을 추려내고, 거기에 외국곡과 김민기, 김광석, 안치환의 악보를 추가해서 2권의 노래집을 내었다. 만드는 동안 의외로 제대로 된 악보가 없는 노래도 있었서 (예를 들면 혁명의 투혼) 팔자에도 없는 앙코르 같은 악보 프로그램 만져야했고, 연영석 동지는 악보를 보지 못한다고 해서 결국 밴드 하는 친구를 불러다가 기타 코드만 따서 넣기도 했다. 오랫동안 큰 민가집이 안만들어져서 그런지 여기저기서 달라는 일도 많았고, 지금도 어디어디에서 노래책을 제본해서 쓴다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래도 이거 하나 남겼구나 싶기도 하다. 뭐 결국 그 책들은 나도 원본은 못가지고 결국 제본해서 가지고 있다. 


악보집을 만들면서 드는 생각은 민중가요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이었다. 60~70년대 민중가요는 낭만적 대학생 운동을 그대로 보여주고, 80년대 이후의 민중가요의 갑작스러운 군가(軍歌)화와 민족적 감수성의 강조는 본격적으로 변혁운동으로 변화하는 운동과, 또 한편으로 반미반제운동의 영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문제는 90년대이다. 민중가요는 80년대 건설한 그 단단한 벽을 뚫지 못했고, 시대에 따라가지 못하는 모습은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급기야 <그대를 처음 만난 날> 같은 경악스러운 노래는 한총련 보급가로 만들었다. (<그대를 처음 만난 날>이 어떤 노래인지는 직접 찾아보시라. 대충 사수대 하는 남자 운동권과 그 남자 손수건 주던 여자 운동권이 눈맞는다는 내용이다) <그대를 처음 만난 날> 같은 노래가 한총련이라는 대학생 운동 집단의 보급곡이 되었다는 것은 운동권 문화가 스스로 얼마나 대중으로부터 격리되었는지, 그리고 그들만의 감수성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또한 얼마나 문제의식이 부재한지 역시 보여준다.


1990년대가 중반이 가까워지자 결국 스스로 이러한 위기를 문예단위들 스스로가 직감했다. 새로운 움직임이 단단할 것 같던 NL진영 내부에서 나온 것 자체가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얼마나 대두되었는지를 보여준다. 한총련진군가를 부르며 북춤을 추던 조국과 청춘은 5집에서부터 미제의 음악이라고 비판받던 락을 도입했고, 이어 보사노바까지 도입하면서 민중가요의 완전한 새로운 장을 열었다. 조국과 청춘의 명곡으로 알려진 <장산곶매>, <우산>, <뮨울 덛어>, <가자! 철마야>, <내 눈물에 고인 하늘>, <청년시대>, <비>, <이 길 가다보면>, <날개> 같은 노래는 이 때 등장했고 대학가에 순식간에 보급되었다. 아마 2000년대 초중반 학번까지 그래도 교투가 살아있던 학교에서는 이런 노래를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또한 이에 대한 영향으로 민운단위에서도 꽃다지나 천지인 등이 새로운 노래를 선보이면서 민중가요는 단순한 운동집단의 하위문화를 뚫는 보편적 정서를 어느 정도 확보하는 듯했다.


문제는 이게 끝이라는 점이다. 명백한 운동의 쇠퇴와 이에 따른 문예단위들의 축소, 그리고 더 이상 스스로 재생산하지 못하는 민중가요판 스스로의 문제는 민중가요를 더욱 고립시켰다. 예를들어 현재 활동하는 몇 안되는 학출 민중가요 집단인 우리나라는 오히려 조국과 청춘보다 더 후퇴한 "맑고 또랑또랑하고 가사 전달력에만 집중하는" 노래들만 여전히 생산하고 있다. 더 이상 새로운 대학에서의 민중가요 생산은 없었다. 돌이켜보면 노무현정권 하에서 한미 FTA 반대 운동을 하며 거리에서 이루어졌던 진영에 따른 문예단위의 대응은 이랬던 것 같다. 먼저 NL진영은 스스로 새로운 생산을 포기하고 극단적인 대중성만을 추구하며 <무조건> 같은 트로트 곡의 개사곡을 집단적으로 보급했고, 다함께 역시 여기에 편승했다. 반면 좌파진영에서는 NL의 대중 추수주의적 경향을 비판하면서도 별다른 대안은 내지 못했고 결국 과거 NL 출신 문예단위에서 생산한 곡들을 주로 재탕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2000년대에 들어 90년대의 운동을 경험했던 이들은 지금은 몇가지 선택을 하고 있는 것 같다. NL진영은 다시 언급하지만 우리나라 대표되는 더욱 고전적이고 보수적인 선택을 하고 있다. 사실 가사만 유해졌을 뿐, 이들이 천리마나 4집 이전의 조국과 청춘과 무엇이 다른지는 모르겠다. 진학련이나 관악 일부의 리버럴들은 역시 민중문예라는 하위문화를 떠나 인디라는 또 다른 하위문화(이제는 단순한 하위문화라고 보기 어렵겠지만)로 이전해갔다. 붕가붕가 레코드가 대표적일 것이다. 그리고 좌파 출신으로 여전히 민중문예에 종사하는 이들은 역시 현장과의 밀접도가 높아진 현장 중심의 노래들을 계속 생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뭐 이제는 현역도 아니고 전혀 관계없는 분야에서 살고 있는 내가 본 느낌이니 틀린 것도 있겠다.


오래된 노래책 제작의 추억을 다시 꺼내보면서 굳이 이렇게 주저리 글을 늘어 놓는 이유는 과연 앞으로 운동권 문화는 어떻게 바뀌어갈까 궁금증이 들기 때문이다. 예전에 시청광장에 4.30 문화제를 보러 가서 많은 것이 바뀌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내기 때 서울대 대운동장의 절반 정도를 매우며, 새벽까지 문선을 하던 광경은 2009년 운동에서 부끄럽게도 물러날 때 쯤은 점차 사려졌다. 시청광장에서 본 새로운 문화제는 한 시대가 갔고 다른 시도들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좀 더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과거에는 운동권 문화가 외부문화에 영향을 주었다면 이제는 반대로 외부문화로부터 운동권 문화가 영향을 받아 변할 때가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원칙적으로는 운동을 한다는 건 항상 대중의 언어를 지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느 집단에도 고유의 하위문화가 없을 수는 없다. 지금까지의 운동권 문화가 내부의 전문가들에 의해서 유지되고 또 고착되었다면 이제는 바뀌어야 할 학생운동권 하위문화는 새롭게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문화의 "전문가"들과 어떤 갈등을 거쳐 어떤 모습을 갖추게 될까? 또 그것은 지금의 민주노총판 집회에서 볼 수 있는 고착된 민중운동판 하위문화와는 어떻게 갈등하고 변화할 것인가? 소위 홍대식 정서가 운동권 내부에 정착될까? 정말로 궁금하다. 아마 운동권이었다기 보다는 운동권 덕후였던 나로서는 부끄러운 일이긴 하지만 계속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덕후로의 역할밖에 할 수 없는 입장에서 나는 또 관찰하고 수집하고 그걸 전해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