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툴바



12/9 금

김포공항 출발
간사이공항 도착. 날이 심하게 따뜻함. 아뿔사. 일본은 단풍 막바지 였음.
간사이 스룻토 패스 구입.
타니미치 4정목 숙소 도착.
도톤보리로 이동. 최후의 만찬. 라멘 먹음. 차슈라멘이 매우 감동적임 : 한국의 라멘은 라멘이 아니었음. 님들도 오사카 가면 금룡라면을.
오사카 시내 구경.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뚫은 운하.
도톤보리 뒷골목에서 삿포로 맥주와 야끼도리로 최후의 술자리.


12/10 토 아스카 순례 - 도보

키토라 고분
다카마쓰 고분
문무천황릉
다카마쓰 벽화관
천무-지통천황릉
귤사(쇼토쿠 태자 탄생지)
거북바위
이시부타이 고분 - 소가씨 고분 열라 큼 덮개돌 11톤이라함
강사
아스카데라(비조사)
만엽문화관
주선석
아스카자료관
아스카쿄


12/11 일 교토

백제왕신사 - 의자왕 동생을 모신 곳
지은원
헤이안신궁(헤이안쿄)
리치메이칸 대학
니조성
광륭사 :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 친견
청수사(기요미즈데라)
기온 거리 구경


12/12 월 오사카-교토 : 이날부터 모든 식사는 250엔짜리 규동이나 마그도날도로 통일. 책을 사는 속도가 빨라짐에 따라 재정 위기가 초래.

인덕천황릉 - 둘래 2850미터 무덤이 아닐지도.... 몽촌토성만함
숭신천황릉
주길신사
사천왕사
오사카 역사박물관 - 매우 책 구입
나니와 궁
오사카성
동사 - 생각지도 않았는데 매우 좋음
서본원사


12/13 화 나라

신공황후릉(추정) - 민족주의를 발휘함. 난동
팔번신사 - 신공황후 모신 곳
효겸천황릉
수인천황릉
헤이조쿄
당초제사
약사사
법륭사  - 접근성이 매우 떨어짐. 나라 교통은 간사이 스롯토 패스가 안됨. 일본 버스는 후불제. 거리에 따라 돈이 올라가는데 거의 택시 수준임. 썩을 놈들. 6정거장 가는데 300엔씩 냄. 어쨋든 백제관음은 감동적.
중궁사
후시노키고분
후지와라쿄, 백제사 유적


12/14 수 나라

동대사, 정창원
나라국립박물관 - 매우 책 구입
춘일신사
흥복사
원흥사
이소노가미 신궁(칠지도 보관처)
하시하카고분


12/15 오사카-교토 : 똑같이 생각 무덤보고 감동하는 고대사 사람들과 다닐 수 없어 혼자 다님 - 혼자 다닐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김.

오사카 역사박물관 재방문
오사카시립 동양도자미술관
교토 이동
평등원
남선사 - 한류를 사랑하는 매표소 아줌마들에게 한국어 강습
고덕암
동조궁, 금강원, 학과 거북이의 정원.


12/16 오사카

오사카시립 해양박물관
공항가는 길에 고서점 발견. 폭풍 구입.
간사이공항 출발
김포공항 도착 - 매우 추워 당황

저작자 표시 비영리
Posted by 同黎

정석학당 광고

雜/무제 2010/02/26 11:15

성삼문님 저작의 정석학당 광고입니다. ㅎ

저작자 표시 비영리

' > 무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석학당 광고  (0) 2010/02/26
숨님  (1) 2010/01/14
賢儒李公癖墓碣銘 幷序  (0) 2010/01/11
Posted by 同黎

병산서원

2010/02/03 20:30


병산서원 앞의 병산은
말 그대로 병풍이더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병산서원  (1) 2010/02/03
안동 답사 일정  (0) 2010/01/31
Posted by 同黎

안동 답사 일정

2010/01/31 01:41
1일
서울 출발
소산마을 (안동김씨 세거지) 청원루 답사
부용대 (하회마을 조망지)
병산서원
검제 학봉종택(유물각)
봉정사-영산암
제비원 석불
안동역 앞 동부동5층 전탑
내앞(천전)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 저녁식사
안동 용상동에서 숙박

2일
안동 태사묘
신세동 7층 전탑과 탑동종택, 임청각
다시 내앞으로 가서 독립운동기념관과 의성김씨종택
오천 군자리 광산 김씨 세거지
국학진흥원-유교박물관
도산서원
신암리 사면불
영주리 석불입상
가흥리 마애삼존불상

3일
충재 권벌 종택
북지리 마애불
부석사
금성대군 신단
소수서원-소수박물관
순흥 읍내리 고분벽화(모형)
묵밥 먹고 상경
저작자 표시 비영리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병산서원  (1) 2010/02/03
안동 답사 일정  (0) 2010/01/31
Posted by 同黎

옛 마을을 지나며

文/詩 2010/01/19 20:42
옛 마을을 지나며
 
                        김남주

찬 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
저작자 표시 비영리

'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옛 마을을 지나며  (0) 2010/01/19
Posted by 同黎

야심성유휘

畵/그림방 2010/01/17 23:47

밤이 깊을 수록 별은 더 빛납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 > 그림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야심성유휘  (0) 2010/01/17
Posted by 同黎

해드린게 없어서 죄송합니다...
꼭 부활하세요! 잊지 않을께요!
저작자 표시 비영리

' > 거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용산부활도 - 이윤엽  (0) 2010/01/16
Posted by 同黎

숨님

雜/무제 2010/01/14 20:56
나도 건너건너 들은 이야기인데, 처음에 성서를 번역할때는 성령을 숨님이라고 했다고 한다.
숨님, 우리가 내쉬는 숨.
참 적절하고 예쁜 표현이다.
예수의 정신은 거창하지 않으면서 언제 어디서나 소박하게 실천할 수 있으며(이게 "기부" 따위라는 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자연스럽에 녹아드는 것이기에... 그게 하느님 나라 운동 아니겠는가?
역사 속의 예수를 나타내는 데에는 적절한 말이 아닐까 싶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 > 무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석학당 광고  (0) 2010/02/26
숨님  (1) 2010/01/14
賢儒李公癖墓碣銘 幷序  (0) 2010/01/11
Posted by 同黎




헤드윅은 내가 가장 재미있게 본 영화 중 하나. 특히 영화에 나오는 The Origin of World 는 나에게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 노래.
그래 사랑은 여성과 남성, 남성과 남성, 여성과 여성 모두 할 수 있는 거지. 그리고 2개의 성으로 규정할 수 없는 많은 성들... 그리고 그 중 자신에게 맞는 반쪽을 찾는 과정으로써의 사랑...



저작자 표시 비영리

' >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The Origin of Love - 헤드윅  (0) 2010/01/14
꿈꾸지 않으면  (1) 2010/01/12
Posted by 同黎

눈 쌓인 장릉

畵/사진방 2010/01/14 20:19

저작자 표시 비영리

' > 사진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 쌓인 장릉  (0) 2010/01/14
철원 노동당사의 풀  (0) 2010/01/11
철원 고석정  (0) 2010/01/11
산청 傳 구형왕릉  (0) 2010/01/11
Posted by 同黎
TAG 장릉

문화대혁명의 의미

2010/01/14 19:27

문화대혁명은 지금까지 많은 오해와 혹은 단선적인 평가만이 존재해와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브리태니커 백과에 실린 문화대혁명의 글을 보시죠.

 


중국공산당 주석 마오쩌둥[毛澤東]이 중국 혁명정신을 재건하기 위해 자신이 권좌에 있던 마지막 10년간(1966~76)에 걸쳐 추진한 대격변. 중국이 소련식 사회주의 건설노선을 따라 나아갈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자신의 역사적 위치에 대한 우려 때문에 마오쩌둥은 역사의 흐름을 역류시키기 위해 사상 유례없는 노력을 기울여 중국의 여러 도시를 혼란상태로 몰아넣었다.

 


이처럼 문화대혁명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이기 일색입니다. 문화혁명하면 주로 홍위병, 지식인과 반모택봉파들의 강제 숙청과 노역, 문물 파괴, 대자보전 등만 퍼올리게 되죠. 그리고 그 원인도 목택동이 유소기, 등소평등을 경계하기 위한 정치적 시도로만 평가하기 일수입니다. 하지만 다른 측면으로 보면 문화혁명은 유럽 지성계, 특히 좌파에게 거대한 충격과 새로운 발견을 주기도 하였고, 사회주의(공산주의) 사상에 하나의 커다란 획을 그었던 사건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중국인들에게도 새로운 자각을 안겨주기도 하였습니다.

 


문화대혁명의 원인은 3가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중국 내부 주자파의 득세입니다. 주자파는 말 그대로 자본주의의 방침을 따르는 자들이라는 뜻인데, 말하자면 중국 사회주의에 수정과 개량을 가하려던 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경제적인 이유도 있지만, 오히려 정치적 목적이 더 강합니다. 즉 모택동을 비롯한 이들을 제거하고 중국 정계의 중심을 차지하려던 등소평의 야욕이 있었습니다. 이전에도 중국공산당 내의 파벌은 있었지만 사실 이를 계획적으로 조직하고 후계를 지르는건 아마 등소평이 처음이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등소평의 흑묘백묘론은 사실상 사회주의를 포기하는 것으로써, 모택동은 등소평이 정권을 잡을 경우 중국혁명 자체가 사라질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둘째는 소련과의 대립입니다. 당시 소련은 소위 "사회주의 조국"으로 행세하며 일종의 패권주의를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가장 많은 인구를 지니고 국제적 발언권도 강할 수 밖에 없는 중국을 통제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이를 거부하였고  중국 독자적인 아시아 사회주의 국가사이에서의 패권을 유지하려고 하였습니다. 이 점은 제가 쭉 지적해온 중국 공산당의 한계이기도 합나다. 사실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는 대치되는 것이지만 2차대전 이후에 사회주의운동과 민족국가 수립운동이 동시에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민족주의가 나타나는 경우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소련의 슬라브중심주의나, 호치민의 동남아시아에서의 베트남중심주의도 이러한 한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번째는 두번째 이유와도 연결되면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바로 사회주의(공산주의)의 전화 노력입니다. 동시에 소련식 스탈린주의의 거부입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공산주의는 바로 스탈린주의를 의미합니다. 즉 스탈린주의가 일종의 고전, 정통의 자리를 획득한 것이죠. (그러나 지금은 아시다시피 스탈린주의자-구좌파는 별로 없습니다. 적어도 한국엔) 스탈린는 여기에 더하여 소련은 더 이상 계급이 없는 국가이다! 즉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완벽하게 실현된 국가이다라고 선언하면서 국제적으로 소련의 모범으로 삼을 것을 요구함과 동시에 국내에서 소련공산당에 대한 반대를 모두 사회주의 자체에 대한 반대로 환원시키면서 공산주의의 본래 통치방법인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가장한 1인 독재를 시행합니다.

 


그러나 모택동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중국혁명 과정에서 모든 혁명과 사회주의의 건설이 맑스나 스탈린이 말한 어떠한 "교과서" 대로 되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이죠. 어느 곳이나 각자의 모순이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죠. 일례로 정식으로 하면 중국은 공업화가 부진하고 노동자보다 농민이 훨씬 많은 나라이기 때문에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날 수 없는 곳입니다. 하지만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탈린주의에서 벗어나 사회주의 자체에 대한 전화를 이야기하게 되고, 그러한 과정에서 나온 저서가 모순론입니다. 즉 스탈린주의가 이야기하는 사회의 모순은 사실한 단 하나, 즉 계급모순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혁명에 성공하고 나서 보니 사회주의 국가의 설립은 사회주의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사회주의혁명이 성공해서 사회 전반에 다른 모순들이 계속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당간부(관료)와 인민간의 모순, 도시와 농촌의 모순, 남성과 여성 사이의 모순, 지식인과 무식자간의 모순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회마다 모순이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요모순"과 "주변모순" 이 존재하며, 주요모순과 주변모순은 순차적이지만 모두 타도해야 할 대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모순의 해소를 위하여 노동자, 농민계급만 나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설득하고 계몽하고 "때려서" 하나의 전선에 서게 해야할 "주타방(주요타격방향)"과 전선동맹이 공격해야 할 "주공방(주요공격방향)"을 구분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문화대혁명은 그러한 의미에서 기존의 정치혁명, 사회혁명이 완수하지 못한 문화의 혁명을 이루지위한 운동이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당 간부가 관료화되고, 도시와 농촌의 차이가 심각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인민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모택동은 인민대중에게 혁명의 주체는 당간부가 아니라 바로 인민 자신이다! 인민이여 상부를 비판하라 라고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이에 호응하여 인민대중은 홍위병을 결성하고 자체적으로 지역의 당의 관료들과 봉건 잔재들은 비판함으로써 스스로 권력을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운동은 지금의 모든 좌파 대중운동의 숙제인데, 문화대혁명은 그러한 의미에서 하나의 큰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또하 문화대혁명은 중국인들의 기존 사상체계에 하나의 큰 충격을 주게 됩니다. 중국은 수천년동안 사(士)에 대한 존중과 존경이 내재화되어왔고, 따라서 지식인은 지금의 상상보다 훨씬 더 큰 사회적 권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말은 절대적인 것이었죠. 그러나 문화대혁명 기간동안 인민대중 스스로에 의한 당 중앙에 대한 비판과 숙청이 이루어지면서 지식인에 대한 환상이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즉 지적차이는 단지 차이일 뿐,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체계의 일대 변화는 당시 이루어졌던 지식인의 하방운동과 맞물려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방운동은 말 그래도 아래로 향하는 운동이라는 뜻으로 지식인들이나 고위 당 관료들이 농촌과 공장의 노동자, 농민의 상황을 직접 체험하기 위하여 연대하는 운동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지식인들에게야 유배나 다름 없어 보이겠지만 농민이나 노동자들의 입장에서는 "선생님" 역시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 경험이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의의에도 불과하고 문화대혁명의 한계는 존재합니다. 우선 엄청나게 거대해진 대중의 힘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모택동조차 그것을 통제하지 못한체 우왕자왕하다가 각개격파 당합니다. 또한 혁명의 고조로 지나치게 최대강령주의가 판을 치면서 문물파괴(이 점이 제가 가장 땅을 치며 통곡하는 부분이죠. 문물파괴를 피한다는 명목으로 이시기 엄청난 문화재가 중국에서 유출되기도 합니다.)와 지나친 숙청은 사회를 경직시키고 혁명의 본 뜻을 가리게도 합니다. 아울러 모택동 자신의 한계도 존재하는데, 대약진 운동(혁명 이후 경제성장을 위해 추진한 대대적인 운동)의 실패를 인정하지 못한 점이 그것입니다. 공산당의 간부 권력 확대와 관료제를 비판하면서도 자신도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죠.

 


하지만 분명한 것은 문화대혁명이 그동안 지나치기 평가절하되었으며, 권력투쟁만으로 치부되어왔다는 것입니다. 문화대혁명은 다순 권력투쟁이 아니라 사회주의 사상의 앞길을 두고 벌인 치열한 투쟁이며, 권력투쟁은 거기에 종속되는 하나의 투쟁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에 대한 기록과 출판은 거의 지식인들만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비극이 있습니다. 지식인들은 이 시기 하방운동이나 비판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만 자신들이 받은 치욕으로만 생각했습니다. 뿌리깊은 중국의 士의식이 이들을 방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에 의해 기록된 문화혁명은 대부분 부정적일 수 밖에 없고, 또한 냉전중인 당시 상황상, 미국의 서방에 의해서 부정적으로 평가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오랫동안 냉전에 시달리고 있는 한국사회에도 자연스럽게 이러한 평가 밖에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오해를 아직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반면 문화대혁명은 프랑스 등의 유럽에서는 획기적인 사상의 전환을 시켜, 알튀세르 등의 이론가를 탄생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역사에 의한 평가는 냉엄해야 합니다. 한국에 소개된 문화대혁명에 대한 책은 거의 전부 지식인이나 혹은 지식인의 자녀들에 의해 쓰여진 책입니다. 그러나 최근 문화대혁명에 대한 기층 민중의 이야기를 담은 책들이 번역되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문화대혁명 또 다른 기억 - 어느 조반파 노동자의 문혁 10년" 이라는 책이 최근에 출간되어서 기층 민중 시각에 의한 문화대혁명 연구의 첫 스타트를 끊었습니다. 이 책의 서평 한 문단을 소개하며 이번 강의를 갈음합니다.

 

2008 베이징 올림픽은 중국인들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 행사였다. 30년간 실시해 온 개혁개방 정책으로 어떻게 중국이 달라졌는지를 세계인에게 보일 수 있는 자리였으며, 이제까지 후진국이나 제3세계로 평가받고 있던 중국이 선진국 대열에 충분히 올라갈 수 있음을 과시하는 행사였다. 하지만 중국의 이러한 화려한 변신 속에는 티베트 독립 운동의 무력 진압 같은 폭력적인 모습이 숨겨져 있을 뿐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 간의 심한 소득 격차로 인한 사회적 불안 요소도 함께 내재되어 있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안정되어 보이는 중국 내부에서, 중국의 노동자들은 현재에 만족하기보다는 40년 전의 문화대혁명(1966~1976년)을 그리워하고 있다. 문혁의 상징인 마오쩌둥을 다시 등장시키며 그 시절로 돌아가고자 하는 움직임이 생겨나고 있는데, 특히 노동자들은 국유기업 민영화 과정에 항의하며,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높이 들고 당시의 구호들을 외치며 집단행동을 벌이기도 했다. 노동자들의 살 권리를 주장하는 이런 시위와 그들이 외치는 구호의 근거를 살펴보면, 그 밑엔 문화대혁명이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분명 중국 내부에서는 잊혀져야 할 시간, 알리고 싶지 않은 과거로 굳어져 버린 문혁이 왜 지금 평범한 중국 인민들에게는 그리움의 대상이 되고 있을까? 국가에 의해 공식적으로는 끝나 버린 문혁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문혁에 대한 관방의 기억과 인민의 기억 사이에는 어떠한 틈이 있는 것일까?
이 책 『문화대혁명, 또 다른 기억: 어느 조반파의 노동자의 문혁 10년』은 지은이 천이난(陳益南)이 장장 10년간 지속된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노동자의 신분으로 조반(造反;‘혁명을 받든다, 혁명적’이라는 의미)운동에 참가하면서 경험한 일을 서술한 회고록이다. 따라서 저자는 혁명의 한가운데서 직접 체험한, 문혁의 발생 과정과 조반파가 우위를 차지하게 된 상황, 또한 중앙에 의해 숙정(肅正)당하기까지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전달해 준다.
조반파 노동자조직은 문혁 연구의 중요한 과제임에도 아직 한국에 소개된 적이 없다. 지금까지 한국에 소개된 문혁 관련 작품들은 지식인의 입장에서 구성되거나, 상층부의 권력 투쟁의 결과라는 관점에서만 다루어졌고, 문혁 시기를 살아가던 평범한 민중들의 경우 그저 혁명의 흐름에 휩쓸려 피폐한 일상을 꾸려가는 존재로만 비춰져 왔던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담론적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홍위병 출신 지식인들이 그들의 문혁 경험을 다양하게 재생산할 수 있었던 것과 달리, 노동자들은 그들의 문혁 경험을 알릴 통로가 마땅하지 않기도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노동자가 자신의 문혁 경험을 써 내려간 이 책은, 독자들에게 문혁의 다층적인 면모를 알려 주는 것은 물론, 노동자의 시선으로 관방에 의해 통제되지 못하는 문혁의 다른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우리에게 문화대혁명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화대혁명의 의미  (0) 2010/01/14
Posted by 同黎

꿈꾸지 않으면

鬪/노래 2010/01/12 18:44


꿈 꾸지 않으면 사는게 아니라고
별헤는 맘으로 없는 길 가려네
사랑하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설레는 마음으로 낯선 길 가려 하네
아름다운 꿈꾸며 사랑하는 우리
아무도 가지 않는 길 가는 우리들
누구도 꿈꾸지 못한
우리들의 세상 만들어 가네
배운다는 건(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 것
가르친다는 건(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배운다는 건(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 것
가르친다는 건(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우리 알고 있네 우리 알고 있네
배운다는 건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저작자 표시 비영리

' >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The Origin of Love - 헤드윅  (0) 2010/01/14
꿈꾸지 않으면  (1) 2010/01/12
Posted by 同黎

천안문 광장에 울려퍼지던 추이지엔(崔建)의 <일무소유>(一無所有)




                                                                                       유요비(문화평론가,시인)


  1989년 6월 4일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는 수십만의 인파가 모여들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젊은이들의 입에서 노래가 퍼져나왔고, 드디어는 수십만의 인파가 따라부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천안문 광장을 둘러싼 공안(경찰)이 물러나고 탱크를 앞세운 군병력이 투입되었다. 천안문 광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중국 정부는 중국 인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무력으로 탄압하였다. 그리고 천안문 광장에서 수십만의 인파가 합창하던 노래는 금지곡이 되었고, 그 노래를 부른 가수는 무대를 빼앗기게 되었다. 그 노래는 바로 추이지엔(崔建)의 <일무소유>(一無所有)다.



  내 비록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난 네게 항상 물었어

  언제 나와 함께 갈 것인지

  그러나 넌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날 비웃었어

  난 네게 내 꿈을 주겠어.

  내 자유도 함께

  ......

  그러나 넌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날 비웃었어

  너는 언제나 나와 함께 갈 것인가

  난 네게 내 꿈을 주겠어

  내 자유도 함께

                                                <일무소유> 일부


  최근 20세기 중국 연예계의 10대 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선정된 추이지엔(崔建)은 중국 최초의 록가수다. 추이지엔은 중국의 개방 이후 급속히 변화하는 정치, 경제, 사회환경 속에서의 젊은 세대들의 고민과 진실, 이상향과 자유에 대한 갈망을 노래로 표현하여 중국 젊은 세대들의 우상으로 우뚝선 인물이다.

  추이지엔의 <일무소유>는 사랑에 대한 간절한 바람을 표현한 연가이긴 하지만, 그 사랑은 단순하지 않다. 꿈, 자유, 함께 라는 단어에서 암시하듯이 시대를 고민하는 젊은이들의 숭고한 사랑이다. 이런 사랑은 훈계조의 계몽가요만을 접하던 중국 젊은이들과 추이지엔 이전의 중국 가수들에겐 상상조차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랑’이었다. 추이지엔의 등장으로 마치 우리나라의 1970년대 김민기의 노래와 포크음악으로 청년문화가 생성되었듯이 중국에서도 비판적이고 저항적인 청년문화가 생성되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 문화혁명 이후 "대장정의 정신과 마오쩌둥 주석의 말씀"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야만 했던 중국의 젊은이들은 우울함과 무력감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그러나 추이지엔의 록음악은 20여년간 중국의 젊은이들을 옭아맸던 우울함과 무기력증을 단숨에 날려보내고, 젊은이들의 가슴속에 잠자고 있던 자유와 진보의 꿈을 용틀임하게 했다. 개인의 자유로운 상상력과 감성을 억압하던 전체주의적 집단의 논리가 추이지엔의 노래 한 곡 <일무소유>로 산산히 박살나 버린 것이다.

  서구의 록음악은 기성의 가치에 대해 저항하고 변혁을 추구하지만, 추이지엔의 록은 여기에 동양적 전통이 스며들어 있다. 때문에 신나고 흥겨울 뿐 아니라, 어떤 때는 사색적이고 철학적이기까지 하다. 물론 풍자는 기본이다. 그래서 악기도 중국전통의 악기인 古箏(거문고의 일종), 笛子(피리), 날나리 등과 색스폰, 전자올겐 등 서양악기를 혼합해서 사용하며, 펑크, 재즈, 언더그라운드, 랩, 락, 레게 등 여러 장르 음악의 특징과 리듬을 융합하여 흐벅진 음색으로 독창성을 표현하고 있다.

  추이지엔은 1961년 공군군악대의 트럼펫 주자인 아버지 최홍재와 조선족 무용단원인 어머니 장순화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부모의 영향으로 음악과 춤을 접했으며, 14세때 아버지에게 본격적으로 트럼펫을 배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1년 베이징 아이허관현악단의 전문 트럼펫연주자가 되면서 중국에서는 금지되어 있는 서구 락음악에 심취하게 되었고, 기타와 작곡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추이지엔이 쉼취한 음악은 스팅, 폴리스 등의 록음악과 존 덴버, 폴 사이몬 등의 포크음악이었다. 1984년 다른 6명의 음악인들과 함께 ‘치허판’(七合板)이라는 밴드를 조직하여 첫번째로 <난 알아요>(不是我不明白)’라는 락음악을 만들었는데, 이는 중국 최초의 보컬밴드였다. 1986년 베이징에서 열린 ‘국제평화의 해 기념음악회’에서 오프닝으로 <일무소유>를 불렀다. 당시 추이지엔은 청나라 황제 복장으로 공연을 했는데 관중들은 추이지엔의 노래를 듣고도 이해하지 못해 황당해 하다가 10여분이 지나서야 열광적인 환호의 박수를 보냈다.

  추이지엔의 앨범으로는 1989년에 발표한 첫번째 음반인 《신장정의 락》(중국에선 一无所有 로 발표하였다), 1991년 2월에 발표한 두번째 음반인 《해결》, 1994년 8월에 발표한 세번째 음반 《홍기하적단》(紅旗下的蛋), 1998년에 발표한 네번째 음반 《무력한 자의 힘≫ 등이 있다. 특기할 것은 첫 번째 음반 《신장정의 락》은 중국혁명 당시의 ‘연안대장정’을 빗대어 새로운 미래를 건설하자는 내용이고, 《홍기하적단》(직역하면 홍기 아래서의 알)은 문화혁명 당시 위세를 떨치던 홍위병을 풍자한 것인데, 이는 추이지엔이 바로 문화혁명 후의 전체주의적 암울한 사회 분위기에서 성장한 세대였기 때문이다.

  추이지엔은 음악뿐 아니라, 중국 6세대 영화감독인 장위엔의 인디영화 <북경녀석들>(1993년)의 제작과 각본, 주연으로 출연하여 화제를 낳기도 했는데, 이 영화는 서사기법과 영화적 구성을 뛰어 넘어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천안문사태 이후 중국 베이징 하층 젊은이들의 방황하는 삶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1995년 로카르노 영화제 특별상과 베를린영화제 청년비평가상 수상하기도 하였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Posted by 同黎

賢儒李公癖墓碣銘 幷序

公의 貫鄕은 延安이요, 諱는 癖이고, 阿號는 碧壁이며, 살던 곳은 忠淸道 丹陽郡이다.生前 婚姻을 하지 않아, 妻와 子息이 없고, 다만 家門의 아우 셋이 있을 따름이다.일찍이 壬戌年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文章과 格物致知에 能하였으며, 性品은 思慮가 깊고 剛直하였다. 開國한지 六百十七年이 되던 해에 我朝에 入朝하였다. 天下의 人材를 뽑는 科擧에 應試하여 進仕試에서 滿點을 받아 本朝 最初의 壯元을 하여서 일찍이 그 이름이 朝野에 널리 퍼졌다. 以後에 大科 文科에 乙科 及第하여 弘文錄에 登載됨과 同時에 朝廷에 出仕하였으니, 처음의 品階가 通仕郞이요, 그 官職은 權知承文院正字였다. 以後 正職으로 使令된 後에도 生員試와 訓練院試에 一等으로 入格하여 그 文章을 天下에 뽐내었다. 後에 그 間의 試券과 詩賦, 論考를 모아 文集을 刊行하니 그 名稱을 謙遜히 하여 碧壁雜集이라 붙였다.

正職으로 使令된 以後, 여러 사람으로부터 그 出衆한 能力을 높이 사게 되어 벼슬에 벼슬을 더하였고, 品階는 갈수록 높아졌다. 直言을 諫하는 玉堂의 博士가 되었으며, 곧 關西의 暗行御史로 任命되어 世道를 바로잡고자 勞力하였다. 이때에 黙黙히 自身의 所任을 다하고 있으나, 잘 알려지지 않은 官屬, 訓長, 百姓들의 功을 御殿에 아뢰니, 이를 機會로 官에서 미처 살피지 못한 곳을 두루 어루만지는 效果를 낳아, 朝野에 公을 稱頌하는 목소리가 드높았다. 이어 禮曹의 佐郞으로 首長이 되었으며 몇 달이 지나 生涯 첫 外官職인 咸鏡道의 道使가 되어 關北으로 떠났고 品階는 從四品 朝散大夫에 이르렀다.

公은 生前에 官職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과 交友하였다. 그리하여 咸鏡道에는 遊樂을 함께 하는 이들을 위한 모임을 만들었다. 또한 本朝의 經世濟民에도 觀心을 기울여, 邑內에 萬物工作이라는 市廛을 세우고, 좋은 商品을 普及하나 殖利에 執着하지 않으니, 많은 이가 公의 재주와 性品을 稱讚하였다. 또한 敎育에 힘을 기울여, 처음에 平安道 大同學堂의 訓長으로 在職하다가, 곧 忠淸道 政碩學堂의 訓長과 有司가 되어 政碩學堂의 講義와 運營에 큰 功績을 남기었으며, 同時에 學堂의 書院昇格을 위하여 勞力하였다. 이러한 公의 性品과 能力에 感化되어 아우 여럿이 公을 中心으로 家門을 세우기를 懇請하니, 그것이 公이 世主가 되어 慶尙道 大邱府 八公山 기슭에 礎石을 잡은 竹乭世家이다. 世家는 비록 父母는 다르나, 義로 맺은 兄弟들이 서로를 恭敬하여 더 없이 友愛롭게 지내니, 他의 模範이 될만 하였다.

그러나 재주가 뛰어난 이는 하늘이 일찍 데려가는 運命에 처한 것 일지라. 公의 剛直한 성격이 불씨가 되어, 咸鏡道 道使로 在職할 時에, 土官 任命을 둘러싼 狀啓가 御殿에서 문제가 되어 誤解를 사, 及其也 削去仕版이 되었다. 그러나 公은 本來 品階에 連延하지 않고, 이미 예전부터 淸野에서 살 것을 念願하였기에 이를 機會로 다만 草野에 隱居하는 선비가 되고자 하였다. 그러나 昊天不弔라! 갑자기 豫期치 못한 禍가 公을 덮치니 以內 不歸의 客이 되어버렸다. 兄의 悲報를 들은 아우들은 슬퍼 嗚咽하며 머리에 재를 뿌리고, 흙바락닥을 뒹굴으며,殯所에는 弔問行列이 줄을 이었다. 아! 이 世上 어느 곳에서 다시 公과 같은 이와 만나 家門을 이루고 한 時代를 살겠는가? 차라리 公의 재주가 뛰어나지 않아 朝廷의 부름을 받지 않았다만, 다만 兄弟와 男妹의 友愛의 즐거움을 조금이라도 더 누릴 수 있었을 것을!

不足한 아우들은 형님을 지켜드릴지 못한 것을 가슴을 치며 慟哭하고, 다만 開國 六百十八年 十二月 二十九日 작은 墓碣을 세워 公이 世上에 나서 돌아갔음을 알린다. 銘曰,

公再不歸 今竹不靑
公曠草廬 現石失剛
山下建意 但避煩邪
世不體其 只弟憶志
竹石氣 豈論直士

開國 六百十八年 歲次 己丑 十二月 二十九日에 아우 承議郞 行承文院著作 金民勝 이 삼가 讚하고, 通訓大夫 行掌隷院提擧 天魚이 삼가 書하고 篆하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 > 무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석학당 광고  (0) 2010/02/26
숨님  (1) 2010/01/14
賢儒李公癖墓碣銘 幷序  (0) 2010/01/11
Posted by 同黎

괜시리 마음이 찡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 > 사진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 쌓인 장릉  (0) 2010/01/14
철원 노동당사의 풀  (0) 2010/01/11
철원 고석정  (0) 2010/01/11
산청 傳 구형왕릉  (0) 2010/01/11
Posted by 同黎

철원 고석정

畵/사진방 2010/01/11 19:46

임꺽정의 무대
저작자 표시 비영리

' > 사진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 쌓인 장릉  (0) 2010/01/14
철원 노동당사의 풀  (0) 2010/01/11
철원 고석정  (0) 2010/01/11
산청 傳 구형왕릉  (0) 2010/01/11
Posted by 同黎
TAG 고석정

저작자 표시 비영리

' > 사진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 쌓인 장릉  (0) 2010/01/14
철원 노동당사의 풀  (0) 2010/01/11
철원 고석정  (0) 2010/01/11
산청 傳 구형왕릉  (0) 2010/01/11
Posted by 同黎

충남지역 백제불상의 특징


- 서산마애삼존불, 태안마애삼존불, 예산화전리사면석불을 중심으로 -



1. 들어가며


백제의 정확한 세력권에 대해서는 많은 학설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당시 백제의 문화는 매우 발전하였고, 그 파급력도 매우 컸다는 것이다. 비록 백제의 첫 수도인 위례성의 위치도 최근 풍납동 유적의 발굴로 어느 정도 연구의 진척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고, 또 다른 도읍지인 웅진과 사비, 지금은 공주, 부여 역시 가시적인 흔적이 많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남아있는 유적, 유물이나 일본에 전래되고 있는 유물들을 보았을 때, 백제의 문화가 매우 세련되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충남지역은 백제 22대 문주왕 이래로 백제의 중심지였다. 백제의 가장 핵심적인 유물과 유적들이 이 지역에 많이 남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외침에 의해 멸망한 나라여서인지 정작 도읍지였던 공주와 부여 땅에는 백제의 걸작이 남아있지 않다. 특히 가장 화려하게 꽃피웠을 불상의 경우에는 발굴조사로 발견되는 소형의 금동불 이외에는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중국과의 교류 중심지였던 서산과 태안을 중심으로 예산까지 백제의 걸작이라 할 석불이 3구 남아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행운일 것이다. 이번 답사지 동선에 모두 포함되어 있는 3구의 불상을 중심으로 백제 불교조각의 특징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려 한다.

 

2. 충남지역 백제불상 개관


앞서 말했듯이, 충남지역은 백제의 수도와 중국과의 교역지가 위치한 지역으로 후기 백제의 핵심적인 지역이었다. 그리고 정작 도성에 남아있는 불교조각은 거의 없다. 발굴조사를 거쳐 출토되는 소형의 금동불, 석불들이 있을 뿐이고, 사찰에서 예배대상으로 조성되었다고 보여지는 대형 불상의 경우, 우리가 살펴볼 서산마애삼존불, 태안마애삼존불, 예산화전리사면석불이 전부이며, 이 외에 전북 익산지역에 연동리 석불좌상과 태봉사 삼존석불이, 정읍지역에 정읍보화리석불입상이, 그리고 충북 연기지역에 백제 멸망 직후 조성된 몇 개의 비상이 전해질 뿐이다. 그러므로 충남지역의 이 3 석불을 살펴본다는 것은 가장 세련되게 조성된 백제불상의 대표작들을 살펴본다는 의미가 있으며, 이를 통해 백제의 화려하게 꽃피웠던 문화를 다시 한 번 되짚어 볼 수 있어 의미가 크다가 하겠다.


2-1. 서산마애삼존불



백제 불상 중 가장 유명하며, 백제의 미소라는 별칭으로도 잘 알려진 서산마애삼존불은 보원사지와 멀지 않은 용현계곡 절벽에 새겨진 마애불이다. 1959년 처음 학계에 알려져 보고되었으며, 국보 84호로 지정되어 있다. 국보로 지정되고, 보호각을 세워 보존하였으나 통풍과 제습 등의 문제로 최근 보호각을 철거하였고, 본존불 상호 등에 생긴 균열을 보수한 후, 원래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서산마애삼존불의 위치적 특징은 이 지역이 태안반도에서 부여로 가는 길목이라는 점이다. 태안반도에서 마애불이 서있는 길을 따라 가야산 계곡을 따라가면 부여가 나오는데, 이 길은 오래전부터 중국과 교통하던 고로(古路)로 알려져있다. 당시 태안반도는 백제와 중국이 교류하는 중요한 지점이었는데, 이 지점에 마애불이 조성되었다는 것은, 이 마애불이 당시 중국과의 교류를 위해 이 지역을 왕래하던 이들의 소망을 담았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마애삼존불 이외에도, 이 길목에는 장승이 조성되어 있어, 이러한 추정에 힘을 실어준다. 삼존불이 학계에 보고된 것은 59년이나 이미 『호산록』에 삼존불에 대한 설화가 기록되어 있고, 삼존불이 있는 바위는 인(印)바위라 하여 상왕(象王)의 인(印)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있어, 이 지역 민초들로부터는 예로부터 존숭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산마애삼존불은 가운데 서있는 본존여래상과 보주를 들고 서있는 보살입상, 그리고 반가사유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구성은 매우 독특한데 아직까지 한국에서 똑같은 구성을 지닌 삼존불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 삼존불의 존명에 대해서는 석가, 미륵, 관음의 삼존불이라는 설과 석가, 관음은 맞지만 반가상의 미륵보살 여부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설, 법화경에 입각한 석가, 미륵, 제화갈라의 수기삼세불(授記三世佛)이라는 설 등이 있다. 학계의 통설은 석가, 미륵, 관음의 삼존불이라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문화재청의 안내판에는 석가, 미륵 제화갈라의 수기삼존불이라고 적혀있다.

서산마애삼존불은 태안마애삼존불 보다 시기가 다소 늦으며, 양식상으로 비슷하지만 약간 딱딱한 태안마애삼존불과는 달리 중후하지만 둥글고 부드러운 맛이 감도는 완숙한 경지의 조각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본존불의 유쾌한 웃음이나 아이 같은 좌우 협시 보살의 상호, 그리고 바위와 조화를 이루며 적절하게 양감이 느껴지는 조각의 깊이는 백제불상의 완성이라 해도 손색을 없을 정도이다. 앞서 말했듯, 중국 남북조와의 중요한 교통로에 새겨져있는 서산마애삼존불은 중국 남북조 말기의 양식을 띄고 있는데, 특히 본존불의 경우 북제(北齊) 불상에서 그 원류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날씬한 우협시의 봉주보살입상 역시 북제(北齊)의 영향이 보이며, 좌협시의 반가사유상은 그 유래가 없는 것으로 아이 같은 얼굴이 북주(北周)의 동형불(童形佛) 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북제나 북주, 수의 양식보다 훨씬 부드럽고 세련되어 있어, 백제 특유의 양식을 완성시킨 것으로 보인다.


2-2. 태안마애삼존불


태안 백화산에 큰 바위에 새겨져 있는 태안마애삼존불은 서산마애삼존불 보다 약간 앞선 것으로 지금은 태을암이라는 암자에서 관리하고 있다. 본래 보물 432호로 지정되어 오다가, 1995년 땅 속에 묻혀있던 하반부를 발굴조사하면서 그 중요성이 재발견되어 국보 307호로 승격 지정, 보호되고 있다. 바위 깊이 감실을 새겨 불상을 모셨으나, 감실 일부는 풍화작용으로 깨져 사라졌다.

태안반도가 위치한 내포 땅은, 백제의 고토회복을 위한 전진기지였다. 태안반도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만은 항구로는 최고의 입지였고, 가야산, 상왕산 등지의 풍부한 임야와 넓은 내포 평야는 충분한 전진기지로써의 역할을 하였다. 이 곳에서는 중국과의 교류가 매우 활발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태안반도에 있는 또다른 도시의 이름이 당진(唐津), 즉 당나라로 가는 항구라는 것만 보아도 태안반도가 대외 교류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지역이었는지 알 수 있다. 특히 고구려에 맞서 중국 남조와의 교류에 열을 올렸던 백제에게 이 지역은 매우 중요한 위치 였을 것이다. 특히 태안마애삼존불의 조성시기는 대략 서기 600년 경, 그러니까 백제 위덕왕(553~597)과 무왕(600~640) 기 경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 시기는 백제가 부흥의 열기를 불태운 시기로, 안정된 국력을 바탕으로 불교 또한 크게 부흥하였다. 하지만 학자에 따라서는 중국 남제(南齊) 불상과의 유사성을 들어 조성시기를 6세기 중반 이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태안마애삼존불은 3미터가 넘는 거대한 두 여래상 사이로 180cm 정도의 보살상이 서 있는 배우 특이한 형태이다. 이에 따라 양식에 대한 논란도 많은데, 서산마애삼존불과 마찬가지로 불상의 조각 양식은 북제(北齊)와 북주(北周)를 이어 수(隨)로 이어지는 양식과 비슷하다. 그러나 여래상 사이로 보살상이 끼어 있는 특이한 형태는 중국 북위 연창4년(515) 조성된 「용문석굴 빈양중동 북벽 협시삼존불」과 똑같다. 그렇기 때문에 태안마애삼존불을 북위 양식을 계승한 불상으로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전반적으로 서산마애삼존불보다 다소 딱딱한 느낌을 주고 있으나, 이는 어설프다는 느낌 보다는 거대한 불상의 크기와 더불어 웅대하다라는 느낌을 주고 있다. 중국 북제와 수의 경직된 양식을 백제식으로 해석하면서 새로운 백제만의 스타일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바위 위에는 목조 건축의 흔적이 있어, 전신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고, 바위 뒷면에도 불상이 새겨져 있으나 마멸이 극심하다.

불상의 존명을 확인하기 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이 특이한 형태의 삼존불의 본존이 누구이냐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삼존불에서 본존은 가운데 위치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운데의 보살상을 관음보살상으로 주정하고, 관음보살을 본존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보살이 불에 앞서 본존을 한다는 것은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고, 조각을 보더라도, 가운데 보살상은 부조가 얕고, 연화대좌의 경우도 뒤로 밀려있으니, 보살상을 본존으로 보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그렇다면 태안마애삼존불은 보살상을 동반한 이불병좌상(二佛竝坐像)일 가능성이 크다. 발견 당시 지역에 전래되는 바에 따르면 보살상은 관음보살, 좌불상은 약사여래, 우불상은 석가여래라고 한다. 보살상의 경우 관음보살의 일반적인 도상인 보주를 들고 있어, 관음보살이라는 데에 많은 의견일 일치하고 있고, 좌불상의 경우 손에 보주, 내지 약기(藥器)를 들고 있어 약사여래라는 것에 대부분 찬성하고 있으며, 우불상의 경우 단순히 시무외인만 하고 있어 석가여래라는 설과 아미타여래라는 설이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태안마애삼존불을 이불병좌상으로 봤을 때, 약사여래의 약기인(藥器印)은 8세기가 지나야 나타나므로 좌불상의 석가여래로 봐야 하고,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이불병좌상의 일반적인 도상대로, 우불상은 다보불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또한 중앙 보살상의 경우 보주를 든 보살상의 예가 관음보살상 뿐만 아니라 미륵보살에도 나타나는 만큼, 결국 태안마애삼존불은 미륵보살, 석가불, 다보불의 삼세불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2-3. 예산화전리사면석불





예산화전리사면석불은 서산마애삼존불에서 봉우리 두세개를 넘으면 있는 곳에 위치해있다. 앞선 두 불상과 마찬가지로, 예산사면석불 역시 고로(古路)의 중간에 위치해있다. 백제 유일의 사면불이자, 삼국을 합쳐도 가장 이른 사면불인 예산화전리사면석불은 본래 바닥면이 풍화작용으로 무너지면서 넘어져있던 것을 1983년 발견하여 학계에 처음 보고되었고, 발굴조사를 거쳐, 현재 보물 794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무른 활석의 바위에 새겨져서, 오랜 세월을 거쳐 풍화작용을 심하게 받아, 훼손이 심한 편이고, 두상이 모두 떨어져 나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상호를 거의 알아볼 수 없지만, 남아 있는 조각만으로도 많은 노력을 거쳐 조성될 불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발굴조사 성과에 따르면 노천불이 아니라, 불상이 조각된 석주를 중심으로 정사각형의 전각을 지어 불상을 보호하고, 예불을 드렸음을 알 수 있다.

불사의 편년은 앞의 두 불상보다 높아 6세기 전반으로 올라가는데, 이는 무령왕(501~523)에서 성왕(523~555)에 이르는 시기라는 것에 거의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이는 앞선 두 불상과는 달리 시기적으로 더 앞서는 북위(北魏) 말에서 동위(東魏)의 양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에서 사방불을 백제가 수용하면서 주로 석굴사원이 많았던 중국에서 유행한, 가운데 사면불을 새긴 석주를 놓고 예배하는 형식을 백제식으로 재해석 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무령왕에서 성왕기는 백제가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게 빼앗긴지 얼마 않되, 웅진으로 수도를 옮기고, 고토회복을 위해 국력을 증강시키던 때이다. 더군다나 예산지역은 고토회복의 군사적 전진기지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러한 배경과 국력을 바탕으로 사면불을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학자에 따라서는 중국 공현석굴이 군사기지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고토회복의지와 사면불의 불법전파의 정신을 응축한 것이 사면불이라는 설과 사면불이 고토회복의 의지를 다지며 성왕이 북위(北魏)의 운강석굴(雲岡石窟)을 본받아 만든 무령왕의 초상조각이며, 특히 남면 본존불이 무령왕이라는 설 등을 주장한다. 하지만 시기상으로 보아 이 주장은 조금 무리가 있다고 하겠다.

경주 굴불사지 사면석불

 

사방의 불상들은 바위면의 크기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조각되어 있는데, 남면이 가장 크며, 불상 역시 가장 크게 조성되어 있다. 특히 남면은 유일하게 좌상인데, 크기나 조각, 홀로 좌상인 것만 보아도 남면불이 이 사방불의 본존임을 알 수 있다. 북면이 그다음이고, 동서면은 다소 협소한데, 이 면들을 이용하여 모두 입상으로 불상을 새겼다. 예산화전리사면석불이 보고되기 전까지 대부분의 사방불은 신라의 것이었다. 경주 남산 탑곡 신인사(神印寺)의 사방불이 가장 오래된 신라의 사면불이며, 그 외에 굴불사지 사면석불과 경주 남산 칠불암 사면석불, 영주 신암리 사면석불, 다수의 탑신에 새긴 사면불이 전해지고 있으며, 고려시대의 것으로는 파주의 마애사면석불이 있다. 예산화전리사면석불은 경주 남산의 신인사지 사방불과 마찬가지로 방형(方形)의 자연석 암반을 이용하여 사방불을 새기고, 이를 이용하여 전각을 세웠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신라의 사면불은 각 면에 삼존, 오존 등 비교적 여러 존상을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비하여, 백제의 화전리사면불은 1면 1불의 원칙을 엄격하게 지켰다. 그러나 신라의 사면불이 각 면의 존상을 모두 동격으로 취급하며, 일정한 규제를 지키고 있는데 비하여, 화전리사면불은 가능한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여, 자유롭게 표현하고 있다. 사면불은 본래 동방 약사 유리광세계와 서방 아미타 극락세계 등 사방의 부처님을 모시는 것인데, 동방과 서방만 확실할 뿐 남방과 북방의 존상은 각 종파마다 대단히 다르다. 한국의 경우 일반적으로 북방 미륵 용화세계, 남방 석가 월륜세계라고 표현하지만 보생여래, 아촉여래 등이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화전리사면불의 존상을 아는 것은 다소 막막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비록 돌 중에 가장 무른 활석이기 때문에, 풍화의 영향을 심하게 받았지만 화전리사면불이 많은 공력을 들어 대단히 세밀하게 조각된 불상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남면 본존불의 광배부분은 불꽃무늬로 대단히 화려하고 역동적이게 조각되어 있는데, 북위 말기에서 동위·서위 시대의 운강석굴, 용문석굴 등과 비견할 수 있다. 특히 앞서 말했다시피 방형의 석주를 가운데 두고 사각형의 전각을 둔 예는, 중국의 초기 석굴양식과 비슷하기에, 사면불의 편년을 추정하는데 큰 근거가 된다. 그러나 머리의 원형 연화광배나 옷주름들의 표현은 중국불상의 기계적인 표현이 아닌 사면불 전체를 관통하는 약동감을 주고 있어 특유의 활력을 주고 있다. 이러한 점이 사면불에 나타나는 백제불상만의 특징일 것이다.


3. 결론 : 충남지역 백제불상의 특징


  위에서 살펴본 3구의 불상에서 우리는 몇가지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첫째, 세 불상은 모두 중국과의 교역로와 밀접하게 관련된 장소에 세워져있다. 둘째, 세 불상은 모두 백제의 고토회복, 국력회복의 의지가 강한 시기에 세워졌다. 셋째, 세 불상은 모두 중국 불교조각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오히려 그보다 더 발전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개로왕 때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 빼앗겨,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백제는 강력했던 해상장악권을 탈환하고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하여, 중국과의 교류를 활발히 하게 된다. 또한 고토회복을 위한 국력강화에 온 힘을 기울이게 된다. 태안반도는 경제적으로, 외교적으로, 문화적으로 백제에게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을 것이다. 세 불상은 바로 이렇게 중요한 지역에, 혹은 이 지역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중요한 교역로에 위치해서인 만큼, 활발한 문화교류의 단면 역시 3구의 불상을 통해 알 수 있다. 백제가 결국 멸망한 이 후에도, 여전히 태안반도는 중국과의 교류에서, 혹은 수운에서 중요한 지역이었고, 이 지역을 다니는 무수한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호를 빌면서 무사를 기원했을 것이다.

또한 세구의 불상은 백제의 염원을 받아 안은 것이다. 서산마애삼존불은 2.8미터, 태안마애삼존불과 예산화전리마애불은 모두 3미터를 넘는 대형 불상들이다. 개인의 발원만으로는 이렇게 큰 규모의 불상을, 그것도 이렇게 세련된 솜씨로 조성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3구 불상의 조성이 국가의 사업이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또한 태안반도의 중요성을 생각해보면, 3구 불상의 조성은 단순한 불사가 아니라 백제의 고토회복과 국력증강의 염원이 담겨있는 중요한 불사였음을 추즉해 볼 수 있다.

문화교류의 한 가운데 위치한 3구의 불상은 자연스럽게 중국의 불교조각의 흐름과 양식을 같이 하고 있다. 북위(北魏)-동위(東魏)·서위(西魏)-북제(北齊)·북주(北周)-수(隨)로 이어지는 중국 불교조각의 전통을 충실히 받아들이고 소화하는 가운데, 백제 특유의 양식과 결합시키고 발전시켜, 오히려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백제의 미소”를 만들어내었으니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고 할 수 있겠다.

 

4. 맺음말


  백제는 통일신라의 전성기 못지않은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다. 이는 일본에서 전래되고 있는 백제의 유물들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외침으로 멸망한 나라가 그렇듯이 마지막 수도인 사비에 남아있는 것은 평백제(平百濟)를 새겼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정림사지 오층석탑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뛰어날 불상이 3구나 살아남아 백제의 문화를 조금이나마 음미할 수 있는 것은 큰 행운이다. 또한 이번 추계답사에서 이 3구의 불상을 모두 돌아볼 수 있게 된 것 또한 큰 행운이다. 예비답사 때 모처럼 보호각을 벗어내고 햇살을 가득 받은 서산마애삼존불을 보면서 느꼈던, 밤늦게 백화산에 올라 핸드폰 조명으로 간신히 찾아낸 태안마애삼존불을 보면서 받았던, 헤매고 헤매, 겨우 친견했던 예산화전리사면석불의 광배의 이글거리는 불꽃을 보면 머리를 때렸던 감동을 답사를 통해 많은 이들과 함께하고 싶다.

 

5. 참고문헌

 

『한국고대불교조각비교연구』,김리나, 문예출판사, 2003

『한국미술사』, 진홍섭 외, 문예출판사, 2003

『한국미술의 역사』, 김원룡, 안휘준, 시공사, 2003

『한국의 불상』, 진홍섭, 일지사, 1976

『한국불상의 원류를 찾아서 1』, 최순우, 대원사, 2002

『한국의 불상조각 1 : 관불과 고졸미』, 문명대, 예경, 2003

『한국 불교 조각의 흐름』, 강우방, 대원사, 1995

『황수영전집2 : 한국의 불상 하』, 황수영, 혜안, 1998


저작자 표시 비영리

' > 그 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포 지방 백제불상의 특징  (0) 2010/01/11
답사수업교재 - 불교 작성중  (0) 2010/01/11
Posted by 同黎
한국사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이태진 (태학사, 2005년)
상세보기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조선사연구의 대가인 이태진교수가 동경대에서 한 개항과 병합까지를 다룬 6차의 강의와 토론을 정리한 역사교양서이다. 이태진교수는 일관되게 일제에 의하여 왜곡되고 폄하된 조선시대와 개항기의 한국사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으며 이는 (주류-신고전파)경제학계에서 주장하고 있는 식민지근대화론에 맞서 근대화기회박탈론을 펴온 그의 소신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 책 역시 조선이 일제가 아니었어도 근대화를 추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며, 그 중심세력이 개화파가 아니라 고종과 근왕세력임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가지 동의할 수 없는 점들이 존재한다. 고종은 과연 근대화의 기수였는가? 이태진 교수가 고종의 근대화 노력의 근거로 들고있는 서울 도시계획은 실상 일본이나 독일의 절대군주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통해 자신을 절대화하려고 했던 노력으로 보인다. 또한 근대화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산업화와 자유주의의 보급을 의미할 것인데 몇가지 도시 정비와 상징적인 건축물 건립만으로 그것을 증명할 수 없다. 더불어 최근 근대화와 서구화, 그리고 자본주의=발전이라는 인식에 대한 성찰의 움직임이 일고 있는 가운데, 이태진의 주장은 새로운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이태진의 이 책에는 지배층과 엘리트의 역사만이 있을 뿐, 기층민중에 대한 인식이 공백으로 남아있어, 한계를 보이고 있다.
근대화기회박탈론의 이태진과 식민지근대화론의 이영훈은 정반대의 입장을 가지고 있지만, 실상 두 사람의 주장은 많은 면에서 겹치고 있다. 모두 발전주의 사관을 바탕으로 근대화, 서구화를 우리가 가야했던 방향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제국의 시대에 아무리 천재가 조선 땅에 태어나 근대화를 추구했어도 조선이 식민지화를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부끄럽고 패배적인 일인가? 제국주의의 역사를 극복했던 과정은 하나의 큰 의미를 지닌다. 베트남의 경우 중국과 프랑스, 미국으로 이어지는 외세에 식민지가 되었지만 독립까지의 과정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우리도 식민의 기억을 단순히 패배로 기억할 것이 아니라 독립의 과정에서 의미를 찾아보는 것이 어떨까? 그것이 역사학계가 진정으로 식민지근대화론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일 것이다.


* 이태진은 책 말미에서 조일간 각종 협약, 조약의 불법성을 증명하고 있지만 내가 보기엔 별로 소용 없는 짓이다. 만약 일제가 "합법적"인 방법으로 합방을 했다면 그러면 그것이 정당한가?

* 책 첫머리의 외계충격설은 다음에 따로 다루겠다. 이건 어이가 없어서 원...

* 가장 큰 문제의 이 양반의 역사관에 민(民)의 영역은 공백이라는 것일 거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 > 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태진,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  (0) 2010/01/11
Posted by 同黎

아놔 이거 언제 다한댜




불교문화의 이해

1. 개관

불교는 부처님을 믿는 종교를 가리킵니다. 삼국시대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로 천 수백여년동안 불교는 한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으며 현재도 한국인의 절반 정도가 불교를 믿고 있습니다. 정부에 등록된 전통사찰만 수 천 곳에 달할 만큼, 불교 문화유산 역시 많습니다. 따라서 불교문화를 파악하는 것은 답사에 있어서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불교문화는 많은 이들에게 다가가기 어려운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여러 불교와 불교문화재의 용어들이 한자로 되어있고, 용어의 의미를 이해하기보다는 무조건 외우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불교는 답사수업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치를 떠는 부분이 되어가는 것 같네요. 하지만 불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본 의미를 조금만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답사지 중 많은 곳이 불교와 관련된 곳이니 만큼 불교문화에 대하여 이해한다면 답사를 더욱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1-1. 한국불교 약사(略史)

①불교의 탄생과 분열

불교는 기원전 6세기 경 북인도 룸비니에서 샤카족(석가족)의 왕자로 타어나 고타마 싯다르타에 의하여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계급차별적이었던 기존의 브라만교를 넘어 계층과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구도를 통해 부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가르침을 펼쳐 많은 제자들을 모았습니다. 그의 사후에 500명의 제자가 2차례에 거쳐 결집하여 불경이 탄생하고 계율이 완성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교리와 계율에 대한 차이가 드러났고, 결국 불교는 상좌부(上座部), 즉 소승(小乘)불교와 대중부(大衆部), 즉 대승(大乘)불교로 분할되게 되었습니다.

②불교의 동전(東傳)과 융성

기원전 3세기 인도의 통일왕인 아소카왕이 불교를 국교로 선포함에 따라 불교는 인도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그러나 불교의 융성에 따라 도덕적 결함이 생기게 되고, 교리가 지나치게 현학적으로 변하게 되면서 인도에서 불교는 수세기에 걸쳐 점차 쇠퇴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기원후 1세기 경 중국 후한(後漢)에 불교가 처음 전래되면서 불교는 차츰 그 중심을 동아시아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대략 4세기 말로 추정하고 있으며 삼국이 각각 중국의 남북조(南北朝)를 통하여 받아들였습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 (372년) 전진(前秦)으로부터, 백제는 침류왕 원년 (384년) 동진(東晉)으로부터, 신라는 눌지왕 때 처음 불교를 접했습니다. 불교의 수용은 국가의 중앙집권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신라처럼 오랜 저항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삼국 모두에서 불교는 성공적으로 정착하였고, 중국과 인도로 구법(求法) 여행을 떠나는 유학승도 많았습니다.

통일신라에서는 불교문화가 정점에 달했습니다. 진표로 대표되는 법상종(法相宗)을 대신하여 의상과 원효로 대표되는 화엄종(華嚴宗)이 크게 융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찰과 승려는 종교적 의미와 동시에 경제적, 사회적 지배층으로 변질되었고, 스스로가 대지주(大地主)가 되었고, 불교 행사나 사찰 건축에 지나치게 많은 경제적 소모가 있기도 하였습니다.

③나말여초와 고려의 불교

신라와 고려의 왕조교체기는 한반도의 불교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온 시기였습니다. 중국에서 교리의 해석보다 실천과 수행의 기풍을 강조하는 선종(禪宗)이 유입되면서 기존의 불교종파는 교종(敎宗)이라는 이름으로 재정립되었습니다. 선종은 그동안 경주와 왕과 귀족의 이해만을 대변했던 교종을 대체할 종파로 지방호족세력에게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고려의 통일 이후, 불교는 왕과 귀족에게 익숙한 교종을 중심으로 돌아갔고, 선종과 교종의 대립이 빈번해졌습니다. 이러한 갈등을 통합하기 위해 왕족 출신인 대각국사 의천은 천태종을 도입하여 교종중심의 불교 통합을 이루려고 하였습니다. 반대로 무신정권의 후원을 받은 보조국사 지눌은 타락한 불교계를 쇄신하기 위한 결사운동을 진행하고, 조계종을 세워 선종 중심의 불교 통합을 꾀하였습니다. 원간섭기에는 몽골의 영향으로 티베트불교가 들어오기도 하였는데, 이 결과로 불교에 대한 사대부계층의 부정적인 인식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④조선에서 현대의 불교

숭유억불의 기치로 일어난 조선에서 불교는 당연히 쇄락할 수밖에 없습습니다. 그러나 태조부터 세조에 이르는 기간까지는 왕실의 후원으로 급격한 쇄락은 막을 수 있었습니다. 성종대에 이르러 불교에 대한 유가의 탄압이 본격화되고, 가속화되면서 전국의 수많은 사찰이 파괴되거나 기울어지고, 승려들은 성역(城役)과 잡역(雜役)에 시달렸습니다. 이 시기에 특별히 불교 탄압이 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양란을 거치면서 승병의 역할이 중요해지고, 또 승려들의 공이 일부 인정되면서 불교는 과거와 같은 탄압을 받지는 않게 됩니다. 승려들이 각종 역(役)에 동원되는 것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많은 승려들은 승직(僧職)을 받기도 하였고, 전쟁으로 파괴된 사찰을 복원하는 불사(佛事)도 활발해졌습니다. 이 시기가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불교 문화재가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승려와 유학자들의 교류도 활발해졌는데. 학승(學僧)들은 이 시기 주로 성리학과 불교가 크게 다르지 않음을 강조했기 때문에 경전연구보다는 철학연구에 전념하였고, 그 결과 불교 교리는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불교계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던 서산-사명 계열로 정리되면서 선종과 교종이 선종 중심으로 통합되면서 교종과 밀교의 특징까지 고루 갖추게되는, 한국 특유의 통불교가 형성됩니다.

이후 일제시기 불교는 조선총독부의 사찰령 등을 통하여 일본 불교에 종속되어 결혼을 하는 대처승(帶妻僧)들이 늘어났습니다. 해방 후 이들에 대한 처리 문제가 큰 논쟁거리가 되었는데, 결국 지금은 비구승들을 중심으로 한 대한불교 조계종과 대처승들을 중심으로 한 대한불교 태고종으로 정리되었습니다.

 

1-2. 불교의 교리와 종파

①불교의 주요 교리

불교의 교리는 매우 깊고 오묘하면서도 다양하기 때문에 글 하나로 정리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다만 여기서는 가장 기초가 되는 부분만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낟,

1)사성제

2)팔정도

3)유식사상

4)윤회사상

②불교의 주요 경전

③불교의 주요 종파

 

1-3. 한국에서 불교문화의 위치

 

2. 불상의 도상과 특징

 

2-1. 불상 개관

①불상의 전래와 역사

②불상의 종류

1)주인공에 따라

2)재료에 따라

 

2-2. 부처의 도상

①부처의 일반 도상

1)불상의 구성과 용어

2)불상의 수인

②석가모니불

③비로자나불

④아미타불

⑤약사여래

⑥미륵불

⑦노사나불

⑧기타

⑨삼세불, 삼존불, 삼신불

 

2-3. 보살의 도상

①보살의 일반 도상

②관세음보살

③지장보살

④미륵보살

⑤문수, 보현보살

⑥일광, 월광보살

⑦기타

 

2-4. 기타 권속의 도상

①사천왕

②나한과 조사

③신장

④시왕

⑤칠성, 독성, 산신

⑥팔부중

⑦기타 권속

 

2-5. 불화의 이해

①불화 개관

②후불탱화

③괘불탱화

④팔상탱화

1)도솔래의(兜率來儀)

2)비람강생(毘藍降生)

3)사문유관(四門遊觀)

4)유성출가(踰城出家)

5)설산수도(雪山修道)

6)수하항마(樹下降魔)

7)녹원전법(鹿苑轉法)

8)쌍림열반(雙林涅槃)

⑤감로탱화

⑥신중탱화

⑦고승진영

⑧벽화와 단청

⑨칠성탱, 독성탱, 산신탱

⑩불화기타 (시왕탱, 조사탱, 삼장탱, 예불도)

 

3. 사찰건축의 이해

 

3-1. 한국의 가람배치

①고구려의 가람배치

②백제의 가람배치

③신라의 가람배치

④통일신라의 가람배치

⑤고려 이후의 가람배치

 

3-2. 가람배치의 실제

①일반적 가람배치

②산문(일주문과 불이문, 해탈문)

③천왕문, 금강문

④누각

⑤대웅전, 대웅보전

⑥극락전, 미타전, 무량수전

⑦비로전, 화엄전, 대적광전, 대광명전, 보광명전

⑧약사전, 유리광전, 만월전

⑨관음전, 원통전

⑩지장전, 명부전, 시왕전

⑪영산전, 팔상전

⑫응진전, 나한전, 조사당, 국사당, 영각

⑬미륵전, 용화전

 

⑭적멸보궁과 계단

⑮삼성각, 칠성각, 북극전, 독성각, 산신각, 용왕각

이 전각들은 불교와 민간신앙의 합일을 보여주는 것으로, 칠성과 독성, 산신 등을 모시는 곳입니다. 주로 가람배치에서 가장 뒤쪽에 위치하며 전각의 크기 역시 매우 작는 것이 보통입니다. 칠성과 독성, 산신 등을 한꺼번에 모실 때에는 삼성각(三聖閣)이라고 하면, 독자적으로 모실 때에는 각각의 이름을 부칩니다. 절에 따라 산신 대신 용왕을 모신 곳도 있습니다. 전각의 크기는 작으나 가장 기복적 의미가 크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찾는 곳입니다.

⑯경판각

 

⑰요사채

⑱종각, 사물각, 법고각

⑲기타 건축물

⑳불전의 내부

 

4. 탑파의 이해

 

4-1. 탑의 이해

①탑 개괄

②탑의 역사

③탑의 종류

④기단부

⑤탑신부

⑥상륜부

탑의 가장 윗부분에서 탑을 장엄하게 꾸며주는 것을 상륜부(相輪部)라고 합니다. 상륜부는 부처의 사리가 모셔진 탑을 장엄하게 한다는 의미를 지니며 동시에 인도의 스투파를 재현하는 효과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인도의 스투파는 대표적인 스투파인 산치대탑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둥근 봉분 모양의 탑신부 위에 부처를 상징하는 법륜(法輪)을 올려놓아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것을 축약하여 놓은 것이 상륜부인데, 예외적으로 고려후기의 마곡사 오층석탑 상륜부처럼 티베트식의 스투파를 그대로 올려놓은 것도 있습니다. 상륜부의 구성 부분이 많고 이름이 어려워서 외우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분이 많은데, 실은 상륜부 각부가 모두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를 생각하시면서 외우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상륜부는 스투파를 재현하는 동시에 보륜(寶輪)으로 상징되는 부처님을 모시기 위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찰주(刹柱) : 상륜부 각부를 설명하는 그림에서 찰주를 애매하게 표시하여 이것을 보개나 보륜 사이의 부재로 보시는 분들도 있는데, 찰주는 쇠나 돌로 만든 꼬챙이로 상륜부의 각 부재들을 여기에 꽂아 고정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감은사지 삼층석탑에는 쇠로 만든 찰주가 잘 남아있습니다.

-노반(露盤) : 노반은 상륜부 제일 아래의 네모반듯한 부재로 상륜부 전체를 받쳐주는 역할을 하며 스투파의 기단부분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복발(覆鉢) : 복발은 한자 그대로 뒤집어진 사발의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타원형의 원구 모양으로 변형되기도 하는데, 스투파의 둥근 탑신 부분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앙화(仰花) : 복발 위에 피어있는 연꽃모양의 부재로 부처님을 모시기 위한 대좌(臺座)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보륜(寶輪) : 앙화 위에는 둥근 원형은 보륜이 여러 개가 올려져 있습니다. 보통 3~9개로 구성되며 홀수일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불교에서 짝수보다 홀수를 신성시하게 때문입니다. 보륜은 부처님을 상징하는데, 인도에서 수레바퀴는 전륜성왕의 상징이며, 부처님의 법계의 전륜성왕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설법은 법륜을 돌린다고 상징화합니다. 불상이 생기기 이전에는 수레바퀴가 부처님을 상징했습니다.

-보개(寶蓋) : 보륜으로 상징되는 부처님을 비나 각종 재해로부터 막고, 장엄하게 꾸미기 위한 일산(日傘)입니다.

-수연(水煙) : 법륜이 돌면서 생기는 불꽃모양의 물안개입니다. 혹은 일산 위에서 부처님을 지키고 있는 용왕이 내뿜는 안개로도 해석합니다.

-용차(龍車) : 용의 수레라는 뜻으로, 불경에 따르면 석가모니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수행할 때, 커다란 용(뱀, 나가)이 부처님을 보호했다는 데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즉 부처님을 수호하기 위한 용왕의 자리입니다.

-보주(寶珠) : 상륜부의 마지막으로 보배로운 구슬을 뜻합니다. 즉 용이 지키고 있는 여의주(如意珠)를 의미합니다.

 

⑦사리장엄구

 

4-2. 부도의 이해

①부도의 역사와 종류

②각부 용어

 

4-3. 불교 석비의 이해

①불교 석비의 종류

②각부 용어

 

4-4. 기타 석조물

①석등

②당간과 당간지주

③석조

④괘불대

⑤노주

 

5. 불교의식구

 

5-1. 불전사물

①범종

②법고

③목어

④운판

 

5-2. 불교법구, 공양구, 의식구, 장엄구

①정병

②향로, 향완

③금강저와 금강령

④전패

⑤목탁

⑥동종과 금고

⑦기타

 

6. 참고문헌

저작자 표시 비영리

' > 그 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포 지방 백제불상의 특징  (0) 2010/01/11
답사수업교재 - 불교 작성중  (0) 2010/01/11
Posted by 同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