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조선

표충사 소장 고문서 해제

同黎 2016. 4. 28. 15:48

표충사 소장 고문서 해제

 

박세연

 

 

 

. 들어가며

밀양의 표충사는 사명당 유정의 출생지인 밀양 무안에 광해군 2(1610) 사우를 건립하여 제향하게 한 데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후 사우가 무너지고 제사가 끊겼는데, 그 후 밀양의 사림과 유정의 5세 법손인 남붕의 노력으로 사우와 영당을 재건하고 경종 원년(1721) 표충사라는 이름을 받고 감영으로부터 제수를 지급받아 일반 사액서원에 준하는 대우를 받게 되었다.

남붕은 영조 14(1738)년 중창불사를 완료하는 한편 휴정과 영규를 표충사에 합사하고 표충비를 건립하여 표충사의 위상을 공고히 하였다. 이 과정에서 남붕은 밀양과 경상도의 재지 양반뿐만 아니라 조정 중앙의 관료들과 교류하면서 휴정과 영규의 합사운동을 성사시킨다. 이러한 저력을 통해 표충사는 해인사와의 사우 이건 분쟁에서 승리하며 사액 사우로서의 위상을 확실히 한다.

표충사는 헌종 5(1839) 이름을 표충서원으로 바꾸고 재약사 영정사였던 지금의 표충사 자리로 이건한다. 현재 표충사가 있던 원래 자리에는 표충비각과 홍제사라는 사찰이 남아있지만, 제향의 기능은 모두 영정사 즉 지금의 표충사로 이동하게 된다. 이는 잡역 부담 등으로 폐사 위기에 있던 영정사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는데, 결국 표충사의 원 자리는 황폐화 되었고, 사액서원으로서의 지위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이후 사라지게 되었다.

1960년대 표충사 내의 유교 건축물들이 대부분 헐리거나 기능이 바뀌고, 삼대사의 진영도 불교식 영각에 안치되면서 표충사에서 유교식 의례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유·불이 공존했던 특이한 공간인 표충사에 대한 학계의 연구는 진행된 바 있다. 채상식에 의해 표충사의 자료가 1차 적으로 조사되었으며, 장동표는 표충사에 소장된 많은 고문서 자료를 토대로 표충사의 설립과 해인사와의 갈등에 주목하였고, 이철헌은 유·불이 공존했던 공간으로서의 표충사에 대해 주목한 바 있다.

이미 몇 편의 선행연구가 표충사 자료의 중요성을 알려주고 있지만, 표충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아직 시작 단계이며, 그 해석에 있어서도 아직 구체적 연구는 진행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본고에서는 이번 기회를 통해 조사된 표충사 자료에 대한 간략한 해제와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 과제에 대해 소략하게나마 논의해보고자 한다.

 

. 고문서 해제

 

1. 교지류

 

표충사에 전해오는 교지는 총 7매로, 유정의 고신교지 1, 유정의 친족에게 내려진 증직교지 5, 유정이 선무원종공신에 책봉됨에 따라 그의 친족에게 내려진 추증교지 1점이다.

 

贈職敎旨 표충사-243~247

5매의 증직교지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증직교지는 선조 35(1602) 발급된 것으로 유정을 同知中樞府事로 임명하면서 법전에 따라 그의 증조고비, 조고비, 고비를 증직한 것이다. 본래 유정 본인의 고신교지를 비롯하여 7매가 전해져 내려와야 할 것이지만, 考 任守成, 妣 金氏, 祖妣 朴氏, 曾祖考 任孝昆, 曾祖妣 金氏의 다섯 매만 전해 내려오고 있다. 선조 33(1600)년 선조가 유정의 實職同知中樞府事에 임명하도록 하고 있는지 묻는 것으로 보아, 僉知中樞府事였던 유정을 이후 同知中樞府事로 임명하면서 그 일족을 모두 증직한 교지로 생각된다. 다만 문서의 왼편에 嘉義大夫行忠武衛副司正惟政妣前任同知中樞府事依大典追贈등의 묵서가 첨기된 것으로 보아 당시 유정의 관직은 이미 동지중추부사를 지나 허직인 오위도총부 충무위 부사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追贈敎旨 표충사-248

선조 40(1607) 발급된 유정의 고 任守成○○大夫 刑曹判書 兼知義禁府事追贈하는 敎旨이다. 문서의 우편이 매우 훼손되어 있어 수급자를 알 수 없어 그동안 유정에 대한 추증교지로 알려져 있었지만, 좌변에 嘉義大夫同知中樞府事正惟政考宣武原從㓛臣一䓁依承追贈라는 묵서가 있어 유정의 고 임수성에게 발급된 교지임을 알 수 있다. 유정을 선무원종공신 1등으로 책봉함에 따라 발급된 교지로 역시 유정과 이 외의 일가들에게 발급된 교지 및 공신녹권 등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告身敎旨 표충사-249

선조 27(1594) 발급된 유정을 折衝將軍 僉知中樞府事로 임명하는 고신교지이다. 당시 실록의 기사와 내용이 일치하는 교지로 현재 유정의 고신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다. 특히 이후 발급되는 승려의 고신이 대부분 허직, 공명첩인데 비하여 이 교지는 승려에게 내려진 실직 고신이라는 점에서 큰 중요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2. 등록 및 완문·절목류

 

표충사에는 관가에서 발급한 완문과 절목 및 표충사와 관부간 오고간 소지·등지·서목·첩보·관문 등을 필사하거나 점연하여 성책한 등록류 문서들이 다수 전하고 있다. 특히 표충사에는 각종 문서류의 원본 외에도 해인사와의 분쟁 등에 사용된 것으로 전해지는 문서를 필사한 등록이 여러 책 전해진다. 타 사찰에 비해 완문 및 등록류 문서가 많은 편이다.

 

表忠院各項騰錄 표충사-175

표충서원과 관련된 각종 완문 및 절목을 모아 필사한 책이다. 監營完文, 禮曺完文: 乾隆三十五年(1770)二月日, [禮曺完文]: 嘉慶三年(1798)十月日, 巡營完文: 慶申二月日, [完文]: 己未二月初五日, 完文: 甲辰五月日, 古羅里山所時禮擧行節目, 馬貰秩, [完文]: 甲辰二月二十八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부분적으로 결락된 곳이 있다.

완문의 내용은 대부분 사액 당시 받았던 복호결을 확인받는 것이다. 주목할만한 내용으로는 예조에서 본원의 유지를 위해 인근 시전리에서 보솔군을 지급받아 이들로부터 돈을 거두어 썼는데, 이것에 결원이 있으니 보충해달라는 소지에 대한 완문이다. 보솔군을 지급해주는 것은 다른 사찰에서 보기 어려운 일로, 표충사가 원당과는 또다른 경로로 특혜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또한 아래 나올 행심책에 시전리, 고암리 등의 항목이 있는데, 사찰 인근 사하촌과 사찰의 관계를 토지뿐만 아니라 역의 관계에서도 고려해 볼 가능성이 있는 자료라 생각된다. 또한 그 명칭이 보솔군에서 이후 보원생으로 바뀌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것이 19세기 향촌사회의 변동 및 그 안에서는 직역 변동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 지도 고려해 볼 대상이다.

한편 古羅里山所時禮擧行節目은 고라리에 있는 사명대사의 아버지 임수성의 묘의 제사 때 드는 비용을 정리한 것이며, 馬貰秩은 유사, 주지 등이 부임하거나 이동할 때 쓰는 쇄마가에 대한 부담을 정리한 자료이다. 특히 마대질은 다른 사원에서 찾아보기 힘든 자료로 사원 내부의 경제상황을 들여다보기 좋은 사료라 생각된다.

3.

 

[密陽表忠祠守護僧徒頓和等狀] 표충사-176

표제가 없어 가장 앞에 등장하는 문서인 密陽表忠祠守護僧徒頓和等狀을 가제로 삼았으나 실은 여러 종류의 문서를 필사해 놓은 등록류로 판단된다. 이 자료는 海印寺에서 三大師影堂을 침탈했다고 호소하는 密陽表忠祠守護僧徒頓和等狀에서 시작하여 해인사와 표충사 사이의 영당 건립을 둘러싼 等狀, 牒報, 書目 등을 정서하여 필사한 것이다. 冊末淳營狀啓草의 경우 작성일시가 乾隆四十九年甲辰(1784)十二月十六日로 되어 있어, 이 이후에 필사된 것으로 보인다.

해인사과 표충사 간 사우 이건 문제를 둘러싼 내력은 장동표의 논문에 매우 잘 정리되어 있다. 사찰 안에 사액사우를 둘 경우 복호결 등 많은 해택을 받을 수 있었는데, 이런 경우의 수는 많지 않지만 원당과 함께 사찰이 역을 면할 수 있는 유이한 방식으로 생각된다. 흥미로운 점은 두 사찰 간 다툼의 영역이 비변사에까지 올라갔으며, 지역의 관가와 사림까지 동원되었다는 점이다. 서원의 유치가 비단 사찰뿐만 아니라 지역사회 전체의 큰 일이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흥미로운 점은 사액사우의 여부가 승려들을 통솔할 수 있는 도총섭 등의 승직과도 관련된다는 점이다. 표충사는 다른 사찰과 달리 사우를 모시고 있다는 이유로 도총섭과 승통 등의 직임을 가졌다. 또한 분쟁의 과정에서 가산산성의 도총섭과 다투는 모습도 보인다. 도총섭이나 승통이 실제적으로 승단에 가지는 영향력이 어떠했는지는 아직도 연구가 되지 않은 부분인데, 대승사와 부석사가 목각탱을 사이에 두고 벌인 분쟁과 비교 연구하여 경상도지역 총섭의 역할에 대해 연구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密陽表忠祠初創重創時備局禮曺本道關文及完文並錄 표충사-190

이 문서는 表忠祠初創重創時備邊司禮曺, 密陽府에서 내려온 關文完文, 전령등을 모아 놓은 등록이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표충사가 처음 생겨나고 또한 보솔군과 제수 등을 지급받게 된 내력을 알 수 있는 등, 표충사 역사의 가장 기본적인 사료로 상객된다.

주로 표충사 창건 초기의 기록으로 보이는데 각각의 문서에 [禮曺關文]: 雍正十年(1732)六月三十日, [備邊司甘結]: 乾隆三年(1738)九月日, [禮曺關文]: 乾隆三年(1738)九月日, [禮曺關文]: 乾隆四年己未(1738)八月二十九日 등의 발급일자가 남아 있어, 주로 남붕이 사우를 짓고 사액을 유치하기 위해 벌였던 활동을 정리한 자료로 보인다. 특히 해인사와의 분쟁 당시 표충사 창건과 관련된 내용을 정리하여 성책해 비변사로 올린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책이 바로 그때 당시 성책한 등록으로 볼 수 있다.

 

[表忠祠守護完文] 표충사-193

이 문서는 여러 건의 문서를 粘連하여 成冊한 것이다. 禮曺에서 내린 表忠祠守護完文이 있으며 그 전후로 監營密陽府에서 올린 牒文粘連하였으나 牒文은 앞부분에 결락되었고, 5牒文 뒤로 '使令表忠祠僧統'으로 시작되는 문서가 粘連되어 있으나 뒷부분이 결락되어 있다.

이 문서의 발급일은 앞의 [牒文]에 있는 乾隆三年)九月日表忠祠守護完文에 있는 茂午十一月卄七日의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이때는 1738(英祖 14)으로 남붕의 노력으로 인해 표충비를 설치하고 表忠祠의 사액을 받아낸 때이다. 즉 이 문서는 表忠祠가 사액받을 당시의 첩문과 완문 원본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예조에서 내린 완문에는 헌관의 차출과 제향의 진행, 제수의 마련과 감영, 밀양부의 지원등을 명시한 완문이 남아 있어, 사찰에 대한 중앙정부의 태도와 18세기 밀양에서의 사명당 현창 노력 등을 추측할 수 있게 한다. 다만 보관의 문제로 인해 문서의 순서가 착간된 부분이 있고 양지에 배접되어 있어 문서의 산화가 심각하게 진행되는 등 보존처리가 시급하다.

 

完文 표충사-194

북한산성팔도도총섭이 표충사에 내린 완문이다. 발급일자는 丙午로 되어있는데, 소장처에서는 1746년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해당연도은 간지는 병오가 아니므로 믿을 수는 없다. 주 내용은 북한산성팔도도총섭 겸승대장이 표충사에 다른 승려들이 침탈하는 것을 금지하고 표충사의 우위를 확인해주는 것이다. 비록 초서가 심하고 부식된 곳이 많아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엔 다소 어려움이 있지만 팔도도총섭이 내린 문서로는 흔치 않으며, 승단 내부의 서열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라고 생각된다.

 

完文 표충사-195

이 문서는 密陽都護府使表忠寺에 대한 지방의 각종 雜役 침탈을 금하도록 하는 완문으로 冊末己卯正月 日 이라는 발급일자가 있다. 특히 부사의 수결 아래 座首, 別監 이하 밀양부 향리들의 이름과 受決이 있어 잡역 면탈을 확실히 하려는 모습이 보인다. 이러한 모습은 완문류에서 보기 드문 것으로, 당시 지역에서 표충사의 지위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完文 표충사-196

이 문서는 경상감영에서 발급한 것으로 표충사 승려의 還俗을 금하고 還俗하는 경우 돈으로 대납하도록 하는 규정을 정한 완문이다. 癸酉八月日 발급되었다고 되어 있으며 순조 13(1812)으로 추정된다. 19세기 승려의 환속이 많았고, 이를 제도적으로 막으려 했다는 중요한 자료로 생각된다.

 

完文 표충사-197

이 문서는 慶尙道觀察使가 발급한 것으로 表忠寺雜人 출입과 雜役 부과를 금한 完文이다. 甲申九月日 발급되었다고 하며 慶尙道觀察使의 인이 찍혀있다.

 

巡營完文 표충사-198

이 문서는 경상감영에서 발급한 것으로 봉산 내의 농사를 금하고, 특별히 표충사 승려들의 승번포와 잡역, 잡세를 면제해준다는 내용의 완문이다. 의승방번제 및 봉산제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자료의 가치가 높다.

 

禮曺節目冊 표충사-199

예조에서 발급한 완문으로 1770(英祖 46) 발급한 완문의 원본으로 보인다. 주로 제향을 담당한 직임을 정하는 내용이다. 먼저 원장, 도총섭, 도유사, 도승통을 도내의 유명한 승려로 정하며 예조에서 차첩을 발급해주고, 산성 총섭과는 달리 급료가 없으니 특별히 서원의 예로 보호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원장은 도내의 승려로 하고 있으나, 도총섭은 원근을 가리지 않고 서산의 제자 중에 가려 뽑게 하였으며, 도유사와 도승통 역시 팔도 각사에서 가려 뽑게 하였다. 전곡유사와 는 도내에서 차출하며 헌관은 서산의 제자 중에, 집사는 원근을 가리지 말고 각사에서, 춘추의 재임은 도총섭이 차출하도록 정하고 있다. 또한 남북한산성과 각사 총섭이 침어하지 말 것을 정하고 있으며 표충사가 팔도의 승려를 규정하는 규정소로 하도록 정하고 있는 것도 특기할만한 사항이다.

 

表忠祠節目 표충사-203

표제는 本官節目이며 이제는 表忠祠節目이다. 표충사 승려의 還俗을 금하고 還俗하는 경우의 규정을 정한 절목으로 밀양부에서 발급하였다. 초서가 심하고 발급일자가 없어 발급년대를 규정하는데 어려움이 있으나 위의 完文 표충사-196와 거의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어, 완문의 내용 중 절목만 따로 필사해 성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營門爲本祠免稅文案 표충사-204

경종 원년(1721) 승려 계기(戒璣)가 새로 지은 表忠祠의 경내 토지를 조사하여 면세를 청한 내용을 밀양부에서 경상감영으로 올린 서목과 그에 대한 감사의 뎨김을 원본 근대로 점연하여 성책한 문서이다. 당시 표충사는 막 사우를 영건하여 사찰의 모습을 갖춘 상황으로, 표충사 건설 초기에 면세 복호를 청하는 문서로 추정된다. 표충사 건립 초기의 자료로 원본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과 서원-사찰의 복호 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높다.

 

3. 회계문서류

 

泗溟和尙碑閣移建入下成冊 표충사-173

사명화상비각이건입하성책은 사명대사의 비각을 이건할 때 쓴 비용을 기록한 회계책이다. 표지는 개장되었으며 표지 이면에 壬寅五月日이라는 묵서가 있는데, 표충사에서는 1902년으로 연도를 비정하고 있다.

 

表忠祠道場麻田行審陟字冊 표충사-177

이 문서는 표충사 소유 토지의 현황에 대해 알려주는 귀한 자료이다. 행심책은 양안 작성이나 수세 당시 지방의 향리들이 소매에 넣고 다니는 실제 토지 면적과 수세량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양안이 해당 고을에 할당된 결 수에 맞춰어 작성된 반면, 행심책은 실제 상황을 알려주므로 농업사의 귀한 자료이지만, 현재 남아있는 것은 별로 없다. 다만 이 표충사행심척자책은 향리들이 가지고 다니던 것이 아니라, 표충사에 보관하면서 지대를 걷을 때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자료이다. 어쨌든 당시 사찰의 토지 소유와 지대수취의 실상을 알려주는 몇 안되는 자료로 보인다.

문서는 表忠祠道場麻田行審陟字冊, 白花堂員, 鳳仙菴員, 局內員及柿田各火太田楮結卜行審, 鷹巖里垈結卜秩, 華藏里家結卜秩의 순서로 되어 있으며 책말에 咸豊七年丁巳(1857)吳月 改冊 時書記性文라는 묵서가 있어 작성 시기를 짐작하게 해준다. 문서는 4단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전결에 관한 내용은 최상단에 필지의 번호와 절대면적(, 斗地只 등의 기준), 위치 정보와 전결의 등수를 적고, 그 다음 단에는 양안상의 면적(결부속 기준), 다음 단에 수취하는 지대(주로 錢文을 기준)의 액수, 마지막 단에 起主의 성명을 적었다. 다만 이 기주는 대부분 양반의 로 되어 있으며, 문서의 특성 상 양안상의 기주를 써 놓은 것인지 作人을 써 놓은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鷹巖里垈結卜秩, 華藏里家結卜秩의 경우 필지가 아니라 의 번호를 매겼으며, 하단에도 作家라고 되어 있어 작인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중간에는 도합 수취액을 계산해 놓아 회계처리를 신속하게 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이 문서는 사찰의 토지 소유 관계, 즉 사찰에 헌납된 토지 등 사찰의 실질적 소유 토지와 양안간의 관계를 알려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더 정치한 연구가 요하는 사료라고 하겠다.

 

碑石物役用下冊 표충사-179

지금 표충비로 알려진 비석을 세울 때 들어온 수입과 지출을 정리한 책이다. 전반적으로 시기에 따라 勸得記下記가 반복하여 나오는데, 권득기는 승려과 각사의 시주 내역을, 하기는 지출 내역을 적은 것이다. 책 말에 겸승대장의 수결이 있고 그 하단에 서기, 물재도감, 비석도감, 중건주, 수호도승통의 수결이 있는데 중건주에 남붕의 수결이 있다. 표충비 건립 당시의 자료임을 알 수 있다. 표지에 典穀次簿라는 묵서가 있어 전곡유사가 관리하였던 장부로 이 외에도 여러 장부가 있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표충사 건림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表忠祠補護功畓結卜文卷 표충사-184

표충사 소유 토지를 나열하고 그곳에 대한 복호를 확인받는 일종의 양안이다. 이면에는 本院畓考卜數實案成給事라고 쓰여 있는 관인이 날인되어 있는데, 이후 내용을 보아 완문으로 생각된다. 완문의 내용을 보면 표충사는 사액서원으로 예조로부터 복호결을 받았는데 시간이 헐러 이 복호결이 사라지자, 각사에서 돈 500 여 냥을 모아 토지를 매득했으며, 이중 밀양부에 있는 토지를 부사에게 확인받아 복호(면세?)를 받으려는 것이다. 문서는 정서로 쓰여있으며 해당 동리, 양안상의 자호, 면적 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4. 계안류

조선후기에는 사찰의 유지보수 및 불사를 위한 경제적 목적이나, 신앙의 목적으로 만든 여러 계가 있었다. 이 중에는 승려만 참여하는 계나, 재가신도까지 참여하는 계가 있었는데, 표충사에는 주로 후자의 계로 지장계, 미타탄일계, 연화계 등이 운영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蓮花契案] 표충사-180

1886(高宗 23) 작성된 계안으로 앞부분에는 일종의 모연문인 勸一切衆生供養阿彌陀佛同修正業文, 그 뒤에는 절목완문이, 마지막으로 비구와 재가신자의 순서로 명단이 적혀있다. 절목완문은 관가에서 발급한 것이 아니라 禪院大公議를 거쳐 작성된 것으로 계의 근본이 되는 토지의 관리와 지출사항 및 관리에 대해서 명시해놓고 있다. 계의 구성원의 책임을 각각 분류해 놓았다는 점과 미흡하기는 하지만 계의 재원이 토지라는 점이 흥미로운 자료라고 하겠다.

 

彌陀誕日禊冊 표충사-181

1880(高宗 17) 작성된 문서로 아미타불의 재를 치루기 위해 만든 계의 계안이다. 표지에 庚辰始設 萬日會留上이라고 적혀 있어 표충사 내의 만일회에서 보관하던 책임을 알 수 있다. 완규를 통해 매년, 매월, 매일의 할 일이 정해져 있으며 표충사와 타사의 비구, 대원암의 비구니 외에 거사와 청신녀가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계의 재원이나 운영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되어 있는 것이 없어 아쉬운 점이 남는다.

 

[地藏菩薩誕日佛禊] 표충사-182

매년 730일날 이루어지는 지장보살 탄일 불공을 위해 만든 계의 명단이다. 앞부분에는 서문이 붙어 있어 이 책이 1871(高宗 8) 처음 작성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나, 그 뒤에는 계원의 명단만 있어 자세한 사항을 알기 어렵다.

 

萬日會地藏契員祝章 표충사-183

표충사에 있는 만일회에서 만등 지장계의 계원 명단이다. 표지에 戊寅七月三十日이라고 쓰여 있어 1878(고종 15) 작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역시 참여한 비구와 재가신자의 이름과 거주지 정도만 쓰여있다.

 

5. 선생안류

 

表忠祠保院先生安成冊 표충사-192

위 문서는 表忠祠를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예조에서 인정해준 保院의 명단을 적어 놓아 성책한 것이다. 권수에 嘉慶五年四月日表忠祠保院先生成冊이라고 적혀 있어 정조 24(1800)년 작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뒷부분에는 密陽府完文이 있어 문서의 내력을 알 수 있게 하는데 예조에서 표충사를 보존하기 위해 일종의 사모속인 보원을 정해 매년 돈을 납부하게 하고 있다. 앞부분에는 保院先生案이 있어 인명과 거주지를 기록하였으며, 보원에서 빠졌을 경우, 거주지 밑에 첩역으로 인해 소지를 올려 탈하하였다는 기록도 하였다. 당시 사액서원의 운영에 관한 귀한 자료로 보인다.

 

記室先生案 표충사-200

표충사 안에 都書記를 두고, 역대 서기의 이름을 적어 놓은 선생안이다. 원래의 題簽이 떨어져 나가고 그 자리에 表忠祠守護節目이라는 墨書가 적혀 있어 본래 있던 절목의 표지를 재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앞의 서에는 崇禎紀元後三甲午..改書라는 기록이 있어 1774(영조 50)년 성책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兼正使의 수결이 있어 영남규정소와 관련이 있는 문서임을 짐작케 해준다.

도서기는 理判都書記事判都書記를 따로 두었으며 각가의 서기는 여러명이었다. 처음 참여한 이는 적성총섭인 가선대부 尙玄과 강화총섭인 廣瑞, 견훤산성(성산산성) 승대장 등이 눈에 띄며, 普覺登階 등의 직명도 사용되었다.

 

判廳節目 표충사-202

이 문서는 표충사 내부에 祠宇의 유지를 위해 判廳에서 를 만들고 그 先生案錄을 기록한 것이다. 문서의 앞에는 서문이 붙어 있는데, 승려들이 돈을 대어 계를 만들고 그 식리를 통해 사우를 유지할 것을 명시해 놓았다. 그리고 서의 끝에는 同治六年丁卯仲春 善雨改書라는 기록이 있어 1867(高宗 4)에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생안 부분에는 참여한 승려의 법명이 적혀 있는데, 하단에 , , 退 등의 글자가 있어 계원의 변동을 알 수 있다.현재 앞뒤의 표지가 떨어져 나가 표제가 없는 상태이다.

 

侍香官典祀官錄 표충사-205

이 문서는 표충사의 역대 제향에 侍香官典祀官으로 참여한 승려들의 선생안이다. 각사에서 차출된 등려들의 직임과 법명, 참여일자 등이 있으며 뒷면이 걸렸되었지만 가장 마지막 부분에 同治元年(1862)壬戌三月日赴任' 이라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1862(哲宗 13)까지는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내주에서 삽지로 '柒原長去寺寺中文壹兩...辛丑十二月初十日和尙釋', '大悲寺僧統受跡寺中文三兩...' 의 내용에 표충사의 도장과 수결이 있는 2장의 수기(영수증)이 발견되었다.

 

堂判錄 표충사-206

표충사의 당판청의 선생안이다. 표제에 堂判錄과 함께 各寺先生案이라고 쓰여 있으며 서의 말미에 兼正使의 수결이 있어 영남규정소와 관련이 있는 문서임을 짐작케 해준다. 서의 말에 乾隆十四年己巳九月이라는 기록이 있어 1749(英祖 25)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생안 부분에는 당판청에 참여한 여러 지역 각사 승려들의 관계와 직임, 법호, 법명과 함께 출연한 錢文이나 등의 종류와 양이 써있는데 흔히 등장하는 통정대부, 가선대부, 승통 외에 弘覺登階, 大覺登階 등의 명칭을 사용하는 승려들도 있어 눈에 띈다.

 

禪敎兩宗糾正都有司先生案錄 표충사-208

역대 표충사의 선교양종규정도유사의 선생안이다. 서의 崇禎紀元後三甲午重陽日?目門人 應雲堂登旿赴任行謹識 이라고 적힌 것을 보아 1774(英祖 50) 다른 선생안과 함께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첫 부분에는 태허당 남붕으로부터 시작해 1774(英祖 50)부터 1811(純祖 11)까지의 都有司 부임을 기록하였다.

 

禪敎兩宗主管有司安錄 표충사-209

역대 선교양종주관유사의 선생안이다. 서에 崇禎紀元後四辛未中秋日雪虛知添謹識이라고 기록한 것을 보아 1811(순조 11)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책수에 처음 주관유사를 두었을 때 선교양종대각등계국일도대선사 설송당 연초가 올랐고, 그 다음에 태허당 남붕이 부임한 것으로 나와있다. 이후 여러 승려들의 법명과 부임일자, 거주 사찰이 나와있는데, 당시 실제 선교양종 주관유사가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래의 종정과 마찬가지로 선교양종주관유사나 종정의 역할과 그 권위가 미치는 범위가 어떻게 되었는지, 실제 부임한 역대 승려의 사찰을 조사하여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宗正案錄 표충사-210

표충사에 부임한 역대 宗正의 선생안이다. 서를 崇禎後四庚午仲春에 작성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1810(순조 10)에 작성되었는데, 그 아래 自下七張乙未八月改書라고 쓰여 있어 이를 후대에 다시 개서했음을 알 수 있다. 1740(英祖 16) 선교양종규정겸팔도도총섭 설송당 演初부터 1873년까지의 종정이 부임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표충사에 종정이라는 직임을 허락한 것은 다른 사찰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으로 당시 불교계 내에서 표충사의 위상을 살펴보는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參祠錄 표충사-211

매년 열렸던 춘추 제향에 참여했던 승려들의 명단이다. 상단에 초헌관, 아헌관, 집사 등 직임을, 하단에 승려의 법명과 원 거처를 표기하고 있다. 끝부분마다 宗正의 수결이 있다.

 

參祠錄 표충사-212

매년 열렸던 춘추 제향에 참여했던 승려들의 명단이다. 상단에 법명을, 하단에 승려의 원 거처를 표기하고 있으면 상단 법명 위에 통정, 가선, 전승장 등의 내용을 추기해 놓았다. 3종류의 참사록 중에 가장 간략한 내용으로 서술되어 있으며 뒷표지에 表忠寺라는 묵서가 있는 것으로 보아 표충사가 영정사 자리로 옮겨간 이후의 제향 기록으로 보인다.

 

參祠錄 표충사-213

매년 열렸던 춘추 제향에 참여했던 승려들의 명단이다. 상단에 초헌관, 아헌관, 집사 등 직임을, 하단에 승려의 법명과 원 거처를 표기하고 있으며 상단 법명, 매 장마다 表忠寺禪敎宗之印이라는 붉은 도장이 찍혀 있고, 끝부분마다 宗正의 수결이 있다. 위의 책보다 공식적인 문서로 생각된다. 당시 표충서원의 운영이 유교식 제례와 불교식 제례의 절충적 방식으로 이루어졌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승려의 법명 앞에 붙은 각종 직명이나, 祭需의 공궤 기록 들이 있어 당시 표충서원의 운영의 연구에도 참고할만한 자료이다.

 

獻畓忌日冊 표충사-186

표제의 첨기를 통해 1934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제목으로 토지를 희사한 이들의 기일에 재를 지내기 위한 기록으로 보이지만 명단만 있어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다.

 

七星閣勸善案錄 표충사-187

표충사의 칠성각을 짓기 위한 모연문과 동참한 이들의 목록이다. 표지에 丁酉七月日 萬日會留上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정유년은 1837(헌종 3) 혹은 1897(광무 1)으로 추정된다. 역시 명단만 있으나 본사 내의 승려를 본방, 선당, 승당, 내원당, 지전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는 것이 흥미로우며, 본사질 안에 처사나 청신녀도 포함되어 있다.

 

密陽表忠祠有功錄 표충사-188

표충사를 지금의 표충비각 자리에서 영정사. 즉 현재의 표충사 자리로 이건하는데 도움을 준 관료들을 기록한 책이다. 정서로 관직과 이름을 쓰고, 하단에 세주로 도움을 준 내역을 적고 있다. 주로 관찰사와 밀양부사들의 이름이 있으며, 그 외에도 통제사, 경상좌수사와 양산, 창녕, 대구 등 주변 고을 수령들이 있다. 눈에 띄는 이름으로 노론 벽파의 권세가였건 權敦仁, 소론이자 대원군의 근신이었던 金學性 등이 있다. 그 외 지방과 사원의 관계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로 판단된다.

 

石砌有功崇報記 표충사-189

이 책은 표충사를 처음 건립할 때와 그 이후 여러 불사를 할 때 공이 있거나 시주했던 이들의 이름을 적어 놓은 책이다. 표충비를 처음 건립할 때의 직임을 기록한 壬辰設始任錄聖上卽位三年戊戌暮春司命大旗成造施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후사한 것으로 보이는 현판인출기가 있다. 서에 乙未春暮都有司懶菴勝齊謹識이라고 되어 있으나 정확한 제작 연도는 알 수 없다. 다만 성상 즉위 3년 무술에 해당되는 해가 없으며 그나마 근접한 것이 1778(正祖 2)으로 적어도 이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聖上卽位三年戊戌暮春司命大旗成造施錄인데, 여기서의 사명대기는 현재 표충사에서 내려오는 賜大禪敎行吏曺判書大匡輔國崇錄大夫領議政兩國大將四溟堂統諸軍司令旗를 가리키는 것 같다. 현재 표충사에서는 이를 선조 때 사명대사에게 하사한 것으로 설명하나 후대의 제작 기록이 있는 점, 조정에서는 사명당이 아니라 유정으로 그를 불렀고, 일본에서는 송운대사로 알려져 있던 점 등을 생각해 볼 때 이 깃발은 최소 18세기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기를 만든 이유는 역시 해인사와의 표충사 이건 분쟁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6. 외교문서류

 

密陽表忠寺所藏捕虜送還文書 표충사-242

밀양표충사소장포로송황문서라고 전해내려지는 이 문서는 泗溟大師1604년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인 포로를 송환할 때의 유품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현재 2종의 문서가 합본된 상태로 액자에 표구되어 있다. 합본된 문서의 세부분에 걸쳐 朱書一號, 二號, 三號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이외 朱書線 다수 존재하고 있다.

이 문서를 살펴보면 2개의 문서로 나눠짐을 알 수 있는데, 첫 번째 문서는 京大坂江戶現旅籠라는 제목이 붙어 있으며, 두 번째 문서는 예조에서 대마도주에게 보내는 서계임을 알 수 있다. 京大坂江戶現旅籠史臣 일행이 日本의 오사카(大坂), 교토(京都), 에도(江戶)로 가는 여정의 인원과 물품을 정한 내용으로 명확하지는 않으나 문서 형식상 史臣對馬島 측이 주고 받은 傳令草本 혹은 으로 추정된다. 사명대사의 유품으로 전해져오고 있으나 사명대사는 대마도와 오사카를 거쳐 교토로 갔으며 후시미(伏見)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회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에도에 갔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아, 과연 사명대사의 유품인지 재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다.

뒷부분에 점연된 예조의 서계는 조선에서 禮曺參議 金澋의 명의로 對馬太守 平公에게 보내는 것으로 숙종 29(1703) 조선에서 대마도로 바다를 건너던 사신이 죽은 것을 위로해 준 것에 대한 감사와 유해 송환 등 사건 처리에 관한 논의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禮曺參議印章이 없는 것과 書契 형식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으로 보아 書契의 원본이 아니라 초본 혹은 寫本으로 보인다. 書契의 제목에 해당하는 부분에 朱點이 찍혀 있으며 朱點 아래 同答送死使第二書, 同答送死使第三書의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앞부분 一書의 내용이 탈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역시 사명대사의 유품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문서에 등장하는 金澋禮曺參議에 임명된 것은 숙종 29(1703)이며 이는 문서의 간지(癸未)와도 일치하므로 사명대사의 유품으로 보기엔 어려움이 있다.

여기는 드는 의문점은 표충사가 성립되기도 이전인 숙종 대의 자료가 어떻게 사명대사의 유품이라는 이름으로 표충사에 전래되었는가의 문제이다. 해인사와의 영당 이건 분쟁이 진행되면서 사명당의 유품 및 이전의 완문 등을 감영과 비변사에 제시하는데, 이 과정에서 관계없는 외교문서가 표충사로 흘러들어온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7. 간독 및 제영류

 

[精抄] 표충사-242

이 책은 간찰의 내용을 모아 놓은 필사본으로 표지에 이라는 묵서가 있는 것으로 보아 3책 중 1책으로 보인다. 문집 편찬 등을 위해 간찰 중에 좋은 것을 가려 뽑아 필사한 것으로 보이지만 후의 내용이 결락된 것이 많아 주인공을 특정하기엔 어려움이 있다.

 

簡牘 표충사-229~234

사명대사 유정의 5法孫南鵬과 주고받은 간찰을 모아 성책한 것으로 총 6242편이다. 중간에 보낸 이를 적은 첨지가 있으나 많은 부분 탈락되었다. 당시 남붕이 표충비를 세우기 위해 보내었던 간찰을 모은 것으로 당시 승려와 유학자들의 교류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생각된다.

 

贈松雲詩帖, 表忠祠題詠 표충사-235~243

후일 표충사제영이라는 제목의 목판본으로 간행되는 문집의 원본이다. 본래 10책으로 추정되나, 본래는 매우 화려하게 제책된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 후대에 다시 성책하면서 순서가 흐트러지고 빠진 부분이 있으며, 제책이 잘못되거나 아예 파손된 부분도 있다. 따라서 이를 다시 맞추려면 전반적으로 배접을 해체하고 새로 성책할 필요가 있다.

101질로 전해지지만 제1책은 贈松雲詩帖으로 惟政이 탐지사로 일본으로 갈 때 송별의 뜻으로 써준 시를 모은 것이지만 남은 부분이 많지 않으며, 후일 남붕이 받은 제영과 섞여있다. 2책부터는 남붕이 표충비를 세우며 여러 인물들에게 받은 제영을 모아 놓은 것으로, 당시의 정승부터 지방의 문인까지 많은 이들이 참여하였다. 표충사에 대한 중앙과 지방 사림의 관심을 엿볼 수 있는 사료이다.

 

.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