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조선

국가권력과 불교 - 조선의 경우

同黎 2012. 8. 16. 21:10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시점부터, 종교권력과 국가권력은 서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갈등하고 때로는 타협하였다. 국가의 입장에서 종교는 현실 권력이 치유해줄 수 없는 臣民의 심성 을 통제하기 위하여 꼭 필요했지만, 동시에 그 권한이 국가권력을 초과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통제되지 않는 권력은 곧 국가를 위협하는 존재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종교의 입장에서 국가권력의 비호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지만, 또한 종교권력이 초월적 존재의 신의 권위에 기초한 만큼 군주 역시 종교권력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불교의 東傳 이래 동아시아 세계에서 역시 종교권력과 국가권력의 갈등이 존재했다. 그러나 北朝에서 3차례의 廢佛 이후 국가권력의 우위가 선언되면서 종교권력은 국가권력에 종속되지만 동시에 존중받는 존재로 정리되었다. 종교권력은 국가권력의 보호 하에서 경제적, 사회적 특권을 보장받았고, 동시에 국가체제의 유지에 종사하였다. 국가권력은 계서적 제도를 통해 종교권력을 통제하고 관리하였다. 때문에 국가권력의 종교 통제 방식을 살펴보는 것은 전근대시대 종교의 존립 형태를 살펴보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조선의 불교 통제는 좀 더 강력하게 이루어졌다. 조선은 새로운 이념이자 종교인 유교를 바탕으로 건국하였다. 불교는 구 왕조의 상징이라면 면에서 새로운 세력을 대변하기 어려웠다. 국가는 불교의 경제적 기반을 몰수하였고, 임의적으로 종파를 통합하고 승려의 수를 제한하여 불교 교리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유교적 국가의례인 國朝五禮儀의 완성 이후에 불교에 대한 통제와 관리가 더욱 심화되었고, 불교의 무종파 시대가 도래하였다.

 

임진왜란의 과정에서 불교에 대한 국가의 통제 정책은 변화를 보인다. 전쟁의 과정에서 승병의 활약은 국가가 승려를 군사로서 활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전후 국가의 재건 과정에서 승려를 요역과 공납에 동원하여 승려와 사찰을 경제적으로 활용하게 되었다. 마침내 국가는 身役인 승군역(義僧防番役)과 戶役인 승역(요역, 공납, 잡역)을 통해 승려를 국역체제 안으로 포섭하였다. 승려는 기본적으로 승군역을 담당하는 동시에 국가가 원하는 승역을 부담하여야 했다. 이는 조선전기 단발적인 승려의 토목공사 동원과는 성격을 완전히 달리하는 것이었다.

 

국역체제에 포함된다는 것은 승려가 신민으로서의 자격을 지닌다는 것을 말한다. 조선전기 승려는 “王化 밖의 무리”로 여겨져 役外民·國外民 취급을 받았다. 승역에 동원된 승려에게 圖帖을 발급하는 것은 그들의 승려 신분을 보장해주는 동시에 그들을 국역체제에서 완전이 끊어내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승려가 완전히 국역체제에 포함된 뒤부터는 “저들도 왕의 백성”이라는 인식이 조야에서 형성되었다. 국가의 경사나 재해가 있을 때 의례히 국가에 베푸는 감면의 혜택에도 승역이 포함되게 되었다.

 

이처럼 국조오례의 단계 이후 불교를 가능한 억누르려는 국가권력의 통제정책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이들을 포섭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그리고 국가의 필요에 따라 승역의 강조점을 어디에 찍은 것인지는 조금씩 변화하였다. 특히 사찰이 직접 소재해있던 지방 군현과 사찰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곧 16세기부터 확산된 왕실·아문의 사찰 사적 점유(절수)와의 갈등을 내재하는 것이었다. 이 갈등을 풀어내고 승역을 국가재정에 안착시키는 것이 하나의 과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