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대정명기감

대정명기감(大正名器鑑) 해설8 - 총설8

同黎 2021. 8. 5. 19:48

도쿠가와(徳川)와 명기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마냥 연기를 하면서까지 명기를 다루지는 못했다. 그가 군정(軍政) 상 사려있고 주도면밀해야 하는 대장이기에 물론 명기의 가치는 알았지만, 실가(實價) 이상으로 그것을 이용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철저함을 처음부터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가 마츠다이라 넨세이(松平念誓)에게서 하츠하나 카타츠키 차이레(初花肩衝茶入)를 얻고 그 대신 영지 500석을 주라고 말했던 것처럼 명기에 대한 관념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인데, 곧바로 이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 격퇴를 축하하는 물품으로 보냈다는 것을 보면 그가 어떻게 명기이용 방법을 이해할 수 있었는지를 파악하기에는 부족하다.

 

케이초(慶長) 5년(1600) 이에야스가 우에스기 카케카츠(上杉景勝) 정벌을 위해 떠나던 중, 시모츠케(下野) 지방의 오야마(小山)에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등의 거병을 듣고 막 병력을 되돌리려 하고 있었다. 이 때 츠다 히데마사(津田秀政)는 이에야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이번에 관서(關西) 세력과의 쟁탈에서 승리를 거둔다면, 명물 차이레(茶入)의 다수를 확보하게 될 것입니다. 소생도 이번에 전력을 다하여 이동하겠으니, 그 상으로서 명물 차이레 1개를 하사하여 주십시오.’

 

그러자 이에야스가 흔쾌히 이를 들어주었다고 한다. 당시 군진 사이를 분주히 이끄는 무장들이 어떻게 명기를 강렬히 원하였는지는 이 일화를 통해 추측해볼 수 있다. 이에야스가 이러한 기미를 파악하여 어떻게 능히 명기를 이용했을까도 역시 이를 통해 추정해보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겐나(元和) 원년(1615) 도요토미의 잔당세력이 웅거한 오사카성이 함락되었을 때 이에야스는 성내의 명기가 헛되이 소실된 것을 안타깝게 여겨, 후지시게 토겐(藤重藤元) 부자에게 명해 화재 현장에서 9개의 대명물 차이레를 찾아내도록 한 일이 있었다. 또한 이듬해 이에야스가 슨푸(駿府)에서 임종할 때에 유품인 소장 명기를 일족 또는 노신 및 숙장(宿將)들에게 분배하여 그 고마움을 표했던 일도 있었다. 그 외에도 그가 한 세대에 걸쳐 명기를 이용하였던 수단은 노부나가·히데요시보다도 손색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을 능히 알 수가 있다.

 

그런데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 도쿠가와 이에미츠(徳川家光) 시대에는 막부의 통치가 아직 확립되지 않아 도자마 다이묘(外様大名)를 상대로 때때로 그들의 환심을 살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종종 명기를 그들에게 하사하였고, 그들 역시 종종 이것들을 헌상함으로써 상호 간에 친목을 드러낼 필요가 있었기에 서로 주고받는 빈번함이 놀라울 정도였다.

 

당시에는 가이에키(改易)을 당한 자가 소장한 명기를 막부에게 몰수당하는 경우를 언급할 것까지 가지 않아도 다른 제후가의 당주가 은거하거나, 사망하거나, 후계자가 새로이 봉토를 계승하는 등의 경우에 그 예로서 쇼군가(将軍家)에 물건을 헌상하였고, 쇼군가에서도 역시 이들에게 종종 하사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하지만 생전에 물건을 막부에 헌상하는 것을 득물(得物)이라 하고, 사후에 헌상하는 것을 유물(遺物)이라 칭하였는데 주고받는 데 사용한 명기는 이전에 쇼군가로부터 하사받은 것을 다시 헌상하거나, 헌상된 것을 이후에 다시 하사하는 등, 막부와 제후 간에 동일한 명기를 누차 수수하는 것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 수수행위는 5대 쇼군 도쿠가와 츠나요시(徳川綱吉) 치세인 겐로쿠(元禄: 1688~1704년) 시기까지 빈번하게 행해졌지만 막부는 메이레키 대화재(明暦の大火, 1657년)로 인해 보장(寶藏) 일체가 소실되었고, 기타 여러 가지의 사정이 발생하면서 겐로쿠 이후에는 두드러지게 명기 수수의 건수가 감소하게 된다. 명기 이용책이 한순간에 저하된 것에는 시대의 변화상에서 왔다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