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일본 여행기 9차

9번째 간사이원정기 - 4일 히로시마4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広島平和記念公園2, 오코노미무라お好み村)

同黎 2015. 12. 27. 21:20



공원을 계속 가다보면 이런 둥근 봉분이 나온다.


원폭공양탑이다.

 

1946년 강이나 도시 폐허 등에 널부러진 시신들을 수습해 화장한 후 모신 납골당을

1955년 모모야마시대의 어릉 양식에 따라 원형 봉분을 만들고 위에 탑을 세운 것이다.

안에는 납골당이 있어 유족이 없거나 신원을 알 수 없는 유해 7만 구를 모시고 있다고 한다.

7만 구라니...


그리고 평화공원 한 구석에는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서 있다.


원폭 희생자 20만 명 중 2만 명이 한국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70년대까지 이를 기리는 비석이 없었고,

1970년 민단 히로시마현 본부에서 기금을 모아 위령비를 세웠다. 그러나 비석의 위치문제와 "한국인"

이라는 명칭 때문에 생긴 조총련과의 갈등 등으로 비석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공원 밖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1999년 민단과 조총련이 합의하여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안으로 이전되었다.

한국인들이 많이 찾곤 있지만 그렇게 눈에 잘 띄는 곳에 있지는 않다. 원폭돔에는 평화자료관 방향으로

오른쪽 구석에 있다. 비석 아래에는 희생자의 명단이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위령비의 유래를 담은 비석



위령비가 있는 풍경


측면 위령비를 세운 사람들의 명단


비음(비의 뒷면 부부)

비를 세우게 된 사연이 적혀있다.


국회의장 이효상이 앞면 휘호를 쓰고 서울대 한갑수 교수가 글을 썼다고 적혀있다.


위령비 옆에는 피폭된 묘석이 원폭 피해 당시 그대로 남아있다.

이 일대는 원래 사찰이었는데 모든 건물이 날아가고 이 묘지 하나만 남았다고 있다.

그리고 묘석 주변만 좀 파여있는데 이것이 원폭으로 인해 지대가 파여 낮아진 당시의 지면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안내문


평화의 관음

본래 피폭지 가까이 있어 전원이 전멸된 나카지마모토 마을 주민들의 위령비이다.


이런저런 기념물이 엄청 많은데 앞으로 나가면 평화자료관이 보인다.


정식명칭은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


그 앞으로는 히로시마 원폭희생자위령비가 있다.


위령비 아래에는 원폭희생자 30만명의 이름을 적은 책 109권이 담겨있다.


위령비는 평화의 연못이 감싸고 있다.

원폭 희생자들의 뜨거움과 목마름에 시달리다가 죽어가던 것을 위로하기 위해서라고

뒤로는 평화의 등이 있어 사시사철 불꽃이 켜져있다. 역시 원폭을 잊지 말자는 의미라고


뒤에 보이는 건물은 원폭에도 살아남은 또 하나의 건물인 다이쇼야 포목점이다.

워낙 튼튼하게 설계된 건물로 전쟁 당시 징발되어 히로시마현 연료공급 통제소로 쓰였는데

피폭 당시 37명 중 우연히 지하실에 있던 한 명을 제외한 36명 전원이 내부와 함께 날라갔다고 한다.


자료관으로 간다. 자료관은 긴 본관과 동관으로 구분된다.


평화기념자료관 입구


입장료는 50엔, 근데 여권을 보여주면 외국인은 무료로 입장 가능하다.


내부에는 원폭투하까지의 과정과 희생자들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이것은 당시 원폭 리틀보이가 폭발할 때의 상황을 보여주는 전시물


피폭 전의 히로시마


상공 600미터에서 폭발


피폭 후의 히로시마

아래 원폭돔이 보인다.


전시물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인영(人影)의 돌

당시 석조건물 입구에 앉아 있던 사람이 원폭 후 말 그대로 분자 단위로

분해되면서 사라지고 그 흔적만 계단에 검게 남은 것이다.


가장 몸서리가 처지는 전시품이다.

특히 원자구조가 해체되어 돌이나 철문에 박힌 유리 등을 보니 더 소름이 끼쳤다.


당시의 흔적

그 부분을 그대로 때어내 전시관으로 옮겼다.


역시 유명한 전시물인 신이치의 자전거

당시 3살이었던 신이치의 아빠가 신이치에게 어렵게 구해준 자전거로 피폭 당시 신이치는

낙진으로 인해 돌에 깔려 사망해 있었는데 손에 이 자전거를 꼭 쥐고 있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동화책으로도 나와 일본에서는 유명하다고


이건 여중생의 나막신이다. 피폭지 근처에 있어 시신은 날라가고 인영석처럼 나막신에 발의 흔적만 남았다.

어머니가 간직하고 있다가 기증한 물건이다.


당시 등교하던 중학생들의 교복


역시 피해자들의 옷가지





피해자들의 사진

심한 화상과 방사능 노출도 대부분 사망했다고 한다. 당시 히로시마의 의사 90%도 사망했다니..

히로시마 사람들은 넋을 잃고 있었다고. 허허...


당시 히로시마의 사진


히로시마의 시장은 무조건 핵실험을 하는 국가의 지도자에게 이에 대한 항의서한을 보낸다.

이것이 히로시마 시장의 의무 중 하나라고 한다.

자료관의 끝은 그 항의서한의 사본과 생존자들의 증언 전시이다.


평화기념자료관 앞의 분수

원폭에 대한 추모를 일본인들의 희생자 코스프레로 보는 경우가 많다.

일본에 당했던 조선(한국)과 중국인들이 일본을 곱게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원폭 평화운동은 일본 자신의 가해행위를 덮으려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재현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담겨있다.

자료관이 웅변하는 것은 결코 핵은 안된다는 것.

어쩌니 해도 살아남은 사람들의 슬픔과 죄책감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을 너무 흘겨보지만은 않았으면 좋겠다.


여튼 이제 버스를 타고 히로시마의 마지막 장소로 떠난다.


아픔이 있지만 어쨌든 히로시마는 오코노미야끼로 유명한 곳

오사카식 오코노미야끼와 함께 히로시마식 오코노미야끼는 양대 산맥이다.


히로시마 중심지에는 오코노미무라라는 오코노미야끼 전문점들이 모여있는 빌딩이 있다.


우리도 처음엔 빌딩 하나인지 몰랐는데 뭐 간단히 말하면 신림동의 순대촌을 생각하면 되겠다.


여튼 하루종일 돌아다녀서 배고프니 빨리 가서 먹자.


안에는 유명한 집들이 여럿 있는데 우리가 이른 시간에 가서 그런지 그냥 열려있는 곳으로 갔다.

우리가 간 집은 락을 하셨던 아저씨와 할아버지 사이의 그런 아저씨가 하는 곳이다


오사카식이 납작한 것과는 달리 히로시마식 오코노미야끼는 국수를 수북히 올려준다.


크기도 크고, 가격도 비싼 편

다만 하나만 먹어도 되니 가격대비 성능비는 높다.


각자 시킨 오코노미야끼


이렇게 짧은 히로시마 여행을 끝내고 넷째 날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