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일본답사 기본상식

일본답사 기본상식 14 : 천황제3 - 천황가의 궁과 능묘

同黎 2018. 8. 2. 12:30

5-4. 천황의 거주지


교토로 천도할 때까지 일본의 수도는 꽤 많은 곳을 돌아다녔습니다. 지금도 잦은 천도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최초의 수도라고 전해지는 카시하라, 그리고 역사상 확인되는 최초의 수도인 아스카를 거쳐 나라와 교토로 올 때 까지 수십번의 천도가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만 해도 다음과 같습니다. 나니와쿄(오사카), 오미쿄(오쓰), 쿠니쿄(키즈가와), 후지와라쿄(카시하라), 나가오카쿄(교토 근교) 등이 그것입니다.

초기의 수도는 기록이 미비하여 구체적 모습을 알기 어렵지만, 견수사와 견당사가 중국을 다녀오고 율령제가 반포된 이후 대체적으로 중국의 장안을 모방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현재 과거 궁성의 모습을 가장 잘 찾아볼 수 있는 것을 나라의 헤이조쿄 유적입니다. 천년 동안 수도였던 교토 역시 나라와 비슷한 구조를 지녔는데, 천황이 머물며 공적, 사적 생활을 하는 곳을 다이다이리(大内裏)라고 불렀고, 그 안에 천황이 생활하는 다이리(内裏)를 배치하였습니다. 다이다리의 중심부에는 정전(正殿)인 대극전(大極殿)이 있었으며 대극전 앞에는 각 관서들이 위치한 조당원(朝堂院)이 있었습니다. 사방에는 총 14개의 대문을 두었는데, 그중에서도 남쪽 정문인 주작문(朱雀門)이 정문이었고 그 남쪽으로는 주작대로가 이어지는 구조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교토에는 과거의 다이다이리는 사라졌습니다. 한국의 경복궁이 그러했듯 천황들은 공적인 다이다이리보다는 환경이 더 쾌적한 별궁을 지어 그곳에서 주로 생활했고, 원정이 시작되자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결국 10세기 이래로 화재가 비번한 다이리와 다이다이리는 14세기 완전히 사라졌으며 그 부지조차 도시계획으로 인해 빌딩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이후 현대의 교토의 어소는 원래보다 동쪽의 위치에 에도 막부에 의해 재건된 것이며 다이다이리 대신 천황의 사적 공간이었던 다이리의 건물 이름을 계승한 건물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도쿄 천도 이후에는 현대식 궁전이 과거의 궁궐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천황이 거주했거나 거주하는 모든 궁궐은 궁내청의 관할이며 대부분 사전 예약을 통해서만 관람할 수 있습니다. 현장 접수도 받기는 하지만 일본인들도 궁궐에 가보고자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아침 일찍 가지 않으면 관람이 어렵습니다.

 

교토고쇼(교토어소)

역사적으로 가장 정통성을 가진 궁궐은 교토에 있는 교토고쇼입니다. 천황이 머무는 정식 궁궐을 흔히 어소 즉 고쇼(御所)라고 부릅니다. 지금의 교토고쇼는 앞서 언급했다 싶이 본래 다이다이리가 아니라 별궁의 하나였던 것을 에도막부에서 그 자리에 다이리를 재건한 것입니다. 비록 메이지천황이 도쿄로 천도한 이후 천황이 거주하지는 않았지만, 메이지천황 이후 즉위한 다이쇼천황과 쇼와천황은 굳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올렸기 때문에 교토인들의 자부심이 되고 있습니다. 다만 현재의 천황은 도쿄에서 즉위했고, 다음 천황은 즉위식은 개최장소가 미상이기 때문에 그 상징적 의미가 어떻게 될지는 의문입니다.

교토고쇼는 교토교엔(京都御苑)이라는 거대한 공원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원래 이 자리는 고쇼를 중심으로 각종 궁가와 공경들의 저택 및 신사들이 들어섰던 자리입니다. 도쿄 천도 이후 대부분의 궁가와 공경들이 도쿄로 이전한 후 남은 거대한 공터를 공원화하였는데 이를 국가에 반환하여 현재는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습니다.

고쇼 안에는 정전으로 즉위식 등의 주요 의례가 이루어지는 자신전(紫宸殿)과 본래 천황과 황후의 침소였지만 이후 집무와 의례의 장소로 중요해진 청량전(清涼殿)이 중심축을 이룹니다. 이 밖에 알현을 위한 대기소, 생활을 하던 장소와 학문의 장소, 다실 등등의 건물이 있습니다. 다만 이 건물들을 한국이나 중국의 궁궐 건물과 비교해보면 사뭇 크기가 작고 형식과 잘 갖추어지지 않아 있어 과거 천황의 위치를 가늠해볼 수 있기도 합니다. 또한 천황들 역시 고쇼에 거물기 보다는 쾌적한 별궁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한편 교토고쇼 옆에는 상황이 머물던 센토고쇼(仙洞御所)와 태후가 머물던 오미야고쇼(大宮御所)가 남아있습니다. 이곳은 화재로 인해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지만 정원 만큼은 잘 남아 있어 에도시대 정원문화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교토고쇼의 정전인 자신전

 

황거(고교)

메이지천황은 도쿄로 천도한 이후 쇼군이 머물던 에도성을 그대로 궁전으로 삼았습니다. 이후 지금까지 천황이 머무는 궁궐은 황거(皇居) 즉 고쿄라고 부릅니다. 특별한 이유가 없이 황거라는 이름으로 관례화되어 지금까지 쓰이고 있습니다.

메이지천황은 에도로 와서 쇼군이 쓰던 에도성을 접수하고 도시 이름을 도쿄로 바꿉니다. 그리고 에도성의 좁은 동쪽 부분은 화재와 전쟁 등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사라졌기에 공원으로 만들었고, 실제 쇼군들도 사용하던 서쪽의 넓은 부분을 사용하게 됩니다. 쇼군이 사용하던 건물은 이미 화려했기 때문에 이를 대부분 재활용하되 일부분을 서양식으로 신축, 개조하여 궁전을 세웠습니다. 출입구는 에도성의 성곽을 그대로 사용했는데,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의 주요 거사가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천황이 살던 황거는 주요한 공습지점이 되었습니다. 에도시대와 메이지시대에 걸쳐 지어진 대부분의 건물은 거의 전소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여론이 좋지 않아 천황가는 궁내청 청사 한층을 임시로 사용합니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 무너진 궁전의 자리에 지금의 완전 현대식 황거가 다시 세워집니다.

황거는 크게 천황의 공식적인 집무와 외빈을 맞이하고 연회를 여는 궁전(宮殿)과 천황 부부가 생활하는 어소(御所), 삼종신기를 보관하고 각종 의례를 여는 궁중삼전(宮中三殿)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중 일반인이 관람할 수 있는 곳은 궁전 중 장화전(長和殿)이라는 건물 앞마당 뿐으로, 이 건물은 천황의 생일과 새해에 천황이 일반인들을 만나는 기다란 건물입니다. 나머지는 우리가 다른 나라의 국왕이나 대통령이 되지 않는 한 구경하기 어렵습니다.

황태자가 머무는 것은 도쿄 아사카사에 있는 동궁어소(東宮御所)로 아카사카리큐(赤坂離宮)라고도 합니다. 본래 메이지시대에 지어진 동궁어소는 매우 화려한 서양식 석조건물로 현재는 구 동궁어소라는 이름으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으며, 해외의 국빈을 접대하기 위한 영빈관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현재의 동궁어소는 아카사카어용지(赤坂御用地)라는 황실 소유의 부지 내에 다른 황족들의 저택과 함께 있으며 공개되지 않습니다.

 

이궁(리큐)

천황이 공식적으로 살던 곳 외에 머물던 별궁을 이궁(離宮) 즉 리큐라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리큐들이 있었으나 현존하고 있는 리큐는 교토의 가츠라리큐와 슈카쿠인리큐 두 곳 뿐입니다. 이 두 곳 모두 에도시대 천황들이 거주하던 곳으로 오직 문예에만 힘쓰던 천황이기에 정원 가꾸기에 힘써 매우 아름다운 정원으로 유명합니다. 두 곳 모두 궁내청에서 주변 부지까지 사들여 보존에 만전을 기울이고 있는데, 매우 한정된 인원만 사전 예약으로 관람할 수 있기 때문에 보기가 매우 드뭅니다.

그 밖에 메이지유신 이후 쇼군가 및 그 다이묘와 관계된 곳을 몰수하여 리큐로 삼았다가 이후 공원화하여 국가에 반환한 경우도 많이 존재합니다. 교토 니조성과 나고야성이 대표적으로 이러한 경우이며 쇼군가의 별장인 하마리큐와 다이묘가의 저택인 시바리큐도 완전히 공원이 되어 공개되어 있습니다.


가츠라리큐 정원


슈카쿠인리큐 정원

 

5-5. 천황가의 무덤

 


일본에서 가장 큰 전방후원분인 닌토쿠천황릉


일본 천황가의 모든 무덤은 궁내청에서 관리합니다. 이는 천황과 황후는 물론이고 하늘에서 내려왔다닌 천황의 조상인 니니기를 비롯한 신대 삼대와 황자, 황녀, 황손 및 각 궁가(미야케)의 당주 및 그 비()의 무덤까지 모두 포함합니다. 여기에 천황 등이 출가할 때 삭발한 머리카락을 묻은 곳, 화장한 곳이나 유해의 일부가 모셔진 곳 모두 궁내청의 소관의 능묘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무덤의 총 수는 897곳에 이르는데, 대부분 교토부와 나라현에 위치해 있습니다. 궁내청에서는 이 수 백 곳의 능묘를 관리하기 위해 산하에 서릉부(書陵部)를 설치하고 도쿄 1, 교토 2, 나라 1, 오사카 1곳의 사무소를 설치하여 관리 중입니다.

참고로 현재 천황릉 및 황족묘로 지정된 무덤 중 나라시대까지의 능묘는 모두 에도시대에서 메이지시대에 비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헤이안시대에서 무로마치시대에 이르는 많은 능묘 중 대부분은 사찰에 위치해 있었는데 사찰의 쇠퇴 등으로 흔적만 남아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능묘도 많았습니다. 문제는 역사학이나 고고학적 근거에 의한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발굴 결과 2번은 천황릉이 바뀌었으며 최소 5곳은 확실히 틀린 것으로 생각되지만 궁내청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매우 보수적으로 나오고 있기 때문에 고고학적 발굴 등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궁내청에서도 이러한 오류 때문에 잘못 제사를 지낼 것을 염려하여 천황가의 무덤으로 유력한 수 십 곳을 능묘참고지(陵墓参考地)라는 이름으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곳들이 대부분 고대사에 영역에 속하는 고분이라서 고고학의 발전을 막고 있다는 점입니다.

현재 내려오는 천황가의 무덤은 다양한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사실상 신화시대에 속하는 천황의 무덤은 원형이나 팔각형 등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훈시대로 불리는 시기의 천황릉은 대부분 전방후원분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후 불교가 전파된 시기에는 상당수의 천황이 화장을 선택하고 있으며 화장 후에는 원형 혹은 방형의 봉분이 있는 무덤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흘러 완전히 불교식 장례가 정착한 후인 남북조시대 이후로는 모두 화장 후 유골을 탑에 안치하고 있습니다. 특히 고미즈노오천황 이래 모든 에도시대의 천황릉은 교토 센뉴지(泉涌寺)라는 사찰 뒤편에 모셔져 있습니다. 헤이안시대 이래 대부분의 천황릉이 사찰에 위치하기 때문에 신불분리령 이후 황족의 능묘가 위치한 토지는 강제로 사찰에서 몰수되었는데 때문에 사찰과 궁내청 간의 분란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메이지천황 이후로는 고대의 천황릉을 되살린다는 명목으로 화장하지 않고 위는 원형이고 아래는 방형인 봉분을 쓰고 있는데, 특히 메이지천황릉은 콘크리트로 된 봉분을 쓰고 있습니다. 메이지천황이 교토 등 간사이지방에 묻힌 마지막 천황이며 이후 천황은 도쿄에 위치한 황실묘지에 묻히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