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84년 1월, 어느 신문의 신춘문예 심사평에서였다. 기형도는 당선되지 못했고, 최종 심사평에 그의 시 일부가 언급되어 있었다. 당선시가 아니라 최종 심사 대상에서 거론되다가 낙선한 시의 일부가, 심사평에 자세하게 소개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심사위원들이 최후까지 고심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당시 <시운동> 동인 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감수성과 어법으로 무장된 새로운 시인들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1980년 12월, 하재봉·안재찬·박덕규 세 사람이 함께 시집을 낼 때부터 우리는 3인 시집이 아니라 <동인지>라고 못을 박았고, 이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한기찬, 경희대에서 함께 시를 썼던 이문재, 《동아일보》로 등단한 남진우 등등이 동인활동에 합류했었다. 또 박덕규와 함께 대구에서 시를 썼던 박기영, 박기영의 소개로 만난 장정일, 그리고 오규원 선생의 소개로 만나게 된 황인숙 등등이 <시운동>에 합류하게 된다.
1984년은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폐간된 문지/창비의 양대산맥의 빈 공간을, 다양한 동인지, 무크지 등이 메꾸고 있던 시절이기도 했다. 한 평론가에 의해 ‘소집단 운동’이라고 명명된 당시의 문학 운동은, 한정된 문예지 지면의 대안공간으로서 동인지나 무크지가 이용되었던 것을 뛰어넘어, 새로운 상상력과 시적 실험으로 형성된 동인 집단들이 칼날을 갈고 혁명하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기형도의 짧은 시가 눈에 들어왔다. 당선된 시보다, 심사평에 언급된 그의 시 일부가 훨씬 더 가슴을 쳤다. 나는 수소문 끝에 기형도가 연세문학회 멤버라는 것을 알았고, 확신을 갖기 위해 연세춘추 교지에 실린 그의 시도 미리 읽어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만나자고 연락을 했다. 당시 나는 군인 신분이었지만, 서울 교외에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로 외출을 나와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은 종로 2가에서 3.1빌딩 쪽으로 꺾어지는 모퉁이 2층에 있었던 ‘민화랑’이었다. 갤러리는 아니고 전통차를 팔던 찻집이었다. <시운동> 동인들은 대부분 술, 담배를 잘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담배 냄새 자욱한 일반 카페보다는 이런 곳을 훨씬 선호했다. ‘민화랑’에서는 금연이었다.
나는 약속시간에 박덕규, 남진우와 함께 나갔다.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어떤 남자가 거울을 보며 머리를 다듬는 것이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가 기형도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는 연세문학회 선배였던, 그리고 당시 이미 문예지 추천으로 등단했던, 시인 오봉진과 함께 그 자리에 나왔다. 나는 그에게 <시운동> 동인을 같이 할 것을 제의했다. 그는 망설였고, 며칠 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며칠 뒤, 그는 추후 함께 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더불어 나에게 타이프로 A4 용지에 깨끗하게 타이핑된 시 한 편을 보내왔다. 훗날 발표된 「포도밭 묘지」라는 시였다. 특히 그 시는 당시 우리 <시운동>이 펼쳐가고 있었던 시세계와 흡사했다. 그는 명백히 <시운동>이 추구하던 시세계의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생각되었다. 아마도 문예지나 신춘문예를 통해 정식으로 등단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성 시인들과 동인 활동을 같이 하는 것이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리고 그 다음해 1985년, 우리는 1월 1일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자 발표에서 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선작 「안개」는 기형도의 대표시는 아니다. 신춘문예 스타일을 고심해서 응모한 시였다. 대학 졸업반이었던 그는, 이미 그때 《중앙일보》 기자시험에 합격해서 수습기자 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제대해서 한 잡지사의 수습기자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나 역시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었기 때문에 우리는 신춘문예 시상식장에서 다시 재회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85년 등단 이후 기형도와는 자주 만날 수 없었다. 그는 초보 기자로서 힘든 수습 생활을 하고 있었고, 수습 딱지를 뗀 후에는 정치부 기자로서 총리실을 출입하며 정치 기사를 썼다. 워낙 바쁜 생활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자주 연락을 하며 지냈다.
나는 <시운동> 동인지를 만들 때마다 그에게 연락을 했었다. 1년에 한 번 정도 발간된 <시운동> 동인지는 어떤 때는 1년에 두 번 발간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기형도는 머뭇거렸다. 그의 시는 빠른 시간 안에 기존 평단의 주목을 받고 있었고, 자신의 시에 대해서 깊은 자기 확신이 있었던 그는 향후 시단의 방향을 예민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가 자주 만나게 된 것은, 그가 문화부로 부서를 옮기면서부터였다. 나도 직장을 옮겨 문예진흥원에 근무하고 있었고, 출판 홍보를 책임지고 있던 나의 직속 상관 박제천 시인은 언론사에 홍보할 일이 있으면 나를 내보냈기 때문에, 나는 업무차 사대문 안의 신문사를 뻔질나게 드나들어야 했었다. 내가 방문하는 곳은 각 신문사의 문화부였고 당연히 기형도와는 얼굴 마주칠 일이 늘어났다. 그러나 우리가 더 자주 만나게 된 것은 그가 편집부로 옮기게 된 뒤부터였다. 사실 그의 편집기자 시절이 우리의 황금기였다. 왜냐하면 늘 기사를 써야 했던 정치부/문화부 시절과는 다르게 그에게 여유 시간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1988년부터 1989년 3월 7일 새벽, 그의 돌연한 죽음까지 우리는 자주 어울렸다. 어떤 날은 하루에 3번 넘게 인사동 골목에서 마주치기도 했다. 기형도가 문화부 방송 담당 기자였던 시절, 방송국에 가면 많은 사람들이 《중앙일보》 방송면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신문 맨 뒷 페이지 오른쪽 상단, 그날 하루의 방송 스케줄이 빼곡하게 짜여진 한쪽 귀퉁이에 실린 방송면은, 순수문화에 대한 애정이 넘쳐나던 80년만 해도 일종의 액세서리였으며 방송이라는 대중문화, 하위문화에 대해 형식상으로 마련된 지면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 작은 지면을 놀랄 만한 탄력의 공간으로 바꿔놓기 시작했다. 방송국 프로듀서들을 긴장시켰고 제작 간부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가 문화부에서 편집부로 옮겨간 과정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소상하게 증언하고 있으므로 피하겠지만, 자신의 일에 대한 그의 완벽주의, 주위 사람들도 혀를 내두를 그의 꼼꼼함은, 시에서는 더욱 심한 것이었다. 시에 대한 그의 이러한 엄정성이 사뭇 그리워진다.
1988년부터 나는 <시운동> 팸플릿을 발간하고 있었다. 매월 20여 쪽 내외로 구성된 작은 팸플릿은 문단 관계 인사들에게만 우송되던 새로운 동인운동이었다. 1년에 한 번 출간하는 동인지의 연장선상에서, 빠르게 변화하는 시단의 징후를 포착하고 문제를 부각시키며 논리를 다듬기 위해 만들어진 ‘시운동 팸플릿’ 맨 뒤쪽에는, 젊은 시인들의 모임 후기가 수록되어 있었다.
소위 문단에 ‘시운동 청문회’라고 명명되었던 이 모임은 대략 2주에 한 번 꼴로 인사동에 있는 평화만들기 혹은 토담 등등에서 개최되었는데 최근 시집을 낸 시인이 초청 대상이었고, 젊은 시인 평론가들이 모여들었다. 대부분 2, 30대로서 등단 10년이 안 되는 젊은 시인들이었다. 초청 대상이 된 어떤 시인은 그날 목욕재계하고 나왔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만큼 단순히 친목을 위해 어울린 것은 아니었고 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쏟아졌던, 조금은 살벌하기도 했던 모임이었다.
이 시운동 청문회의 단골 고객이 기형도였다. 그는 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좋아했다. 사람들의 기분을 나쁘지 않게 하면서도 할 말을 정확하게 하는 그에 대해 누구나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다. 1차 청문회는, 무차별한 폭격으로 초청 대상이 된 시인의 시를 난타하는 것이었다. 상찬도 있었지만 그것은 드문 경우였고, 시의 결점을 주로 잡아내서 토론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열기가 뜨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1차 모임이 끝나면 그때부터 음주 가무로 들어갔다. 이때 가장 빛나는 사람이 기형도였다. 우리는 그를 ‘문단의 카수’라고 불렀다. 교회 성가대 출신답게 고운 음색과 정확한 음정으로 그가 노래를 부르면, 우리는 모두 조용히 그의 노래를 경청했다. 기형도의 연세문학회 동기였던 시인 성석제가 《문학사상》으로 등단한 이후, 시운동 청문회에서는 기형도와 성석제의 이중창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났다. 나는 아직도 두 사람이 함께 노래 부르던 트윈폴리오의 「하얀 손수건」, 「웨딩케익」 같은 노래들을 기억한다. 아니, 그런 노래만 들으면 기형도 생각이 난다.
1989년 3월 6일 아침, 나는 중앙일보사로 갔다. 그리고 편집부 그의 책상을 찾았다. 그날 저녁 샘터 파랑새 극장에서 나의 첫시집 『안개와 불』의 장례식 퍼포먼스가 개최될 예정이었다. 나는 퍼포먼스 팸플릿을 들고 그를 찾은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리에 없었다. 나는 그의 책상에 팸플릿을 놓고 나왔다. 그리고 하루종일 퍼포먼스 준비로 바쁘게 뛰어다녔다.
그 몇 달 전인 1988년 12월, 나는 첫시집 『안개와 불』을 민음사에서 출판했다. 등단 9년만에 낸 시집이었다. 발표한 시를 엮어서 시집을 만들었다면 벌써 2, 3권은 나와야 했다. 그러나 시집은, 그 자체가 하나의 시적 질서를 갖는 우주여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고 시집을 구성하는 동안 많은 에너지를 소진시켰다. 대립되는 물질적 이미지의 충돌을 통해 세계불화의 한복판에서 자아의 흔들림을 경험하는 개인의 성장과정을 그린 시집 『안개와 불』 구성에 너무 몰입해서 그런지, 시집을 출간한 뒤에 한동안 나는 그 세계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제는 그 세계와 결별하고 새로운 시를 쓰고 싶었는데 여전히 『안개와 불』의 시 세계는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시집 『안개와 불』의 장례식 퍼포먼스를 기획했다. 장례식이라는 제의과정을 통해서 그 시들을 떠나 보냄으로써 새로운 시적 출발을 가능케 하려는 의도였다.
대학로 샘터 파랑새 극장이 쉬는 3월 첫 월요일 저녁을 시집 『안개와 불』 장례식 퍼포먼스 공연날짜로 잡아놓고, 나는 기형도에게 시집 서평을 부탁했다. 조정래, 김초혜 선생이 함께 간행하던 월간 《한국문학》 서평난에 게재될 원고였다. 그때가 1989년 2월초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기형도는 흔쾌하게 내 부탁을 받아들여 주었고 좋은 원고를 보내왔다. 내가 알기에는, 그 원고가 기형도 생전에 공식적으로 발표된 그의 마지막 산문이다.
3월 6일 저녁, 많은 시인, 기자들이 샘터 파랑새 극장을 찾아주었다. 상갓집 분위기와 똑같이 꾸미기 위해 나는 장의사에 가서 ‘근조’라고 검은 글자로 씌어진 커다란 노란등을 빌려 극장 입구에 걸어놓았고, 또 마름모꼴 하얀 종이의 검은 테두리 안에 역시 ‘근조’라고 씌어진 종이를 지하극장 입구 양쪽 벽에 수없이 붙여 놓았다. 무대에는 제단이 있었고 내 시집은 고인의 영정이 놓이는 자리에 양쪽으로 검은 띠를 두르고 놓여졌으며 향을 묶음 다발 통째로 피워 극장 안은 연기로 가득했다. 당시 《한겨레》 문학담당 기자였던 조선희는 매캐한 연기를 참지 못해 쿨럭거리며 극장 밖으로 뛰쳐나가기도 했었다. 나는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듯이 미친 듯이 시낭송을 했고, 나중에는 시집을 들고 종을 딸랑거리며 극장 밖으로 나가 시집을 불태우고 오체투지로 그 불꽃을 덮었다.
공연이 끝난 뒤 참석자들과 뒤풀이가 있었다. 술을 마셨고 새벽에 택시를 타고 상계동 집으로 들어갔으며 다른 때보다 늦게 일어났다. 그런데 전화가 왔다. 《한국일보》 문학담당 기자인, 내 시집 뒤의 해설을 써준, 김훈 선배였다.
“나 김훈이다. 형도가 죽었다. 지금 서대문 병원 영안실에 있다.”
무미건조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김훈 선배가 감정에 사무쳐서 소리 지르는 것도, 요동치는 것도 보지 못했다. 결국 그와 별로 친하지 못했다는 말인데, 하지만 나는 그가 이성을 잃는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다. 그 순간에도 아주 사무적인 말투였다.
나는 전화를 끊고 머리 속이 진공상태가 되었다. 김훈 선배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로 받아들여지지도 않았다. <시운동> 동인들 중심으로 긴급히 연락을 하고 회사에 들러 직속상관 박제천 시인에게 상황을 이야기하고 서대문병원 영안실로 갔다. 오전 10시쯤이었다. 이제 막 영안실 빈소를 준비중이었다. 그의 연세문학회 동기들이 넋 나간 표정으로 몇 사람 앉아 있었다.
그리고 발인이 있기까지 사흘 동안 나는 그곳에서 보냈다. 회사에 나가지도 않았고 중간에 집에 잠깐 다녀온 기억도 없다. 우리는 미친 듯이 술을 마셨고 서로 주먹질을 하며 싸움을 했다.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상갓집을 꾸며 놓고 향불을 피우고 생쇼를 한 것이 혹시 그의 죽음을 미리 부른 불길한 행동은 아니었을까 수없이 자책을 했다.
시인 권대웅은 나를 붙잡고 “형, 이제 형이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었다. 파고다 극장에서 새벽에 발견되기 전까지 기형도의 행적이 묘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소 기형도와 나의 친분관계로 보아서 분명히 어제 저녁 있었던 시집 장례식 퍼포먼스에 기형도가 갔을 것이고, 저녁 늦게까지 술을 마셨을 것이며, 그리고 사고가 났으므로 아직까지 원인불명인 기형도의 사인에 대해 내가 알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나는 권대웅에게 주먹을 날렸고, 이것이 발단이 되어 상갓집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난투극을 벌였다. 야외 천막 안에 모여든 수많은 시인, 작가, 평론가들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 곳곳에서 서로 시비를 걸고 알 수 없는 분노로 폭발하기 직전이었는데, 내가 주먹을 날린 것을 시작으로 영안실 전체가 난투극에 휘말렸다. 이 날의 소동은 다음날 한국일보 휴지통에 소개되기도 한다. 나도 이성을 잃고 폭력을 사용한 점, 아직도 권대웅에게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경기도 안성 천주교 묘지에 우리는 기형도를 묻었다. 붉은 무덤 앞에서 나는 그의 마지막 시 「빈집」을 읽었다. 마치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언하는 것 같은 시를 읽는 동안 우리 모두 흐느꼈다. 1989년 3월, 왜 우리는 그토록 많은 죽음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3월호 《문학사상》에서 청탁을 받고 나는 시를 보냈는데, 「비디오/화산」이라는 그 짧은 시도 죽음의 이미지로 도배된 시였다.
기형도는 불과 4년 조금 넘게 시단 활동을 했고, 한 권의 유작시집밖에 남기지 않았지만 그의 시는 급물살을 타며 변화해 가고 있는 시대적 징후를 누구보다도 빠르게 감지하고 있었으며 90년대 시단으로 향하는 문을 미리 활짝 열어주었다. 너무 짧은 죽음으로 마감된 그의 시세계는 안타깝기만 하다. 한국 시사에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려고 문지방을 막 넘던 찰나에 그는 쓰러졌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살아 있다.
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하재봉 19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1년 《문예중앙》 신인상 소설부문(중편소설) 당선. 시집 『안개와 불』 『비디오/천국』 『발전소』. 소설 『콜렉트콜』 『블루스 하우스』 『쿨재즈』 『황금동굴』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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