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무제 21

유서. 2013.05

유 서 인간의 역사는 인과관계로 이루어져 있지만 삶과 죽음만은 예상치 못한 우연입니다. 저 역시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저는 제가 어떤 방식으로 삶을 마치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의 죽음 이후에 남아있는 일만은 깨끗하게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이렇게 유서를 남깁니다. 만일 제가 사고로 혹은 병이나 선택으로 삶을 마친다면 유서 원본은 제 후배 유제훈에게 전달 될 것입니다. 제 마지막 가는 길은 제훈이가 정리해주면 좋겠습니다. 이 유서는 2013년 5월 작성되었으며 상황에 따라 수정될 것입니다.따로 벌어놓은 재산이 없기 때문에 딱히 드릴 것은 없습니다. 다만 제가 진 경제적 채무는 부모님께 부탁드리기 바랍니다. 그 정도의 경제적 능력은 있을 것입니다...

雜/무제 2013.05.11

賢儒李公癖墓碣銘 幷序

賢儒李公癖墓碣銘 幷序 公의 貫鄕은 延安이요, 諱는 癖이고, 阿號는 碧壁이며, 살던 곳은 忠淸道 丹陽郡이다.生前 婚姻을 하지 않아, 妻와 子息이 없고, 다만 家門의 아우 셋이 있을 따름이다.일찍이 壬戌年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文章과 格物致知에 能하였으며, 性品은 思慮가 깊고 剛直하였다. 開國한지 六百十七年이 되던 해에 我朝에 入朝하였다. 天下의 人材를 뽑는 科擧에 應試하여 進仕試에서 滿點을 받아 本朝 最初의 壯元을 하여서 일찍이 그 이름이 朝野에 널리 퍼졌다. 以後에 大科 文科에 乙科 及第하여 弘文錄에 登載됨과 同時에 朝廷에 出仕하였으니, 처음의 品階가 通仕郞이요, 그 官職은 權知承文院正字였다. 以後 正職으로 使令된 後에도 生員試와 訓練院試에 一等으로 入格하여 그 文章을 天下에 뽐내었다. 後에 그 間의 試券..

雜/무제 2010.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