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북경 답사 1차

북경여행기 - 3일 (자금성 후삼궁: 건청궁, 교태전, 곤녕궁)

同黎 2015. 9. 12. 12:35



후삼궁 구역에 들어가기 위해 건청문 앞으로 가는 길

보화전 뒤편이 보인다.


보화전 뒤편에는 자금성에서 가장 크고 긴 것으로 알려진 답도(단지)인 운룡대석조가 있다.

중국 측 안내서에는 운룡석계(雲龍石階)라고 써 있었다.

길이는 16.5미터, 폭은 3미터, 두께는 1.7미터에 달하는 이 운룡대석조는

무게가 200톤으로 원석의 무게는 300톤이었다고 한다.

한 덩어리로 이루어진 이 운룡대석조는 북경 서남부의 팡산(房山)이라는 곳에서 채굴되었는데

명사에 따르면 병조에서 병사 6천 명을 동원해 채굴했으며 겨울철에 2만 명을 동원하여

얼음을 얼린 빙판길을 이용해 옮겨왔다고 한다.


오악과 운룡을 조각한 이 운룡대석조는 명대 석조미술의 대표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여러 군데서 극찬을 하긴 하지만 사실 그렇게 엄청 감동적인 조각은 아니다.

관의 영향력을 받은 예술의 느낌이 너무 난다.

어쨌든 대단한 대륙의 물량을 보여주는 건 맞다.


보화전(保和殿) 뒤편으로 건청문(乾淸門)이 있다.

내조의 정문이다.

본래 여기서부터는 내조이기 때문에 문의 크기도 5칸으로 좀 작고 신하들이 드나드는 좌우의 문도 없다.

그러나 청이 자금성을 사용하면서 건청궁이나 곤녕궁이 좀 더 공적인 성격을 띄게 되자

건청문의 용도 역시 변하게 된다. 순치제 때부터 여기에 임시 옥좌를 설치하고

신하들로부터 정사를 듣고 결정하는 '어문청정(御門廳政)'이 실시된 곳이다.


안에 들어와서 본 건청문


지금의 건청문은 순치제 때 중수된 것이다.


건청문에서 건청궁(乾淸宮)까지는 한백옥으로 만들어진 월대로 연결되어 있다.


내조 후삼궁의 중심인 건청궁


본래 건청궁은 황제의 침전으로 지어졌다. 강희제까지는 그러한 목적대로 잘 사용되었으나

옹정제 이후 침전이 양심전으로 교체되면서 강녕전은 일종의 편전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황제가 죽은 후 장례 때까지 시신을 안치하는 빈전(殯殿)의 역할도 하게 되었다.

담장 너머 보이는 건물은 딸린 건물로 이전(耳殿)이라고 하는 소인전(昭仁殿)과 홍덕전(弘德殿)이 있다.


영락제 때 정면 9칸의 건물로 처음 완성되었으나 기구한 일을 많이 겪어 중건도 많이 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청 가경제가 중수한 것이다.


황제의 침전인만큼 여러가지 사건도 많이 일어난 곳이기도 한데

만력제 때의 이궁안, 태창제 때의 홍환안 등도 여기서 일어난 일이다.

그래도 청 때는 그런 끔찍한 일은 적었고 강희제와 건륭제 때에는

천 명의 노인을 모아 잔치를 여는 천수연이 베풀어지기도 하였다.


건청문에서 건청궁까지 걸쳐진 회랑은 황실의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내무부에 딸린 여러 기관들이었다.

어다방(御茶房), 어약방(御藥房), 상서방(上書房)등이 그것이다.

내무부는 청 특유의 기관으로 명이 환관들의 득세로 멸망했던 것을 경계한 청 황실이 설치한 기관이다.

내무부의 관리들은 거의 전원 팔기 기인으로 이들에게 황실의 살림을 맡겨

환관의 세력을 축소시키고 이들의 정사 참여를 막았던 것이다.



다시 보는 건청문


건청궁 월대 아래에는 금을 입힌 동항이 여러 개 설치되어 있다.


월대 위에는 정 모양의 향로와 일대, 가량대가 설치되어 있다. 태화전과 똑같다.

강녕전 안에는 침상이 27개나 있다고 한다. 뭐 황제가 어디서 자는 지 모르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신경질적이었던 옹정제라면 해당되겠지만 그렇게 황제들이 죽을 걱정하면서 살았을 것 같진 않다.

경복궁 강녕전의 경우 단지 2개의 온돌방이 있을 뿐이고, 좌우에 4개의 부속건물을 지었다.


이제 건청궁으로 가본다.


현판


건청궁 내부


사람들이 사진을 찍으려고 난리를 치는 이유가 있다.

이곳이 청 황제의 후계와 관련되어 아주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건청궁 보좌 위의 정대광명이라는 글씨는 순치제의 친필이다.

옹정제 이후 저 현판 뒤에는 황제가 생전에 후계자를 지명하여 적어 놓은 봉투가 있었고,

황제 사후 왕공들이 그 봉투를 꺼내 후사를 발표했다. 옹정제가 정한

이러한 후계자 결정 방식을 저위비건법 혹은 비밀건저법이라고 한다.


옹정제의 비밀건저법은 아버지인 강희제의 실패를 보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순치제 사후 아주 어린 나이로 즉위했던 강희제는 삼번의 난을 종식시키고 대만까지 평정하면서

본격적으로 황제의 권위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는 합의에 의해 칸을 추대하였던

유목민족 전통의 방식을 극복하고 막강한 황권을 가지기 위한 것이었다.

강희제가 황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후계자 결정법으로 삼은 것은 한족 방식의 황태자제였다.

한족 방식으로 장자 우선 상속의 방식을 채택하면서 자신의 장자인 윤잉을 황태자로 삼은 것이다.

생전에 그것도 장자로 후계자를 삼는 방식은 유목민족의 전통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청 역사상 전무후무한 황태자였던 윤잉은 여러가지 사건을 일으키고 조정은 황제당과

황태자당으로 나뉘어진다. 황태자당은 심지어 강희제를 암살하려고도 했다. 붕당을 극도로

경계했던 강희제는 결국 윤잉에 대해 폐위-복위-폐위를 거쳐 황태자제의 실패를

선언하고 죽을 때 유서로 제4황자인 옹정제를 후계로 결정했다.

그러나 옹정제 역시 제14황자를 제4황자로 조작했다는 조작설에 휩싸였고, 결국 옹정제는

비밀건저법을 선택했다. 이는 황제가 후계를 결정한다는 한족의 전통과 능력있는 자가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유목민족의 전통을 절충한 것이다.

 

물론 이후에는 밀봉된 유지에 대한 조작설도 있었고 황제가 이 유지를 바꾸는

제스처를 하면서 황자들의 충성을 요구하는 정치쇼도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 건청궁 내부는 당대 정치의 가장 치열한 공방현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좀 잘 나온 내부 사진

보좌 주변 사방 기둥의 주련은 강희제의 글을 건륭제가 적은 것이다.


내부 측면


내부 침전 공간으로 통하는 문


건청궁 좌우에는 수미산 위에 정방형의 건물이 올라간 형태의 구조물이 있다.

이를 사직강하금전(社稷江山金殿)이라고 한다는데 정확한 유례는 모르겠다.


이제 건청궁을 돌아 교태전(交泰殿)과 곤녕궁(坤寧宮)으로 간다.


아이고 힘들다.

5시간째 달렸더니 너무 피곤하다.


외조의 중화전을 꼭 닮은 교태전

경복궁에도 똑같은 이름의 건물이 있다. 왕비의 침전이다.

자금성의 교태전과 이름은 같지만 역할은 약간 다르다.


교태전은 원래 명나라 때 중원전이었으나 순치제 때 교태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곳은 황후의 정전 역할을 했던 곳이다. 물론 황후가 공식적인 내명부의 수장이나

실제 집무하기보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공간으로 주로 기능했다.

황후의 생신인 천추절에는 황귀비 이하 황실 내명부와 공주 등의 하례를 받았으며

매 해 황후가 잠신(蠶神)에게 제사지내는 곳이기도 했다.

특히 순치제 때 명대 환관(태감)들의 폐단을 경계하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교태전이 유명한 이유는 또한 건륭제 때문이다.

건륭제는 25개의 국새를 만들어 교태전에 두었다. 원래 39개를 만들려고 했는데 완성된 게 25개라고 한다.

또한 건륭제 때 여기에 거대한 물시계를, 가경제 때는 청에서 만든 대형 자명종 시계를 두기도 했다.


현판


문에 새긴 운룡문


교태전 내부

가운데에는 원래 강희제가 썼으나 소실되고 건륭제가 다시 쓴 무위(無爲)라는 현판이 있다.

가장 이상적인 정치 형태라는 무위지치(無爲之治)를 의미하는 것이겠으나 해석에 따라서는

황후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 즉 깝치지 마라는 뜻이기도 한다고 하지만... 알 수 없는 일

안에 보자기를 씌운 것이 25개의 옥새를 보관하는 함이다.


내부 측면


잘 나온 내부 사진

왼쪽에 자명종이 보인다.


오른쪽에 물시계가 있다.

정면에 있는 현판 아래의 글은 교태전명이라고 하여 건륭제가 짓고 쓴 것이다.


천정의 조정과 헌원경


이제 후삼궁의 마지막 공간인 곤녕궁으로 간다.


측면에서 본 곤녕궁

정면 9칸의 큰 건물이다.

원래 여기가 중궁(中宮)으로 명대 황후의 침전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후삼궁이 다 그렇듯이 영락제 이후 가정제, 만력제 때 계속 화재를 겪었고 숭정제의 황후인 주황후가 여기서 목을 매 자결하기도 했다.

명대에도 순치제·강희제·건륭제·가경제 때 계속 화재가 나 복구하였고 지금의 건물은 가경제 때의 것이다.


청대에 들어 곤녕궁의 역할이 완전히 바뀌었다. 먼저 입구가 남향에서 동향으로 바뀌었다.
곤녕궁은 청조 특유의 샤먼제(사먼제)라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 되었다. 즉 아이신기오로씨의 조상신과
수호신, 그리고 티벳 불교의 여러 신들을 모시는 만주족 특유의 제사가 여기서 지내진 것이다.
본래 만주족의 솟대도 여기 서 있었다고 전하나 이후 철거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궁으로의 상징적 의미도 분명히 가져갔기 때문에 황제와 황후의 대혼은
여기서 치루어졌으며 강희, 동치, 광서제의 국혼과 초야가 여기서 치루어졌다.
즉 내부 공간을 동난각과 서난각으로 나누어 동난각은 혼례공간, 서난각은 제례공간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그나마 강희제의 두 황후는 곤녕궁에 머물렀으나 옹정제 이후로는 황제가 완전히 양심전으로

침소를 옮기고 황후는 동, 서육궁 중 한 곳을 선택하도록 하여 황후의 침궁으로서의 역할도 잃었다.

다만 황후의 생일인 천추절에는 여기서 하례를 받곤 했다고 한다.


내부를 보러 간다.


남향 정면의 내부

정면 4칸은 명간(明間)이라 하여 만주족의 신과 황실의 조상신을 모시는 공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서쪽 끝 한 칸은 불정(佛亭)이라 하여 부처를 모시는 공간으로 활용했다.


명간 정면


동난각의 부분

화려하게 장식된 여기는 바로 국혼의 초야를 치루는 공간이다.

겨우 2칸으로 아주 작은 편이다.


이제 후삼궁을 다 보았다.

곤녕궁에서 바라본 교태전과 건청궁


동쪽에서 바로 본 교태전 모습


이제 드디어 자금성의 마지막 코스인 어화원으로 이동한다.


경화문(景和門)을 통과하면


드디어 마지막인 고궁의 화원으로 통하는 통로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