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일본답사 기본상식

일본답사 기본상식 1 : 지역과 역사

同黎 2018. 7. 27. 05:14

일본답사 기본상식

 

박세연

1. 지역과 지명


 어느 나라건 그 나라를 파악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와 지역입니다. 그중에서도 지역과 지명은 그 나라를 파악하는 가장 기초적인 자료가 됩니다. 가장 먼저 일본의 지리에 대해 살펴보면서 일본이라는 나라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1. 일본의 지역구분



일본의 지역의 북쪽에서부터 홋카이도(北海道), 도호쿠(東北), 간토(関東), 주부(中部), 간사이(関西), 주코쿠(中国), 시코쿠(四国), 규슈(九州), 오키나와(沖繩)로 나누어집니다. 이중 주부지방은 동해 방향과 태평양 방향의 문화가 너무 달라 나고야를 중심으로 한 도카이(東海) 지방과 가나자와를 중심으로 한 호쿠리쿠(北陸)지방, 니가타를 중심으로 한 고신에쓰(甲信越)지방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간사이 지역은 수도인 교토 인근의 교토부, 나라현, 시가현, 오사카부 등을 합쳐 긴키(近畿)지방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또한 단순히 도쿄를 중심으로 한 동일본과 오사카, 교토를 중심으로 한 서일본, 그리고 규슈를 중심으로 하는 독자적인 세 덩어리의 문화권으로 묶기도 합니다.

일본사의 시작은 규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문명과 권력은 점차 규슈에서 서일본으로 이동하였고, 문자로 기록된 역사시대에는 완전히 서일본 그 중에서도 간사이 지방이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도 떠오릅니다. 규슈는 독자적인 문화권으로 존재했고, 그러면서도 그 무역경로상의 중요성에 따라 중앙정부에서는 다자이후(大宰府)라는 직속 관청을 설치해 규슈를 통제하려 하였습니다.

교토를 중심으로 한 귀족정치에 반발하는 무사정치는 중심을 동일본으로 옮겼습니다. 상대적으로 산지가 많아 개발이 덜 되었던 간토지방은 중세를 거치면서 발전하고 에도시대에는 완전히 서일본을 압도합니다. 역사적, 문화적 깊이를 자랑하는 간사이지방의 자부심은 대단한 데, 특히 교토인들은 자부심이 대단하여 공식적인 천도(遷都)가 없었으므로 아직도 수도가 교토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습니다. 반면 도쿄를 중심으로 한 간토 사람들은 간사이인들을 시대에 뒤떨어진 촌스러운 사람이라고 폄하합니다. 이 두 지역의 지역감정은 대단합니다만 그것이 한국처럼 정치적 지지 정당의 차이로까지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주부지방은 간사이와 간토의 연결통로 역할을 하였고, 근대 나고야의 공업이 발전하기 전에는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습니다. 시코쿠와 주코쿠는 아직도 일본에서 시골로 여겨지며 히로시마 정도를 제외하고는 큰 도시가 적은 편입니다. 정치에서 소외되었던 규슈, 시코쿠, 주코쿠에서 에도막부를 반대하고 근대화를 추진한 세력이 나타났다는 것은 흥미로운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도호쿠 지방 홋카이도, 오키나와는 엄밀히 말하면 오랫동안 일본이 아니었습니다. 오키나와에는 류큐왕국이 성립하여 오랫동안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근대에 강제로 합병됐습니다. 2차 대전 과정에서 본토인들에 의해 희생이 강요되었고 이후에도 한동안 미국령이 되어 본토와는 지금도 큰 이질감을 가지고 있으며 독립운동의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려옵니다.

도호쿠와 홋카이도는 오랫동안 미개척지였습니다. 이곳에는 본래 동일본 지역에서 살다가 일본인에 의해 쫓겨난 아이누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오랑캐라는 의미의 에미시라고도 불리는데 백인을 닮았지만 사실은 고()아시아인에 속합니다. 도호쿠지방의 북부는 에도시대에 와서야 완전히 복속되었으며, 홋카이도의 경우 오랫당안 존재 자체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일본의 창세 신화에서는 일본의 큰 섬으로 혼슈(本州)와 시코쿠, 규슈만이 언급되며, 홋카이도가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입니다.

 

1-2. 쿠니()와 한()과 켄()


일본의 행정구역 상 가장 큰 단위는 도도부현입니다. 이 도도부현은 한국의 도와 시군구의 중간 정도 되는 크기입니다. 행정구역이 이렇게 정리된 것은 고대 율령제 국가일 때 만들어진 행정구역인 쿠니() 때문입니다. 율령제 국가의 이상에 따르면 왕토사상에 따라 모든 백성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며 각 쿠니에는 국사(國司)가 파견되어 백성들로부터 부세를 걷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물론 실제 이렇게 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일본에는 최대 66개의 쿠니가 설치되어 지방행정을 담당했습니다. 시코쿠(四国)와 규슈(九州)라는 지명도 각각의 섬에 쿠니각 각각 네 개와 아홉 개가 있었다는 데에서 유래한 명칭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쿠니는 나중에 무사정권이 들어서서 각기의 영주들이 설치하는 한()의 기본 경계가 됩니다. 앞으로는 익숙한 번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번의 이름 역시 쿠니에서 유래한 것이 많습니다. 그리고 번에서 만들어진 명칭이 지금의 일본 도시의 명칭으로 굳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번은 에도시대 261개에 이릅니다.

그러나 메이지유신 이후 번을 폐지하고 현을 설치하는 폐번치현(廃藩置県)의 조치게 취해지면서 많은 번은 1(), 1(), 2(), 43()으로 정리됩니다. 이때의 폐번치현으로 쿠니와 번에서 쓰였던 많은 지명이 사라지게 되고, 그 지역의 대표하는 도시명이 행정구역명으로 바뀌게 됩니다. 오사카부, 교토부, 나라현 같은 지명은 원래 없었던 것이 새로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지방색이 강한 일본의 지역은 쉽사리 예전의 쿠니에서 쓰였던 지명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철도역이나 기초자치단체의 이름에는 옛 쿠니나 번에서 쓰였던 명칭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교토부에는 야마시나(山城), 시가현에는 오미(近江), 나라현에는 야마토(大和), 오사카부에는 셋츠(摂津), 카와치(河內), 도쿄에는 무사시(武蔵) 등의 지명이 많이 쓰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일본 답사를 다닐 때 어색한 느낌을 받게 되는데, 과거의 지명이 그대로 쓰이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2. 시대구분


지역을 살펴본 후 다음으로 일본의 역사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일본의 역사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정리하면서 동시기 한국사와 비교해보면 시대 이해에 조금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일본의 선사시대는 구석기시대에서 고훈시대까지 지속됩니다. 이 시기에는 믿을 수 있는 일본의 역사기록이 없고, 다만 중국의 사서에 부분적으로 등장할 뿐입니다. 그리고 일본서기(日本書紀)고사기(古事記)에서는 일본의 천황가를 만세일계(萬世一系)라 하여 한 번도 혈통이 교체된 적이 없다고 서술하며, 현대 일본사가들도 중국 측의 기록과 일본의 역사서에 등장하는 천황을 일치시키려 하지만 실제로는 혈통이 최소 3번 이상 교체되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우리가 문헌상으로 믿을 수 있는 자료가 등장하는 역사시대는 아스카시대에서 시작됩니다. 이 시기부터 에도시대까지 일본의 시대구분은 정치의 중심지가 되는 지명으로 결정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아스카시대부터 헤이안시대까지를 고대, 무사정권이 시작되는 가마쿠라시대부터 무로마치시대를 중세, 안정된 무사정권이 완성되는 에도시대를 근세로 구분합니다.

이후 서양을 만나 메이지유신을 거쳐 군국주의 국가로 거듭났다가 패전 이후 지금까지 지속되는 시기가 근현대입니다. 이 시기부터 천황을 평생동안 하나의 연호(年號)만을 사용하는 일세일원(一世一元)제가 시행되기에 시기구분을 연호로 합니다. 이중 2차 대전 패전 이전의 시기를 근대로, 패전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시기를 현대로 구분합니다.

아래에서는 따로 다룰 근현대사를 제외 한 나머지 시기를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여기서 언급한 사건과 인물은 일본을 답사할 때 알아야 할 최소한의 인물들로 이들과 얽힌 장소와 문화재가 대부분의 답사지를 차지합니다.


2-1. 선사시대

 

조몬시대(縄文時代) [신석기시대]

기원전 14000~ 기원전 10세기(지역에 따라 기원전 300): 한국의 고조선~삼한시대

동해가 아직 땅이었던 시기 일본의 구석기문화는 한반도와 비슷하게 진행됩니다. 그러나 아직 대륙부와 구분되는 뚜렷한 특징은 보이지 않는데, 기원전 약 1만년 전 빙하기가 끝나고 동해에 물이 차 일본이 대륙에서 분리되면서 독자적인 신석기 문화가 발전합니다. 이 신석기문화는 독특한 토기로 대표되는데, 이것이 바로 조몬토기입니다. 조몬은 승문(縄文), 즉 새끼줄무늬 토기를 말합니다. 토기 표면에 새끼줄로 누른 듯한 무늬가 있는 토기 인데, 이것이 점차 발전하여 불꽃모양을 형상화한 토기와 우주인과 비슷해 보이는 토우(土偶) 등 정교하교 독특한 토기문화를 형성합니다. 이러한 조몬시대는 외부로부터 유입된 도래인들에 의해 종말을 고합니다.

 

야요이시대(弥生時代) [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

기원전 3세기 ~ 기원후 3세기 : 한국의 삼한시대~삼국시대 초기

야요이시대는 도쿄시 야요이쵸의 패총에서 발견된 토기를 야요이토기로 부르던 데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조문토기와는 전혀 다른 야요이토기를 사용하는 문화권을 이르는 말입니다. 화려한 조몬토기와는 달리 야요이토기는 무늬가 없거나 적은 민무늬 토기가 주를 이룹니다. 조몬시대의 일본인이 대륙으로부터 분리되어 고립된 생활을 했던 것과는 달리, 야요이시대의 일본인은 시베리아, 한반도, 폴리네시아 등에서 일본 열도로 건너온 이들로 이들은 청동기를 사용하고 농경을 하고, 무덤을 만들며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갑니다. 야요이시대 새롭게 등장한 이들을 도래인(渡來人)이라고 부릅니다.

도래인의 대부분은 한반도인이라고 생각됩니다. 다만 한반도인도 북방계와 남방계로 나누어지는 만큼 무조건 한반도인이 일본으로 건너가 새로운 문화를 전파해주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아무튼 야요이시대에 일본은 금속을 사용하고 농업을 하면서 기존의 소규모 공동체를 뛰어넘어 작은 나라들을 만들고, 이것이 고훈시대로 연결되게 됩니다. 이러한 도래인의 소규모 국가 건설은 규슈에서 시작하여 점차 간사이 지방으로 확대되고 간토 지방에 이르기까지 확인되는데, 일본서기에 초대 천황인 진무천황의 정벌이 규슈에서 시작하여 지금의 나라현으로 이어지는 것과 대략적인 맥이 일치한다는 데에서 주목할만 합니다.

 

고훈시대(古墳時代)

3세기 중반 ~ 7세기 말(혹은 250~ 538) : 한국의 삼국시대

고훈시대는 말 그대로 고분(古墳)들의 시대입니다. 이 시기에는 일본의 여러 지역에서 거대한 규모의 고분들이 등장합니다. 그중에서도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것은 열쇠구멍 모양으로 생겼으며, 앞은 둥근 원부분이고 뒤는 네모졌고, 사방에 물로 만든 일종의 해자를 둘러 놓은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입니다.

이 시대를 역사시대로 볼 것인지, 선사시대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위에서 고훈시대의 연대가 다른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일단 일본서기같은 일본 측의 기록은 신화와 역사가 혼재되어 있어 그대로 인용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이 시기 삼국지(三國志)등 중국 사서(史書)에 왜()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여 이를 둘러싼 논쟁이 많습니다.

중국 사료에 따르면 일본에 야마타이국(邪馬台国 사마대국)이 있으며 여기에 히미코(卑彌呼 비미호)라는 여왕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예전 일본 학자들은 히미코를 조선을 정벌했다는 신공황후(神功皇后)와 동일시 하기도 했습니다. 그 밖에 중국 사료에는 중국(남북조시대)의 여러 왕국에서 왜왕으로 책봉을 받았다는 다섯 명의 왕이 등장합니다. 이 다섯 왜왕 역시 일본학자들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천황 다섯 명을 비정하지만 이들이 실존했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과연 이것이 맞는지는 의문입니다. 오히려 고대 일본은 통일된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여러 개의 지역 소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고훈시대를 거치며 어느 순간 호족들이 연합하여 규슈에서 지금의 나라지방으로 이동해 야마토(大和 혹은 )정권이라는 불리는 비교적 중앙집권적인 새로운 정권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이 야마토 정권의 수장은 오키미 즉 대왕(大王)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백제, 신라, 가야 등 한반도 남부의 나라들과 밀접하게 교류하고 대립하며 점차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습니다.

 

2-2. 고대(古代)

 

아스카시대(飛鳥時代)

6세기 후반 ~ 8세기 초반 : 한국의 삼국시대 ~ 삼국통일 직후

아스카시대는 야마토 정권이 아스카에 수도를 만들고 궁전을 지으며 한반도의 중국의 문화를 활발하게 전수받던 시기입니다. 일반적으로 아스카시대의 시작은 쇼토쿠태자(聖徳太子)의 불교 수용으로 잡고 있습니다. 당시 백제의 성왕(聖王)이 일본에 불상과 경전을 보내면서 일본에 불교가 처음 공인되는데, 이를 두고 일본 고유의 종교(후일의 신도)를 고수하는 세력과 불교 공인을 요구하는 세력이 전쟁을 벌입니다. 쇼토쿠 태자는 불교 공인을 적극 주장하며 결국 전쟁에서 승리해 섭정으로 즉위하고 백제대사(百濟大寺), 호류지(法隆寺 법륭사) 등 수 많은 사찰을 창건합니다. 이 과정에서 백제계 도래인으로 추정되는 소가씨(蘇我氏) 일족이 세력을 잡게 됩니다.

쇼토쿠태자는 당시 중국의 수나라 (후일의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들은 견수사(遣隋使), 견당사(遣唐使)라고 합니다. 이들 사신은 당나라가 망하기 직전인 9세기까지 계속되며 불교, 유교, 한문, 율령 등 중국의 법률과 문화를 받아들였고, 무역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쇼토쿠태자 사후 세력을 계속 확장하여 왕족의 세력까지 위협하는 소가씨를 제거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다이카개신(大化改新 대화개신)입니다. 다이카개신 이후 일본의 지배자는 드디어 대왕(大王)에서 천황(天皇)을 칭하게 됩니다. 천황이라는 호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당나라 고종(高宗)이 스스로 천황을 칭한 바 있고, 그 호칭을 일본에서 차용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또한 왜()라는 명칭을 대내외적으로 버리고 일본(日本)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게 됩니다. 이는 일본의 자신감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다이카개신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이카개신 이후 천황은 불교를 국교로 하고 율령제를 정치의 기틀로 삼는 중앙집권적 국가를 건설합니다. 이는 아스카시대를 거치며 일본이 기존의 호족연합적 정권에서 군주를 중심으로 하고 법률로 통치되는 중앙집권적 국가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쿠호시대(白鳳時代)

645~ 710

아스카시대를 나누어 다이카개신 이후에서 헤이조(平城, 현재의 나라)로 천도하기 이전의 60년 가량을 하쿠호시대로 따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하쿠호(백봉)이라는 것은 다이카개신 이후의 연호에서 유래한 용어입니다. 그러나 이는 역사학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미술사나 건축사에서만 쓰이고 있습니다. 아스카시대 후기 불교미술과 건축이 화려하게 꽃피고, 일본의 미술이 단순한 모방에서 벗어나 고유의 창조를 시도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미술사적으로는 크게 주목받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나라시대(奈良時代)

710~ 794: 한국의 통일신라 초기

일본은 기본적으로 천도(遷都)를 자주 하였습니다. 지금은 대도시가 된 고베, 오쓰, 오사카 등은 모두 한번 이상 일본의 수도 역할을 했던 도시입니다. 그 중 겐메이천황(元明天皇)이 헤이조쿄(平城京) 즉 지금의 나라(奈良)로 천도하면서 아스카시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화려한 나라문화가 펼쳐집니다. 나라시대는 불과 80년이 조금 넘는 짧은 시기였지만 하나의 시대로 자리 잡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나라로의 천도는 후지와라씨로 대표되는 귀족의 탄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본래 천황가는 족내의 근친혼만 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러나 다이카개신의 주역 중의 하나였던 후지와라노 가마타리(藤原鎌足)의 아들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不比等)가 자신의 두 딸을 천황과 결혼시키고 그 자손을 다시 천황의 자리에 앉히는데 성공하고 외척이 되어 중요한 귀족가문이 됩니다. 애초에 나라는 바로 이 후지와라씨가 오랫동안 살아오던 곳이었습니다. 후지와라씨는 이후 조정의 주요 관직을 거의 독점하는데, 이들의 영향력은 무려 천년을 넘게 가서 에도막부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나라 천도 직전 백제가 망하고, 백제의 많은 유민들이 일본으로 흘러들게 됩니다. 백제의 왕족을 비롯한 이들은 일본에서 성씨를 하사 받고 정착하여 일본문화의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합니다.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不比等)는 일본의 각종 지역 신화와 가문 신화를 종합하고 백제의 역사서를 참조하여 일본서기라는 첫 일본의 관찬(官撰) 역사서를 펴냅니다. 이로써 일본은 일본이라는 정체성을 처음으로 형성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나라시대에는 무수한 명품이 태어났지만 그 정점은 바로 도다이지(東大寺)의 대불(大佛) 조성이었습니다. 도다이지와 대불의 조성은 국가적 사업으로 진행되었고 전국에서 비용을 마련하였으며 국가기관이 설치되기도 합니다. 그 결과 탄생한 대불은 이후 많은 화재로 불타고 재건되지만 나라시대의 상징으로 남아있습니다. 도다이지는 단순히 수도에 위치한 큰 절일뿐만 아니라 전국 사찰의 중심 역할을 하였습니다. 도다이지를 중심으로 전국의 지방마다 고쿠분지(國分寺)가 세워져 불교가 지방세력에게까지 보급되었습니다.

한편 도다이지 대불전 뒤편에 위치한 황실의 보물 창고인 정창원(正倉院 쇼소인)에는 일본뿐만 아니라 당, 신라, 발해에서 생산된 물건들이 고스란히 남아 당시 일본의 활발한 교류상을 보여줍니다.

 

덴표시대(天平時代)

729~ 749

나라시대 중 도다이지 등을 만들며 특히 불교문화에 심취해 있던 쇼무천황(聖武天皇)의 재위기간을 덴표시대라고 합니다. 이는 천평(天平)이라는 당시의 연호에서 유래한 명칭입니다. 이 시기엔 당나라와 신라 문화가 왕성히 유행하여 아스카시대를 탈피하여 화려한 나라문화를 완성시켜갑니다. 다만 역사학적 시대구분으로는 사용되지 않고, 미술사에서만 통용됩니다.

 

헤이안시대(平安時代)

794~ 1185 혹은 1192: 한국의 통일신라 중기 ~ 고려 중기

나라에서 일본 문화는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불교세력의 지나친 확장과 후지와라씨를 필두로 하는 귀족세력은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율령국가에는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794년 간무천황(桓武天皇)은 수도를 헤이안쿄(平安京) 즉 지금의 교토(京都)로 옮기고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를 펼치려고 시도합니다. 그후로 약 400년간 교토를 중심으로 천황과 귀족, 그리고 승려세력이 때로는 대립하고 때로는 협력하는 헤이안시대가 펼쳐집니다. 그리고 교토는 메이지유신 이전까지 약 1200년간 수도의 위치를 지키고, 그 후에 도쿄에 그 지위를 넘겨주게 됩니다.

헤이안시대는 400년간 매우 길게 지속되었지만 그 정치적 변화는 매우 많았습니다. 그래서 보통 헤이안시대는 1~4기의 네시기로 나누며 그 중에서도 3기는 후지와라시대로, 4기는 원정기로 별도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사세력인 다이라씨(平氏)와 미나모토씨(原氏)의 투쟁이 일어나는 겐페이(原平) 전쟁기를 헤이안시대로 보기도, 이후의 가마쿠라시대로 보기도 합니다.

 

1기와 2

794~ 969: 한국의 통일신라 중기 ~ 후삼국시대와 고려 초기

헤이안시대 초기는 헤이안 천도의 의도대로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율령국가의 틀을 지켜나가기 위해 노력합니다. 특히 불교세력의 융성을 막기 위해 수도인 교토에는 동과 서에 단 하나씩 즉 단 두 개의 사찰만 지을 수 있도록 허가해 승려세력의 발호를 막으려고 노력합니다. 특히 교토로의 정착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2기는 엔기덴랴쿠(延喜天曆)의 치세라 하여 당나라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 독자적 일본의 귀족문화가 완성되는 시기입니다. 엔기덴랴쿠의 치세에는 일본서기의 후속작이라고 할 수 있는 속일본서기, 일본삼대실록등이 서술되고, 율령이 재정비되며 고금와카집과 같은 일본 고유의 시집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한자를 변형시킨 일본의 문자인 가나가 정비됩니다. 문학도 발전하면서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와 같은 귀족적, 여성적 취햐의 소설이 쓰여집니다. 이때 일본은 무너져가는 당나라를 보고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판단 아래 견당사를 폐지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을 국풍(國風)문화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도 균열은 계속 생깁니다. 중국의 유학승들이 천태종과 진언종을 들여와서 새로운 사원을 세우면서 기존의 불교사원과 대립이 일어납니다. 또한 왕토사상을 통해 토지를 독점하고 지방을 직접 통치하려는 국가의 시도가 번번이 좌절되는 가운데 귀족세력이 서서히 천황권을 위협해가기 시작합니다.

 

3: 후지와라시대(藤原時代)

969~ 11세기 말 : 한국의 고려 전기

헤이안시대 3, 천황을 위협했던 것은 오랫동안 천황가의 외척으로 권력 가까이 있었던 후지와라씨입니다. 9세기 말부터 이미 후지와라씨는 다른 가문이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특히 969년 이래 모든 천황은 후지와라씨를 외가로 하게 됩니다. 이로써 969년부터를 후지와라시대라고 합니다.

후지와라씨의 득세는 율령제를 와해시키게 됩니다. 후지와라씨를 위해서 율령에 규정된 최고직인 태정대신(太政大臣) 위에 새로운 다른 관직이 상설화된 것입니다. 이 관직이 바로 섭정(攝政)과 관백(關伯)입니다. 섭정은 천황이 성인이 되기 전 천황의 역할을 대리하는 자리이고, 관백은 천황이 성인이 된 후에도 천황을 도와 정무를 처리하는 자리입니다. 특히 이 두 자리는 천황에게 올라가는 문서를 미리 살피고, 또 천황이 내리는 문서를 공포 전에 살필 수 있는 막강한 자리였습니다. 후지와라씨는 이 섭정과 관백의 자리를 독점하였고, 결국 메이지유신 이전까지 후지와라씨가 이 자리를 독점하게 됩니다. 후지와라씨는 교토를 중심으로 수 많은 사찰과 신사를 건리하여 헤이안 문화의 융성기를 가져옵니다.

한편 후지와라씨는 전국에 장원(莊園)을 만들어 이 땅을 경제적 소득원으로 삼습니다. 이로써 평민의 토지소유는 거의 사라지고 전국의 토지는 황족과 귀족, 그리고 사원에 의한 농장으로 귀속됩니다. 또한 지방에 위치한 장원을 관리하기 위해 황족이나 귀족의 서출이나 지방 유력가문으로 구성된 무사세력을 끌어들임으로써 무사세력이 점차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4: 원정기(院政期)

1086~ 1156: 한국의 고려중기

후지와라씨의 독주가 계속되자 천황가는 권력을 쟁탈하기 위해 새로운 방식을 개발합니다. 바로 이는 원정(院政 인세이)라는 것입니다. 어린 자식에게 천황의 자리를 일찍 물려주고 자신은 상황(上皇)이 되어 권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이는 율령이나 오랜 귀족정치로 생긴 많은 관습에서 벗어나 권력을 휘두르기 위해서였습니다. 때문에 당시 일본에는 천황과 상황, 명목상의 임금인 미카도()와 실제 권력자인 치천의 군주(治天)라는 두 명의 임금이 존재하였습니다. 또 상황 중에는 승려 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출가하여 법황(法皇)이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상황과 천황의 권력 투쟁이었습니다. 천황이 아무리 허수아비라도 후계자 지명권은 있었기에 자신도 어서 퇴위하여 허수아비 천황을 세우고 권력을 손에 넣으려고 시도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면서 상황이 여러 명이 생기고, 상황과 상황, 상황과 천황과의 투쟁이 계속되고, 부자간, 형제간의 싸움도 빈번해졌습니다. 이 권력투쟁의 과정에서 실제 물리력을 행사하기 위해 각 세력은 무사세력인 다이라씨(平氏)와 미나모토씨(原氏)를 끌어들이고 정치투쟁의 대가로 토지나 무역권을 하사하면서 무사세력이 막강하졌습니다.

 

다이라씨(平氏)의 권력 장악과 겐페이(原平)전쟁

1156~ 1192

1156년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스토쿠상황(崇徳上皇)과 고시라카와천황(後白河天皇)의 대립이 무력투쟁으로까지 번진 호겐의 난(保元)이 일어나면서 다이라씨(平氏)와 미나모토씨(原氏)가 귀족가문을 위협하는 무사가문으로 성장하고 뒤이어 두 가문의 다툼인 헤이지의 난(平治)에서 다이라씨가 승리하면서 다이라씨의 수장인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清盛)는 무사로는 최초로 태정대신의 자리까지 오릅니다. 그러나 귀족화되어 무사의 본질을 잃어버린 다이라씨는 수년 후 재기한 미나모토씨에 패배하고 결국 미나모토씨의 수장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가 쇼군(將軍)의 자리에 오름으로써 390년간 지속된 헤이안시대는 막을 내립니다.

 

2-3. 중세(中世)

 

가마쿠라시대(鎌倉時代)

1185년(혹은 1192년) ~ 1333: 한국의 고려 후기

가마쿠라시대는 최초의 막부가 지금의 간토지방인 가마쿠라에 설치됨으로써 시작됩니다. 본래 쇼군의 정식명칭은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으로 에미시()라고 불리된 도호쿠지방의 일본 원주민을 정벌하기 위해 설치된 임시직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마쿠라시대 이후 쇼군은 교토의 귀족계급 즉 공경(公卿 구게)와 대비되는 무사계급을 통솔하는 위치로 격상됩니다.

초대 쇼군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는 유배되어 있던 중 처가인 호조씨(北条氏)의 도움을 받아 동일본의 무사들을 규합하여 다이라씨를 물리치고 최고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는 귀족화되어 결국 패배한 다이라씨의 사례를 경계하고 교토에 있는 천황과 귀족들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해 막부를 간토지방의 한구석에 있던 가마쿠라에 세워버립니다. 그렇게 무사의 시대가 열리면서 경제권 역시 이동하게 됩니다.

천황가나 귀족, 사원의 장원을 관리하기 위해 파견한 무사계급인 슈고(守護)는 가마쿠라 막부 시대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하고 막부에 충성을 다짐함으로써 자신의 세력을 인정받았습니다. 막부는 지방에 있는 슈고들의 세력을 인정하고 이들로부터 진상을 받아 무사들을 지휘했습니다. 토지를 상실한 천황과 귀족들은 막부의 지원에 의지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토지를 매개로 하는 봉건사회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한편으로 가마쿠라시대에는 중국으로부터 선종이라는 새로운 경향을 불교가 유입됩니다. 선종은 삶과 죽음에 초연해야 하는 무사들에게 큰 각광을 받게 되었고, 전국에 무사의 후원을 받은 선종사찰이 급속하게 늘어나게 됩니다. 평민들은 쉽게 극락왕생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정토종계 불교에 빠져들어 정토종과 정토진종, 융통염불종 등의 크게 확산됩니다.

 

겐무신정(建武新政)과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1333~ 1392: 한국의 고려 말기

가마쿠라막부는 곧 위기에 봉착합니다. 특히 더 이상 나누어 줄 토지가 부족하면서 지방의 무사들을 통제할 능력이 점차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원나라의 일본 침략은 외부에 의한 최초의 일본 침략이었습니다. 비록 카미카제(神風)이라는 태풍의 덕으로 원나라와 고려 연합군은 물리쳤지만 문제는 전승(戰勝)의 대가로 나누어줄 토지가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막부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고 천황의 친정(親政)을 위한 시도가 있었습니다.

1318년 황위에 오른 고다이고천황(後醍醐天皇)은 가마쿠라막부의 토벌을 명하고 이에 여러 무사들이 호응하여 마침내 막부가 무너집니다. 고다이고천황은 천황과 귀족에 의한 헤이안시대식의 복고정치를 추진하는데 이것이 약 2년간 지속된 겐무신정입니다.

그러나 이미 무사가 역사의 주인공이 된 상태에서 무리한 복고정치는 오래갈 수 없었습니다. 가마쿠라막부를 토벌할 때 큰 공을 세웠던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가 반란을 일으키고 이에 고다이고천황은 교토 남쪽의 요시노(吉野)로 도망갑니다. 이에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교토에서 독자적인 천황을 세우고, 고다이고천황은 천황의 삼종신기를 가지고 또다른 정부를 운영합니다. 고다이고천황의 정부를 남조(南朝), 아시키가 다카우지의 정부를 북조(北朝)라고 하며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손자가 남조를 흡수해 북조를 중심으로 천황가를 통일할 때 까지를 남북조시대라고 합니다. 그러나 남북조 통일 전에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쇼군직을 받기 때문에 이를 기점으로 하는 무로마치시대와 남북조시대는 일부 시기가 겹치게 됩니다.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

1336~ 1573: 한국의 조선 전기

고다이고천황을 몰아낸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쇼군에 올라 교토에 머뭅니다. 이어 그의 손자이자 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는 남북조를 통일하고 교토 무로마치거리에 쇼군의 대저택을 세우는데 이에 따라 이 시대를 무로마치시대라고 합니다. 가마쿠라시대와 달리 쇼군이 교토에 머문 이유는 교토에 있던 천황과 귀족(공경)들을 감시하고 이들의 활동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남북조를 통일한 무로마치막부는 교토의 귀족문화와 무사들의 문화, 그리고 선종의 문화까지 합쳐 새로운 화려한 문화를 만듭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문화재가 바로 교토의 금각사와 은각사입니다. 특히 무로마치막부는 오랫동안 중지되었던 중국과는 공식 외교관계를 재개하여 명나라와의 무역을 활발히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막부의 안정기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후계자 문제였습니다. 후계자의 선정에 외가의 입김이 너무 많이 들어가고 결정이 지지부진하여 심지어 제비뽑기로 쇼군을 뽑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자 자연히 쇼군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명과의 외교를 재개하는 과정에서 천황을 무시하고 쇼군이 일본국왕(日本國王)에 책봉되면서 불만도 재기되었습니다. 결국 안정된 상황은 남북조 통일 후 100년을 가지 못하고 불안정기에 접어듭니다. 그러던 중 쇼군의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오닌의 난과 그 이후 전국시대에 이르러서 쇼군은 명목상의 자리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오닌의 난(応仁)

1467~ 1477

오닌의 난은 무로마치막부의 후계자 계승문제를 둘러싼 내전이었습니다. 그 과정은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일일이 설명하기 어렵지만 간단히 정리하면 권위가 실추된 쇼군자리를 둘러쌓고 벌어진 쇼군가의 가신집안인 호소카와씨(細川氏)와 야마나씨(山名氏)의 전쟁이었습니다. 이 두 집안은 모두 슈고(守護) 출신이었는데, 토지에 대항 장악력을 높여 영주가 되어씁니다. 이런 이들을 슈고 다이묘(守護大名)라고 합니다. 이제 토지를 기반으로 하여 각지에서 각자의 세력을 자랑하는 다이묘(大名)들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오닌의 난은 승자가 없는 싸움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승자 없는 막부의 분해였고, 쇼군의 지배력이 사라진 상황에서 각지의 다이묘들이 제각기 세력화해 들고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전국시대의 시작입니다. 한편 오닌의 난은 천년의 수도였던 교토를 불태웠습니다. 시가전으로 인해 교토의 90%가 불탔다고 합니다. 지금도 교토에는 오닌의 난 이전에 세워진 건물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전국시대(戦国時代)

1467~ 1573

오닌의 난으로 무너진 질서는 곧 극도의 무질서한 시대로 이어집니다. 이 시기대를 일본은 전국시대라고 합니다. 센코쿠시대라 읽는 전국시대라는 명칭은 바로 중국 춘추전국시대에서 따온 말입니다.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차이점은 명분의 여부였습니다. 명목상으로라도 왕도를 따랐던 춘추시대와는 달리 전국시대는 너도 나도 왕을 칭하면서 자신의 패권만을 추구합니다. 이러한 하극상의 시대가 일본에 재현되었기 때문에 전국시대라는 용어를 쓰는 것입니다.

전국시대에는 각 무사가문이 특정 지역을 차지하여 다이묘가 되었습니다. 비교적 전통이 있던 슈고 다이묘 외에 다이묘의 방계 혹은 가신 가문이나, 무사가 아닌 평민 출신으로 다이묘가 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데 이를 센코쿠 다이묘(戦国大名)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바늘장수에서 관백까지 올라간 도요토미 히데요시입니다.

전국시대는 정치적 역동성은 있었지만 별다른 문화적 성과는 내놓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일백년간 숨죽이고 있었던 일본의 문화적 저력은 정국이 안정된 아즈치모모야마시대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 활짝 꽃피게 됩니다.

 

2-4. 근세(近世)

 

아즈치모모야마시대(安土桃山時代)

1568~ 1603: 한국의 조선 전기 ~ 임진왜란 직후

수백 개의 가문이 싸우던 전국시대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 의해 무로마치막부의 마지막 쇼군이 쫓겨나면서 종말을 맞게 됩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등과 천하통일을 놓고 경쟁하다가 결국 규슈와 주코쿠를 제외한 대부분의 일본을 정복하게 됩니다. 그는 거점을 간사이와 간토의 길목에 있는 아즈치성(安土城)에 마련합니다.

그러나 오다 노부나가는 부하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가 일으킨 혼노지의 변(本能寺)으로 살해당하고 그 가신이었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가 천하의 패권을 쥐게 됩니다. 그가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입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불안한 후계문제를 놔두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상태에서 세상을 뜨고, 결국 세키가하라 전투()와 오사카 전투를 지나 도쿠가와 가문의 에도막부가 성립됩니다.

아즈치모모야마시대는 오다 노부나가의 아즈치성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모모야마성(桃山城)에서 따온 말입니다. 이 시기 주목되는 것은 특히 성곽 기술의 발전입니다. 전국시대 수많은 싸움을 거쳐오며 쌓아온 축성기술과 다른 다이묘에 대한 과시욕이 합쳐져서 오사카성, 나고야성, 히메지성, 구마모토성 등 많은 명성(名城)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다도(茶道)가 발달하고 임진왜란으로 건너온 조선 도공들에 힘입어 도자기 등 공예부분에 있어서 새로운 활기가 띄게 되었습니다. 또한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과 교류하며 이른바 남만(南蠻)문화라고 하는 새로운 문화가 유입되었습니다. 전쟁으로 소실된 사원을 재건하는 일도 잦아지면서 많은 건축들이 생겨나게 되면서 전국시대 동안 잠들어있던 여러 문화가 짧은 기간 안에 한꺼번에 폭발하듯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에도시대(江戸時代)

1603~ 1867: 한국의 조선후기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초대 쇼군이 된 에도막부는 265년간 지속된 안정된 막부였습니다. 에도막부는 가마쿠라막부의 예에 따라 간사이 지방을 버리고 간토 지방을 근거지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크기가 작았던 가마쿠라가 아니라 바다가 가깝고 또 상대적으로 넓은 면적의 에도를 새로 개발하면서 무사의 기풍을 지키는 동시에 인구의 증가와 상업의 발전을 염두에 둔 결정이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국의 다이묘들의 영토를 무시하고 이들을 재배치합니다. 교토와 나고야, 오사카 등 중요한 거점은 막부에서 직접 경영하며,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은 자신의 친족이나 오래된 가신들에게 영지로 나누어 줍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적대했던 다이묘들의 영지는 대거 몰수하고 그들의 지역적 기반을 없애기 위해 영지를 다른 곳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교대로 각 다이묘들을 에도로 상경시켜 막부를 호위하게 하는 참근교대(參勤交代)를 통해 이들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소모하게 하고 정기적으로 이들을 감시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백성은 인근 사찰에 등록하게 하여 단가(檀家)제도를 통해 호적을 관리하였습니다. 이로써 에도막부는 전국의 군사력을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중세 이후로 최고의 중앙집권적 정권을 탄생시켰던 것입니다.

아즈치모모야마시대와 에도시대는 중세가 아닌 근세(近世)로 분류됩니다. 이것은 도시 및 상업의 발전 때문입니다. 이 시기에는 전국의 주요 교통 거점에 성을 쌓고 그 성 아래에는 성에 물건을 공급하기 위한 상인들과 공인들이 거주했습니다. 이러한 조카마치(城下町)의 발전으로 인해 상공인들은 사농공상의 신분질서를 뛰어넘어 상위 계층의 신분을 살 수 있는 능력까지 가지게 되었습니다. 특이 오사카 상인들은 해외와 교류하며 국제 무역시장의 한 부분을 차지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도시와 상업의 발전은 서양 근세의 모습과 비슷하기에 근세라는 시대구분을 하는 것입니다.

에도시대의 문화도 이에 따라 기존의 귀족과 무사문화 외의 부분에서도 발전했습니다. 상인들을 중심으로 한 서민문화는 기존의 고급문화를 흉내 내면서도 자체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풍속화와 연극의 발전, 다도의 대중화, 상업적 미술작품의 생산 등은 이러한 변화상을 보여줍니다. 에도시대는 오랜 전쟁 가운데 온 실로 반가운 평화였습니다.

 

막부말기(幕末)

1853~ 1867

그러나 오랜 평화 뒤에는 웨스턴 쇼크(Western Shock)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853년 미국 페리 제독이 개항을 요구한 흑선 사건은 오랫동안 평안했던 에도 막부를 뒤흔들었습니다. 당시 막부는 개항을 허락했는데, 이는 미국의 무력시위에 겁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한국의 강화도 조약과 같은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개항은 두가지 문제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개항의 결과 상대적으로 금 값이 싸고 은 값이 비쌌던 일본은 무역의 결과 많은 금이 빠져나가고 반대로 막대한 은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당시 일본 국내에서는 은을 화폐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은의 증가로 인한 은 가격의 하락은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일으켰습니다. 이는 대중적인 불만으로 연결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 천황의 허가 없는 조약은 막부의 반대세력에 있던 정치세력의 불만을 가져왔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정치에서 소외되었던 교토의 황족과 귀족, 즉 공경(公卿)과 에도막부에서 홀대 받았던 사쓰마번, 조슈번, 도사번 등이었습니다. 이들은 비록 막부의 지배 하에 있었으나 외국과의 교역 등을 통해 막대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막부가 그동안 고수했던 양이(攘夷)의 쇄국정책을 버리고 갑작스레 미국과 조약을 맺은 것은 좋은 구실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오랫동안 존재감 없이 있던 고메이천황(孝明天皇)이 쇼군을 교토로 소환했습니다. 양이의 약속이 어긋난 것인지를 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후계구도의 문제로 내부사정이 복잡했던 막부는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양이를 약속하는 한편 교토의 공경과 막부의 무사들이 합체하여 난국을 타개하자는 공무합체(公武合体)를 주장하였습니다. 반대파 중 비교적 온건해던 도사번의 중재 아래 결국 내전을 피하기 위해 에도막부의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는 권력을 천황에게 돌려준다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시행하고 곧 이어 쇼군의 자리마저 사퇴하면서 에도막부는 마침내 소멸하였고 신정부가 들어섭니다. 그러나 결국 막부군과 정부군의 내전인 무진전쟁(戊辰戰爭)이 일어나고 막부군이 패배하면서 메이지유신이 완성되게 됩니다. 이후 정치의 중심지는 에도 즉 도쿄로 이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