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일본 여행기 16차

일본횡단기 - 3일 교토 라쿠호쿠1 (미야케하치만구三宅八幡宮 한국병합봉고제비韓国合併奉告祭碑)

同黎 2020. 1. 30. 03:48



삼일째 아침

교토에 도착했다. 여기서 북쪽으로 간다.


어제 무리를 해서 그런지 컨디션이 좋지 않아 카드를 쓰기로 한다.


가는 길에 보이는 마에하라 세이지

무소속으로 살아남았다.

입헌민주당을 함께 지지하는 집인 모양


이와쿠라행 버스

택시를 타자마자 발견...


오늘의 첫 목적지인 미야케하치만구(三宅八幡宮)

한일병합조약 체결 후 세워진 한국병합봉고제비(韓国合併奉告祭碑)로 유명한 곳이다.

원래 신사가 위치한 이곳은 타카노(高野)로 오노씨(小野)의 영지였다. 전설에 따르면 스이코천황 당시, 견수사로 파견된 오노노 이모코(小野妹子) 규슈에서 병에 걸렸는데 우사신궁에서 기도하고 병이 나았다고 한다.

이후 돌아오는 길에 우사신궁의 하치만신을 권청해 자신의 영지에 세운 것이 이 신사라고 한다. 그러나

하치만신에 대한 신앙은 나라시대에 전국적으로 퍼지니 이 이야기가 맞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 근처에서

오노노 이모코의 아들 오노노 에미시의 묘지가 발견되어 오노씨와의 관련은 사실인 것으로 여겨진다.

본래 지금보다 남쪽에 있는 이타다신사의 말사로 세워졌으나 남북조시대 남조 충신인 코지마 타카노리의

신심으로 분리되어 미야케하치만구라는 이름의 독립 신사가 되었다. 미야케라는 이름은 이곳에 다이카

개신 당시 조정의 둔전 창고가 있었던 데에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이후 오닌의 난으로 전소되어

주민들의 힘으로 간신히 이어지다가 메이지시대 천황의 명으로 복구되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우사신궁에서 이와시미즈하치만구로 권청할 때 흰 비둘기가 안내했다는 데에서 고마이누 대신 비둘기를

모신다. 하치만신에 대한 여러 신앙이 있지만 이곳은 특히 자녀 양육과 해충 구제로 이름 높다. 충팔번이라

불릴 정도. 황실과도 인연이 깊이 메이지천황이 어릴 때 아플 당시 이 곳에서 기도해 병이 나았다고 한다.


옆 쪽으로 들어가는 길

작다


에마전이 보인다

이곳에 보관된 에마 133점이 중요유형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우리로 치면 중요민속문화재


멀리 사무소가 보인다.


작은 비석


배전

메이지시대 복구


한쪽에 에마를 전시하는데


시간이 없어 들어가진 못했다.


자녀 양육에 관한 에마 133점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앞마당에서 불 피우는 중


한가롭구만


배전 현판


멀리 보이는 본전과 중문


작은 신사다


한쪽에 있는 테미즈야


고마이누

메이지시대의 것


본전


작은 건물이다


메이지시대에 건설


본전에서 본 밖의 모습

바로 도리이로 나가서 비석을 찾는다.


안내문


설명했던 것과 같은 내용이 쓰여있다.


도리이 옆에 바로 한국병합봉고제비가 보인다.


사실 비석을 세운 주체는 별 거 아니다. 이 신사의 신관과 타카노 동네 주민들이 세운 것으로

이렇게 작은 마을에서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거창한 비석을 세웠는지 모르겠다.


전액 부분


1910년 한일병합을 기념하여 제사를 올리고 비석을 세운 것인데, 내용이 흥미롭다. 한일병합의 정당성을

일본서기 등에 나오는 천일창의 귀화, 신공황후의 삼한정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임진왜란을 차례로

들며 역사 속에서 찾고 있다. 한편으로는 역사 속에서 나라를 합병할 때는 전쟁을 거치는데

이번 병합은 평화롭게 이루어졌다고 칭송하고 있다.

일본 전국과 한국 내부에 이런 비석이 적지 않았을 것인데, 해방 이후 대부분 파괴되고 이렇게 남은 건

별로 없다. 동네 마을 신앙에 지나지 않던 신도가 제국주의를 위한 이데올로기로 사용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당시 일본 제국주의가 민중을 상대로 뿌린 이데올로기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옆에는 아마도 러일전쟁 승전비로 보이는 비석이 있다.

탄환을 박아넣은 비석


도리이의 현판


미야케하치만신사(삼택팔번신사)라는 현판


옆에는 비둘기 조각이 있다.


암수 한 쌍


신사 행사 예정판


신사는 공원처럼 조용하다.


신사 전경을 하나 찍고 이제 다음 장소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