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그 외

내포 지방 백제불상의 특징

同黎 2010. 1. 11. 19:28

충남지역 백제불상의 특징


- 서산마애삼존불, 태안마애삼존불, 예산화전리사면석불을 중심으로 -



1. 들어가며


백제의 정확한 세력권에 대해서는 많은 학설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당시 백제의 문화는 매우 발전하였고, 그 파급력도 매우 컸다는 것이다. 비록 백제의 첫 수도인 위례성의 위치도 최근 풍납동 유적의 발굴로 어느 정도 연구의 진척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고, 또 다른 도읍지인 웅진과 사비, 지금은 공주, 부여 역시 가시적인 흔적이 많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남아있는 유적, 유물이나 일본에 전래되고 있는 유물들을 보았을 때, 백제의 문화가 매우 세련되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충남지역은 백제 22대 문주왕 이래로 백제의 중심지였다. 백제의 가장 핵심적인 유물과 유적들이 이 지역에 많이 남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외침에 의해 멸망한 나라여서인지 정작 도읍지였던 공주와 부여 땅에는 백제의 걸작이 남아있지 않다. 특히 가장 화려하게 꽃피웠을 불상의 경우에는 발굴조사로 발견되는 소형의 금동불 이외에는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중국과의 교류 중심지였던 서산과 태안을 중심으로 예산까지 백제의 걸작이라 할 석불이 3구 남아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행운일 것이다. 이번 답사지 동선에 모두 포함되어 있는 3구의 불상을 중심으로 백제 불교조각의 특징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려 한다.

 

2. 충남지역 백제불상 개관


앞서 말했듯이, 충남지역은 백제의 수도와 중국과의 교역지가 위치한 지역으로 후기 백제의 핵심적인 지역이었다. 그리고 정작 도성에 남아있는 불교조각은 거의 없다. 발굴조사를 거쳐 출토되는 소형의 금동불, 석불들이 있을 뿐이고, 사찰에서 예배대상으로 조성되었다고 보여지는 대형 불상의 경우, 우리가 살펴볼 서산마애삼존불, 태안마애삼존불, 예산화전리사면석불이 전부이며, 이 외에 전북 익산지역에 연동리 석불좌상과 태봉사 삼존석불이, 정읍지역에 정읍보화리석불입상이, 그리고 충북 연기지역에 백제 멸망 직후 조성된 몇 개의 비상이 전해질 뿐이다. 그러므로 충남지역의 이 3 석불을 살펴본다는 것은 가장 세련되게 조성된 백제불상의 대표작들을 살펴본다는 의미가 있으며, 이를 통해 백제의 화려하게 꽃피웠던 문화를 다시 한 번 되짚어 볼 수 있어 의미가 크다가 하겠다.


2-1. 서산마애삼존불



백제 불상 중 가장 유명하며, 백제의 미소라는 별칭으로도 잘 알려진 서산마애삼존불은 보원사지와 멀지 않은 용현계곡 절벽에 새겨진 마애불이다. 1959년 처음 학계에 알려져 보고되었으며, 국보 84호로 지정되어 있다. 국보로 지정되고, 보호각을 세워 보존하였으나 통풍과 제습 등의 문제로 최근 보호각을 철거하였고, 본존불 상호 등에 생긴 균열을 보수한 후, 원래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서산마애삼존불의 위치적 특징은 이 지역이 태안반도에서 부여로 가는 길목이라는 점이다. 태안반도에서 마애불이 서있는 길을 따라 가야산 계곡을 따라가면 부여가 나오는데, 이 길은 오래전부터 중국과 교통하던 고로(古路)로 알려져있다. 당시 태안반도는 백제와 중국이 교류하는 중요한 지점이었는데, 이 지점에 마애불이 조성되었다는 것은, 이 마애불이 당시 중국과의 교류를 위해 이 지역을 왕래하던 이들의 소망을 담았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마애삼존불 이외에도, 이 길목에는 장승이 조성되어 있어, 이러한 추정에 힘을 실어준다. 삼존불이 학계에 보고된 것은 59년이나 이미 『호산록』에 삼존불에 대한 설화가 기록되어 있고, 삼존불이 있는 바위는 인(印)바위라 하여 상왕(象王)의 인(印)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있어, 이 지역 민초들로부터는 예로부터 존숭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산마애삼존불은 가운데 서있는 본존여래상과 보주를 들고 서있는 보살입상, 그리고 반가사유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구성은 매우 독특한데 아직까지 한국에서 똑같은 구성을 지닌 삼존불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 삼존불의 존명에 대해서는 석가, 미륵, 관음의 삼존불이라는 설과 석가, 관음은 맞지만 반가상의 미륵보살 여부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설, 법화경에 입각한 석가, 미륵, 제화갈라의 수기삼세불(授記三世佛)이라는 설 등이 있다. 학계의 통설은 석가, 미륵, 관음의 삼존불이라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문화재청의 안내판에는 석가, 미륵 제화갈라의 수기삼존불이라고 적혀있다.

서산마애삼존불은 태안마애삼존불 보다 시기가 다소 늦으며, 양식상으로 비슷하지만 약간 딱딱한 태안마애삼존불과는 달리 중후하지만 둥글고 부드러운 맛이 감도는 완숙한 경지의 조각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본존불의 유쾌한 웃음이나 아이 같은 좌우 협시 보살의 상호, 그리고 바위와 조화를 이루며 적절하게 양감이 느껴지는 조각의 깊이는 백제불상의 완성이라 해도 손색을 없을 정도이다. 앞서 말했듯, 중국 남북조와의 중요한 교통로에 새겨져있는 서산마애삼존불은 중국 남북조 말기의 양식을 띄고 있는데, 특히 본존불의 경우 북제(北齊) 불상에서 그 원류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날씬한 우협시의 봉주보살입상 역시 북제(北齊)의 영향이 보이며, 좌협시의 반가사유상은 그 유래가 없는 것으로 아이 같은 얼굴이 북주(北周)의 동형불(童形佛) 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북제나 북주, 수의 양식보다 훨씬 부드럽고 세련되어 있어, 백제 특유의 양식을 완성시킨 것으로 보인다.


2-2. 태안마애삼존불


태안 백화산에 큰 바위에 새겨져 있는 태안마애삼존불은 서산마애삼존불 보다 약간 앞선 것으로 지금은 태을암이라는 암자에서 관리하고 있다. 본래 보물 432호로 지정되어 오다가, 1995년 땅 속에 묻혀있던 하반부를 발굴조사하면서 그 중요성이 재발견되어 국보 307호로 승격 지정, 보호되고 있다. 바위 깊이 감실을 새겨 불상을 모셨으나, 감실 일부는 풍화작용으로 깨져 사라졌다.

태안반도가 위치한 내포 땅은, 백제의 고토회복을 위한 전진기지였다. 태안반도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만은 항구로는 최고의 입지였고, 가야산, 상왕산 등지의 풍부한 임야와 넓은 내포 평야는 충분한 전진기지로써의 역할을 하였다. 이 곳에서는 중국과의 교류가 매우 활발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태안반도에 있는 또다른 도시의 이름이 당진(唐津), 즉 당나라로 가는 항구라는 것만 보아도 태안반도가 대외 교류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지역이었는지 알 수 있다. 특히 고구려에 맞서 중국 남조와의 교류에 열을 올렸던 백제에게 이 지역은 매우 중요한 위치 였을 것이다. 특히 태안마애삼존불의 조성시기는 대략 서기 600년 경, 그러니까 백제 위덕왕(553~597)과 무왕(600~640) 기 경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 시기는 백제가 부흥의 열기를 불태운 시기로, 안정된 국력을 바탕으로 불교 또한 크게 부흥하였다. 하지만 학자에 따라서는 중국 남제(南齊) 불상과의 유사성을 들어 조성시기를 6세기 중반 이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태안마애삼존불은 3미터가 넘는 거대한 두 여래상 사이로 180cm 정도의 보살상이 서 있는 배우 특이한 형태이다. 이에 따라 양식에 대한 논란도 많은데, 서산마애삼존불과 마찬가지로 불상의 조각 양식은 북제(北齊)와 북주(北周)를 이어 수(隨)로 이어지는 양식과 비슷하다. 그러나 여래상 사이로 보살상이 끼어 있는 특이한 형태는 중국 북위 연창4년(515) 조성된 「용문석굴 빈양중동 북벽 협시삼존불」과 똑같다. 그렇기 때문에 태안마애삼존불을 북위 양식을 계승한 불상으로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전반적으로 서산마애삼존불보다 다소 딱딱한 느낌을 주고 있으나, 이는 어설프다는 느낌 보다는 거대한 불상의 크기와 더불어 웅대하다라는 느낌을 주고 있다. 중국 북제와 수의 경직된 양식을 백제식으로 해석하면서 새로운 백제만의 스타일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바위 위에는 목조 건축의 흔적이 있어, 전신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고, 바위 뒷면에도 불상이 새겨져 있으나 마멸이 극심하다.

불상의 존명을 확인하기 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이 특이한 형태의 삼존불의 본존이 누구이냐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삼존불에서 본존은 가운데 위치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운데의 보살상을 관음보살상으로 주정하고, 관음보살을 본존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보살이 불에 앞서 본존을 한다는 것은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고, 조각을 보더라도, 가운데 보살상은 부조가 얕고, 연화대좌의 경우도 뒤로 밀려있으니, 보살상을 본존으로 보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그렇다면 태안마애삼존불은 보살상을 동반한 이불병좌상(二佛竝坐像)일 가능성이 크다. 발견 당시 지역에 전래되는 바에 따르면 보살상은 관음보살, 좌불상은 약사여래, 우불상은 석가여래라고 한다. 보살상의 경우 관음보살의 일반적인 도상인 보주를 들고 있어, 관음보살이라는 데에 많은 의견일 일치하고 있고, 좌불상의 경우 손에 보주, 내지 약기(藥器)를 들고 있어 약사여래라는 것에 대부분 찬성하고 있으며, 우불상의 경우 단순히 시무외인만 하고 있어 석가여래라는 설과 아미타여래라는 설이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태안마애삼존불을 이불병좌상으로 봤을 때, 약사여래의 약기인(藥器印)은 8세기가 지나야 나타나므로 좌불상의 석가여래로 봐야 하고,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이불병좌상의 일반적인 도상대로, 우불상은 다보불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또한 중앙 보살상의 경우 보주를 든 보살상의 예가 관음보살상 뿐만 아니라 미륵보살에도 나타나는 만큼, 결국 태안마애삼존불은 미륵보살, 석가불, 다보불의 삼세불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2-3. 예산화전리사면석불





예산화전리사면석불은 서산마애삼존불에서 봉우리 두세개를 넘으면 있는 곳에 위치해있다. 앞선 두 불상과 마찬가지로, 예산사면석불 역시 고로(古路)의 중간에 위치해있다. 백제 유일의 사면불이자, 삼국을 합쳐도 가장 이른 사면불인 예산화전리사면석불은 본래 바닥면이 풍화작용으로 무너지면서 넘어져있던 것을 1983년 발견하여 학계에 처음 보고되었고, 발굴조사를 거쳐, 현재 보물 794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무른 활석의 바위에 새겨져서, 오랜 세월을 거쳐 풍화작용을 심하게 받아, 훼손이 심한 편이고, 두상이 모두 떨어져 나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상호를 거의 알아볼 수 없지만, 남아 있는 조각만으로도 많은 노력을 거쳐 조성될 불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발굴조사 성과에 따르면 노천불이 아니라, 불상이 조각된 석주를 중심으로 정사각형의 전각을 지어 불상을 보호하고, 예불을 드렸음을 알 수 있다.

불사의 편년은 앞의 두 불상보다 높아 6세기 전반으로 올라가는데, 이는 무령왕(501~523)에서 성왕(523~555)에 이르는 시기라는 것에 거의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이는 앞선 두 불상과는 달리 시기적으로 더 앞서는 북위(北魏) 말에서 동위(東魏)의 양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에서 사방불을 백제가 수용하면서 주로 석굴사원이 많았던 중국에서 유행한, 가운데 사면불을 새긴 석주를 놓고 예배하는 형식을 백제식으로 재해석 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무령왕에서 성왕기는 백제가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게 빼앗긴지 얼마 않되, 웅진으로 수도를 옮기고, 고토회복을 위해 국력을 증강시키던 때이다. 더군다나 예산지역은 고토회복의 군사적 전진기지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러한 배경과 국력을 바탕으로 사면불을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학자에 따라서는 중국 공현석굴이 군사기지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고토회복의지와 사면불의 불법전파의 정신을 응축한 것이 사면불이라는 설과 사면불이 고토회복의 의지를 다지며 성왕이 북위(北魏)의 운강석굴(雲岡石窟)을 본받아 만든 무령왕의 초상조각이며, 특히 남면 본존불이 무령왕이라는 설 등을 주장한다. 하지만 시기상으로 보아 이 주장은 조금 무리가 있다고 하겠다.

경주 굴불사지 사면석불

 

사방의 불상들은 바위면의 크기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조각되어 있는데, 남면이 가장 크며, 불상 역시 가장 크게 조성되어 있다. 특히 남면은 유일하게 좌상인데, 크기나 조각, 홀로 좌상인 것만 보아도 남면불이 이 사방불의 본존임을 알 수 있다. 북면이 그다음이고, 동서면은 다소 협소한데, 이 면들을 이용하여 모두 입상으로 불상을 새겼다. 예산화전리사면석불이 보고되기 전까지 대부분의 사방불은 신라의 것이었다. 경주 남산 탑곡 신인사(神印寺)의 사방불이 가장 오래된 신라의 사면불이며, 그 외에 굴불사지 사면석불과 경주 남산 칠불암 사면석불, 영주 신암리 사면석불, 다수의 탑신에 새긴 사면불이 전해지고 있으며, 고려시대의 것으로는 파주의 마애사면석불이 있다. 예산화전리사면석불은 경주 남산의 신인사지 사방불과 마찬가지로 방형(方形)의 자연석 암반을 이용하여 사방불을 새기고, 이를 이용하여 전각을 세웠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신라의 사면불은 각 면에 삼존, 오존 등 비교적 여러 존상을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비하여, 백제의 화전리사면불은 1면 1불의 원칙을 엄격하게 지켰다. 그러나 신라의 사면불이 각 면의 존상을 모두 동격으로 취급하며, 일정한 규제를 지키고 있는데 비하여, 화전리사면불은 가능한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여, 자유롭게 표현하고 있다. 사면불은 본래 동방 약사 유리광세계와 서방 아미타 극락세계 등 사방의 부처님을 모시는 것인데, 동방과 서방만 확실할 뿐 남방과 북방의 존상은 각 종파마다 대단히 다르다. 한국의 경우 일반적으로 북방 미륵 용화세계, 남방 석가 월륜세계라고 표현하지만 보생여래, 아촉여래 등이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화전리사면불의 존상을 아는 것은 다소 막막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비록 돌 중에 가장 무른 활석이기 때문에, 풍화의 영향을 심하게 받았지만 화전리사면불이 많은 공력을 들어 대단히 세밀하게 조각된 불상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남면 본존불의 광배부분은 불꽃무늬로 대단히 화려하고 역동적이게 조각되어 있는데, 북위 말기에서 동위·서위 시대의 운강석굴, 용문석굴 등과 비견할 수 있다. 특히 앞서 말했다시피 방형의 석주를 가운데 두고 사각형의 전각을 둔 예는, 중국의 초기 석굴양식과 비슷하기에, 사면불의 편년을 추정하는데 큰 근거가 된다. 그러나 머리의 원형 연화광배나 옷주름들의 표현은 중국불상의 기계적인 표현이 아닌 사면불 전체를 관통하는 약동감을 주고 있어 특유의 활력을 주고 있다. 이러한 점이 사면불에 나타나는 백제불상만의 특징일 것이다.


3. 결론 : 충남지역 백제불상의 특징


  위에서 살펴본 3구의 불상에서 우리는 몇가지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첫째, 세 불상은 모두 중국과의 교역로와 밀접하게 관련된 장소에 세워져있다. 둘째, 세 불상은 모두 백제의 고토회복, 국력회복의 의지가 강한 시기에 세워졌다. 셋째, 세 불상은 모두 중국 불교조각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오히려 그보다 더 발전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개로왕 때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 빼앗겨,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백제는 강력했던 해상장악권을 탈환하고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하여, 중국과의 교류를 활발히 하게 된다. 또한 고토회복을 위한 국력강화에 온 힘을 기울이게 된다. 태안반도는 경제적으로, 외교적으로, 문화적으로 백제에게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을 것이다. 세 불상은 바로 이렇게 중요한 지역에, 혹은 이 지역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중요한 교역로에 위치해서인 만큼, 활발한 문화교류의 단면 역시 3구의 불상을 통해 알 수 있다. 백제가 결국 멸망한 이 후에도, 여전히 태안반도는 중국과의 교류에서, 혹은 수운에서 중요한 지역이었고, 이 지역을 다니는 무수한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호를 빌면서 무사를 기원했을 것이다.

또한 세구의 불상은 백제의 염원을 받아 안은 것이다. 서산마애삼존불은 2.8미터, 태안마애삼존불과 예산화전리마애불은 모두 3미터를 넘는 대형 불상들이다. 개인의 발원만으로는 이렇게 큰 규모의 불상을, 그것도 이렇게 세련된 솜씨로 조성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3구 불상의 조성이 국가의 사업이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또한 태안반도의 중요성을 생각해보면, 3구 불상의 조성은 단순한 불사가 아니라 백제의 고토회복과 국력증강의 염원이 담겨있는 중요한 불사였음을 추즉해 볼 수 있다.

문화교류의 한 가운데 위치한 3구의 불상은 자연스럽게 중국의 불교조각의 흐름과 양식을 같이 하고 있다. 북위(北魏)-동위(東魏)·서위(西魏)-북제(北齊)·북주(北周)-수(隨)로 이어지는 중국 불교조각의 전통을 충실히 받아들이고 소화하는 가운데, 백제 특유의 양식과 결합시키고 발전시켜, 오히려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백제의 미소”를 만들어내었으니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고 할 수 있겠다.

 

4. 맺음말


  백제는 통일신라의 전성기 못지않은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다. 이는 일본에서 전래되고 있는 백제의 유물들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외침으로 멸망한 나라가 그렇듯이 마지막 수도인 사비에 남아있는 것은 평백제(平百濟)를 새겼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정림사지 오층석탑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뛰어날 불상이 3구나 살아남아 백제의 문화를 조금이나마 음미할 수 있는 것은 큰 행운이다. 또한 이번 추계답사에서 이 3구의 불상을 모두 돌아볼 수 있게 된 것 또한 큰 행운이다. 예비답사 때 모처럼 보호각을 벗어내고 햇살을 가득 받은 서산마애삼존불을 보면서 느꼈던, 밤늦게 백화산에 올라 핸드폰 조명으로 간신히 찾아낸 태안마애삼존불을 보면서 받았던, 헤매고 헤매, 겨우 친견했던 예산화전리사면석불의 광배의 이글거리는 불꽃을 보면 머리를 때렸던 감동을 답사를 통해 많은 이들과 함께하고 싶다.

 

5. 참고문헌

 

『한국고대불교조각비교연구』,김리나, 문예출판사, 2003

『한국미술사』, 진홍섭 외, 문예출판사, 2003

『한국미술의 역사』, 김원룡, 안휘준, 시공사, 2003

『한국의 불상』, 진홍섭, 일지사, 1976

『한국불상의 원류를 찾아서 1』, 최순우, 대원사, 2002

『한국의 불상조각 1 : 관불과 고졸미』, 문명대, 예경, 2003

『한국 불교 조각의 흐름』, 강우방, 대원사, 1995

『황수영전집2 : 한국의 불상 하』, 황수영, 혜안,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