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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역사학은 어떻게 대중에게 다가갔는가?

同黎 2017. 6. 17. 04:42

유사역사학은 어떻게 대중에게 다가갔는가?

유사역사학의 위험성은 사실관계의 오류에만 있지 않다

  • 박세연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대한 인사청문 경과보고서가 지난 15일 채택됐다. 도종환 의원이 문체부 장관에 내정되자 학계에서는 의문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검증되지 않은 유사역사학을 공공연하게 지지하는 사람이 학계에 강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문화부처의 수장이 될 자격이 있냐는 이유였다. 이 우려는 인사청문회를 거쳐서도 여전하다. 유사역사학에 경도된 역사관이 국회 전체에 퍼져있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이다. 심지어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가야사 복원을 지시한 일까지 알려지면서 역사학과 권력에 대한 논란은 심화되고 있다.
 
도종환 의원이 국정교과서 폐지 운동에서 학계와 연대한 사실을 아는 이들은 학계가 왜 이렇게까지 거부감을 나타내는지 의아해 한다. 그는 전교조 활동으로 강제 해직됐었다. 진보적 활동을 활발히 한 문인이었다. 그 때문에 그를 비판하는 학계를 카르텔, 혹은 ‘식민사관’에 물든 역사학계의 집단 반발로 여기는 시각도 있다.
 
 
이처럼 인식의 괴리가 생기는 이유가 뭘까? 무엇보다 대중들이 접하는 ‘역사’가 해방 이후 별로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역사’는 자랑스럽고 유구한 민족문화에 대한 증인이어야 한다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역사학자’는 한민족이 활약한 시간적, 공간적 면적을 확대하는데 봉사해야 하며, 그 중 자랑스러운 부분을 부각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대중 정서에서 단군, 고구려 등의 역사는 ‘성역’으로 남아 있다.
 
이 ‘성역’을 확대하려는 시도가 바로 유사역사학이다. 유사역사학은 한국사의 상고사를 비정상적으로 확대하고 성역화함으로써 민족주의를 비이성적으로 강화한다. 유사역사학은 민족사에 대한 자긍심을 키운다는 명목으로 일부 진보 지식인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대중적 지지를 넓히고 있다. 최근 도종환 후보자에 대한 논란은 유사역사학의 대중성이 이미 광범위하게 확보되었음을 보여준다.
 
유사역사학이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이유를 단순히 대중의 무지로 치부해도 되는 걸까? 그렇지 않다. 학계에도 책임이 있다. 한국사학계는 90년대 이후 운동 및 대중과 괴리되었고, 새로운 대안을 내놓지도 못했다. 다른 한편 ‘인문학의 위기’라는 이유로 국가에 의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문제 의식을 바탕으로, 유사역사학이 대중성을 가지게 된 원인을 한국사학계의 흐름을 통해 찾아보고자 한다.
 
 

식민사관 청산과 ‘발전론’적 역사관

한국의 여느 학문이 그렇듯 근대적 의미의 역사학은 식민 통치를 통해 형성됐다. 20세기 전반 일본 역사학은 유럽의 뒤를 이어 뛰어난 수준을 자랑했고,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식민 통치를 위해 한국사에 대한 기초적 실증 작업을 펼쳤다. 그 목적은 조선사가 비주체적이고 후진적이었다는 정체성론, 타율성론, 만선사관 등의 식민사관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 학자들의 연구 수준은 세계적으로도 높은 수준을 자랑했다. 이들의 연구방법론에 영향을 받아 이후 유사역사학자들에 의해 ‘식민사관의 뿌리’로 지목되는 이병도, 신석호 등의 학자들이 나타난다. 다른 한편으로는 박은식, 신채호, 최남선 등 민족주의적 역사관을 강조하는 역사학자들도 등장한다. 하지만 실제 학계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진단학회’로 대표되는 실증학파였다.
 
흔히 식민사관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이병도, 이기백 등 50~60년대 소위 ‘강단사학자’들은 실제로는 해방 후 식민사관 청산의 주역이었다. 정권이 ‘자랑스러운 민족사’를 강조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정치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이 연구는 한민족의 형성, 신라 골품제, 고려 귀족제, 조선 양반제, 그리고 현대 민주제라는 발전과정을 제시했다. 이를 통해 일제시대 만들어진 정체성론, 당파성론, 만선사관 등의 식민사관에 맞섰다.
 
70년대 이후 등장한 김용섭, 강만길 등의 경제사학자들은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한다. 이전까지의 연구가 ‘정치 참여 주체의 확대’에 방점을 찍었다면, 유물사관에 기초한 경제사학자들은 마르크스의 역사발전단계에 한국사 역시 부합된다는 면을 강조했다. 이렇게 생산관계에 바탕을 둔 역사연구는 기존의 주류 사관을 비판하고 뒤집었다. 식민사관에 대한 비판도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게 됐다. 이들의 제자인 70~80년대 학번의 연구자들은 이를 밑거름 삼아 연구를 진행한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받아들인 1980년대의 연구자들은 이른바 '민중사관'을 발전시켰다. 당시 역사학은 '사회 변혁'을 위해 복무한다는 목적성을 갖고 있었다. 역사학자들은 자본주의 이행논쟁, 사회구성체 논쟁 등에 함께 참여했고 과거의 민중 봉기를 연구하며 현재의 혁명을 추구했다. 아카데미가 현실 운동과 얼마나 밀접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에 따라 몇몇 연구 그룹으로 갈리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학문과 사회운동이 함께 가야 한다는 점에는 이의가 없었다.
 
80~90년대 초반의 한국사 연구 성과는 화려했다. 이론의 바탕 위에 실증을 펼쳤다. 현재 역사 교과서의 틀은 이때 완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헌데 이렇게 불온한 이론을 국가가 교과서에 받아들인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론적으로 과거에 비해 당시의 역사학이 보다 명확하게 ‘한국사의 발전 방향’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민중사관의 변혁적 가치만 살짝 지운다면 '한민족이 역사적으로 발전하며 자본주의적 맹아까지 탄생시켰다'는 민중사관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소련의 단계론적 역사발전론을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이라고 여긴 시대적 한계 속에서 80년대까지 한국사학계는 한국사를 일관된 발전의 단계로 보고자 했다. 이러한 면에서 80년대 역사 연구는 민족주의, 국가주의적 관점과 만날 수 있었고 대중들이 역사를 민족의 발전사로 보는 것을 묵인했다. 그리고 역사 연구가 발딛고 서 있던 운동의 위기가 오자 곧바로 국가에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사회운동과 학문의 위기, 그리고 이별

1990년대 초, 사회운동의 위기와 더불어 한국사 연구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소련 해체와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는 당시 역사학 연구가 바탕을 두고 있던 변혁이론 자체에 대한 의구심을 낳았다. 유물사관 혹은 민중사관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가 시작됐다.
 
가장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경제학자 이영훈이다. 이영훈은 면밀한 사료분석을 통해 김용섭, 강만길 등이 쌓아올린 자본주의 맹아론을 무너뜨렸다. 이는 비단 조선후기사 연구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민족이 스스로 역사를 발전시켜왔다는 내재적 발전론 자체를 무너뜨린 것이다. 
 
학계 전반은 마르크스주의적 역사 연구를 소련의 역사발전단계론이라고 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운동의 종말이 왔다는 섣부른 패배 의식도 퍼졌다. 내재적 발전론의 종말은 곧 ‘거대담론’의 종말을 의미했다. 학계에서는 이영훈의 주장에 저항하며 발전론을 지키려 했지만 곧 한계에 부딪혔다. 이영훈이 주류경제학의 방법론을 역사 연구에 들이대자 ‘발전사관’은 손쉽게 해체됐다.
 
이러한 회의주의적 분위기에서 자체 학습 모임들은 점차 해체됐다. 80~90년대 학번들이 중견 역사학자로 자리 잡으면서 운동과 함께 했던 실천적 역사학은 ‘과거의 추억’으로 전락했다. 이론에 대한 과소한 교육으로 신진 연구자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된 문제의식을 접하지 못한 채 연구를 시작했다.
 
현재 역사 연구에서는 문학, 철학, 사회과학 이론들이 역사학의 방법론으로 시도되고 있다. 그러나 그 공간은 아카데미 안으로 축소되었다. 학문이 학문의 영역에서만 머물게 되면서 대학 내 학회‧동아리의 역사학 텍스트 읽기도 줄었다. 시민과 함께하지 못하는 역사학은 결국 역사의 대중화를 교양의 영역에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국가에 종속된 역사 연구

위기는 역사 연구의 생태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90년대 초반까지 역사 연구는 대중의 진보를 위한다는 목적의식이 강했다. 때문에 생산된 텍스트는 동료 연구자뿐만 아니라 노동자나 학생, 대중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운동과 학문의 위기는 이러한 흐름을 끊었다.
 
인문학을 비롯한 기초학문이 자본의 논리에 잠식되고 역사학도 과거의 생태계를 잃었다. 역사학은 오로지 국가의 지원에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됐다. 정부는 일부 대학에 지원을 몰아주는 BK21 사업을 시행하고 있고 이제는 프라임 사업과 코어 사업을 통해 대학 전체를 구조조정하고 있다. 지원을 받지 못하는 대학에서는 대학원생의 안정적 연구가 이뤄지기 어렵다.
 
 
학회와 학술지 역시 마찬가지다. 국가는 한국연구재단을 통해 국가가 원하는 기준의 학회와 학술지만을 지원해준다. 연구자들은 한국연구재단의 심사를 통과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국가가 제시하는 틀에 맞춰 결과와 계획을 낼 수밖에 없다. 이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 학회에 대한 지원이 끊길 뿐만 아니라, 해당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해도 공식 인정을 받지 못한다. 학회 자체가 존립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신진 연구자나 대학원생들의 생계를 위해 진행해야 하는 프로젝트의 경우 국가에 대한 의존이 더 심하다. 역사학의 경우 한국학중앙연구원과 국사편찬위원회,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발주하는 프로젝트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국가 기관에서 역사 프로젝트를 주관하면서 국가의 입맛에 맞는 프로젝트가 우선적으로 선정되고, 학문으로서의 전문성이 담보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 예가 ‘동북아 역사지도 프로젝트’ 중단 사태다.
 
역사학계는 현실적 문제라는 이유로 국가 주도의 역사 프로젝트에 저항하기보다는 이 구조 속에 들어가 몸을 맡겼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명분 아래 학문의 자율성을 찾기보다 국가의 개입을 정당화하고 대중과는 관계없는 프로젝트와 연구만 진행했던 것이다.
 

‘역사의 대중화’와 유사역사학

역사의 대중화는 학계와 관계없이 이루어졌다. 역사학의 특성상 조금의 사실관계만 파악하면 흥미있는 과거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학문과 운동이 분리되고, 역사가 대중으로부터 유리됨에 따라 역사 대중화의 기수는 자본의 손에 들어갔다. 인문학이 돈이 되는 사회에서 ‘상품’을 창출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대중의 입맛에 맞는 역사’를 취사 선택했다. ‘쉬운 역사’가 좋은 상품이었다.
 
문제는 최소한의 전문성도 담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료의 오독, 사실관계의 오류는 물론이고 학문적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야기가 범람하기 시작했다.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 이야기는 더 자극적으로 변모했다. 학계에서 나온 자극적인 이야기를 골라 이를 부풀리고, 학계 내부의 반론은 전혀 소개하지 않는 일이 빈번하다.
 
 
예컨대 이덕일은 노론에 계급적 성격을 부여한 과거 연구들을 골라 노론이 지금의 지배계급과 연결된다고 주장하며, 유교망국론과 현재의 모순을 연결지었다. 이는 지배층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던 진보 지식인이나 언론들로부터 재생산됐다. 이에 대한 합리적 비판은 식민사관과 같은 자극적 비난으로 덮었다. 과거 운동진영이 갖고 있던 민주-반민주 전선을 역사학에 뒤집어씌운 것이다.
 
유사역사학이 갖는 민족주의적 감수성은 이들과 결합하기 좋았다. 과거 일부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가가 주장했다는 이유로 유사역사학은 민족적 역사관으로 둔갑했다. 일부 활동가들은 사회운동의 지속적인 쇠퇴에 대한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 유사역사학을 수용하기도 했다. 유사역사학에 진보적‧민족적 허상이 씌워지면서 민주화 이후 대중의 역사 인식에도 유사역사학이 확대된 것이다.
 

지배하는 자와 유사역사학

유사역사학의 위험성은 사실관계의 오류에만 있지 않다. ‘학계’에서 유사역사학의 내용에 대한 실증적 비판은 이미 끝났다. 문제는 유사역사학이 현실의 모순을 과거의 ‘마약’으로 치료하려 한다는 점이다. 유사역사학이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심화시킴으로써 국가와 자본이 만든 이데올로기 유지에 기여한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민족사의 복원은 대중을 열광하게 한다. 김영삼 정권은 ‘역사 바로 세우기’란 이름으로 대대적인 친일 잔재 청산 작업을 시작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율은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경복궁 복원 외에 남은 것이 없다. 대중적 인기는 얻었을지언정 대중의 감정을 자극할 뿐 오히려 실질적인 친일 청산의 결과는 보이지 않았다.
 
유사역사학은 더 위험하면서도 매력적이다. 기존의 역사 연구를 타겟 삼아 비난하고, 더 광활한 민족사를 주장하면 대중적 인기를 얻을 수 있다. 확인되지 않은 하(夏)나라를 역사시대로 규정한 중국의 하상주단대공정은 중화주의를 더욱 강화했다. 오늘날 한‧중‧일 동북아 3국은 경쟁적으로 역사 전쟁을 치르고 있으나, 실제 민중에게 돌아오는 이득은 아무것도 없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호고(好古)와 실증을 넘어 대안을

역사학이 운동과 이별하고 아카데미 내에 한정되었기 때문에 도종환 의원의 역사 인식에 대한 우려들은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한때 진보적 활동가이기도 했던 그가 유사역사학에 설득된 것에도 학계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필요한 것은 대안사회를 위한 역사학 재건이다. 우리는 역사학을 통해 ‘과거에 살았던 위인의 위대함’이 아니라, ‘역사를 움직인 구조’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역사 연구의 기본인 실증은 이러한 점을 인정할 때 유의미할 수 있다. 현실 사회주의는 실패했지만 자본주의의 모순은 사라지지 않았다. 역사학은 이를 떠나지 않고 지켜야 했다. 과거의 도식적 발전론은 분명 오류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는 테제가 폐기된 것은 아니다.
 
 
과연 필자의 연구는 현실에 어떠한 울림을 줄 수 있는가 반성해본다. 80년대를 겪은 많은 선배 연구자들은 변혁의 가능성을 포기하며 자신들의 공부 중 일부를 기각했다. 그러나 현재 공부를 막 시작하는 연구자들은 그러한 이론들이 왜 중요했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경험이 이어지지 않고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대안을 만들기 위한 공부를 사회와 함께 시작하고 나누어야 한다. 물론 그것이 역사학이라는 분과 학문의 몇몇 연구자들의 노력만으로 가능하진 않겠지만 말이다. ●
 
필자 소개

박세연 | 한국사 연구노동자. 조선 후기 경제사를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