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그 외

21세기 한국사학 무엇을 해야하나 - 오종록

同黎 2013. 5. 4. 03:21

21세기 한국사학 무엇을 해야하나

 

오종록(성신여대)

 

*이 글을 쓰신 오종록 선생님은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조선전기 군제사로 박사를 받으셨습니다. 이 글은 201353일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주최 좌담회의 발제문입니다. 전면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인간에 대해 공부해온 한 학자의 통찰력을 보여주고 생각할 거리를 여러 개 던져주는 글이기 때문에 소개합니다.

 

아직 21세기의 초입부를 지나는 시점에서 21세기 동안 한국사학이 해야 할 과제를 전망하는 것은 필자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닌 듯하다. 그러나 바꾸어서 생각하면, 분단시대를 극복하고 통일 민족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한국사 연구가 이미 오래 전부터 한국사학의 과제였으나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는 것과 같이, 일찍이 한국사학의 주요 과제로 제시되었던 사안들은 대부분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따라서 비록 그 중요성이 크기는 하나 이 글에서 굳이 다시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 반면에 형식적 수준에서 민주사회의 얼개를 갖춘 우리 사회가, 실제 운영되는 내용에서는 해결해야 할 시급한 과제가 무수하다는 점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이 새롭게 드러나는 과제들은 상당수가 한국사학이 해명해야 할 과제이며, 또한 그 해명과 해결에 상당한 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러한 전망 아래 이 글에서는 우리의 민주주의의 내실을 채우기 위해 한국사학이 해야 할 일들이라고 필자가 판단한 것들을 간단히 제시하고자 한다.

 

역사를 부르는 소리들

우리 사회에서 역사를 부르는 소리가 또 다시 커지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작지만 종전과는 다른 소리도 들린다. 커다란 소리는 이미 익숙하다. 중국이 그들의 동북지역에 존재했던 국가들에 대해 중국의 국가였다거나 심지어는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는 주장을 하고, 일본이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상황이 우리 사회에서 역사를 커다란 소리로 불러내게 하는 원인이다.

우리 역사를 부르는 커다란 목소리는 영광스러웠던 역사로 우리 역사가 기억되기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 영광스러운 역사를 달성하는데 공을 세운 영웅을 창조해 낼 것도 요구한다. 나아가서는 사회 구성원들이 그 영웅들의 업적에 의해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정작 한국사를 연구하는 이들은 그 소리가 그렇게 커다란데도 불구하고 반응이 시큰둥하거나 오히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반발하고 있고, 역사 주변의 학문을 연구하거나 역사 가운데서도 서양사쪽을 연구하는 이들이 환호하며 호응하고 있는 이상한 상황이 21세기로 접어든 이후 계속되고 있다.

이와 달리 (작은 목소리는) 신음에 가까울 정도로 작으나 절실하다. 우리 사회의 병리 현상이 깊어 가는 속에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신음을 하고는 있으나 그들은 대부분 역사가 왜 필요한지 알지 못한다. 그 고통을 지켜보는 이들 가운데서 일부가 역사도 무언가를 해야만 하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말들을 한국사 연구자들은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듣고도 모른는 척 하고 있는 것인지 아직 눈에 띌만한 반응은 거의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작은 목소리들을 듣기

벌써 몇 해 동안 OECD에 드는 나라들 가운데 대한민국의 자살률이 1등을 달리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10대 청소년들의 자살률도, 노인들의 자살률도 모두 1등이다. 이것만으로도 이 사회는 중대한 질병을 앓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음에도 소위 언론 매체에서는 그 소식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학교에서 친구들의 촉력을 견디지 못한 어느 학생이 또는 부당하게 해고당한 노동자 가운데 누가 자살을 하였다거나 해야 신문이나 시사 주간지 등에 보도가 되는 형편이다. 수 많은 갑남을녀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자 할 때 그 번민이 오죽할까마는, 그것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음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우리 사회가 중병을 앓고 있음을 알려주는 사실들은 너무나 많다. 그런 까닭에 얼마 전부터 여러 사회적 질병들을 치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런데 여러 사람들이 내놓고 있는 치료 방안들을 보자면 일종의 대중요법이 아닌 것이 없다. 병의 증세를 완화하고자 하는 방안들만 난무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의사나 환자를 치료한 때에는 당연히 그 사람의 병력 즉 어떤 병에 걸려 어떻게 치료하였는지를 내용으로 하는, 환자가 질병을 겪는 역사를 확인한다. 큰 수술을 할 예정이라면 환자의 병력을 더욱 자세히 파악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노릇인지 우리 사회의 질병을 치료할 의사라고 알려진 사람들이 그러하다보니 사회의 질병으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병을 제대로 치료하기 위해서는 역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한국사를 연구하는 우리는 사회의 이곳저곳에서 사회적 질병으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있는 이들의 작은 목소리들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또 그것을 지켜보며 역사를 호출하고 있는 이들의 작은 목소리들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그리고 사회적 병리현상의 뿌리 깊은 원인들을 캐내어 정확한 진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는 우리가 사회의 병리 현상을 역사적 맥락에서 진단하고 설명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야만 할 때가 된 것이다.

 

사관을 다시 이야기하기

세계는 지금 역사 전쟁을 겪고 있다. 이 역사 전쟁은 우리가 아는 역사 전쟁과 달리 역사관의 충돌에 의해 벌어지고 있다. 사회주의권이 붕괴된 마당에 무슨 역사관의 충돌이냐, 헛소리 하지 말라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세계 최첨단의 자본주의사회인 미국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어느 시사 주간지에 실린 기사를 보면, 올해 초 미국에서는 인터넷에서 대량으로 정보를 부료로 내려 받을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여 보급하는 오픈액세스운동을 스워츠라는 천재 청년이 자살한 사건이 벌어져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었다. 해킹과 컴퓨터 사기 등의 혐의로 체포되어 유죄로 결정되면 최대 징역 35년에 벌금 100만 달러에 처해질 중범죄자로 검찰에 의해 기소되었다가 보석으로 풀려난 뒤 자살한 것이다. 그런데 피해 당사자로 지목된 JSTOR이 이 청년에게 어떤 민사상 책임도 묻지 않겠다고 성명한 발표한 상태에서 검찰이 그를 기소하기 전에 그에게 유죄를 인정하면 징역 6개월 형의 혐의를 기소할 수 있다고 협상을 제안했다는 것이 알려져 사회적 논란이 증폭되었다는 것이다. 논란의 핵심은 이 청년이 2010년 일리노이주립대에서 강연한 내용으로부터 파악할 수 있다. “미국의 중요한 대학 학생이 된 덕분에 여러분 모두는 온갖 종류의 학술 정보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 미국의 주요 대학은 다 JSTOR 같은 학술 전문 데이터베이스에 약정금을 내고 무제한으로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해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인도의 대학에 다니는 학생이라면 이런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없다. 인류의 유산이라 할 막대한 학술적 연구성과에 대한 접근이 철저히 차단되는 셈이다. 인류 모두가 공유해야 할 소중한 정보가 기업의 이윤 추구 대상으로 전락해 버렸다. 이런 현실을 바꿔 누구나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자는 운동이 오픈액세스운동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픈액세스운동이 담고 있는 역사관과 미국 검찰이 지니고자 하는 역사관이 정면으로 충돌하였음을 볼 수 있다. 앞의 것이 현대 문명을 인류 공동의 노력에 의해 성취한 결과로 보고 따라서 그 공유를 주장하는데 반해, 뒤의 것은 소수의 유능한 인재들이 현대 문명을 일군 것으로 보고 따라서 그 성과를 소수가 사적으로 소유하는 것이 옳다고 보는 역사관인 셈이다. 그리고 앞의 역사관은 그 타당성에도 불구하고 법과 제도에 의해 통제를 받는 반면에, 뒤의 역사관은 법과 제도에 의해 보호받는 것은 물론이고 나아가서는 그 운영자들에 의해 법과 제도가 정한 범위를 넘어서서 적극적으로 보고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일들이 더 심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이다.

우리의 시사 주간지에서 소개한 내용에서도 또 미국 현지에서의 상황 전개에서도 역사관의 심각한 대립과 충돌이 벌어졌다는 사실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마지막 결론에 이르면 어느덧 천재 청년의 죽음을 아쉬워하는 쪽으로 내용이 수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무엇을 나타내는 것일까? 나는 이것이 미국이나 우리나 사회의 분위기가 여전히 소위 신자유주의시대 동안 확산된 자본에 대해 초월적 특권을 부여하는 문화에 젖어들어 잇는 데서 말미암은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문화에는 역사관으로서 영웅사관이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의 머리와 가슴 속에 스며든 영웅사관이 작동하고 있고, 그것이 많은 사람들의 정념을 다른 중요한 사실들보다도 천재의 죽음을 중요하게 여기도록 하는 쪽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영웅사관은 근대 역사학이 정립한 이후로 중세의 교훈적 역사 인식을 계승하면서 비역사적 인식을 야기하는 대표적인 관점으로 비판되어 왔고, 그러한 까닭에 근대 사회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역사학 내부에서는 그 위상이 현저하게 약화되는 추세에 있었다. 그러나 사회 현실에서는 역사학과는 다른 양상이 전개되어 왔다. 몇 명의 천재만 있으면 대한민국 국민 전체를 부유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할 것이며 누구누구가 그러한 사람일 것이라고 언론이 나서서 호들갑을 떨고, 그 말을 그대로 믿고 사회 전체가 들떠 흥분할 때 우리 역사학계에서 그것이 곧 영웅사관이며 실제 역사에서 그러한 일이 일어난 적 없었다고 지적한 사람이 전혀 없었다는 점을 되새겨야 한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과 달리 영웅이 중요한 역사적 업적을 독차지하는 논리는 자연히 권력과 부를 영웅이 독차지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도록 하는 논리로 연결된다는 점을 지적하는 이도 당연히 없었다.

영웅사관 그리고 그것과 연결된 여러 문제들을 사회 구성원이 알아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사관에 대해 드러내놓고 논의를 전재하는 것이 필요하다. 바꿔서 생각하면 한국사학계에 만연되어 있는 사관을 드러내는 것을 기피하는 풍조가 근대사회라면 설 자리가 없어야 마땅할 영웅사관이 활개를 치게 된 배경인 셈이다. 사실 식민지시기에 문헌고증사학에 속하던 이들이 사관을 드러내기를 꺼리고 심지어는 그것을 합리화하여 사관이 없어야 객관적인 역사 연구가 가능한 것처럼 주장하기까지 한 것은 식민지 권력 아래에서 보신을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현재에 이르러 한국사학계에 몸담고 있는 이들은 거의 사관에 논의하지 않고 있고, 사회과학 등에 종사하면서 영웅 만들기에 몰두하는 이들이 오히려 현재 잘못된 사회의 원인으로서 과거를 들추는 것을 일본 극우세력이 즐겨 쓰던 자학사관이라 부르며 사관을 언급하는 것만이 보일 뿐이다.

역사관을 줄여서 부르는 사관이라는 말은 역사가 변화 발전하는 양상을 어떻게 보는가, 그 주된 동력을 무엇이라 보는가 등의 요소를 갖추어야만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따라서 자학사관이라는 말은 역사학을 아는 이라면 사용하기 부끄러운 말이다. 사관으로서는 자격 미달인 용어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엉터리 사관은 물론이고 영웅사관의 폐해를 중단시키기 위해서도 사관에 대해 활발히 논의를 전개해야 한다.

 

현재의 원인으로서 과거 연구하기

우리 사회에서는 이웃 국가들과 벌어진 역사 소유권 분쟁이 역사 전쟁의 전부인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다. 한국사학계가 역사와 관련된 분쟁에 대응해온 결과에서 무언가 심각한 문제가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한국사학계 전반이 그러했던 것은 아니나, 주요 언론에 소개된 것은 먼 옛날에 존재했던 국가의 역사가 현존하는 국가와 민족 중 누구의 소유물인가를 따지는 내용이 중심을 이루었다. 그것이 한국사학계의 주요 학자들이 역사 소유권 다툼에 참여하고 있는 것처럼 비쳐지게 되었던 것이다.

과거 어느 지역에서 존재했던 역사를 어떤 사람들이 이루어냈는가를 밝히는 일은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는 작업이다. 그것과 그 역사가 현존하는 국가나 민족 중 누구의 것일까를 밝히는 일은 서로 관련은 있으나 동일한 것은 아니다. 이 두 가지를 혼동하는 것도 문제이기는 하나, 문제가 심각하다고 말하는 까닭은 그것보다 역사 소유권 다툼에 여론의 초점이 맞추어지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역사를 누군가가 소유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 것인 양 생각하게 된다는 데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개인이나 소수가 역사를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그 유래가 대단히 길다. 고대국가가 수립된 이래로 왕권이 미치는 공간은 물론이고 시간도 국왕이 소유하여 지배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역사도 당연히 국왕이 그 주인이었다. 다만 역사를 실제 서울하는 것은 관료들이었기에 지배층은 자신들이 역사의 사실상의 주인이라 자부할 수 있었다. 이러한 관념은 유교문화가 성숙해 가면서 이어서 새로운 단계의 유교인 성리학이 수용되어 발달하면서 더욱 치밀하게 다듬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관념이 지속된 기간이 대단히 길었던 까닭에 근대 역사학이 시작된 뒤에도 그 관념이 쉽게 불식될 수 없었다.

일제 식민지시기에 대한 연구가 뒤늦게 진척되고 민족해방운동 또는 족립운동 중심으로 이루어진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50년은 지나야 역사라 할 수 있다는 변명을 내세웠지만, 내막은 일본이 지배한 역사는 우리 역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작용하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연구만 유독 부진했던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왕조사회적인 것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근대 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이라면 당연히 인과관계의 파악이 핵심 가운데서도 핵심을 이루며, 과거를 연구하는 목적은 현재의 원인을 밝히는 데에 두게 마련이다. 그 동안 연구가 진전되어 이제는 식민지시기 역사의 많은 부분이 밝혀지고는 있으나, 현재의 원인으로서 일본의 식민지배가 전체상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려는 의식적 연구의 분발이 요구된다. 그래 일제 식민지시기에 대한 연구에서는 문화사연구가 성황을 이루고 있는데, 근대적 삶의 양식으로 바뀌는 과정을 구명하고 있다고는 하나 문화의 상층 도는 표피층에 치중하는 성향이 짙다. 농민과 도시의 서민의 문화를 바탕으로 문화의 지형을 재구성할 수 있는 수준으로 연구의 지평을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해방 후의 역사 연구는 워낙 연륜이 짧아 여로 모로 연구가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래에는 노태우정권 시기까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어서 연구 대상 시기의 확대는 상당히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다. 다만 정치사와 운동사 연구가 주축을 이루고 있어서 비록 사회사 성과로 분류하더라도 본격적 사회사 성과라 할 만한 것이 많지 않다. 한국사에서의 사회사 연구는 어느 시대를 대상으로 하는지를 불문하고 전체사로서의 사회사도 아니고 사회적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으로서의 사회사도 아닌, 사회제도나 사회현상을 주로 다루는 양상을 보여왔다. 그러나 이제는 사회사가 지닐 수 있는 장점을 충분히 발휘하는 연구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특히 해방 후의 시기를 대상으로 하는 사회사는 더욱 그러해야 할 필요성이 크다.

 

성리학적 인식 극복하기

앞서 언급하였던 우리 사회에서 영웅사관이 지닌 문제점은 다른 사회들보다 더 증폭되는 측면이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영웅사관이 전근대적 속성이 해소되지 않은 우리의 문화와 결합히기 때문이다. 사회 전반이 근대 자본제사회의 내용을 갖추었다고 해서 전근대사회의 속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역사적 상식에 속한다. 전근대사회의 사회적 관계는 근대적 관계의 힘에 눌려 사회 주변부에서 남모르게 작동하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1997년의 외환위기를 겪은 이후로 전근대적 사회관계가 사회의 중심부에서조차 종종 작동하는 반동적 양상이 나타났다.

지난 2012년 봄 총선을 앞두고 느닷없이 사회 일각에서 구체제를 혁파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당시 구체제라고 지목된 것을 다른 말로는 87년체제라고 불렀다. 1987년에 현저해졌다고 해서 이렇게 이름이 붙은 그 구체제라는 것은 영남과 호남의 유권자들이 맹목적이라 할 정도로 특정 정당을 지지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그런데 과연 영남과 호남에서 각기 그 동안 그 지역의 유권자들이 반대해온 정당의 인물이 국회의원으로 선출된다고 해서 구체제가 극복될 수 있는 것이었을까? 더 나아가서는 우리가 극복해야 할 구체제가 그러한 수준에 그치는 것일까?

2008년 이명박정권이 출범한 뒤 우리 사회에서 현저해진 현상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이 더 중요하고 문제가 심각한가에 대한 판단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나, 내가 보이게는 기본권의 억압과 무시, 유력 기업과 개인의 특권 강화, 그리고 세습성의 강화가 가장 중요하고 심각하였다. 기본권의 억압과 무시의 맞은편에는 특권의 강화와 존중이 또아리를 틀고 있고, 세습성의 강화는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현상이 짝을 이루었다. 기본권 가운데서도 가장 기본적으로 존중해야 할 생존할 권리마저 무시하고 억압하는 일이 사회 곳곳에서 벌어졌고, 당연히 그 이면에는 전근대적 속성의 특권이 법률과 제도의 보호를 받으며 맹위를 떨쳤다. 재벌 총수의 자리를 비롯한 여러 특권적 지위의 세습이 사회적 비난을 무릅쓰고 법률과 제도의 규제를 피하거나 형식적으로만 규제를 받는 시늉을 낸 채 별 탈 없이 진행되는 동안, 로스쿨 등의 새로운 교육제도가 정착하면서 특권적 지위의 세습적 현상이 더욱 확산되었다. 세습적 성향이 강화되는 흐름은 중산층과 서민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허리띠를 졸라매며 사교육 비용을 지출하는 풍주가 만연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실은 현재까지의 한국사 연구로는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자본의 특권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종래에 비해 훨씬 강화시킨 신자유주의가 이러한 상황이 전개되는 데에 큰 구실을 한 곳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도 우리 사회의 특권의 행사에 대한 제도와 법률적인 보호와 그것을 당연시하도록 만드는 전근대적인 성격이 짙은 문화의 존재가 더 근본적인 동력이었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권위의 근본을 상당 부분 정통성에서 찾고 있고, 주요 음식점마다 원조를 내세우는 것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상업 문화를 보더라도 케이팝과 한류의 열풍으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적 겉모습 속에 노예계약이나 성폭력의 속살이 자주 노출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정치문화에서의 전근대적 속성은 당연히 이승만 정권 때에 가장 짙었고, 박정희 정권 때에도 유신체제에 이르러서 재연되었다. 이승만 정권 때나 유신체제에서나 권력을 폭력적으로 행사되엇는데, 주묵해야 할 것은 그 이면에 특권의식과 세습성이 작동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정치문화의 바탕에는 사람을 제대로 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차별하는 전근대적 인간관이 중요하게 작동하였다. 유교 정치사상의 기반이라 할 이 인간관은 삼강 중 특히 군신관계()과 부자관계()를 축으로 하는 정치적 사회적 질서를 어긴 사람은 겉은 사람이되 속은 사람이 아닌 존재로 규정하여 법에 의해 살해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였으며, 국왕과 지배층이 특권적 지배를 행하는 제도와 법률에 철저하게 적용되었다. 조선시기에 이르러 성리학의 수용이 심화되고 성리학을 정치사상으로 하는 사람세력이 정치를 주도한 17세기 이후 이 인간관도 차츰 기층민에게까지 확산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겉은 사람이되 속은 사람이 아닌 존재가 대량으로 발생하였을 경우에는 당연히 대량학살 사건이 일어날 수 있었고, 세조 때 단종 복위운동을 시도한 것으로 지목된 순흥도호부의 양반과 향리, 기타 관속 300여 명이 살해된 사건과, 홍경래 반란 사건 때 정주성에서 농성한 주민의 집단 학살 사건이 대표적 사례이다. 국가 권력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폭력적이고 특권적인 권력 행사에 반대하는 사회 구성원을 사람이 아닌 빨갱이로 규정한다는 것 자체가 근대사회에서는 행사될 수 없는 특권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에는 유교적, 성리학적 인간관과 역사인식이 해소되지 못한 문화가 있다. 이것이 성리학적 역사의식을 극복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유신체제를 겪는 동안 나타났던 희한한 일 가운데 하나는 가치의 서열 전도이다. 철도의 열차편 호칭이 최상급 새마을호로부터 무궁화호, 통일호, 비둘기호로 명명된 것은 계속하여 새로 생긴 열차편이 더 고급이었던 데서 연유하였을 것이나, 당시 사회의 실상이 인류의 평화를 가장 등한시하고 민족 통일에 무관심한 채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강조하고 특히 정권의 업적을 가장 열성적으로 홍보하던 것과 짝하여 일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것이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치 전도의 백미는 역시 장기 집권과 폭력적 지배를 관철하기 위해 갖춘 체제를 한국적 민주주의라 이름 붙였던 일이었다. 그런데 조선시기 동안 각 관청이나 농촌의 공동체는 각기 고유한 문화 전통을 유지하며 그것에 대단히 높은 가치를 부여하였음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이것이 성리학적 가치관과 결합하면 각 관청과 공동체의 문화와 질서는 가족적 문화와 질서의 속성을 강하게 띠게 된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국가와 사화의 전반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내부자 고발이 질식 상태로 들어가고 있는 것은 가치 전도의 극치인데, 이처럼 전도된 가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그 역사적 맥락을 해명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우리 사회가 해결하여야 할 과제 가운데 시민사회의 성숙이 더디게 진행되는 것도 중요하게 지적되곤 한다. 용산 참사로 부르는 사건이나 쌍용자동차 사태 등등에서 시민들이 철저하다고 할 정도로 무관심하다고 절망감을 피력하는 것도 그 하나일 터인데, 이 또한 우리 역사의 결과라는 점은 분명하다. 일각에서는 언론의 여론 오도나 살아가기 어려워진 현실의 탓으로 돌리고 있으나 그보다는 그 주요 원인으로 식민지 권력과 해방 후 정권에 의해 지속되어 온 국민 만들기를 주목하는 것이 그래도 학문적으로 진지하게 접근하는 태도라 여겨진다. 그렇지만 이 사회적 무관심은 권력에 순종하는 모습이라기보다 특권을 누릴 수 있거나 장차 그렇게 될 것으로 기대하는 자의식이 잠복하고 있는 때문일 개연성이 크다. 항공기 결항이나 사고로 열차 운행이 중지되었을 때 환불 소동 속에서 흔히 드러나는 것이 그 종사자들을 종 대하듯이 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점에서는 근래 해외 이론의 적용 위주에서 벗어나 현실 진단에 관심이 커진 한국 사회학계와 한국사학계가 공동 연구를 행하면 좀 더 깊이 있는 현실 진단과 현재 인식이 가능하리라 기대된다.

현재 한국사학계가 맞은 당면 과제는 복잡다단해진 현실 속에서 현재인식의 깊이를 더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특권과 세습, 이 둘을 당연하거나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도록 하는 문화에 대한 종합적 연구가 필요하다. 그리고 종래의 성리학적 인식을 넘어선 새로운 차원에서의 우리 역사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하다. 그 가운데서도 성리학적 역사인식의 군원이라 할 조선시기에 대한 연구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호적제도가 폐지된 뒤에도 위세가 꺽이지 않고 있는 가부장제적 문화와 그것과 관련된 관념, 질서는 이미 고대국가가 성립되는 시기부터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는 것이지만, 현재의 그것은 조선시기에 원형을 갖춘 뒤 식민지시기와 해방 후를 거치는 동안 상당한 변화를 이루어 도달한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 내용과 성격은 역사 각 분야의 연구를 통해 종합적으로 인식해야 실상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다. 가부장제적 문화만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 문화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 중 전통이 깊은 것들은 대개가 그러하다.

근대 조선시기사 연구는 그 동안 침체되었던 경제사 분야가 재정사 연구 쪽에서 활력을 얻고 있는 가운데, 호적대장의 연구 등 사회사 연두고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고 있다. 이에 비해 사회적 반향이 큰 문화사와 사상사 연구는 그 화려함에 비추어 내실에는 여전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그 원인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성리학적 인식에서 적극적으로 벗어나려 하지 않는 데에 있다. 그 연구 성과들을 보면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재구성하는 것은 대단히 치밀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대 일부 성과를 제외하고는 거기서 나아가 그 역사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현재와 관련하여 인과관계 위에서 설명하려는 시도는 방기하고 있다. 당시의 인간관에 대한 구명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문화와 사상에 대한 연구는 대개 문자 활동을 한 지배층이나 중간층에 국한되기 쉬운데, 그 계층 내부의 세계만을 보고 있는 것이다. 마치 사대부 가옥을 설명하면서 엄격히 내외하기 위해 공간을 둘로 나누었고 사랑채는 어떻고 안채는 어떻고 설명하면서 정작 사대부가가 위치한 입지나 특히 그 담장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하지 않는 것 같다. 그나마 조금 나은 궁궐을 설명하는 경우에도 대부분 궁궐의 담은 궁성이라고 한다는 설명 외에는 별로 없는 것이 보통이다. 최근 당시 사회 구성원 사이의 구분과 차별을 다룬 연구가 다시 진전되고 있는데, 당시의 인간관과 그것을 담은 문화 전반에 대한 연구로 진전되기를 기대한다.

 

사료를 확대하기

한국사 연구 인력이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온 결과 근래의 연구 성과는 그 양이 대단히 많아졌을 뿐더러 연구 구제도 매우 다양해졌다. 여기에 더해 과거에는 생각하기 어려웠던 참신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성과들도 제법 눈에 띈다. 그러나 전반적인 소감은 외화내빈이라 할 만하다. 논문들의 경우는 역사학의 전문 논문이 갖추어야 할 조건들을 충실히 갖추고 있는 것이 보통이나, 기왕의 인식에 전문성을 높이거나 자신의 인식에 깊이를 더한 것이 적지 않다. 이 문제는 국가의 학술지 평가에 맞추어 학회와 연구자가 순응해가는 한 측면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요점을 말하자면 학문적으로는 중요하되 주를 달기 어려운 주제나 논쟁적인 주제는 비중이 전보다 줄어드는 양상이 나타나고 잇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긍정적인 흐름을 찾자면 사료에 대한 연구의 진척이 활발해졌다는 점이다. 고대사의 경우는 금석문과 목간 등 새로 발견된 사료들이 연구에 활기를 불어놓고 있고, 백제사의 연구가 활발해진 것도 반가운 일이다. 고려시기에 대한 연구도 목간 등 새로 발견된 사료를 바탕으로 한 연구와 아울러 기존에 크게 의존해 온 편년사료에 대해서도 공동연구에 의해 주석작업을 거치며 사료의 가치를 높이고 있고, 족보 등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어, 새로운 차원에서의 사료 이용을 바탕으로 역사상의 다양화가 촉진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문헌자료가 풍부한 편인 조선시기의 연구에서는 여러 고문서를 이용한 연구, 일기류를 바탕으로 한 연구에 이어 왕래한 서신을 묶어서 사회적 관계망을 파악하려는 연구도 이루어지고 있다. 근대사 연구에서는 구술사 작업을 통해 문헌사료의 범위를 넘어선 사료의 확보 작업이 꾸준히 진행되고 있어서 주목된다. 그런데 지배층이 문헌자료작성을 독점하던 시기를 벗어나는 근대사의 연구에서 사회적 약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사료를 만드는 작업이 진행되는 것과 달리, 문자의 사용을 지배층이 독점하던 시기인 전근대시기의 연구에서는 목간이라 할지라도 연구 자료가 사실상 문헌자료에 머무는 차이가 노출되고 있다. 이에 따라 피지배층과 관련된 역사를 탐구하고자 할 때 안게 될 자료의 한계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계속 문제로 남는 상황이다.

이제 역사의 지평을 확대하기 위해 한국사 연구에서 보다 과감하게 유형의 사료 전반으로 사료 이용을 확대해야 할 때가 되었다. 이미 한국의 고고학은 역사고고학으로 범주를 확대해 가고 있는데, 한국사 연구에서도 그 성과들을 적극 이용하고 나아가서는 필요한 부분에 대해 고고학적 조사와 발굴, 연구를 요청해야 할 것이다. 조선시기와 근대사의 경우에는 근래의 피지배층 또는 기층민의 삶에 대한 연구가 정체되고 있는 양상이다. 1960년대 이후 산업화의 급속한 진전 속에 도시화 또한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농촌에서 이탈해 파편화되어 도시에서 살아가게 된 수 많은 사람들이 정석적 연대감을 얻고자 교회를 찾게 되었음을 구명한 기도교사 연구자의 성과를 보면서, 한국사 연구자들이 중요한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었다. 조선시기부터 근대 전기의 피지배층이나 기층민의 삶은 민속자료에 그 흔적을 상당 정도 남기고 있으므로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연구가 필요하다. 또 민속학 쪽의 연구 성과도 학문적 비판을 거쳐 적극 활용하는 것이 요구된다.

오랜 동안 대형서점의 한국사 판매대는 전공서적이 대부분을 차지하였으나, 현재에 이르러서는 역사대중서가 압도적으로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역사대중서는 대개 역사학을 전공하지 않았으나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의 작품이다. 요즈음에는 한국사 전문 연구자의 대중서도 꽤 늘었으나, 그 비중은 아직 만족할 만한 수준과 거리가 있다. 비전문가가 역사대중서를 쓴 경우 비역사적 인식 또는 반역사적 인식을 담는 경우가 많은데,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들이 수준 높은 무형의 사료를 구축하지 못한 데에 있다. 무형의 사료는 본래 역사가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기는 하나, 장기간의 연구에 의해 역사가의 내면에 체계적으로 구축되기 마련이다. 전문적 학술 논문에서는 무형의 사료가 표면에 거의 드러나지 않은 채 비역사적 서술을 막는 장치로 기능한다고 할 때, 역사가가 학술 논문의 작성에 갇히면 대중이 높은 수준으로 구축된 역사가의 역사상을 접근할 길을 사실상 차단된다. 역사소설만은 못하지만 역사대중서도 때때로 그 역사상이 영상매체를 통해 대중에 전달되면서 사회적으로 영향을 끼치므로, 장기간 한국사 연구에 내공을 닦은 연구자들이 이제 대중적 역사서의 저술에도 적극 나서서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