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북경 답사 1차

북경여행기 - 3일 (태묘-노동인민문화궁)

同黎 2015. 9. 1. 14:12



먼저 오문 옆의 궐좌문으로 향한다.

여기로 나가면 태묘가 있다.


궐자문을 나서서 본 오문의 모습


색다른 풍경이다. 뒤로 궁성 성벽이 보인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금성으로 직진할 텐데

성의 오른쪽에는 태묘(노동인민문화궁)가, 왼쪽에는 사직단(중산공원)이 있다.

우리는 탈진 직전이었기 때문에 태묘만 가기로 했다.


오봉루 누각 사진


궐좌문을 나오면 바로 태묘 입구가 보인다.


입장만 한다면 2위안이지만 건물 내부까지 들어가는 통표(통합표)는 10위안이다.

우리가 들어가는 방향은 태묘의 뒷부분

뒤에서부터 앞으로 (북에서 남으로) 훑은 방향에 속한다.


북경 태묘의 후전으로 통하는 문


여기로는 못 들어가고 옆의 문을 뺑 돌아간다.


태묘는 전, 중, 후 3개의 건물로 되어 있다.

후전의 모습


측면으로 들어가서 삥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는 중


월대의 용머리 배수구

태묘의 건물들은 대부분 명대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드디어 후전 월대에 도착


사진을 찍는다.


북경 태묘의 모습은 우리의 종묘와 사뭇 다르다. 한국보다 왕조가 짧게 지속되어 위패 넣을 공간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는지는 몰라도 전반적으로 길이가 짧고 3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의 종묘는 건물 한 개에 불과하다는 것(영녕전은 별도의 제사)을 생각해보면 확실히 특이하다.

후전의 원래 정식명칭은 조전(祧殿)이다. 이름대로면 본전에 문제가 생길 때 잠시 위패를 보관하던 곳이다.

명대에는 원래 이 용도로 쓰였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지금은 청나라 누르하치의 조상들이 모셔져 있다.

기능은 조선의 영녕전과 비슷하다고 보인다.


후전의 위패는 이렇다.

중앙 : 조조(肇祖) 원황제(原皇帝) 아이신기오로 먼터무.

몽케 테무르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누르하치의 선조이다. 시조인 부쿠리용숀의 후손으로

명으로부터 제1대 건주좌위지휘사의 관작을 받아 후일 후금-청으로 발전하는 건주좌위를 열었다.

좌1위 : 조(興祖) 직황제(直皇帝) 아이신기오로 푸만.

보통 두두 푸만으로 더 알려져 있으며 누르하치의 증조부이다.

우1위: 경조(景祖) 익황제(翼皇帝) 아이신기오로 기오창가. 누르하치의 조부이다.

명의 요동총병 이성량의 명으로 니칸을 치다가 아들 탁시와 함께 오인 사격당해 죽었다.

좌1위: 현조(顯祖) 선황제(宣皇帝) 아이신기오로 탁시. 누르하치의 부.


후전 바로 앞에는 중전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


보이다시피 월대와 문 사이의 공간이 매우 협소하다.

본래 신위의 임시 보관 장소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랬던 것으로 생각된다.


중전으로 통하는 문


월대에서 바라본 모습


문 위의 잡상들


설명문




좌우에 딸린 건물이 있다.

아마 제기와 악기를 보관하던 장소였을 것이다.



동항(銅缸), 우리로 치면 드므다.


월대에서 바라본 풍경


월대의 조각들

태묘의 건축은 청대에 개보수되긴 했지만 대체로 명대의 건축양식을 충실히 지키고 있다고 한다.


중전 뒷면

이제 후전을 나와 중전으로 간다.


중전, 전전에 딸린 부속 건물들


중전과 전전은 같은 월대 위에 있다. 다만 중전은 1단에 전전은 3단에 올라가 있다.


월대 조각들


중전 모습


중전의 공식 명칭은 침전이다.

제사가 없을 때 평소에 위패를 모셔놓는 역할을 하였다.

누르하치부터 광서제까지 11명의 황제와 그에 딸린 황후들의 위패를 모셔놓았다.


중전의 월대



설명문


좌우의 부속 건물



월대의 조각


용머리 배수구


이제 전전으로 간다.

전전의 배전인데 공신당인가?


전전의 난간석


전전 월대에서 바라본 태묘의 정문


대극문이라고 한다.


대극문은 신만 다니는 신문이고

좌우의 문으로 황제와 백관이 다닌다.



월대 정면에서 본 대극문


설명문


태묘 정전 풍경


정식 명칭은 향전이다.

전체 11칸으로 길이는 68미터이다. 길이만큼은 태화전과 비슷하다고 한다.

여기서 대제를 지낼 때 뒤의 침전(중전)에서 위패를 꺼내와 여기서 제사를 지낸다.



태묘 현판

만주어와 한어로 동시에 써 있다.



태묘 월대 아래서 서로 사진 찍어대는 이종욱과 정재현


태묘 전전 전경


태묘야말로 사직단과 함께 신해혁명 이후 가장 능욕당한 건물 중 하나이다.

중화민국 성립 직후 화평공원으로 바뀌어졌다가, 지금은 북경노동인민문화궁이다.

태묘 전전이 북경시 노동자를 위한 공연장이 된 것이다.


중앙의 답도



다시 본 대극문


전전 내부

제향 공간은 없어졌다. 최근에 노동인민문화궁이라는 명칭을 사라지고 정식으로 태묘가 되었으며

국가중점보호문물단위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내부는 복원되지 않은 것 같다.


내부 중앙에는 황제를 나타내는 구룡화가 걸려 있다.


그 아래에는 제례악에 쓰였던 여러 악기가 걸려 있다.


수많은 편종들



원래는 모두 악기고에 보관되어 있었을 것인데


엄청 편종이 크다.


가운데 있는 가장 큰 특종


태묘 천정의 단청



전전 내부 가구


기둥이 실하다.

운남성에서 가져온 나무들이라고 한다.


편경


모셔져 있던 역대 황제와 황후의 위패와 영정

지금은 모두 대만에 가 있다고 한다.


내부 바닥에는 금전이라고 불리는 단단한 벽돌을 깔았다.


기둥의 모습

운남성 밀림에서 채취한 녹나무라고 한다.


편종



좌우로 바라본 태묘 내부


이제 태묘를 나선다.


전전과 중전 사이


이제 태묘를 나와서 다시 자금성으로 간다.


태묘 입구에 보이는 가량대

가량이란 일종의 말로 토지와 곡식에 관한 표준 규범이 황제에게 있음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