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북경 답사 1차

북경여행기 - 3일 (자금성 진보관1: 영수궁 구룡벽, 황극전)

同黎 2015. 9. 5. 17:19



건청문 옆으로 난 경운문(景運門)을 지나면


비교적 넓은 공간이 나오고 종표관(봉선전) 입구가 나온다.


여긴 좀 이따 가기로 하고


여기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전정(箭亭)이라는 건물이 나온다.

황족들에게 만주족 방식의 교육을 시키는 곳이었다. 이미 강희제 때부터 황제들은 만주족의 한화(漢化)를 심각하게 느끼고 만주족의 정체성을 유지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뭐 그 정체성이라는 것이 고유한 것인지 아니면 청 건국 이후 새로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쟁 중이지만


이렇게 진보관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온다.


붉은 담에 3개의 유리로 장식된 문이다. 이름은 석광문(錫廣門)


여기서 진보관(珍寶館) 표를 사야한다.


진보관 입장료는 10위안이다.

자금성 입장료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으니 주의해야 한다.


이제 입장


진보관 구역 안내도

사실 이 곳은 영수궁(寧壽宮)이라는 일종의 상왕궁(上王宮)이다.

건륭제가 태상황으로 있으면서 거처로 삼은 곳이다. 자세한 설명은 아래에 하겠다.


진보관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구룡벽을 보러 온다.


건륭제 때 만들어진 길이 30미터에 달하는  구룡벽(九龍壁)은 영수궁 전체의 영벽 역할을 하는 벽이다.

아홉 마리의 용은 천사를 상징한다. 


기념사진 찍는 사람들


워낙 커서 한 눈에 담기도 어려울 정도이다.


건륭제가 만든 이 구룡벽은 중국 3대 구룡벽에 속한다고 한다.

사실 구룡벽은 여기만 있는 건 아니고 여기저기 있다.

여기 외에 북해공원 정심재 앞의 구룡벽과 산동성 대동시에 있는 구룡벽이 3대 구룡벽에 들어간다고 한다.


270개의 유리벽돌로 이루어졌고 높이는 3.5미터에 이르는 이 구룡벽은 벽돌 중 하나만 나무라고 한다.

유리벽돌 한 장을 깨먹은 장인이 나무로 깎아 넣았다고 한다.

이걸 찾아보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러기에 너무 힘들었다.




꿈틀대는 아름다운 용들


가운데 중심이 되는 황룡


맨 왼쪽에 있는 황룡의 조각 하나가 나무라고 한다.



황제를 상징하는 가운데의 황룡


두 번째 문인 황극문(皇極門)


한백옥 기단 위에 벽돌로 올리고 유리기와를 장식했다.


황극문을 통과하면 본래 영수궁의 정문인 영수문(寧壽門)이 나온다.


영수문은 강희제 때 영수궁이 처음 생겼을 때의 건축이다.

그러다가 건륭제 때 영수궁을 대대적으로 개축할 당시 건청문의 양식을 본따 더 증축한 것이다.

그러다가 광서제 때 서태후 60세 생신을 여기서 치루면서 단청이 변경되었는데

이후 복원하면서 건륭제 당시의 모습으로 바꾸었다.


멀리 보이는 태화전


영수문 앞에도 도금한 사자상이 서 있다.

이건 암놈이고


이건 숫놈이다


아름다운 공 모양


영수문을 들어서면 영수궁의 중심건물인 황극전(皇極殿)이 보인다.


영수궁의 명대에 원래 인수궁 터였다. 그러다가 강희제 때 별궁의 느낌으로 영수궁이라는 건물을 지었다.

당시에는 工자 모양으로 전전(前殿)과 후전(後殿)이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건륭제 36년에 자신이 쓸 개인적 공간으로 영수궁을 확대하면서 본래 영수궁의 전전과

전전-후전을 이어주는 통로를 부수고(...) 앞에 태화전을 본딴 정면 7칸의 황극전을 지었다.

그리고 후전에 해당하는 건물에 영수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영수궁은 이후 건륭제가 가경제에게

양위한 후 태상황궁이 되었고 건륭제가 죽을 때까지 실질적인 권력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다가 서태후(자희태후)가 60세와 70세 생신연을 여기에서 하면서 많이 변형되었다.

여기서 서태후는 미국, 오스트리아 대사 등을 접견했다고 한다.

지금은 진보관이라는 이름으로 고궁박물원의 일부가 되었으며

박물원의 가장 진귀한 유물들을 전시하는 공간이 되었다.


황극전은 영수궁의 중심 건물이자 외조에 해당한다.

이 뒤의 영수궁까지가 외조이고, 뒤에는 양성전이 있어 후조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1단의 월대 위에 서 있는 황극전

석고관이라는 글씨가 보이는데, 아쉽게도 우리가 갔을 때는 닫혀있었다.


황극전으로 접근 중




황극전 현판


단청은 금채를 썼다. 서태후가 금을 빼 소채로 바꾸었다고 하는데 왜 그랬을까?

청 황실에 대한 의도적 폄훼였을까?


황극전의 답도


극도로 화려하고 섬세하다.


황극전의 보좌


조금 작지만 태화전과 동일한 구성을 하고 있다.


뒤편의 인덕대융이라는 현판은 서태후의 친필이라고 한다.


앞에는 법랑으로 만든 코끼리가 보인다.


우측 모습


좌측 모습


금을 입한 보좌


법랑으로 만든 코끼리


태화전과 같이 보좌 4방의 기둥은 금을 입혔다.


황극전 내부의 유물들

여긴 직접 들어가 볼 수 있다.


용이 조각된 자단목으로 된 옷장


이종욱 기념사진


보좌 모습


천정. 금채가 된 조정과 헌원경이 보인다.


황극전 월대 앞의 모습

태화전과 함께 일대가 보인다.


일대 앞의 수미좌

정교한 것인데 드므와 같은 용도인지 아니면 괴석 같은 것을 놓던 용도인지 모르겠다.


반대편의 가량대

이제 전시장으로 들어가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