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화전 옆 후우문을 통해 서쪽으로 간다.
여기서는 무슨 돈 받고 사진 찍어주는 코너가 있는데
그걸 못 찍게 하려고 저런다.
그것이 알고싶다인 줄
자금성 서쪽 관람로의 입구인 내우문
여기서부터 양심전과 서육궁 관람이 시작된다.
내우문
서관 참관로 지도
만만치 않은 넓은 지역이다.
제일 먼너 양심전부터 가기로 한다.
내우문 현판
여기서부터는 만주어와 한자가 병기되어 있다.
청이 멸망하고도 내조 지역은 청국 소조정이라는 이름으로 베이징 정변 이전까지 유지되었기 때문에
현판이 그대로인 것으로 생각된다. 역시 외조 쪽은 중화민국 시절에 현판이 바뀐 것 같다.
서쪽 부분과 중앙 부분은 이렇게 거대한 벽과 그 사이의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건물과 건물 사이가 이런 거대한 벽으로 나뉘어져 있어 바람도 잘 안 불고 답답한 느낌을 준다.
실제 황제들도 여기보다는 이화원이나 피서산장 같은 다른 이궁을 더 선호했다고 한다.
각 궁으로 통하는 문
지나가다 만난 태화전의 서쪽 문인 월화문(月華門)
준의문(遵義門)
양심전으로 들어가는 작은 문 중 하나이다.
문을 들어서면 황유리로 된 장식 벽이 존재한다.
중국인들은 문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공간이나 문이 보이는 공간을 그대로 나두지 않고 장식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풍수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 한국과는 달리 중국에서는 실내 풍수가 발달해있다.
이런 벽을 영벽(影壁), 혹은 조벽(照壁)이라고 부른다.
이런 영벽에는 길상을 나타내는 무늬를 많이 새겨 놓았다.
여기도 연꽃의 모습을 아로새겼다.
여기로 들어가지 않고 더 남쪽으로 내려와 정문인 양심문(養心門)으로 들어가기로 한다.
위키백과에서 가져온 사진
당시는 지나쳤지만 양심문 왼편에는 지금은 매점이 된 치방(値房)이라는 공간이 있다.
이 곳은 황실의 음식을 준비하던 어다선방(御茶膳房)이 위치한 곳이었다. 소위 수랏간이었던 공간이었다.
양심문 앞에는 이렇게 금을 입힌 사자상이 놓여 있다.
역시 극도로 섬세한 세공을 보이고 있다.
정면
양심문
벽에는 유리로 장식이 되어 있다.
삭막해 보이는 궁궐 안에 그나마 이런 장식이라도 있어 숨통이 트여 보인다.
양심문 현판
양심문 앞에는 영벽 역할을 하는 이런 작은 나무 문이 있다.
이것도 영벽이라고 한다.
양심문 남쪽에는 이렇게 옥으로 된 복벽도 있다.
섬세함이 대단하다.
양심전이 보인다.
앞에 차양막처럼 한 칸을 내어 지었다. 건물 자체는 工자 모양이다. 즉 앞뒤의 건물이 복도로 연결되어 있는 형태이다. 본래 한국에선 工자 모양의 건물을 선호하지 않는데 궁궐에서 이런 건물을 쓰다니 의외이다.
양심전은 명대부터 있던 건물이다. 본래 가정제가 지은 건물로 자금성 내 여러 침궁 중에 하나였다.
양심전이라는 이름은 맹자 진심편에서 따온 것이다.
청조 때에도 침전으로 활용하여 순치제가 붕어한 곳이기도 하였으며,
강희제는 여기서 서양인들을 만났는데 로마 교황의 사절을 만난 곳도 바로 이곳이다.
옹정제가 양심전을 아주 좋아해서 이후 대부분의 황제들이 이곳을 침전으로 삼고
건청궁을 편전으로 삼았다. 그후 건륭제와 동치제가 여기에서 서거하기도 하였다.
동쪽의 체순당(體順堂)에 동태후가, 서쪽의 연희당(燕禧堂)에 서태후가 각각 머물고
동난각(東暖閣)에서 수렴청정을 하였지만, 알다시피 동태후는 얼마 못 가 사망한다.
이후 1912년 청나라 마지막 어전회의가 이곳에서 열리고 광서제의 부인인 융유태후의 결단으로 내각총리대신이던 원세개(위안스카이)에게 정권을 넘기고 선통제 부의(푸이)가 퇴위한 역사의 장소이기도 하다.
양심전 앞의 정
양심전 풍경
뒤쪽과 좌우로도 딸린 건물들이 여럿 있었는데 너무 복잡해서 다 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양심전 현판
설명문
양심전 내부
가운데 옥좌 위에는 중정인화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옹정제의 글씨이다.
내부
역시 금전이 깔려 있다.
옥좌 뒤편의 시는 건륭제의 친필이라고 한다.
내부 정면
뒤편에 파란 것은 책장인 듯한데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모르겠다.
보좌 뒤편으로 언뜻 보이는 글씨는 함풍제의 글씨라고 한다.
보좌
동난각(東暖閣)
다섯 칸짜리 작은 건물이지만 이곳이 동태후와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하던 집무실이었다.
양심전 한 켠에는 이렇게 작은 공간이 있고 건륭제 당시의 내부가 재현되어 있다.
여기가 바로 건륭제의 보물창고인 삼희당(三希堂)이다.
건륭제의 작은 독서 공간이다. 이 이름은 건륭제가 모은 3개의 보물에서 유래되었다.
우리가 흔히 쓰는 해서의 완성은 삼국시대를 지나 동진시기에 이루어졌다.
그 중 서성이라 일컬어지는 왕희지(王羲之)가 해서, 행서, 초서를 완성했으며,
그 아들 왕헌지(王獻之) 역시 명필이었다. 그 밖에 왕순(王珣) 역시 해서와 행서에 능했다.
그런데 이 진대의 진필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특히 왕희지의 진필은 여러 설이 있으나 하나 밖에 남아있지 않으며, 그 이유는 당태종이 그의 친필을 너무 사랑해 모두 무덤으로 가져갔기 때문이라고(...) 다행히 당태종이 당대의 명필들인 저수량, 우세남 등을 시켜 왕희지의 친필들을 아주 똑같이 그대로 모사하도록 하여 당대의 모사품은 여럿 전해지고 그 밖에 당태종이 당시에 돌에 그의 친필을 새겨놓도록 하여 탁본으로 전해지는 것이 많으며, 당태종의 무덤인 소릉이 일찍 도굴되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흘러나왔다는 것들이 여럿 있다. 특히 일본에 많긴 하지만 공식적인 진필은 없다. 대만 고궁박물원에 있는<평안하여봉귤삼첩平安何如奉橘三帖> 또한 진본이라는 설이 있긴 하다. 하지만 애초에 무엇이 진본인지 알 수가 없으니 감정이 어려울 수 밖에...
그런데 건륭제는 왕희지의 유일한 진필이라고 인정된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 그리고 송대의 명필인 미불이 감정한 왕헌지의 <중추첩中秋帖>, 그리고 명대 동기창에 의해 감정된 왕순의 <백원첩伯遠帖>을 구했고, 이를 기뻐하며 세 개의 보물을 보관하는 곳을 삼희당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아편전쟁과 중일전쟁, 국공내전의 와중에도 다행히 3개의 첩은 잘 살아남았고
이 중 쾌설시청첩과 백원첩은 대만 국립고궁박물원에, 중추첩은 북경 고궁박물원에 남아있다.
삼희당 자체는 아주 소박한 공간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온 역대 명필을 모두 모아 놓은 삼희당법첩은
송대 순화각첩과 합께 대표적인 서예교본으로 유명하다.
내부 글씨는 다 건륭제의 친필이다.
설명문
서쪽 작은 문의 영벽
녹유리로 되어 있다.
전면 모습
양심전을 나와 서육궁 구역으로 나가기 시작한다.
다시 서육궁으로 들어가는 근광우문
근광우문 현판
이제 태극전으로 간다.
태극전으로 가는 길에 있는 함화우문
함화우문 현판
가는 길에 영수문이 보인다.
영수문은 닫혀 있다. 서육궁 중 한 곳인 영수궁(永壽宮)은 황제 후궁들의 거처 중 한 곳으로
장락궁, 육덕궁 등이었다가 만력제 때 영수궁으로 바뀌었다. 지금으 청대비빈생활관으로 쓰이고 있다.
건륭제의 생모인 효성헌황후가 살았었고 건륭제의 딸 고륜화효공주가
건륭제 때 최고의 권신이던 화신의 아들과 가례할 때의 장소로도 사용됐다.
못 들어가는 거 사진이라도 가져와 본다.
영수궁 건물
영수궁 현판
비빈들이 쓰던 가마
전시관 내부
지금은 이렇게 지붕만 찍어 본다.
문의 행진이다.
정문이 아니라 측면으로 들어간다.
영벽
나무로 되어 있고 주칠을 해 놓았다.
태극전
본래 명대에는 미앙궁, 계상궁이라는 이름으로 있었다가 청조 말기 서태후에 의해서 태극전이라고 이름이 바뀌었다. 명대 정덕제가 후사가 없어 가정제가 제위에 올랐을 때 그 아버지인 흥헌왕이 살았었고,
그 후 가정제 때 건청궁과 곤녕궁이 소실되어 황제의 침소가 되는데, 이는 동서 육궁 중 유일한 예이다.
서태후의 거처 중 한 곳으로 뒤의 장춘궁의 문을 허물고 건물을 이어 서태후의 거처로 삼았다.
사실 영수궁을 제외한 서육궁의 대부분 지역은 서태후의 공간이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다. 태극전이라는 이름도 미묘한데 서태후가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것 같다. 황제에게나 사용하는 태극이라니
서태후의 사후에는 동치제의 후궁이 살았다가 선통제와 함께 나갔다고 한다.
약간 측면에서 본 태극전
설명문
태극전의 답도
태극전 정면
태극전 현판
태극전 내부
서태후가 앉던 보좌가 보인다.
창문에 여러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비취로 만든 여의
원래는 등긁개, 그러니까 효자손이었는데 나중에 상징적인 의례용품으로 바뀌었다.
천정이 특이하다.
청화백자 같기도 하고
내부의 거울과 거울대
태극전 정면의 아름다운 영벽
당시 서태후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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