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일본 여행기 9차

9번째 간사이원정기 - 6일 교토 히가시야마4 (기요미즈데라 조주인清水寺 成就院)

同黎 2016. 2. 19. 01:08



이제 애들을 만나기 위헤 기요미즈데라로 간다.

물론 나는 먼저 갈 데가 있다.


기요미즈데라 앞에는 엄청 가게가 많은데, 그 중에서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곳은 이 센베집이다.


여러가지 맛이 있지만 유자맛 등등의 갓 구운 센베에 굵은 설탕을 듬뿍 친 것은 정말 기가 막히다.


조주인(成就院, 성취원)으로 가려면 일반적으로 매표소로 올라가는 언덕 왼쪽에 난 길로 들어가야 한다.


멀리 삼층탑이 보인다.


기요미즈데라를 대여섯번 왔어도 이곳은 처음이다.

사실 올 일이 없었으니 


석불이 옹기종기 모여있는데 각각 하고 있는 턱받이 색이 달라 알록달록하다.


나름 장관이다.


석불 위쪽 뒤로 보이는 비석 세 개는 다 유래가 있는데 조금 있다가 설명하겠다.


조주인(成就院) 입구


봄, 가을의 특별공개 외에는 잘 공개하지 않는 곳이다.

기요미즈데라는 나라시대 이전에 창건된 법상종 사찰로 헤이안시대 이후 계속 번성하였다.

그러다가 진언종도 겸하여 메이지시대 전까지 사실상 진언종에 속하는 사찰이 되었다. 그러나 사찰의

많은 장원은 줄어들어 히데요시 때는 겨우 130석이 되었는데, 이는 에도시대에도 계속되었다. 

전국시대까지 기요미즈데라 운영은 9개의 탑두사원들에 의해 이어졌는데 이른다 삼직육방이라고 하여

각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 중에 조주인은 서열 3위로 절의 유지관리와 사하촌의 지배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9개의 탑두 중 일부는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사라졌고, 이후 메이지시대의

폐불훼석으로 조주인을 제외한 모든 탑두사원이 사라지면서 조주인은 기요미즈데라 유일의

탑두이자, 동시에 스님들이 거쳐하는 본방이 되었다. 참 특이한 역사다.


조쥬인 본방 입구


조주인의 정원은 달의 정원이라고 하여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 정원은 무로마치 말기의 유명한 작정가 소아미가 만들고, 고보리 엔슈가 보수하였으며

다시 에도시대에 마츠나카 테이토쿠에 의해 보수되었다고 전해진다.


연못 위에 있는 작은 건물은 호마당으로, 이에야스의 손녀이자

고미즈노오 천황의 아내 도후쿠몬인에 의해 기증되었다고 한다.


작은 연못을 중심으로 다리와 석등, 산 등을 조화롭게 배치해 놓았다.



봄의 모습


날이 맑을 때는 히가시야마의 여러 봉우리들이 연못에 비친다고 한다.


봄에 다시 와 봐도 좋을 것 같다.


이번에 공개되는 여러 사보 중에는 에도시대 말기의 조주인 주지인

겐쇼(月照) (왼쪽)와 그의 동생 신카이(信海)의 목상(오른쪽)도 있다.

겐쇼는 존왕양이를 주장한 승려로 바로 이 조주인에서 사쓰마번의

사이고 다카모리, 교토의 귀족 자제이자 후지와라씨의 씨장자이며 공무합체파였던

고노에 타다히로(近衛忠煕)와 비밀 모임을 가졌는데 이를 조주인 밀담이라고 한다.

그러나 당시 에도 막부의 다이로(大老)로 막강한 실력자였던 오미 히코네번의 번주 이이 나오스케에

의해 위험인물로 주목되고 이이 나오스케가 주도한 안세이의 대옥 때 죽음을 피해 사이고 다카모리와

함께 교토를 탈출하여 사쓰마번으로 도망갔으나 사쓰마번에서는 그를 받아들이길 거부했고

결국 동생 신카이와 함께 죽임을 당한다.


아까 석불들 위로 보였던 세 비석은 각각 겐쇼와 신카이가 죽을 때

마지막으로 남긴 사세구를 새긴 것과 사이고 다카모리가 쓴 조시를 새긴 것이다.


막부의 그늘 아래서 기요미즈데라 같은 오래된 사찰에서도

존왕양이의 기운이 있었다니 신기하다. 조선의 이동인과 같은 이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