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일본 여행기 9차

9번째 간사이원정기 - 6일 교토 라쿠츄 (교토국립박물관京都国立博物館, 도요쿠니신사豊国神社, 호코지方広寺, 이총耳塚, 산쥬산겐도三十三間堂, 도지東寺)

同黎 2016. 2. 15. 21:04



도후쿠지를 나선 후 나는 겐닌지 방향으로, 나머지는 교토 중부를 보기로 한다.

교토국립박물관의 특별전시관

구 제실교토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구 본관에서 바라본 마당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 분수, 그리고 역시 서구풍의 정문이 보인다.

생각하는 사람은 진품. 

거금을 들여 유럽 명작가의 작품을 사들였던 메이지시대의 일본인들. 역설적이게도 천년 수도의

박물관은 완연한 서구풍이다. 메이지시대 일본인들의 서구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지금의 국립박물관들은 과거의 제실(帝室) 박물관이었다.

황태자, 즉 쇼와천황의 결혼식 후에는 은사교토박물관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박물관은 천황이 세워 국민들에게 하사한 것이었다.

도쿄국립박물관이 있는 도쿄의 우에노 공원도 정식 명칭은 우에노 은사공원이다.

종전 후에야 국립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관리와 소유권이 국가로 이전된다. 지금은 민영화의 선두

일본답게 국립박물관과 국립문화재연구소를 묶은 독립행정법인 국립박물관에 소속된 기관으로...

국립이라는 것은 일종의 브랜드처럼 남게 되었다.


역시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구 정문

지금은 서문이다. 사실상의 정문은 새로 만든 남문이다.


교토국립박물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도다이지의 대불전보다 더 큰

대불전과 대불을 지은 호코지(방광사, 方広寺)와 그의 사후 그를 신격화하여 모신 도요쿠니신사

(豊国神社)의 자리에 지어졌다. 히데요리의 사후 호코지는 쇠락하고 도요쿠니 신사는 폐지되어

신호도 박탈되고 신사에 모셔진 히데요시의 혼령은 마총(馬塚)이라고 불리는 무덤으로 옮겨졌다.

그 후 지진에도 수리하는 이가 없어서 그 구역은 계속 축소되었고, 그 위에 박물관이 지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도요쿠니신사 앞에는 임진전쟁 당시 조선에서 베어 온 코와 귀를

안치한 이총(미미즈카, 耳塚)가 위치해 있다.


도요쿠니신사와 호코지, 이총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지난 여행기 참조



도요쿠니신사의 당문(가라몬)

이 문은 히데요시의 거성이었던 후시미성에서 이축해 온 것으로 그 성의 몇 안 되는 유구이다.


도요쿠니신사 바로 옆에는 호코지의 대종인 국가안강(國家安康)의 종이 걸려있다.

크기로는 도다이지, 지온인의 종과 함께 일본 3대 종이라고 하며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국가안강의 종은 히데요리와 그 어머니 요도도노(요도기미, 챠챠)의 발원으로 재건되어

만들어진 것으로 그 종명에서 국가안강(國家安康) 군신풍락(君臣豊樂)이라는 단어가

이에야스(家康)의 이름을 나누어 저주하고 도요토미는 축복한다는 이상한 필화사건으로

번져서 이에야스가 히데요리와 오사카의 잔당을 숙청한 것으로 유명해진 종이다.

오사카의 전투로 도요토미씨는 멸족되었으나 정작 종은 아직도 멀쩡히 살아남았다.

국가안강의 종명 사건이 도쿠가와 측의 단순한 트집이 아니라 히데요리 측의

의도된 저주였다는 의견도 있는데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종이 무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대불전이 있던 자리에는 도요쿠니신사가 들어서 있다.

이 대불은 아미타불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꿈에 유명한 나가노의 젠코지(善光寺)의 아미타불이

꿈에 나타나 그 아미타 삼존불을 19미터로 만들라고 한 것이다. 처음에는 목불이었다. 그러나 완성 직전

지진으로 대불의 목이 부러지자 히데요시는 나라를 지키라고 세웠더니 너 자신의 몸도 지키지 못하냐며

대불에게 화를 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부분은 소설이나 드라마의 내용일 수도 있고 확실하진 않다.

이후 히데요리가 동으로 다시 대불을 만들지만 대불의 개안식은 위의 국가안강 종명 사건으로 인해

열리지 못했고, 지진으로 부서졌다. 그후 에도시대 10분의 1 크기로 만들어진 불상 역시

1973년 실화 사건으로 소실되면서 대불의 흔적만 남아 있다. 


국보 도요쿠니신사 당문

금장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건물이다.


도요쿠니신사에서 내려다 보이는 곳에 이총이 자리잡고 있다.


전쟁에 희생된 이들을 기리는 공양탑이라고는 하지만 영락없이 히데요시의 전공을 자랑하는 형상이다.


밖에서 본 교토국립박물관 정문


한적하지만 과거에는 이쪽이 정문이었다. 지금은 주로 출구로 사용되고 있다.


다로 근처에는 산쥬산겐도도 있다.

헤이안시대 말기 고시라카와천황이 자신의 이궁이었던 호주지(法住寺)의 한 쪽에 조성한 것으로,

사실상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재산을 쾌척해 지은 것이다. 이후 가마쿠라시대에 불탄 것을 재건하였고,

히데요시 때에는 호코지에 포함되기도 했다가 지금은 천태종 사찰인 묘호인(妙法院)에 소속되어 있다.


자세한 설명은 지난 답사기 참조



국보인 산쥬산겐도 본당


앞마당은 넓은 모래밭이다.


길이 118미터의 거대한 건물이다.


이제 도지(東寺)로 간다.


교토의 상징인 도지의 오층목탑

하루카에도 새겨져있다.


거대한 해자

교토로의 수도 이전은 고후쿠지 등 승려세력의 발호에 넌더리가 난 간무천황의 결단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수도 안에는 도지와 사이지(西寺), 단 두 개의 사찰만 허락되었다.

당에서 입국한 구카이(空海)는 당시의 최고 현학 철학이었던 진언종을 들여와 천황의 신임을 얻어

도지를 장악하고 도지는 고야산과 함께 진언종의 양대 성지가 되었다.


군인이니까 봐준다.


도지 앞의 해자는 사찰이 사실상 하나의 성임을 짐작케 해준다.

천태종만큼은 아니었어도 진언종 역시 승군을 갖추고 위력을 과시했다고 한다.


지금은 이렇게 오리만 유유자적하다.


중요문화재인 남대문을 지나 들어가면


국보로 지정된, 히데요리가 재건한 금당이 보인다.

도지 역시 무시로 다녔다.

지난 여행기들



일본에서 가장 높은 55미터의 오층목탑

앞에는 하치만 신사가 있다. 안에는 구카이가 직접 만들었다는 하치만 삼신상이 모셔졌는데

신불분리의 과정에서 신사는 철거되었다가 다시 만들어진 것이다.


금당의 뒤편


강당.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건물로 안에는 구카이가

 당에서 가져왔다는 21구의 불상이 입체만다라로 설치되어 있다.



킨테츠선이나 JR을 타고 들어오면 저 오층탑을 배경으로 볼 수 있다.


도지 오층탑의 투시도


오층목탑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에 의해 재건된 것이다.


정원에 비쳐 보이는 오층탑의 모습


멀리 어영당이 보인다.


국보로 지정된 어영당. 대사당이라고도 불린다.

안에는 국보로 지정된 구카이의 목상과 그가 가져왔다는 부동명왕상이 모셔져 있다.

이 두 상은 모두 국보지만 엄밀하게 보호되는 비불이다.


종파를 가리지 않고 숭배받는 구카이 덕분에 도지는 오늘도 건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