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논문

고석규, <19세기 전반 향촌사회 지배구조의 성격: 수령-이`향 수탈구조를 중심으로>, <<외대사학>>2

同黎 2012. 7. 28. 12:09

첫째, 이·향층에 편입될 수 있는 요호부민과 그렇지 못한 요호부민의 차이점은 어디서 기인하는가? 같은 요호부민층이 어떻게 분절되어 수령과 결탁할 수 있는 측과 그렇지 못한 측으로 나누어질 수 있는가? 만약 요호층의 이러한 분열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경제적 측면보다는 경제외적 강제에 의한 것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필자는 요호층이 분리되는 경제외적 강제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고 있다.

 

둘째, 19세기의 이·향층은 과거의 향리계층과 분절성을 강하게 가지는가? 필자는 조선후기에 고려부터 이어진 土姓의 吏族이 약화되고 양민층 출신의 假吏가 급격히 늘어나서 기존의 향리층을 대신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조선후기 가리층의 수가 증대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새로운 세력이 假吏로 등장하였다고 했을 때, 이것이 필자의 주장과 부합하려면 두 가지가 증명되어야 한다. 첫째, 假吏의 출신이 타향에서 이동해돈 이족이 아니라 양민이 대부분을 차지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평자가 검증할 능력이 없다. 둘째, 假吏는 기존의 이족과는 다르게 세습성을 강하게 지니지 못하고 주로 경제적 요인이나 여타 다른 요인에 의하여 자주 교체되거나 충원되는가? 이는 즉 당시 이·향층의 세습적, 친족중심적 성격이 해체되었는가와 같은 질문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필자가 접한 19세기의 사료는 이서층의 세습성과 친족중심성이 결코 해체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경아문의 이서층이 남긴 일기자료인 公私記考를 보았을 때, 이서층의 세습성은 결코 약화되지 않았다. 공사기고는 헌종 즉위년에서 고종 연간에 이르는 시기에 균역청과 호조의 서리를 지냈던 李某가 쓴 일기이다. 일기의 주인공은 아버지의 역이었던 균역청과 호조의 서리직을 그대로 세습하고 있으며, 이는 동생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李某의 경우 중앙 아문의 서리라는 점에서 지방 향리와는 다르다고 볼 수도 있으나, 중앙 아문의 서리 - 營吏 - 邑吏로 이어지는 커넥션이 주인공의 아버지대에서부터 이어지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지방 이·향층 역시 세습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었다.

 

한편 역시 18세기인 純祖代 경상도의 장수역(지금의 영천 지역)의 察訪으로 제수된 芳鉉黙(?~?)이 쓴 일기자료인 從仕日記(異題 南丞日記)를 보아도 영천 지방 일대의 驛吏는 대부분 같은 성을 지닌 친족관계를 보이고 있다. 자료의 한계는 있겠지만 새로운 이·향층이 등장하고 이들이 기존의 이·향층을 대신하는 현상이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또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었다는 내용은 평자가 된 19세기 사료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필자가 설명하고 있는 향리들 간의 이권을 둔 다툼이 바로 상이한 출신성분을 가진 신·구 이·향층의 투쟁이 아니라 향리 친족세력간, 혹은 향리 개개인간의 다툼일 수도 있는 것이다.

 

셋째, 이·향층의 계급분화 현상이 보이지 않는다. 필자가 이·향층의 계급분화를 보여주는 사료로 제시한 것은 동학농민군의 창의 격문에서 보이는 小吏라는 표현뿐이다. 그러나 필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이·향층이 수령과 함께 농민 수탈의 첨병이었다면 어째서 격문에는 이들이 등장하지 않고 수령과 방백에서 굴욕을 받는 小吏만 등장할 뿐일까? 제시된 자료만 보아서는 오히려 이·향층 역시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는 느낌이 강해게 든다.

 

넷째, 평자는 필자의 세도정치에 관한 평가에 동의하기 어렵다. 평자는 19세기 세도정치와 기타 조선사회에서 나타나는 제문제가 심각한 수준이었다는 것까지 동의할 수 있으나, 그 모든 원인은 세도정치와 그에 참여한 지배층의 사사로움에 돌리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조선 망국의 원인은 개개인이나 특정 세력의 부패에서 찾을 것이라기 보다는 국가 체제와 국가 운영 시스템의 실패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물론 그 안에서 개인의 부패 현상이 일어날 수 있지만, 그 부패가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 구조적 원인을 찾으려 한다면, 필자가 서술하듯이 단지 부패의 커넥션을 언급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마지막으로 都結에 대한 필자의 인식에 문제가 있다. 필자는 도결이 근대적 수취제도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으나 구조적 부패로 인하여 근대 재정의 단계까지는 가지 못한 것으로 보고 있다. 도결이 조세의 금납화라는 점과 여러 봉건적 부세를 분리하지 않고 한꺼번에 수취한다는 점 즉 부세가 노동 지대에서 화폐 지대로 이동했다는 점을 부각해 이러한 결론을 내린 듯하다. 그러나 외형이 같다고 하여 이를 근대적 수취제도로 평가하는 것은 동의할 수 없다. 도결이 여러 항목의 세금을 한꺼번에 거두기는 한 것이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봉건적 조세 제도가 잔존해 있었다. 근대적 경제 관계의 특징이 경제외적 강제의 배제라고 할 때, 도결은 아직 이러한 상태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근대적 재정의 필수 요소는 현재의 국세청과 같은 일괄적이고 중앙집권적인 징세기구이다. 그러나 都結은 필자도 언급했듯이 지방의 공동납에서 기인한 것이며, 수취 자체도 국가가 아니라 지방의 私적 영역에서 이루어졌다. 즉 중앙의 일괄적인 수취와 도결은 별 관계가 없는 것이다. 이를 보아도 필자가 도결을 근대적 수취제도의 맹아로 보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