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논문

조선시대 정치적 갈등과 그 해결 (이태진,『조선시대 정치사의 재조명』, 1985)

同黎 2012. 7. 24. 02:03

조선시대 정치적 갈등과 그 해결 (이태진,『조선시대 정치사의 재조명』, 1985)

요약발제문

1.

인간의 정치적 동물로, 인간의 정치적 행위는 역사의 동력이다. 이는 한국사에서도 예외일 수 없는데, 우리는 정치사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 이는 정치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그르치는 문제이다. 사화와 당쟁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당연시되고 있지만, 그러한 인식이 생긴 배경은 민족사에 대한 반성보다는 일제의 고의적 작위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즉 식민사관이 식민통치의 정당화, 영속화를 위해 한민족의 민족성을 당파적이라고 규정지으면 사화와 당쟁을 본보기로 든 것이다. 때문에 재검토의 필요성이 절실하다.

 

2.

기존의 연구에 의하면 16세기 ~ 17세기 전반기는 왕조 초기의 통치 기반이 무너져 혼란과 모순이 쌓이고 무능함이 왜란, 호란으로 드러난, 사회경제적 발전이 없었던 시기이다. 그러나 사화와 같은 정쟁이 격렬한 것은 사회변동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기는 경제적 발전이 16세기 사회의 가장 큰 변화는 상품유통의 발달이었다. 15세기의 연작법에 따른 농업경제력 신장에 기반하여 생산력이 증대되고, 이는 지방 장시를 발달시키고, 대외무역이 활발해졌다. 대외무역의 발달로 중국에서 비단과 원사를 수입하였고, 그 대가로 은을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 은광업이 발달하였다. 농업분야에서도 발전이 일어났는데, 수리기술이 발달하고 간석지가 개발되면서 생산량이 늘어났다. 이를 볼 때 17세기 후반의 상공업 발달은 16세기에 토대가 잡힌 것이다.

16세기의 경제변화는 초기성으로 인해 구조적 취약점이 많았다. 새로운 재부를 두고 사적 이익 도모에 관인의 직권이 남용 되었는데, 군역의 포납화와 공물의 방납화가 가장 대표적이다. 지금까지는 이를 제도 문란으로 보아 왔는데, 이는 16세기 상업 발달로 인한 제도상의 변화란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권력의 횡포는 왕자, 부마, 재상가 등이 지방관과 호강들의 협조아래 간석지 개발에 나서는 대에서도 드러난다. 중앙권세가들의 지방사회 장악은 경재소와 유향소라는 제도적 장치를 통해 보장되고 있었다. 왕조 초기 중앙집권적 지배체제 확립의 일환으로 성리된 이 제도는 그러나 이 시기에는 권세가들이 지방세력과 유착하여 지방사회 기반을 확대하는 수단이 되었다. 새로운 재부 획득에 관권이 남용되는 형세 아래 정치적으로 척신의 비중이 높아졌다. 지속적인 사익을 보장 받기 위해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은 척신에게 관인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재부는 권세가에게 편중되었고, 상인층에서도 중앙권력과 쉽게 연결될 수 있는 경중사고에게 절대적으로 유세하였다. 정치와 상업의 유착관계는 사회적, 정치적 대립 갈등을 격렬하게 불러왔다.

 

3.

위 같은 상황이 계속되면 파국이 될 것인데, 이 때 사림계의 비판 활동은 유의미했다. 사림은 15세기 말엽부터 상용된 표현으로 재야지식인층을 가리키는 말이다. 생인·진사층이 그 중심이며, 사장보다는 경학을 중시 여기고, 기본정신은 성리학, 경제적으로는 재지 중소지주적 기반을 가지는 부류가 다수였다. 조선 초기 현직을 얻지 못한 중소지주층을 가르키는 품관이라는 단어가 15세기 말엽 사림으로 바뀌는 것은 그 계층 내 지식인화가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사림의 대두는 정치여론권의 형성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들이 관인으로 진출하면서 그들의 소견을 반영했다. 그 시작은 성종 초 김종직 등 영남사류의 등용에서 시작된다. 이들은 수기치인을 통한 공도 실현이라는 입장을 가졌는데, 이는 훈척에 대한 비판적 의미가 강했다. 이들은 사회질서를 재확립시키기 위한 방법을 모색했는데, 김종직 계열의 향사례·향음주례 보급운동이 그것이다. 이는 향촌 사회에 윤교적 윤리를 보급하고자 하는 것으로, 세조대 혁파된 유향소를 부활시켜 두 의례의 중심으로 삼고자 하였다. 이러한 운동은 훈구대신들의 반대에도 성종 19년에 결실을 보는데, 결국 복원된 유향소를 경재소를 통해 훈구대신이 장악함으로써 혁파 당시와 다름이 없어졌고, 결국 사림계에서 전면적인 혁파를 주장하게 되었다. 사림계는 훈척의 비리를 공격하는 언론활동으로 방향을 바뀌게 되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사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중종대 다시 진출한 사림계는 향약 보급운동을 벌인다. 왕의 신임을 바탕으로 향약운동은 전국 각지에서 성과를 거두고 훈척계에 위협이 되었다. 향약운동은 경재소-유향소 체제를 대체하여 해체되는 향촌 질서 재확립의 목적으로 하며 향사례·향음주례 운동보다 더 적극적인 것이었다. 이는 중종 10년대 초반부터 제기되는 경제적 문제들에 바탕하는데, 이 때 민채납곡제가 공인되고, 권세가에 의한 간석지 개발이 경기를 벗어났으며, 면포의 저질화가 논란이 되었다. 향약은 이러한 난국 타계 의도가 들어있는 것이다. 사림계는 직접적인 경제 시책도 가지게 되엇는데, 양잠 장려, 수리 강화, 향촌의 안정 등이 그것이다. 또한 훈척 권세가의 간석지 개발을 통한 토지 확대에 제동을 걸고자 한전론을 제기하고, 유통수단의 개선을 위해 화폐 주조를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 활동에 대한 반격으로 기묘사화가 일어났고, 연이은 사화로 사림계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들은 지방에서 서원 건립 운동을 통해 서원이라는 구심체를 얻었고, 정치적 입장을 학문적 차원으로 승화시켰다. 이황, 이이의 등장은 이러한 시대적 여건에서 획득된 것이다.

요컨대 경제 변동으로 촉발된 정치적 갈등 대립에서 공인을 추구하는 사림계가 성리학을 매개로 그들의 정치적 입장을 학문적, 사상적 차원에서 심화시켜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4.

16세기 척신정치는 미혼인 선조의 즉위로 외형적으로 종식된다. 이 때 재야에 있던 사림계가 중앙으로 진출함으로써 척신의 출현이 저지되는 붕당정치로의 과도기가 설정된다. 선조 광해군 연간이 그것이다. 선조 즉위 후정국은 알려진 것 처럼 사림계가 완전 장악한 것아 이며, 혁명적 수단에 의한 정권 진출이 아니므로 상당수 구신류가 남아있었다. 선조 8년 무렵부터의 동서분기는 이런 과도기적 조건 아래서 구체제 요소의 척결 문제를 둔 의견 대립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동서분기에 이어 남북분기의 연쇄적 분열이 일어난 건 타기 대상인 구신이 자기 보전을 위해 오히려 강경론에 끼어들어 구성원상에 혼란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도기적 양상은 인조반정을 계기로 서인·남인의 상호 비판, 공존 체제로 일신한다. 이 때 정파는 학파적 조건을 구비하게 된다. 이 무렵 양당은 구양수나 주희의 군자소인론의 한계를 지적할 정도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산림을 통해 정치 여론이 수렴되었고, 여론의 진원지인 서원 또한 정제성을 가지고 발달했다. 때문에 척신이 대두되지 않은 것이다. 사회경제적으로도 향촌별로 향약질서 확립이 도모되고, 방납이 대동법으로 해결을 보는 등의 성과를 가져왔다. 대동법은 실학적 정책이 아니라 상인과 권세가의 결탁을 비판한 사림계 인사들의 대안이었다. 또한 상업 자체를 부정하거나 억제하려고 하지 않아 16세기의 장시는 그대로 존속하였다.

요컨대 17세기 전반의 사림정치는 16세기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는데 초점을 두었고, 성리학의 이념 아래 붕당정치의 모형을 얻었다는데 의의가 있다. 흔히 예론을 혹평하지만 예론은 성리학 사회의 규범으로 소흘히 할 수 없는 것이다.

 

5.

17세기 후반 붕당간 공존의식이 무너지고 일당전제의 성향을 띄게 된다. 이 원인은 사회경제적 변동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인데, 대동법의 실시로 상업경제가 확대 발전하면서 질·양에서 발전이 컸다. 17세기 후반부터 붕당정치가 파란을 일으킨 건 새로운 경제변동에 직면해 명분론 위주의 종래 성리학적 정치 운용이 한계에 부딪혔음을 뜻한다. 확대된 재부를 둘러싼 갈등이 공존의식에 균열을 일으켰던 것이다. 재부 앞에서는 개인이나 가문의 입장이 우선시되는데, 척신 벌열이 정치세력으로 붕당을 대신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따라서 이 때 서원은 정제성을 잃고 남설되었다.

숙종·경종 연간의 격렬한 정쟁은 영조·정조대 왕정체제 강화로 일단 제어될 수 있었다. 이 두 왕대에 지배층 사이에 利害 성향을 사회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려는 실학 같은 시도가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미흡했고, 때문에 왕권이 미약해지자 세도정치가 등장한 것이다. 19세기 세도정치는 사회적 기반을 결여하고 귀족이 왕정을 대신해면서 개인과 가문을 우선시해 유교적 국가관에서도 후퇴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당연히 혼란과 반발이 생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