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논문

양안의 연구 (김용섭,『사학연구』7·8, 1960)

同黎 2012. 7. 24. 02:05

양안의 연구 (김용섭,『사학연구』7·8, 1960)

토론문

김용섭의 본고는 한국사에 있어서 내재적 발전론의 가장 대표적인 저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본고에서 이야기하는 내재적 발전론의 가장 큰 특징은 농가, 농업, 농민의 문제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중세사회의 해체기인 조선후기 이루어졋던 내재적 발전의 원동력이 民으로부터 말미암았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인류사의 보편적인 발전단계” 중 하나인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 즉 국가의 통치력이 사실상 해체되고 신분제가 동요되면서 피지배계층이 성장하고 그들의 주도에 의해 근대가 열리게 된다는 세계사적 흐름이 조선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김용섭이 연구한 경제사는 조선이 중앙집권국가였음을 인정하고 국가재정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현재의 경제사 연구 경향과는 많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양안의 연구>의 결론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양안의 기주는 실질적인 토지 수유자로 볼 수 있다. 2. 조선후기 토지의 소유관계와, 농업수익은 신분관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높은 신분일수록 토지소유와 농업수익에 있어서 유리하다. 3. 그러나 토지 소유에 있어서 양반층에서도 소농, 빈농이 존재하고 평민, 상민층에서 신분제를 넘어 각각의 상위 계급을 상회하는 이들이 존재했다. 4. 같은 양반층이라도 직역에 따라서 토지소유의 차이가 있었으며 일반적으로 높은 직역에 있을수록 토지소유에서 유리하지만 業武와 幼學의 경우와 같이 직역과 토지소유 실태가 반대로 가는 경우도 있다. 5. 말단신분층이나 상민층도 재력을 통해 신분변동이 가능했다. 6 또한 토지소유에 있어서 부농층은 적고 소농층은 많은 계층분화(양극화)가 심화되었다. 적은 부농층은 전체 토지의 많은 양을 차지하였고, 많은 소농층은 전체 토지의 적은 양을 차지하면서 극도로 영세화 되는 가운데 많은 농민들이 빈농층으로 집중되었다. 7. 같은 신분 내에서도 토지 소유에 따라서 계층 분화가 이루어졌다. 8. 대부분은 농민은 그 소득이 국가에 내는 각종 조세와 다음 농사에 쓸 종자를 마련하는데에도 부족했으므로 생계유지를 위한 다른 방법을 찾지 않으면 안됐다. 9. 조선후기의 신분제 동요에는 농지소유의 계층분화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영세소농층의 생계를 위한 여러 움직임 (상업 종사 등) 도 고려해야 한다.

본고가 조선후기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만큼 본고에 대해서는 본고가 이미 송찬식, 이영훈 등의 세세한 비판이 가해진 바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선행된 비판과 관계없이 몇 가지 지점을 지적하고 싶다. 본고의 문제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는데, 사료비판의 문제가 첫 번째이고 관점의 문제가 두 번째이다. 사료비판의 문제는 곧 본고의 기초사료가된 양안의 신뢰성 문제인데 여기에는 이미 기존학계에서 제기했듯이 몇 가지 의문점이 있다. 첫 번째 문제는 누결·은결의 문제이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양안의 연구>가 가지고 있는 가장 심각한 사료비판 미비의 지점은 누결, 은결의 문제에 있다. 누결과 은결은 단순히 양전사업에서 누락되고 은닉된 결수를 의미하지 않는다. 양전사업에서의 누락과 은닉 자체가 신분과계로 형성되는 권력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은결과 누결이 드러나지 않은 양안을 통계처리해 얻어진 결과를 그대로 해석한다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둘째는 토지의 등급문제인데, 이는 첫 번째 문제와 연결된다. 즉 양안의 작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토지의 등급문제였는데, 김용섭도 지적하고 있듯이 은결·누결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양전사업 당시 신분에 따른 권력관계가 사업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면 양반 소유의 토지는 상대적으로 그 등급이 낮게 매겨질 수 있는 것이다. 김용섭의 증명에 따르면 상층 신분일수록 토지소유에 있어서 유리한 위치를 지니게 되는데, 만약 양안 작성 당시 지배층에게 유리하게 토지 등급이 매겨졌다면 양반의 농업 소득은 김용섭의 파악보다 훨씬 상향 조정되어야 한다. 즉 김용섭이 세심하게 증명한 신분제의 동요가 그 정도를 의심받는 것이다.

셋째는 기주의 문제이다. 기주가 과연 지주인가 아니면 대록된 인물인가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논쟁이 있어왔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양안의 기록에 국가가 개입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경우는 두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첫째는 김용섭이 스스로 이야기했듯이 내수사나 궁방 같이 실 토지소유주가 투탁하는 경우이다. 둘째는 기주가 실소유주가 아니라 실납세자인 경우이다. 두가지 모두 양안상 기주와 실소유주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인데, 특히 두 번째 경우는 양안의 본래 작성 목적을 음미해보아야 할 필요성을 일깨워주는 문제라고 하겠다. 즉 양안은 국가가 民의 토지 소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작성한 것이 아니라, 토지에 조세를 부과하기 위해 작성한 것이다. 설령 토지소유관계가 정확하지 않더라고, 실제로 누가 국가에 조세를 부담하는가만 파악하면 되는 것이다. 즉 양안은 개인과 기업의 사적재산 소유를 보장해주기 위한 근대적 등기제도와는 전혀 목적을 달리하는 자료이다. 따라서 기주·진주가 반드시 토지 소유주를 나타낼 것이라는 김용섭의 주장은 재검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넷째는 양안의 작성시대 문제이다. 즉 본고의 사료가 되는 양안은 기본적으로 숙종 재위 후반부 즉 18세기 초반에 이루어진 경자양전 때 작성된 것이다. 따라서 본고의 결과는 즉 18세기 초반 혹은 그 이전부터 이미 토지소유의 양극화와 신분제의 동요가 시작되었다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결론이 과연 타당한가? 김용섭도 인정하듯이 경자양전이 이루어진 시기는 경제 질서가 비교적 안정을 찾아가는 시기였다. 오히려 극심한 사회 동요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반에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100년 이상의 공백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19세기 조선이라는 시스템의 붕괴가 17세기 후반 ~ 18세기 전반에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인가? 김용섭의 연구가 기타 재정사, 정치사와는 어떠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이 점에 대해서 <양안의 연구>는 대답하지 않고 있다.

기타 직역에 대한 문제도 존재한다고 보이는데, 유학이 과연 상층 양반층에 속하는지, 피지배계층이 교생이나 원생의 직역을 지게 되는 것이 신분상승의 목적이었는지 아니면 그들에게 강제되는 것이었는지 명백히 파악해야 할 것이다. 공명첩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기존까지 피지배계층의 신분상승 노력으로 알려져 왔던 부분들이 실제로는 국가의 강제적 부과로 밝혀진 바가 있는 만큼 양안의 해석하는데 있어서도 이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조선후기사에 대한 김용섭의 관점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김용섭은 하부구조에 의하여 역사발전이 추동된다는 전제 아래, 일반적으로 신분제에 의해 경제력이 좌우되었음을 증명하여 조선의 봉건적 성격을 드러내고, 동시에 토지소유와 그에 따른 소득이 양극화됨에 따라 피지배계층에서 지배계층을 능가하는 경제적 부를 지닌 이들이 등장하고 이들이 상위계층에 진입함에 따라 봉건제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조선이 근대로의 이행을 준비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시각은 서양사(유럽사)에 기반한 단계적 역사발전론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때문에 김용섭의 한국사 고유의 특징적 지점을 고려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과연 김용섭이 추출한 신분제와 일치하지 않는 토지소유관계 즉 천민이 부농층에 해당하는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 신분제의 동요로 연결되는 현상인가라는 문제이다. 김용섭의 분석이 의미를 가지려면 조선후기의 천민 토지 소유가 조선후기만의 특수한 문제여야 한다. 그러나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노비의 사적재산 소유는 본인이 아는 범위안에서는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국법이 허가하는 바였다. 즉 천민이 토지를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그 양이 획기적이지 않는 한 이것이 신분제의 동요로 연결될 수는 없는 것이며, 이미 조선전기부터 존재해왔던 토지소유관계인 것이다. 서양사에서 농노가 독자적으로 토지를 소유하는 것은 기존의 질서에 균열을 가하는 현상이 될 수 있겠지만, 조선의 노비는 서양사의 농노와는 달랐든 만큼 그 의미를 동일하게 적용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상민층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경제력과 향촌사회 지배력, 혹은 신분관계에서 발생하는 권력이 즉각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현대 자본주의제 하에서나 가능한 일이며, 오히려 사족층이 자기 정체성을 강화해가고 성리학적 지배질서가 지방에까지 뿌리내리던 상황이라는 점을 고려해볼 때 김용섭의 주장은 사회사적 관점과 연결시켜 재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설령 상민층이 경제적인 부를 바탕으로 양반의 신분을 샀더라도 과연 양반행세를 하고 살 수 있을 것인지 또한 실질적인 사환권이 주어질지는 미지수이다. 즉 서양사에서 일부 부르주아들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관직을 사고 실제 귀족이 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양반 신분을 가탁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신분질서”가 무너진 갑오경장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조선의 개인은 그 이전까지는 대부분 신분제의 벽을 넘지 못했던 것이다.

셋째, 조선후기 경제사는 국가를 생각하지 않고는 그 면모를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는 김용섭의 본고에서도 부분적으로 확인되는데 예를 들어 1. 품관이 유학에 비하여 월등하게 경제적 우위에 있다는 점 2. 천민층의 토지소유에 있어서도 私奴婢보다 寺奴婢가 유리했다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국가가 토지 전체를 장악하고 소유권을 행사하지는 못했지만 상당한 양의 토지를 직접 소유하였다. 결국 경제변동에 있어서 국가라는 변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최근 경제사 연구 동향이 주로 재정사에 집중하는 것도 이러한 면이 고려되어서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중세-근대로의 이행은 국가 권력이 약해지는 바탕 하에서 이루어진다. 조선의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였다. 김용섭은 이러한 조선의 특징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김용섭은 한국사를 보편적 역사발전 단계로 설명하려 시도하였기 때문에 위와 같은 문제가 발견되는 것이다. 유럽적(영국적) 모델이 아닌 조선의 특징을 찾아내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세계사적 관점에서의 조선사 연구도 가능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