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논문

李基白,「高麗 貴族社會의 形成」,『한국사』4, 국사편찬위원회, 1974.

同黎 2012. 7. 23. 14:10

李基白,「高麗 貴族社會의 形成」,『한국사』4, 국사편찬위원회, 1974.

 

조선후기

석사3 박세연

 

1. 成宗代의 政治的 支配勢力

고려 초기 사회는 호족연합형태에서 귀족사회로 발전해갔다는 점은 대체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그 구체적인 모습이 드러나지는 않았다. 본고에서는 10세기 말에 있어서의 귀족사회 형성과정에 초점을 두고 살펴보도록 하겠다.

고려 건국에 호응한 호족세력과 개국공신은 光宗으로 인하여 억압 받아 거의 뿌리가 뽑혔다. 최승로는 “살아남은 舊臣이 40여 명뿐이다.”라고 하였다. 광종은 대신 후백제·발해 출신 등 새로운 인물들을 등용하였다. 광종 사후 景宗이 복수를 허락하면서 광종의 개혁에 참여했던 인물들이 제거되었다. 광종이 죽은 후 개국공신계열이 再登用된 것으로 보인다. 荀質 ·申質·崔知夢(907~987)·朴良柔(?~?)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그러나 광종대에 워낙 많은 이들이 축출되어 이들의 세력이 크지 못하였다. 대신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하였다.

성종대 정치세력을 살피기 위해서 우선 성종의 配享功臣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이들은 崔承老·崔亮·李知白·徐熙·李夢游의 5인이다. 최승로(927~989)는 통일 직후부터 활동하다가 최지몽 사후 문하시중으로 수상직을 물려 받은 인물로 신라 육두품 출신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성종의 정치노선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성종 8년 사망하고 있어 성종 전반기에 활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최량(?~995) 역시 신라 육두품 계열로 성종대에 비로서 영달하였다. 이지백(?~?)은 출신을 알 수 없으나 최승로와 달리 성종의 유교정책을 비판하는 입장에 서있었다. 서희(942~998)는 이천의 호족 출신으로 성종 때 거란의 침입을 막아낸 후 극진한 존경을 받았는데, 이지백과 더불어 최승로 등에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이몽유(?~?)는 출신을 알 수 없으나 최승로와 가까운 세력이 아니었나 싶다. 요컨대 전반기에는 신라 육두품계열의 유학자가 지배적이다가, 후반기에는 近畿지방의 호족 계열의 세력이 성장해 대립하고 顯宗代에는 후자가 성장하여 갔다. 이와 같은 결론은 내사문하성에서 활약하던 이들에 관한 고찰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간쟁·봉박을 맡은 내사문하성 省郞과 감찰을 맡은 어사대에서 활약하던 인물들을 검토해보겠다. 최량·이지백·李陽·金審言·鄭又玄(?~?)·李周憲(?~1022) 등이 대상이다. 이양(?~?)은 유교적 정치이념을 지니고 있었으며 최승로와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김심언(?~1018) 역시 마찬가지이며 신라 육두품 출신인 崔暹(?~?)의 사위였다. 정우현은 성종 때 과거에 합격한 신진관료로 최승로·이양·김심언 등과는 입장을 달리한 것으로 보이며 성종이 그를 벌주려 했을 때 서희가 비호하였다. 이 밖에 이주헌도 서희와 입장을 같이 한 것 같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신라 육두품 계열의 세력은 주로 내사문하성에서 활약하는 반면, 지방호족 계열은 어사대로 진출하는 것이 주목된다. 그리고 전반기에 주로 전자가 활약하고, 후반기에 후자가 진출하는 것은 내사문하성의 경우와 같다.

다음으로 어사도성의 요직을 지낸 인물들을 살펴보면 民官·選官 등 관부는 주로 최승로 계열이, 兵官·工官·刑官 등의 관부는 주로 서희 계열이 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중추원의 관리로는 중추원사를 지낸 韓彦恭(940~1004)과 좌승선을 지낸 趙之遴(?~1011)이 있는데, 그들는 근기 지방의 호족 계통으로 보인다. 따라서 중추원은 근기 호족계열이 우세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知貢擧 중에는 단연 육두품 출신들이 주를 이루었다.

종합해보면 성종대 정치세력은 유학을 존중하는 유학자 계열과, 전통적 사상을 존중하는 행정관리 계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자는 성종의 정치이념 뒷받침해주고 정책을 결정해 주었으며, 후자는 행정을 담당하는 정책을 비판하는 입장에 놓였다. 재상직에는 양자가 모두 임명되었으며 대체로 전자는 전반기에 후자는 후반기에 우세하였다. 전자는 신라 육두품 계통일 주류를 이루고 일부 후백제 계통이 섞인데 비해, 후자는 호족 출신이 주가 되었다. 그리고 후자의 세력이 穆宗·顯宗의 시대에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추즉된다. 과거급제자의 수는 전자가 더 많으나 큰 의미를 지니지는 못한다.

 

2. 科擧制와 支配勢力

그렇다면 위와 같은 지배세력의 분포는 관리등용법과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과거제는 고려에 들어와 처음 실시되고 성종이 특히 과거를 중시하였으며, 과거제를 통해 고려가 관료제사회라는 주장이 나왔으므로 성종대 과거제를 정치세력과 연결시켜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우선 성종대 進士·明經의 兩業을 살펴보면 성종은 거의 매년 과거를 시행해 16년 동안 119명 가령을 급제자를 뽑았는데, 이는 광종·경종에 비하며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특히 성종 8년(989)을 고비로 급제자 수가 급증하고 있으며, 특히 명경의 급제자가 도합 3명에서 32명으로 급증하였고, 진사의 경우도 4배 정도 증가했다. 그 이유는 우선 관직의 수가 늘었다는데 있는데, 성종 14년(995)의 관제 개혁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나 그것으로 설명이 된다고는 말할 수 없다.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은 성종 8년 최승로의 사망이다. 동왕 7년부터 그가 치사를 하지만 반려 당하는데 이는 그의 정치적 퇴세를 암시하는 것이다. 시기를 기준으로 경주·나주 출신의 유학자 세력은 점차 퇴조하고 근기 호족 출신의 관료들이 주도권을 잡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세력의 변동에서 관리 등용도 일정한 변화가 일어나 호족 출신들을 더 등용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이전까지 대단히 엄격하였던 과거가 다소 완화되어 과거급제자가 대량으로 늘어난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이즈음 12목이나 여러 주부의 학생에 대한 교육에 더욱 각별한 관심이 나타난다는 점이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 해준다. 이는 지방호족의 자제를 과거를 통해 등용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따라서 같은 과거급제자로 하더라도 그들의 사회적·정치적 성격을 같이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성종대 주도적 위치에 있던 인물 다수가 과거관료라는 점에 입각해 이 시기가 관료제 사회이며 귀족제가 아니라는 설에 찬성할 수 없다. 귀족제사회나 관료제사회 모두 관리등용을 위한 국가고시는 시행될 수 있으므로 과거제의 사회적 기능을 면밀히 조사할 필요가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과거 응시의 자격이 문제가 된다. 靖宗代에 정해진 규정에 따르면 향·부곡·악공·잡류의 자손 등 과거에 응시할 수 없는 사회적 신분이 있었다. 비록 뒤에 악공·잡류의 응시가 허락되고 양인 농민의 응시 자격이 있었다고 보아야 하지만 과연 이들이 학문을 하여 응시할 수 있었을까? 비록 국자감시에 白丁·庄丁의 응시 자격이 있기는 하지만 국자감시는 제술·명경업에 응시할 자격을 주는 예비시로 제술업감시에는 백정과 장정이 응시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명경업감시의 경우 합격자가 극소수에 불과하므로 사실상 백정·장정의 급제는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文宗 2년(1048)에 州縣에서의 응시 자격을 副戶長 이상의 孫이나 副戶正 이상의 子로 한정하는데, 이는 향리층에서도 일정 선 이상만 과거에 응시할 수 있다는 것으로 양민의 자손이 응시할 가능성은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중앙관리나 지방향리의 자손이 응시자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성종대 과거합격자들의 경우에도 볼 수 있는데, 성종대 정치적으로 유력한 인물이었던 최량·서희·최섬·박사유 등 8인 중 전체가 중앙관리 혹은 지방호족의 子 이었다. 성종대 과거에 급제한 이들도 대부분 중아관리나 지방향리의 가문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성종대의 과거제는 결코 신분을 초월하여 실력만으로 관리를 등용하는 제도라고 할 수 없다. 과거가 전문실력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교양시험이라는 특징과도 결부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는 사회·정치·경제·문화적으로 유리학 지위에 있는 자들이 특권을 배타적으로 공유하였던 하나의 방법이었다. 다만 정치세력과 결부되어 약간의 변화와 확대를 초래하기도 하였다고 보인다.

 

3. 敎育政策과 地方豪族의 中央官僚化

과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교육이다. 성종은 교육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여러 州郡縣의 자제를 서울에 와서 공부하도록 하였다. 이는 아마도 지방관이 파견되는 성종 2년(983)에 이루어졌다고 생각되는데, 2년 후 상경한 이들 중 고향을 생각하는 이가 많았기 때문에 많이 자제들을 돌려보냈다 .대신 다음해 12목에 經學博士와 醫學博士를 파견하고, 지방관으로 하여금 학문이 훌륭한 자를 천거하도록 한 것이다. 지방의 교육 진흥을 위한 정책은 계속되었고, 동왕 11년(992) 지방에 서재와 학사를 넓혀 짓고, 전장을 주며, 국자감을 창건하는 것으로 학교제도를 마무리 지었다.

그런데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지방향리의 자제들에 대한 교육에 큰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다. 지방향리 자제들을 상경하게 한 것에서 시작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내면서도 경학·의학박사를 보내 교육을 담당시킨 것이다. 또 성적이 좋지 않으면 경학박사의 임기가 끝나도 책임을 완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향리 자제에 대한 교육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여러 호장의 자제 중 극히 일부분만 상경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정책은 과거시험을 통해 지방향리의 자제들을 관리를 등용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일단 과거에 합격하면 그는 지방에서 率家하여 상경하였는데, 그 자손들은 중앙관직을 가지는 것이 유일한 업이 되었다. 그러므로 성종대 향리 자제들에 대한 교육의 목적은 그들을 중앙귀족화하려는데 있을 것이다.

 

4. 中央官僚의 貴族的 性格

과거제와 그를 위한 교육정책은 중앙관리나 향리가 관직을 독점하는 특권을 뒷받침해 주는 제도였다. 때문에 이들이 귀족화하리라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따라서 상경하여 중앙관리로서 세계를 개척하여 그 길을 업으로 삼게 되면 이들은 귀족이며, 지방에 사심관으로 약간의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더라도 호족일 수 없다. 이들의 중앙귀족으로 본향의 동족과는 신분적 격차를 보이고 있으며, 이들이 왕경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특권을 박탈당하는 일종의 형벌이 되었는데 歸鄕罪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고려 중앙귀족의 신분을 표시할 때 내세우는 本貫은 어떤 의미인가? 이는 고려가 신라와 달리 지방에서 성장한 호족적 전통을 지닌 異姓貴族社會였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문벌이 유효하게 되면서 자신의 가문을 구별하고 자신의 특권을 드러내려는 의도가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특권의식을 지닌 귀족은 특권을 보장하기 위해 여러 방책을 강구하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음서제이다. 음서제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목종 즉위년(998)에는 이미 실시되고 있다. 그런데 이는 5품 이상의 子에게 주는 것으로 이는 육품 이하와 구별하여 일정한 특별대우를 하는 고려 음서제의 전형을 보여준다. 특히 성종대에 오품 이상에 있어서 많은 특별대우의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성종 8년 오품 이상에 있어서 반드시 王旨를 거치게 한다는 인사 규정은 음서제와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즉 과거급제자를 양적으로 증가시켜 지방향리 자제들의 진출을 확대한 것과 더불어 중앙귀족화한 오품 이상의 고급관리의 자제에게도 음서의 특권을 주려 한 것으로 보인다. 즉 과거가 지방향리층까지 포함하는 넓은 특권층의 관계진출 통로였다는 음서제는 보다 제한된 특권층을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중앙귀족의 자제는 왜 과거에 응시했는가? 이는 음서제의 제약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음서의 특권은 5품 이상에게만 한하는 것으로 6품 이하의 子는 과거를 보아야 했으며, 음서는 1子에 한다는 것으로 다른 아들은 과거를 보아야 했다. 또한 과거를 통해 학문적 교양을 자랑하고 출세를 촉진시킬 수 있었다. 이는 상당한 사실로 귀족제사회설에서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과거제를 들어 고려가 귀족제사회가 아니라는 주장은 납득이 가지 않으며, 도리어 과거제뿐만 아니라 음서제에 의해서까지 신분적 특권을 유지하려 하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5. 執權的 貴族政治의 理念

성종 전반기 정치이념을 제공한 것은 최승로 등의 유학자 계열이었다. 이들에 대한 검토를 통해 성종대 정치적 성격을 살펴보자.

최승로의 상서를 살펴보면 그는 역대 왕의 치적을 검토하면서 우선 왕권의 안정 즉 안정적인 왕위계승을 강조하고 있다. 다음으로 그는 국왕의 전제보다 귀족의 의견을 존중하길 바라고 있다. 대표적인 내용이 光宗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는 정치적 지배층인 귀족세력을 안정시키는 방향을 모색하고 있던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28조의 시무책을 올렸다.

28조의 시무책 중 22조가 전해지는데,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불교에 대한 비판이다. 특히 그는 功德信仰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그는 공덕이란 기대할 수 없는 것이며 유교적 도덕을 따르면 복록이 스스로 온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최승로는 現世를 중시하는 유교적 입장에서 治國하기를 바랬으며, 이러한 구성은 중앙집권적 정치형태로 나타난다. 즉 지방관 파견이나 가옥제도를 정비하여 호족이 큰 집을 짓지 못하게 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중앙정부의 힘을 길러 지방호족의 독자적 지배력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중앙집권적 통치기구의 운영은 국왕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했다. 그러나 국왕이 최고책임자라고 해서 왕권이 부제한 비대해지는 것을 용납한 것은 아니었다. 시위 군졸과 궁중 노비·구마의 수를 줄이라는 요구가 그러한 점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왕이 신하의 의견에 귀 기울일 것을 강조하고 있어 왕권의 전제화를 억제하려는 의도를 보여주고 있다.

대신 그는 귀족관료층의 권리를 보장하는 여러 가지 건의를 하고 있다. 삼한공신의 자손을 등용하자는 주장이나, 재직자와 庶人을 구분하는 의복제도를 정비할 것, 존비에 따른 가옥제도, 奴·主관계의 구분을 엄격히 할 것 등은 모두 귀족관료의 권위와 특권을 옹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승로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중앙집권적 귀족정치의 실현을 목표로 하였다. 이에 대해 최승로가 귀족이 아니더라도 제도와 기구에 의한 정치를 할 수 있는 국가기반을 확립하고자 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그의 관심은 특수한 신분층에 집중되었으며, 그가 말하는 관료는 귀족관료였다. 이양과 김심언의 상서도 중앙권력의 강화와 유교적 이상 군주상의 강조라는 점에서 최승로의 상서와 일치한다.

성종은 이러한 건의를 받아들여 실천한다. 요순시대와 같은 유교적 이상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유교적 극가의례를 정비하고, 孝를 강조하였다. 중앙집권적 정책을 수행한 것도 최승로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이다. 성종은 지방호족의 독자성을 허락하지 않고 전국토를 왕의 통치 하에 두려 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마련된 중앙집권적 정치규범들은 호족 출신의 귀족관료들에 의해서 그대로 지켜졌던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검토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려고 한다.

 

1. 필자는 최승로의 致仕와 그 반려를 최승로 세력의 퇴조로 보고 있는데, 동의하기 어렵다. 최승로가 치사를 요청하고 다음해 사망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치사는 단순한 건강 상의 문제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가 치사를 요청해도 이 것이 계속 반려되고 있는 것은 신하의 요청에 대한 왕의 반대가 아니라 최승로가 여전히 존중받고 있다는 것으로도 설명될 수 있다. 이것을 근거로 정치세력의 교체를 이야기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최승로의 치사 이외에 다른 결정적 근거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성종 전후반기 정치세력의 갑작스러운 교체를 설명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보인다.

2. 성종대 과거급제자의 급증 현상에서 왕은 어떤 위치에 처하여져 있는가? 필자의 설명대로라면 고려의 제도와 정책은 왕을 제외한 주도적인 정치세력에 의하여 수정되고 있다. 그러나 제도와 정책의 최종결정자는 왕이며, 특히 성종은 정책들을 시행하여 결코 약하지 않은 왕권을 보여주고 있는 왕이 단지 지배적 정치세력의 교체 때문에 정책을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바꾸고 있다는 것은 수긍하기 어렵다.

더불어 필자는 성종 8년의 변화를 오로지 정치세력의 교체와 정국운용상의 문제에서만 찾고 있는데, 정치세력의 교체가 무엇인지 밝히지 않음은 물론, 제도의 변화를 지나치게 정치공학적으로 접근하고 있어 귀족제사회라는 전체 틀을 설명하는데는 약간의 한계를 보이고 있지 않은가 한다.

 

3. 필자의 설명에 따르면 지방향리에 대한 교육과 과거제도는 지방향리를 중앙귀족화 시키기 위한 의도가 담겨있다. 그런데 드는 의문은 지방향리는 중앙귀족이 될 수 있는 기회에 적극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필자로 서술하고 있지만 수 많은 향리의 자제가운데 단 260명만이 상경하여 공부하고, 그중에서도 200여명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만다. 혹 향리가 중앙과 지방이라는 선택지에서 지방을 선택하는 것이 더 유리한 상황이 아니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4. 필자는 성종대 전반기의 지배세력이었던 최승로 등 신라 육두품 출신 유학자 계열이 구상했던 집권적 귀족정치의 이념이 후반기의 지배세력인 서희 등 지방호족 세력에게 그대로 이어졌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설명하고 있듯이 두 세력은 상이한 기반과 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설명 없이 성종 전반기의 정책이 그대로 이어졌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은가 싶다. 특히 필자의 설명대로라면 성종 전후반기 정치세력의 교체의 과거제의 성격 변화 등 인사제도 운영상의 변화까지 보여주고 있는데 차이가 있는 정치세력간의 정책이 그대로 이어졌다는 것은 명확한 근거 없이는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5. 필자가 이야기하고 있는 과거제의 제한적 성격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 동의한다. 그러나 국자감시의 규정에서 보이듯이 고려의 과거가 표면적으로는 양인 전체가 응시 가능하다는 명목을 띠고 있지 않았는지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과거제의 실질적 운용이라는 부분이 중요한지만, 依例的인 수사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만약 실제로 의례적 수사에 해당하는 인물이 급제했다는 그 상징적인 의미 또한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음서로 관직에 진출한 사람이라도 가급적 과거를 보는 것 또한 과거의 상징적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을 필자가 지나치게 간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6. 마지막으로 필자가 사용하고 있는 귀족관료라는 용어의 문제이다. 필자가 귀족관료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제도를 추구하는 귀족이라는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서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귀족과 관료가 명백히 다른 경로를 통해 진출하는 지배집단을 이야기한기 때문에 귀족관료라는 용어는 재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