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석사로 가는 길

석사로 가는 길 4 - 세번째 원고

同黎 2014. 1. 9. 02:45

17세기~18세기 초반 僧侶의 國役體制 편입 과정

 

석사수료

박세연

 

서론

1. 壬辰倭亂 이후 국가의 僧侶 활용

  1) 壬辰倭亂 이후 力役의 승려 동원

  2) 官營手工業의 쇠퇴와 寺刹手工業의 확대

2. 17세기 중반 僧役의 제도화

  1) 남한산성 義僧防番制의 성립

  2) 國家財政의 變通과 折受屬寺의 革罷논의

3. 승려의 국역체제 편입과 지방 부속

  1) 僧侶의 戶籍 등재와 승려의 半公民化

  2) 寺刹의 郡縣 附屬과 寺刹役

결론 : 지방사회에서의 승려와 사찰

 

서론

조선의 국가재정은 田稅·徭役·貢物이라는 세 요소의 수취와 신분관계에 기반한 身役 기초하여 운영되었다.1) 이 몇 가지 재정 수취 체계는 각기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토지를 소유한 자는 누구나 국왕에게 전세를 납부하여야 했다. 그리고 일종의 勞動地代로써 1년의 몇 일 동안 국가를 위해 요역을 부담해야 했다. 국왕의 臣民으로 노비의 私役을 지나 있지 않은 자들은 마땅히 나라에 역을 져야했다. 그리고 봉건제적 이념에 기초하여 지방은 중앙에 예헌적 성격의 공물과 진상을 바쳐야했다. 즉 조선의 수취체제는 단순한 재화의 수입이 아니라 그 자체로 국가 혹은 국왕과 신민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때문에 수취관계의 변화를 통해 우리는 그 사회의 국가와 민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국가와 신민의 관계를 보여주는 관계에서 명확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승려의 경우였다.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하여 건국한 조선에서 불교는 이치에 가까운 듯 하여 더욱 위험한 似而非의 虛無寂滅之道였다. 그러나 천년이 넘는 기간 동안 신앙되어진 불교를 일시에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으며, 조선이 강제적으로 廢佛을 할 정도로 폐쇄적인 사회도 아니었기 때문에 16세기 전반에도 1700여 곳의 사찰이 존재하고 있었다.2)

그렇다면 수취관계에서 볼 수 있는 조선시대 국가와 승려의 관계는 어떠한가? 조선전기에 한하여 살펴보면 그것은 어떠한 신분의 신민과도 다른 것이었다. 세종 연간 이루어진 사사전·사사노비의 혁파 이후 17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승려는 개인적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다. 단지 왕실의 하사나 절수만이 가능했을 뿐이다. 공물의 경우 15세기 승려가 국가로부터 공물 대납의 권한을 받았던 일은 보이지만3) 국가가 승려와 사찰에 공물 마련 자체를 할당한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 추측컨대 승려의 토지 소유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토지를 기준으로 分定하던 공물을 승려에게 부담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4) 또한 공납제의 봉건적·예헌적 성격을 고려해볼 때 일반적 의미의 신민이 아닌 승려에게 이를 부담시키는 것은 무리가 따르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役이다. 身役 즉 國役은 곧 신분관계와 직결된 것이며, 국가가 해당 신분의 신민을 어떻게 파악하고 그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승려는 私役을 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국가의 國役을 담당하고 있지도 않았다. 국역을 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승려가 身良役賤이라거나 八賤 중 하나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승려의 이러한 신분적 특징 때문에 오히려 피역을 위해 출가하는 이가 급증하기도 하였다.5)

국가는 승려를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하여 이들에게 도첩이나 승호패를 발급하였다. 출가자가 급증하는 경우 이들에게 일정기간동안 국가의 큰 공사에서 요역을 부담케 한 후 도첩을 발급하였다. 도첩은 즉 승려들에게서 일반 양인의 권한인 사환권을 박탈함과 동시에 일반 양인의 의무인 국역과 공납의 부담을 면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한 번의 부담만 지면 이후로는 영원히 役을 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조선전기의 승역은 승려가 국역체제로부터 벗어나는 수단이자 승려를 국역체제라는 공적 영역에서 분리하기 위해 국가가 징수하는 비용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국가의 불교 통제라는 측면에서 볼 때 조선전기 국가는 끊임없이 불교를 공적 영역에서 분리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고려 때부터 승려를 관리하던 공식기구인 僧錄司를 혁파하였고, 선교양종을 통해 승려를 통제함으로써 표면적으로나마 불교계가 자체적으로 승려를 통제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6) 그러다가 양종이 혁파되고 승과와 승직이 폐지되면서 불교는 공적 영역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즉 조선전기 국가의 대불교시책은 불교를 공적 영역에서 지워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조선후기의 경우 승려와 사찰이 국가의 재정구조에 적극적으로 편입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승군의 산성 수호와 지역 등 사찰의 잡역 부담에 대해서 이미 많은 연구가 되었다.7) 더불어 승려의 호적 등재와 總攝制에 대해서도 연구가 진행되었다. 많은 연구들을 종합하건데, 조선후기 국가는 불교계에 대해 보다 직접적으로 개입하고자 하였으며, 따라서 공적 영역에서 승려와 사찰이 보다 많이 등장하게 되었다.

선행 연구를 통해 조선시대의 승역은 임진왜란 이후에 급격히 증가하였으며 특히 築城과 紙役에 주로 활용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많은 승려들이 산성의 축성에 동원되었다. 전후 도성 복구의 공사에도 많은 승려들이 동원되었다. 또한 병자호란 이후 조선이 부담해야했던 막대한 양의 세폐·방물지의 경우에도 승려들이 아니면 조달이 불가능했다. 18세기 이후로는 국용 세폐·방물지뿐만 아니라 지방관청에서 사찰에 많은 수취를 가했다는 사실이 강조되었다.

윤용출은 요역제가 해체되면서 고용노동으로 전화되는 과정에서 농사를 짓지 않는 승려가 良丁의 대안으로 활용되어 18세기 중엽까지 승역이 활발해졌음을 밝혔다. 승려에게 요역을 부담시킴으로서 일시적으로 요역제의 붕괴를 막을 수 있었지만 결국 과도한 승역 때문에 이 역시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각종 승역에서 특히 紙役이 가장 큰 부담이었기 때문에 사찰에서의 제지수공업도 증가하였다.8) 사찰의 종이 생산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생각되며 조선전기에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러나 조선후기부터 본격적으로 사찰에 국가의 세폐·방물지와 공납·진상지가 할당되어 큰 부담이 되었음이 밝혀졌다. 다만 사찰의 제지업이 전체 제지수공업에서 어떠한 위상을 차지하는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9)

승역의 일부로 승군역에 대한 연구 역시 이루어졌다.10) 조선후기 승군역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확립되었기 때문에 護國佛敎의 성격이 강조되었다. 특히 조선후기 수도방위의 핵심적인 요새인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의 義僧軍役에 대하여 연구가 집중되었다. 그러나 남북한산성의 의승군역이 근본적으로 苦役이었으며 서북지방을 제외한 지방의 사찰이 정기적으로 승려를 수자리 보내는 것이 상당한 무리가 되었기 때문에 영조대에 방번을 멈추고 각 사찰에 錢을 부담시키는 義僧防番錢制가 시행되고 정조대에 다시 그 액수가 半減되었다.

승역의 도피처로 주목 받은 것이 바로 왕실의 원당사찰이다.11) 왕실원당은 왕실의 불교신앙을 바탕으로 왕실 인물의 위패나 眞影, 글씨 등을 모시고 특혜를 받았던 사찰을 말한다. 왕실원당으로 지정되면 면세와 면역의 혜택이 있었으며, 지방사족의 침호 또한 막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많은 사찰들이 승역을 피해 왕실원당이 되고자 하였다. 또한 원당이 내수사에 절수되어 왕실재정에 포함되었음 역시 밝혀졌다. 왕실원당 연구는 조선후기 사찰이 권력과 관계를 맺고 寺勢를 유지·성장시켜나가는 가장 중요한 경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러나 왕실 원당이 된다고 해도 여전히 사찰에 부과되는 잡역이 있다는 사실이 공히 지적되었음에도 그 원인에 대해서는 밝히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승역에 대한 기존 연구의 특징적 부분을 다소 도식적으로 정리하자면 첫째, 군역, 공납, 요역, 잡역 등 다양한 형태의 승려에 대한 수취방식이 승역이라는 단일한 용어로 표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승려는 남한산성·북한산성이나 지방 산성에 번상하는 승군역과 지역 등의 공납 관련 요역, 그리고 지방의 잡역을 중첩적으로 부담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쉬운 점은 이렇데 다양한 승려의 역 부담이 단지 봉건국가의 가혹한 수탈로만 치환되면서 조선후기 재정구조의 변동과 사원경제의 관계를 입체적으로 드러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체 재정사와 사원경제사의 유기적 관계를 밝히는데 난점이 있었다.

둘째, 대부분의 승역에 대한 연구는 국가의 사원침탈이라는 측면에서 강조되었다. 양종 혁파 이후 조선시대는 억불 일변도로 흘러갔다는 인식에 따라 승역 역시 국가의 억불 정책 중 일부로 파악되었다. 이는 국가의 수탈적 면모를 강조했던 다른 분야의 연구와도 시각이 일치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승역에 대한 국가의 반대급부라고 할 수 있는 것들, 즉 사찰에 대한 국가의 재분배 부분에 대해서 우리는 거의 무지하게 되었다.

최근에는 조선후기 불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연구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12) 사상사적으로 조선후기의 승려들이 禪과 함께 교학전통을 꾸준히 지켜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신앙을 지키고 사찰을 유지하기 위하여 契를 비롯한 다양한 공동체에 관한 연구들이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16세기 성종대에서 중종대에 이루어진 일련의 억불정책 이후로는 명종대 잠깐의 중흥 외에는 볼 것이 없다고 생각되던 조선후기 불교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재평가는 단순히 역사 연구에서 한 소재를 추가했다거나, 한국불교사의 공백을 채워 넣는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 동안 역사가의 관심 밖에 있었지만 엄존했던 사찰과 승려, 그들이 조선이라는 국가의 다른 구성원과 형성했던 관계들과 그 관계를 통해 알 수 있는 조선이라는 사회의 특징을 보여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이에 대한 연구가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특히 불교사원이 조선후기 국가재정 혹은 지방재정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 이미 많이 언급되었으나 정치한 연구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때문에 조선후기 불교의 존재 형태를 결정했다고 할 수 있는 국가와 불교와의 관계에서 지나치게 국가의 수취 부분만 강조하여 모든 것을 국가의 수탈로 설명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役은 기본적으로 국가와 민의 상호관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고 국가는 민의 재생산을 보장해주어야 했기 때문에 승역이 그토록 일방적인 성격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조선후기 승려가 국역체제에 편입된 이상 승려에게도 일정한 반대급부가 주어졌던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이상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국가와 승려·사찰 간의 상관관계가 형성되는 과정으로서의 승려의 국역체제 편입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그동안 ‘僧役’이라고 묶여서 호명되던 각종 役을 성격에 따라 분류해야 한다. 僧役은 국가의 노동력 동원인 徭役, 그리고 지방에서 주로 공납과 관련해 부여하던 雜役, 공민에게 의무적으로 부담시킨 身役·軍役이 모두 포함된 개념이다.

필자는 우선 力役 동원이라는 측면에서 요역과 軍役을 묶어 다루고, 지방에서 부여한 공납 및 관수와 관련된 役을 또 한 갈래로 묶고자 한다. 왜냐하면 승려의 요역 동원은 곧 국가에서 僧軍을 동원하는 것이었기에 승군역과 긴밀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13) 한편 공납과  관련된 役은 좀 더 복잡한 성격을 지닌다. 사찰에 부여되는 각종 물종을 마련하는 役은 국가에서 필요한 세폐·방물·공상 등을 지방 각관을 거쳐 사찰에 備納시키는 것, 지방 각관이 국가에 납부할 진상·공물을 사찰에 備納시키는 것, 지방의 관수를 사찰에 雜役으로서 부담시키는 것, 사찰이 어느 아문에 소속되어 관수를 공급하는 것, 廛·契의 貢人이 사찰에 주문한 공물을 사찰이 역으로 느끼는 것 등 다양하다. 여기에는 요역·잡역·강제적 거래관계 등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기 때문에 기존 재정사 연구에서 쓰였던 어느 단어로 설명하기에 어려움이 따른다. 때문에 본고에서는 이것들이 모두 사찰을 단위로 분정되며 집단적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공통점을 지닌다는 점에 착안하여 그 戶役으로서의 성격을 부각시켜 ‘사찰역’으로 통칭하고자 한다.

필자는 이 두 가지 역의 변동 과정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서술하며 승려의 국역체제 편입 과정을 전체적으로 조명해보고자 한다. 얼핏 승려라는 키워드 외에 공통점이 없는 것 같은 두 가지 역을 한꺼번에 다루는 이유는 먼저 기존 연구에서 ‘승역’으로 다루어진 승려의 역부담이 사실 서로 다른 성격의 여러 역들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동시에 이 다른 성격의 역이 모두 크게는 승려의 국역체제 편입 과정에서 함께 형성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결국 지방과 사찰·승려의 관계가 밀접해지며 사찰이 지방에 부속되는 결과가 맺어지기 때문이다. 17세기 ‘승역’의 흐름을 보아야 18세기 이후 지방재정의 일부로 정착되는 사원경제의 성격을 전체사속에서 바로 볼 수 있다.

본 연구에서 승려의 국역체제 편입 과정을 세 시기로 구분하였다. 첫 번째는 戰後 국가의 재정비가 아직 완료되지 않은 시점에서 각종 분야에 승려를 대규모로 동원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 승려는 각종 토목공사의 요역과 산성의 군역, 막대한 양의 세폐방물지의 생산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승려의 동원 방식에 있어서는 일정한 정식이 없었으며 조선전기의 방식을 답습하면서 약간의 혼란을 야기하였다.

 두 번째는 국가에서 승려의 각종 역을 제도적으로 정비해가던 시기이다. 이 시기 국가는 義僧軍役을 제도적으로 정비하는 한편, 지방각관의 공납·진상을 보장하기 위하여 임진전쟁 이후 급속히 확대된 궁방·아문의 사찰 절수를 혁파하기위해 노력했다. 비록 절수가 완전히 혁파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 과정에서 사찰을 국역체제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그 근거를 가다듬었다. 또한 결국 사찰의 지방 각관 부속이라는 원칙이 확인된 점도 이후 전개되는 18세기 사찰의 존재형태를 생각할 때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세 번째는 승려의 국역이 제도적으로 완전히 자리 잡은 시기이다. 이 시기 단순한 제도적 변화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승려에 대한 국가의 인식 전화도 함께 보인다. 승려는 처음으로 호적에 등재되었고 완전히 역을 지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비록 불완전하지만 승려 역시 공민이라는 인식이 시작되고 있음을 증명할 것이다. 동시에 승려의 국역체제 편입 과정에 지방이 깊숙이 개입하면서 사찰의 지방 각관 부속이 완성되었고 그에 따라 18세기 사원경제의 제도적 기반이 형성되고 있음을 증명하고자 한다.  

이 글을 완성하는데 그 주요 얼개는『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등의 연대기 사료를 통해 완성할 수 있었다. 17세기 국가의 대불교정책은 주로 중앙에서 이루어졌으며 아직 군현의 단계에서 사찰에 개입할 여지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연대기 사료를 통해 전체적인 상을 확인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에 이르는 시기는 본격적으로 사찰과 군현의 관계가 형성되는 시기로 연대기 사료만으로는 그 실상을 파악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그래서 『단성호적』, 『대구호적』을 비롯한 호적자료와 사찰 및 군현의 고문서자료를 활용하였다. 그 밖에 『속대전』, 『신보수교집록』 같은 법령 자료들도 국가의 승려에 대한 제도적 통제를 살펴보는데 도움이 되었다.

국가와 승려와의 관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바로 양반 사족 및 향촌사회의 구성원과 승려와의 관계이다. 16세기 이래 양자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국가에서 또한 18세기 이후 사찰은 국가의 역에 다양한 형태로 대응하였다. 국가에서 승군을 동원하거나 궁방·아문이 사찰을 절수할 때도 사족과 사찰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본 연구의 초점은 국가와 승려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사대부 원당·재사·분암·서원 속사 등에 관해서는 추후의 연구 관제로 삼고 싶다.  

 

1.  壬辰戰爭 직후 국가의 僧侶 활용

1) 壬辰倭亂 이후 力役의 승려 동원

조선의 개국 이래 국가는 불교와 승려를 중앙으로부터 배재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세종 6년 불교 관련 사무를 관장하였던 승록사가 혁파되면서 국가의 공식 직제에서 불교와 관련된 것은 배제되었다. 그 후로 제 종파가 강제로 통합되어 선교의 양종으로 단순화되고 선교양종도회소가 설치되어 국가의 대불교정책을 보조하였다.14)

조선전기 국가의 불교정책은 허무적멸의 이단15)인 불교를 공적인 영역에서 철저히 배제시키는 것이었다. 그 결과 불교 승려 역시 정상적인 公民이 될 수 없었다. 거기에 승려는 本業인 농사에 종사하지 않고 구걸로 연명하기 때문에 비경제활동인구라는 인식이 덧붙여져 승려의 출가에는 많은 제한이 따르게 되었다. 『經國大典』 禮典의 度僧條에는 출가하는 자에는 丁錢으로 정포 20필을 부담하게 하였던 것이다. 출가하는 이에게 정전을 거두었다는 것은 승려는 丁役 즉 군역과 직역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전기의 군역은 단순한 부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군역이나 직역에 종사한다는 것은 그 반대급부로 사환권을 보장받는 것이기도 하였다.16) 승려가 된다는 것은 이 역관계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국가와 개인의 한 관계가 끊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승려는 온전한 공민이 아니었으며 국왕에 대한 의리를 저버린 존재가 되었고 이는 불교 비판의 한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국역을 지기 어려운 이들이 모여들면서 사찰은 점차 避役地로 변모하였다. 국가는 도첩제를 통하여 이들을 통제하려 하였지만 완벽한 통제는 불가능했다. 때로는 출가자들을 강제로 환속시키려는 정책을 펴기도 했지만 문제는 갑자기 많은 인력동원이 필요할 경우였다. 이 때 국가는 도첩이 없는 승려를 대상으로 力役에 참가하면 도첩을 발급해주는 정책을 통해 승려를 동원하였다.17) 이러한 정책은 승려를 역관계에서 배제시킨다는 원칙이 그대로 관철된 것이다. 이른바 ‘승역’이 조선 건국이 가속화되는 공양왕 3년부터 나타났던 것18)은 승려를 국역체제에서 배제시킨다는 구성이 조선 건국의 주도세력으로부터 이미 구상되었음을 보여준다.19)

하지만 이러한 원칙이 오히려 출가를 피역의 수단으로 만드는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세조 연간에는 한 번 요역을 부담하고 영구히 피역하는 승려의 숫자가 수 만에 이르기도 하였다.20) 때문에 성종 23년 도첩제를 폐지하고 승려의 출가를 금지하여 아예 국가와의 역관계에서 벗어나는 공민이 증가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 하였다.21)

그러나 16세기 조선의 국역체제는 급속히 붕괴하였다. 사환권이라는 반대급부를 통해 유지되던 공민의 국역부담은, 국역이 고역이 되면서 기피의 대상이 되었다. 경제적 기반이나 현조의 존재 여부에 따라서 국역을 부담하던 양인은 반·상으로 분화되었고, 국역보다 사역의 부담이 덜한 상황이 형성되지 다수의 양인들이 노비가 되는 양소천다의 상황이 발생하였다. 국역체제의 붕괴는 곧바로 국가재정의 위기로 연결되었고, 왕실재정이 확대되는 가운데 공물의 양이 증가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壬辰戰爭을 격은 조선은 전후 복구와 재건이라는 중요한 문제에 직면하였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전쟁이 끝난 후 국가가 처리해야 하는 시급한 문제 중 하나는 국가의 행정 업무를 복원하고 또 이를 보장하기 위한 물리적 토대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궁궐과 종묘, 그리고 수도와 국사적 요충지를 보호하기 위한 산성의 축성 등이 그것이다.

장기적으로는 16세기 무너진 국역 체제를 정상적인 궤도로 올려놓는 것이 필요했다. 이는 단순히 국초의 제도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고, 변화한 상황에 적합한 재정구조를 새롭게 그려나가는 것이 요구되었다. 무너진 군역·직역의 복원과 문란한 공납제의 정비, 왕실 재정과 국가 재정의 균형 등이 조선이 장기적으로 추진해야 할 과제였다.

전후 복구과 국가 재건은 곧 백성의 인신을 동원하는 力役을 증가시켜야 함을 의미하였다. 단기적으로 많은 양정을 동원하여 토목공사를 진행해야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 직후의 상황에서 조선전기 역역 동원방식을 그대로 준용할 수 없었다. 우선 成宗代 정해진 役民式의 요역 동원 기준이었을뿐만 아니라.22) 각종 부세의 부과 단위였던 전결이 전쟁 전의 상태로 회복되지 않았다. 壬辰倭亂 이후 국가가 파악한 田結은 30만결에 불과하며 이는 戰前의 1/5에 불과한 것이었다.23) 농사를 오랫동안 짓지 못해 황폐해진 陳結과 양안에 누락된 隱結, 漏結이 광범위하게 존재했던 것이다.

국가에서 군역을 부담시키는 기준인 良丁의 수 역시 전쟁을 거치면서 상당히 줄어들었다. 게다가 이미 16세기부터 많은 이들이 역을 피하여 도망·유망하거나 주호의 협호가 되어 호적과 군적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다. 국역체계를 복원하기 위해 국가는 장기적인 관점으로 양정을 보호하여야 했다.24) 따라서 전후 농민의 생산력 회복을 위하여 국가는 ‘與民休息’의 기조를 채택할 수밖에 없었고,25) 백성에게 국가 재건과 국역체제 정상화를 위한 모든 비용을 부담시킬 수 없었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떠오른 대안은 避役의 무리라고 이야기되던 승려를 통해 국역체제의 공백을 메우는 것이었다. 본래 역을 지지 않았고, 비정기적인 요역에 동원되더라도 그 반대급부로 영구적 免役을 보장받던 승려들은 이제 국가의 필요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동원되게 되었다.  

조선의 중앙정부가 비어있는 국역체제를 메우기 위한 대안으로 승려를 주목하게 된 계기는 임진전쟁 기간 동안 활동했던 의승군이라고 할 수 있다.26) 임진왜란 당시 유정·휴정·여규 등에 의해서 동원된 승군은 전투뿐만 아니라 군량 및 무기의 수송 및 보관 등 보조적 업무에서도 큰 역할을 하였다. 그리하여 선조가 직접 승군의 활약에 대하여 칭찬하기도 하였다.27) 병자호란에서 역시 의승군이 일어났는데 이들의 활동에 대해서도 긍정적 평가가 지배층들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28) 따라서 각종 공사에 승군을 동원하는 것이 검토되었는데 이들은 逃役之人, 化外頑民으로 지목되고 있었기 때문에 승려 동원은 여민휴식이라는 국가 기조와도 어긋나지 않는 것이었다.

승려의 역역 동원은 두 번의 전쟁 이후 각 지역에 분산되어있던 승군의 동원으로 시작되었다. 전후 승군은 해산되었지만 승군을 지휘했던 승장들의 영향력은 지속되고 있었다. 선조대의 유정과 인조대의 각성이 17세기 초반의 대표적인 승장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에서는 壬辰倭亂을 거치면서 승군으로 체계화된 승려들의 명령계통을 각종 토목공사의 책임자로 승군의 지도자를 임명하고 僧軍에게 공사를 일임하였다.29)

그러나 인조조까지의 승려 동원은 어떠한 恒式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는 승려 동원이 국가정책의 구멍난 부분을 메우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전후 서울의 복구뿐만 아니라 수도와 주요 지방거점을 방어하기 위한 산성의 축성이 시급했는데, 양정 동원이 불가능한 곳에 승군을 동원하면서 자연스럽게 완성된 산성의 수호 역시 승군에게 지워지게 되었다.30) 뿐만 아니라 둔전의 경작31)과 화포의 제작32)도 승려들에게 맡겨졌다. 이처럼 17세기 초반 力役으로서의 승역은 군역과 요역 등이 복잡하여 혼재된 성격을 띠고 있었다.

승군 혹은 승도를 동원하는 방식은 조선전기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17세기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승려 동원 방식은 주로 募集·勸募였다. 서울이나 산릉의 대규모 토목공사나 산성 수축과 수호의 방식에 모두 이 방식이 사용되었다. 승려를 모집한다는 것은 즉 국가에 일정한 역을 부담한 승려에게 도첩을 발급하여 승려가 더 이상을 역을 부담하지 않을 수 있도록 증명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조선전기 승려 동원에 빈번하게 사용되었던 방식이다.

그러나 도첩제 자체가 부활한 것은 아니었다. 즉 국가에서 승려에게 정전을 받고 이들을 완전히 국역체계에서 배제시키는 방식은 채택되지 않았다.33) 국가적으로 양정의 손실을 최대한 막아야 하는 상황에서 도첩제의 부활이 피역을 확산시킬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따라서 도첩은 상황에 따라 국가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하여 지급되고 있었다. 때에 따라서는 도첩을 돈을 받고 발급하여 공명첩처럼 국가재정의 보용책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34) 따라서 도첩의 신뢰도는 차츰 떨어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승려의 동원체계는 어떠했을까? 기본적으로 중앙에서 필요한 승군의 수를 각도에 차정하면 각도에서는 이를 다시 군현에 차정하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또한 모집한 승려를 모아 부역소로 데려가기 위하여 중앙에서 차사원이 파견되기도 하였다. 남한산성에 동원할 승려의 숫자는 도별로 분정되었고,35) 지방 산성의 경우 읍별로 분정되었다.36) 여러 도 중에서도 평안·함경의 두 도는 역승 조발에서 제외되었고,37) 황해도의 경우 양서지방으로 역시 관방과 관련되었기 때문에, 경기의 경우 사대부의 재사와 분암이 많았기 때문에 제외되는 경우가 많았다.38) 따라서 주로 삼남지방과 강원도에 많은 역승이 할당되었다.

지역별 분정이 되더라도 국가가 승려의 인신을 파악하고 통제하는 체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도별·읍별로 승군의 액수를 채우는 방식은 모집이 주를 이루었다.39) 모집의 방식은 각도와 군현이 자율적으로 결정하였다. 경상도의 경우 실제의 조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관찰사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사찰 수에 의거하여 임의로 각 군현에 분정하였다.40) 모집을 한다 해도 그것이 관의 강제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고 때로는 명망있는 승려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는 아직 각도와 군현이 사찰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모집되어 역소에 도착한 승려는 정해진 부역일수만큼 부역을 하였다.41) 산성의 수호를 맡은 승려들은 산성 안에 있는 사찰에 머물면서 군량이나 무기, 화약을 관리하는 등 보조적 역할을 하였다.42) 승려들이 담당하는 역에는 별도의 역가가 지급되지 않았다. 광해군대에는 부역승들에게 식량과 포를 지급했지만43) 인조반정 이후에는 승려들이 스스로 식량을 갖추어 오는 것(自備糧)이 원칙이 되었다.44)45) 이는 광해군대 풍수가이자 궁궐 영건의 감독 역할을 했던 승려 성지에 대한 반편향 때문이기도 했지만,46) 여민휴식을 위해 피역지배인 승려를 동원한다는 원칙에 충실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조발한 승려 속에 속인이 섞여 있을 경우 큰 문제가 되어 차사원과 해당 군현의 수령 및 관찰사가 파직되기도 했다.47)

승려의 지휘는 도총섭 등 승직을 맡은 이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48) 임진전쟁 기간에는 잠시 폐지된 양종의 관직인 선교양종판사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이후로는 대체적으로 도총섭·총섭·승통의 승직이 주어지면서 군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본래 도총섭과 총섭은 고려시대부터 종교적 권위를 지니고 있는 고승들에게 부여하던 일종의 명예직함이며, 조선초기까지 지속되었다.49) 태종 이후 사라진 도총섭 및 총섭 등의 승직이 왜 다시 성격이 변하여 등장했을까? 그 이유는 현실적으로 승군을 통솔할 승직이 필요하지만 『경국대전』에 올라가있는 승과를 통한 공식적 승직을 부여할 수는 없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때문에 비정규적이고 명예직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도총섭·총섭 등의 승직을 부여한 것이다.50)

요컨대 두 번의 전쟁 직후 조선의 승려 역역 동원은 시급한 재정적 공백을 메우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매우 非定期的이고 非定式的으로 이루어졌다. 여민휴식의 국가 기조아래 본업에 힘쓰지 않는 피역의 무리인 승려들이 역역에 동원되었다. 승려의 조발은 도첩을 발급하여 모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국가의 승려에 대한 장악력이 아직 완전치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중앙-도-군현으로 이어지는 승려 동원 체계 역시 승려의 개입 없이는 불가능했다. 때문에 도총섭·총섭·승통 등의 승직을 고위 승려들에게 부여하여 승려를 지휘·통제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은 효종시기를 지나 현종대에 이르러 변화한다. 역역 동원 중 요역의 부담이 줄고 군역의 비중이 늘어나는 한편 동원 방식이 변화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고 제2장 1절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2) 官營手工業의 쇠퇴와 寺刹手工業의 확대

17세기 사찰과 승려에게 부과된 또 다른 역은 공물·진상품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는 본래 조·용·조 중 조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공물와 요역은 본래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었다.51) 따라서 사찰이나 승려에게 각종 공물·진상품의 마련은 일종의 역으로서 부과되었다.

力役에 승려를 동원하는 것과 동시에 貢納에 승려를 동원하는 현상 또한 壬辰倭亂 이후 시작되었다. 사찰에 국가에서 필요한 물품을 납부시킨 것은 전쟁으로 인하여 관영수공업이 쇠퇴하였기 때문이었다. 17세기 관영수공업을 담당하는 여러 屬司는 혁파되었고, 남아 있는 屬司도 소속된 공장이 사라졌다.52) 관공장제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공납해야 할 물품을 마련하기 위하여 국가는 대체 인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53)

먼저 전쟁 이전 관영수공업의 상황에 대하여 살펴보자. 조선전기의 관영수공업은 京·外에 각각 工匠을 소속시키는 중앙과 지방의 이원적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54) 종이 생산의 경우에도 역시 고려시대 紙所의 유제를 일부 계승하면서도 중앙과 지방에 각각 분정되었는데, 이는 개국 이후 서적의 출판이 늘어나고 문서체계가 정비되어 官需가 늘었어 급격히 종이 소비가 증가했기 때문이다.55) 명과의 외교에 필요한 종이와 進獻紙의 증가 역시 국가에서 종이 생산에 지속적으로 신경을 쓰게 만든 이유가 되었다.56)

 중앙의 조지서는 사대용의 고급 종이를 생산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세조 년() 조지소에서 조지서로 개편되어 예조의 직속아문이 된 후 몇의 장인이 6번으로 나누어 상번하여 종이를 생산하였다. 한편 국초에 지방은 아직 종이 생산을 위해 노동력을 집약시키고 원료인 닥나무 껍질을 대량 생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도회제로 종이를 생산하였다. 그러나 『경국대전』의 단계에 이르러서는 도회가 해체되고 군현별로 지소에서 종이를 생산한 것으로 보인다.57) 이는 종이가 공납을 위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지방 자체의 수요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종이의 공납은 중앙과 지방에서 동시에 이루어졌는데, 壬辰倭亂 이전에는 거의 모든 군현에서 자체적으로 종이를 생산하였다.

 

承文院寫字官 文繼朴 상소했다. 그 대략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事大하는 일입니다. …… 또 造紙局을 설치하여 갖가지 종이를 전담하여 제조케 함으로써 각종 文書의 용도에 대비하게 했던 것인데, 난리를 겪은 나머지 온갖 기구가 못쓰게 되고 일이 대부분 엉성해져서 형편없게 되었는데도 更張하지 못하고 있으니, 신은 그래도 괜찮은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번에 다른 諸司들은 모두 이전과 같이 복구되었는데도 유독 이 造紙局만은 방치된 채 복구되지 않은 상태여서 表文이나 咨文에 쓸 종이를 外方에 위임하고 있으므로 종이 품질이 麤惡하고 擣鍊도 精하지 못합니다. …… 솜씨좋은 紙匠이 많지 않은데, 만약 僧人 중에 종이 잘 만드는 사람을 모집하여 1인당 奉足 3∼4명씩을 붙여주어서 本署 곁에서 살도록 하고, 비어있는 들에다 닥나무밭을 개간하여 和賣해서 먹고 살게 하고 관에서는 稅로 닥을 징수하게 하는 한편, 때때로 紙匠의 임무와 혹은 砧軍의 역사를 겸비하도록 하여 한결같이 완전한 家戶가 되게 한다면, 점차로 효과를 이루게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58)

 

하지만 전쟁으로 중앙의 조지서 제지 수공업은 붕괴되었다. 위의 사료는 중앙에서 외교에 필요한 고급 종이를 생산해야 할 조지서가 그 기능을 상실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종이를 생산해야 할 官工匠을 모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59) 전란으로 인하 많은 공장이 사망하거나 유망하였다.60) 국가재정의 악화 때문에 공장에게 적절한 급료를 줄 수 없는 것 또한 문제였다. 조지서는 전란이 끝나고 한참이 지나고도 회복되지 않았다. 숙종대에 이르기까지 조지서에서 확보해야 하는 경공장은 여전히 모이지 않았다.61) 심지어 조지서가 공납해야 할 종이를 만들지 못하여 私主人과 私紙匠에게 이를 위임하기까지 하였다.62) 결국 영조대 조지서는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혁파되었다.63)

그러나 질 좋은 종이의 수요는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전후 서적 인쇄가 활발해졌을 뿐만 아니라, 淸에 바쳐야 하는 방물지가 급격해 늘어났기 때문이다.64) 심지어 다른 세폐와 방물이 줄어드는 와중에도 淸은 더 많은 종이를 조선에 요구하였다.65) 병자호란 이후 13년이 지난 인조 27년(1649)에 3개월 동안 조선이 청에 바쳤던 종이는 2만 2천권이 넘었다.66) 대동법이 실시된 후 공납되던 종이는 공물주인을 통해 공급받으면서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었지만, 자문이나 표문에 쓰일 가장 최상급의 종이를 무역하여 사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종이의 품질이 일정해야 하는데, 貿納한 종이는 품질이 제각각이기 마련이었다.

때문에 조지서가 완전히 붕괴되기 전 국가는 남북한산성에 입번하는 의승을 동원하여 종이를 생산하였다.67) 고려와 조선전기부터 사찰에서 종이가 생산되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조지서와 가까운 곳에 있는 남북한산성의 의승을 조지서의 紙匠으로 차정한 듯하다. 그러나 의승은 그 자체로 苦役이었기 때문에 조지서의 의승 입번은 산성 수호와 종이 생산 양면에 모두 차질을 주어서 중앙의 관영제지수공업을 복원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68)

중앙의 종이생산이 붕괴되자 지방군현의 종이 생산이 더욱 중요해지게 되었다. 사대에 소용되는 많은 종이를 모두 지방 특히 삼남에 분정하였기 때문이었다.69) 예컨대 효종 원년 청의 섭왕 도르곤이 사망하자 필요한 백면지 66016권 중 2만원을 제외한 46016권과 厚紙 20984권을 하삼도에 분정하여 제조하게 하였다.70) 지방에 분정된 종이는 읍별로 분정되어 중앙으로 상납하여야했다.

그러나 지방군현 역시 소속되어 있던 외공장들이 흩어져 종이를 생산하기 어렵게 되었다.71) 군현에서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종이를 사찰에 분정하는 것이었다. 사찰은 고려시대부터 종이를 생산하고 있었으며, 조선전기에도 대장경의 인쇄나 간경도감에서의 불경 간행 등 한꺼번에 많은 종이가 필요할 경우 사찰에서 직접 생산하도록 하였다.72) 16세기에도 사찰에서 지속적으로 종이를 생산하고 있었던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73) 때문에 노동력을 집약적으로 동원할 수 있고, 제지 기술을 가지고 있던 사찰에 지역을 분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執義 申命圭, 掌令 朴贄, 持平 李宇鼎이 …… 또 아뢰기를, “백성의 요역 가운데 白綿紙 등이 가장 무거운데, 各邑에서는 모두 僧寺에 책임지워 마련케 하고 있습니다. 중들의 능력도 한계가 있으니 일방적으로 침탈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전라 감영이 전례에 따라 바치는 종이도 적지 않은데 근래에 또 새로운 규례를 만들어 일년에 올리는 것이 큰 절은 80여권, 작은 절은 60여권이 되므로 중들이 도피하여 여러 절이 텅 비었습니다. 이런데도 혁파하지 않는다면 그 해가 장차 백성에게 미칠 것입니다. 본도 감사로 하여금 各寺에서 이중으로 올리는 폐단을 속히 없애게 하소서.”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74)

 

이처럼 종이의 군현 분정은 많은 양이 사찰에게 다시 분정되었다. 실례로 확인되는 것으로 서천군은 천방사에서 종이를 받고 있었으며,75) 금성현에서는 쌍계사에 한 개 마을의 백면지를 모두 할당시키고 있었다.76) 사찰의 종이 부담이 정확히 얼마인지 알 수 없고, 일부 과장이 있다는 시각도 있으나,77) 19세기까지 종이 공납의 적지 않은 부분이 사찰에 할당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한 듯하다.78)

공납제 변통 논의가 활발해지고 대동법이 실시된 이후에도 사찰의 종이 생산은 계속 강조되었다. 대동법 실시 후에도 한참동안 시행 대상에서 종이는 제외되어 현물상납하도록 하였다.79) 방물지의 경우 숙종 연간에 지계와 지전으로 하여금 비납하도록 하여 대동법의 범주 안으로 들어갔지만 사찰에 지급하는 지가가 헐했기 때문에 관의 협력 없이는 공인들이 사찰에서 종이를 공급받는 것이 불가능했다. 또한 국용이나 관수로 쓰이는 종이는 여전히 군현에서 담당하였다. 때문에 사찰이나 국가에서 계속 사찰제지업을 役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사찰에 紙役이 분정된 후에 역 부과 단위로서의 사찰은 중요시되었다. 종이의 제조는 몇몇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원료인 닥을 채집하여 물에 불리고 섬유상태로 만들어 다시 체에 떠서 말리는 과정을 반복해야했기 때문에 집약적인 노동력이 필요하였다. 또 몇몇 과정에서는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승장이 필수적이었다. 때문에 승려가 과거와 같이 유산하여 정착하지 못하는 상황은 문제가 되었다. 즉 조선전기 승역과 같이 유랑하는 승려를 모집하고 도첩을 발급해 免役토록 하는 것은 사찰에 공납의 기능을 맞긴 조선후기의 상황과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승려는 사찰에 고정되어야 했다. 특히 직접 종이를 상납해야 하는 지방관들에게 이 문제는 중요한 것이었다. 때문에 승려의 유산을 막고 이들을 국역체제로 편입시키는 문제는 지방의 입장에서도 필요성을 띠게 되었다.

 

2. 17세기 중반 僧役의 제도화

1) 남한산성 義僧防番制의 성립

17세기 중반에 역역으로서의 승역은 큰 변화를 맞이하였다. 가장 큰 변화는 승군이 남한산성에 번상하는 義僧防番制가 정립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모집을 통한 승군 조발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승역이었다. 또한 이와 조응하듯 모집을 통한 승역 역시 일정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먼저 의승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살펴보자. 사료상에 나타나는 승군·승도와 의승이라는 표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영건·축성·산릉역 등에 동원되는 승려들은 승군 혹은 승도라고 통칭된다. 승도는 말 그대로 승려 무리라는 뜻이고, 승군은 이들이 본래 전쟁 도중에 승장 아래 모여있었던 무리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생각된다.80)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주 지어진 많은 산성에는 부역승을 조발할 때와 같이 모집한 승군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은 화기와 병량을 지키는 일부터 직접적인 군사업무까지 다양한 일을 담당했다.

그러나 의승은 특별히 산성에 머물며 성을 수호하는 승려를 말한다. 그렇다면 모든 산성에 있는 수호승은 의승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의승의 정확한 의미는 숙종 13년 강화도에 의승을 설치하는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건명이 계하길, “작년 가을에 강화유수 신정이 강화 義僧의 일을 경연 중에 진달하였는데, 그 때 영돈녕부사 김수항이 ‘당초 남한산성을 축성할 때 승도로써 부역시켰으므로 일곱 사찰을 세우고 여러 도의 승인들로써 분정하여 입번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강화도의 형세는 남한산성과는 다르니 외방의 義僧이 입번하는 사이에 그 폐가 셀 수 없을 것이니, 우선 경기 屬邑과 ... (이하 缺)’ 이 뜻으로써 비변사에 馳報하니 여러 사람이 모두 의논하기를 ‘남한산성의 義僧은 그 폐가 이미 지극한데 지금 또 강도에 설치하면 수호하는데 무익하고 도리어 해가 된다.’ 고 하였습니다. 대신이 금방 입시하오니 다시 정탈하여 분부하심이 어떠합니까?” 하였다. 상이 “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니 남구만이 말하길 “소신 또한 公事를 보았는데 남한산성의 義僧은 비록 八路에 분정하지만 폐를 끼침이 오히려 많습니다. 지금 연백과 남양, 풍덕 등은 모두 野邑이니 승도가 본래 적어 적은 수의 승인이 輪回入番하는 것은 반드시 힘이 모자를 것이어서 한갓 폐를 끼침이 돌아오는 것이 되니 신의 뜻으로는 결코 불가합니다.” 81)

 

위의 사료에서 설명하고 있는 의승은 해당 사찰에 모집되어 거주하는 승려가 아니라 각 도에 분정하거나 혹은 다른 고을에 윤회분정하여 입번하는 승려들을 말한다. 즉 이들은 마치 군역을 지고 있는 공민과 같이 순서에 따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일정한 기간 동안 의승번역을 부담하고 기간이 종료되면 다시 거주하던 사찰로 돌아갔다. 이처럼 승군과 의승은 역역을 부담하는 승려라는 의미에서는 동일하지만 그 방식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 남북한산성의 의승방번제는 숙종 40년에 시작되었다고 알려져왔다.82) 즉 승군 자체가 제도화 된 것은 남한산성이 완성된 인조 2년 이후 이며 육도의 군현과 사찰에 상경 입번할 승려를 분정한 것은 북한산성이 완성된 숙종 40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숙종 40년 이전까지 남한산성의 사찰에서 수호의 역을 담당하던 이들은 국가가 모집하여 산성의 사찰에 영구 거주하는 원거승이 된다. 그러나 사료를 검토해보면 이미 그 이전부터 의승방번제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2-1 이태연이 말하길 “수원의 일은 소신이 임지에 도착한 후 거의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이 예전에 수어사 종사관이 되었을 때 보니 앞서 의승을 성내에 모아둔 것은 남한산성의 수호를 위한 것이지만 근래 의승이 고을로부터 모이는 일은 지난 날과 같지 않기 때문에 장차 수호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걱정할만 합니다. 외방의 여러 일로 승려가 군사가 되는 것을 그 수가 매우 많다고 합니다. 이로써 의승에 채워 넣으면 변하고 마땅할 듯 합니다. 신이 이 뜻으로 수어사에게 말하고자 합니다.” 상이 말하길 “의승의 일은 또한 폐를 끼치는 것이 너무 많다. 경이 수어사에게 가서 보고 서로 의논하여 함이 가하다.”83)

 

2-2 김석주가 말하길 “남한산성의 일곱 사찰은 각기 팔도에 분속되어 있습니다. 선신(김좌명)이 수어사가 되었을 때 한 사찰을 더하여 여덟 사찰이 되었는데 각도의 의승으로 하여금 스스로 식량을 갖추어 산성의 절에 입번하게 하였으니 그 역이 심히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리고 호남의 의승은 육번으로 나누어 아무 달에 아무 사찰을 세우며, 1년에 한 사찰에서 입번하는 승려가 항상 백 여 명을 내려가지 않았으니, 한결같이 군사가 상번하는 예와 같이 상번하는 의승이 왔습니다. 그 도의 각사의 재물을 받아 의승의 역에 보냈으니 그 실제는 한 도의 승려가 모두 담당하는 것이었습니다.84)

 

2-3 윤지선이 말하길 “신이 엎드려 듣건데 선사부사 조지항이 영남 의승을 타도에 이정해줄 것을 소청한 것을 묘당이 그 청을 불허하고 단지 선산·칠곡 양읍의 의승만 감해주었다고 합니다. 신이 부득불 그 안 되는 이유를 대략 분별해보았습니다. 남한선성의 의승 분정은 기사년(인조 7년)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60년 사이에 일찍이 읍에 산성이 있다고 탈감해 주는 바가 있지 않았으며 다만 혹 부득이 수를 가해주는 읍이 있어도 원액은 영구히 감해주지 않았고, 도내의 타관에 이정하였으니 이로부터 유래한 고례를 지금에 이르러 어찌 조지항의 한마디 말로 가벼이 의논함이 가하겠습니까? 경상·전라의 양도는 조잔함과 번성함을 나누어 남한산성 의승의 원액을 정하며, 또한 각 읍의 승도로써 도 내의 산성에 수직시키니 또한 남한산성 의승의 예와 같습니다. 공청·황해·경기 등의 도는 비록 산성이 있어도 수직군으로 정하지 않고 남한산성 의승을 조지서 도침군과 함께 마련하여 분정하니 당초에 역을 고르게 하려는 뜻이지 실로 우연이 아닙니다. 만약 산성이 있다 하여 의승을 감해줄 것을 허락한다면 각도의 산성이 잇는 읍이 장차 분분히 다투어 청할 것이니 조가가 어떻게 그 길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85)

 

위 사료들을 살펴보면 의승방번제는 남한산성에서 먼저 시행되었고 그 시기는 대략 남한산성이 축조된 인조 2년 이후의 어느 시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남한선상의 축성이 승군을 통해 이루어졌고, 산성 내에 여러 사찰이 있었기 때문에 모집의 형식으로 승군이 주둔했을 가능성이 있다.86)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집과는 근본적으로 방법을 달리하는 의승방번제가 시작된 시기이다.

 사료2-3에서 보이듯 숙종대에는 남한산성 의승을 인조 7년(기사년)에 두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지금까지 우리가 볼 수 있는 의승방번제의 시작에 관한 가장 구체적이면서 오래된 기록이다. 그러나 인조대의 자료들을 종합해 볼 때 적어도 병자호란 직후까지도 의승이라는 용어는 분정하여 입번시키는 승군을 가리키지 않았다. 오히려 인조 17년 인조는 전쟁에 나왔던 승려에게 의승이라고 부르는 것이 후일의 폐단이 될 것이라고 하며 일이 없을 때는 의승이라는 명호를 없애라고 하고 있다.87) 게다가 동년에는 청나라의 명으로 개축한 남한산성을 헐어버리는 일이 있었다.88) 적어도 인조 17년까지는 의승이 상번하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료 2-1에서 알 수 있듯이 늦어도 효종 8년 이전에는 의승이 상번승을 가리키는 말로 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조 18년에서 효종 8년에 이르는 어느 시기에 의승방번제가 성립된 것이다. 기록의 미비로 알 수 없지만 효종대 북벌을 준비하며 남한산성의 군비를 확충할 때 의승방번제가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보인다. 그리고 사료 2-2에서 보이듯 현종대를 거치면서 사찰이 추가되어 팔도 분정이 완성되고 원액이 정해졌다. 그 수는 대략 400 여 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89)

의승방번제에서 각 도에 할당된 의승의 조발 방식은 어떠한가? 위의 사료 2-2과 2-3을 보면 대략을 알 수 있다. 위 사료들을 종합해 보면 중앙정부는 의승을 도 별로 분정하며 스스로 식량을 갖추어 올라오게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은 일반적인 군역자의 상번과 같은 것이었다.90) 인원을 분정받은 각도는 이를 자체적으로 마련해야 했다.

각도는 저마다의 방법으로 의승을 조발하였다. 숙종 원년 전라도는 전체 의승을 6번으로 나누고 호남의 각 사찰에 달마다 윤회분정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다. 영조 32년 전라도에 할당된 의승의 수가 136명이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한 번에 100 여 명이 상번했다는 기록이 과장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료 2-3에서 알 수 있듯 시간이 흐른 숙종 13년 각도는 각 읍별로 정해진 의승을 수를 정하여 분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각 고을의 사정에 따라 의승을 타읍으로 이정하는 일은 이었지만 정해진 원액은 어기지 못했다. 양남지방은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각 산성에 승려가 주현군으로서 수직해야 했지만91) 산성의 승군과는 별개로 의승을 조발해야 했다.  

의승방번제 성립은 국가의 사찰에 대한 통제력이 한층 신장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선조 재위에서 인조에 이르는 시기 승군 조발의 방법인 모집의 단계에서 벗어날 정도로 국가가 승려와 사찰을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중앙정부가 승려의 개개인의 인식을 파악하는 예컨대 승안이나 승적이라고 부를만한 문서를 만들지는 못해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아직 승려가 국역체계에 완벽히 편입되지는 못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숙종 원년 승려의 호적 등재 단계에 이르러서야 국가는 승려를 좀 더 효율적으로 장악할 수 있었다.

의승방번제가 성립되던 시기에 승려의 요역 동원 방식 역시 변화를 보이고 있다. 물론 인조에서 숙종대에 이르기는 시기에 역시 여전히 도첩 발급을 통한 모집·권모의 방법으로 승군을 조발하는 현상은 계속 보이고 있다.92) 그러나 오로지 모집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선조 재위 후반에서 인조 초반에 이르는 시기와 달리 일괄적으로 도-군현으로 분정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93) 이러한 경향은 의승방번제의 도-군현 분정 방식과 동일한 것이다.

승려 조발과 지휘에 있어서도 도총섭·총섭 등 승직자들의 권한이 약해지고 군현의 수령과 색리에 의하여 주도되었으며 이들을 역소로 데려가는 도령승·령승 역시 지방관이나 차사원이 임명하였다.94) 중앙-도-분현의 승군 분정 방식과 승려 조발의 과정에서 수령의 권한 강화가 가능해진 것은 17세기 조선후기 군현제가 발전했기 때문이다.95) 또한 도첩제가 유명무실해지면서 더 이상 17세기 초반과 같은 방식으로 승려를 모집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96)

의승방번제 성립이 알려주는 또 하나의 사실은 승려에게 정규의 역이 부과되었다는 것이다. 숙종 40년 이전까지 남한산성에 입번하는 승려의 수는 대략 400명 정도로 추정된다.97) 이는 각종 토목공사에 많게는 수 천명에서 적어도 천 명 내외의 승군을 조발하던 것에 비하면 매우 가벼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승려의 요역이 한 달 내외의 정해진 시간만 부역하면 되었던데 비하여 남한산성의 의승은 수개월 동안 군역을 부담해야 했다.98) 이러한 방식은 일반적인 군역 부담자와 똑같은 것이었다.99) 때문에 “지금의 승인은 비록 산에 산다 하여도 신역은 또한 모두 있습니다.”라고 하여 승려 대부분에게 국가의 役이 가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당대에도 인식하고 있었다.100)

그런데 의승방번역의 경우 같은 역역으로서의 승역이라도 승려의 요역 동원과는 다른 성격을 띠고 있음이 주목된다. 17세기 초반 승군 조발이 일정한 역 부과 단위 없이 승려의 인신 개별을 대상으로 한데 비하여 의승방번역은 최종 역 부과 단위가 사찰로 귀결되어 일종의 호역으로 볼 수 있다.

역역으로서의 승역이 인신에 부과되던 것에서 사찰을 기준으로 하는 호역으로 점차 바뀌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이는 역시 의승방번역이 일반 공민을 대상으로 한 군역과 같은 모습으로 정착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왕실과 아문의 원당, 능원 수호사찰의 승려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찰 승려들은 어떤 승려는 군역자가 되어 상번하고, 한 사찰은 다른 승려들은 일종의 軍保가 되어 의승의 상번비용을 보조했던 것이다. 17세기 이후 승려 개인의 토지 소유가 인정되기도 했지만,101) 그 규모는 대체적으로 영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의승방번제에서 상번승이 상경비용과 거주비용 일체를 알아서 스스로 마련해야했기 때문에 부담해야 할 경제적 부담은 대단히 컸다. 영조 32년 남북한산성의 의승방번제를 폐지하고 입번을 대전으로 대납케하는 의승방번전제가 시행되었을 때, 정해진 代錢은 의승 1명에 錢 10~22냥이었다.102) 그러나 10냥을 부담하는 경기지방의 의승은 20명에 불과했고 호서·해서·강원의 의승은 18냥을, 전체 의승의 약 63%를 차지하는 양남의 의승은 23냥을 지불해야 했다. 이를 작미하면 『만기요람』 기준으로 쌀 63두로, 당시 전세가 결 당 3두, 대동미가 12~16두에 불과한 것을 생각해보면 큰 부담이었다고 생각된다. 의승방번전제가 성립 할 때 영조가 승려들의 부담을 조금 덜어주었다는 점과 『만기요람』의 기준이 실제보다 과소 책정되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실제 부담의 정도는 쌀 63두 이상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영남 의승이 한 차례 상번하는데 드는 비용이 30냥에 달한다는 기록도 있다.103)

의승 개인이 이를 부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의승을 상경 입번시키는 것은 단순히 의승 개인의 역이 아니라 해당 사찰이 온 힘을 기울여 공동으로 부담해야 하는 큰 역이었던 것이다.104) 군현의 의승 분정도 결국 사찰 별로 이루어졌다. 사찰의 기본적 경제기반인 사위전이 사찰 자체의 소유로 등록되어 공동 노동형태인 울력을 통해 경영되었으며105) 이 공동노동을 통해 승려의 국역부담을 보조했기 때문에 의승역은 자연히 호역의 형태로 정리되어갔던 것이다.106)

국가가 승려에 대하여 통제력을 확대하여 승려들에게 피역을 담보로 하지 않는 항상적이고 정규적인 역을 부과할 수 있게 되면서 시행한 의승방번제는 승려들을 군역의 형태로 국역체계 안에 흡수함을 의미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이 국역체계안에 흡수되었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전통적 의미에서 국역체계는 국가가 공민에게 국역 부담을 요구함과 동시에 이들에게 사환권과 같은 특권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16세기 이후 국역체계가 급속히 붕괴되고 있기는 했지만, 국역이 곧 반대급부를 의미한다는 사실이 망각되지는 않고 있었다.107)

요컨대 전국의 승려를 대상으로 남한산성에 윤회입번하도록 하는 의승방번역은 17세기 중반 적어도 효종대에 성립되었다. 의승방번역은 중앙에서 각도로 각도에서 군현으로 분정되었으며 그 총액에 정해져있었다. 군현은 분정된 의승을 각 사찰에 분정하였다. 의승방번제의 성립은 국가의 승려·사찰에 대한 통제력이 한층 신장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군현제의 발달에 힘입어 중앙-도-군현의 동원체계가 성립된 것이다. 이는 당시 승려 요역 동원 방식의 변화와도 동일한 현상이다. 또한 의승방번역을 통해 승려에게 정규의 역이 주어져 승려가 군역과 같은 방식으로 국역체제 편입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공동 경제생활을 영위하는 사찰의 특정 상 사찰 전체가 군보가 되어 그 모습은 호역의 형태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승려가 국역체제에 편입됨으로써 생겨나는 국가의 승려에 대한 인식 변화는 3장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2) 國家財政의 變通과 折受屬寺의 革罷논의

승역의 확대는 몇몇 승려에게 승직과 품계를 부여받는 기회가 되고, 높은 승직의 승려가 관계된 사찰이나 산성 인근 사찰의 중건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인 승려가 부담해야 하는 승역은 疊役인 경우가 많았고 役價로 납부하는 布가 1인당 10필에서 40~50필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108) 특히 출가가 避役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던 때에 승역의 확대는 사찰의 곤궁과 잔폐를 불러왔다.  

문정왕후의 죽음 이후 혁파되었던 원당은 壬辰倭亂 이후 함께 확대되었다. 壬辰倭亂 이후 원당의 확대는 내수사 및 궁방의 절수뿐만 아니라 아문의 사찰 절수와 함께 나타난 현상이다. 이 시기에는 궁방 및 아문에 의하여 陳田이나 간척지를 중심으로 한 궁장토,109) 둔전의 확대가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漁場·鹽田·山林·蘆田·등이 절수되었다.110) 이른바 원당의 확대와 아문의 사찰 절수 또한 이러한 경향과 함께 나타나는 현상인 것이다. 때문에 以下에서는 17세기 사찰 절수의 경제사적 의미를 강조하고, 왕실뿐만 아니라 아문에도 절수되어 부역을 담당해야 했던 사찰이 원당과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보이기 때문에 절수사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겠다. 사찰이 절수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원당이라고 보기 어려운 경우도 있기 때문에111) 절수속사라는 용어가 본고의 목적과 더욱 부합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찰이 절수의 대상이 되었을까? 왕실의 경우 기본적으로 신앙이라는 매개를 통해 사찰과 연결되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찰에서 지내야 하는 각종 齋와 그에 소용되는 비용을 절수를 통해 자체적으로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왕실과 절수속사의 관계에서 신앙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경제적 요소가 존재한다는 것 역시 주목해야 한다. 경제적 요소는 아문과 절수속사의 경우 더 강조되어야 한다. 절수자와 사찰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어느 정도 일치했기 때문에 사찰이 절수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사찰로서는 각종 승역이 확대되는 가운데 역을 피할 수 있는 탈출구가 필요하였다. 특히 승군 및 역승의 동원이 승려 모집의 방식에서 지방관을 통한 사찰별 인원 할당으로 변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군현에 소속되어 부역을 하게 될수록 그 필요성은 증대하였다. 왕실 및 아문의 입장에서 사찰은 다른 절수지보다 좀 더 용이하게 절수를 할 수 있었다. 사적 토지 소유 인식의 확대에 따라 陳田의 절수 및 둔전은 확대는 어려워졌다.112) 民이 세와 역을 피해 투탁을 한다 하여도 이는 곧 중앙재정의 악화와 연결되었기 때문에 관료의 주된 비판 대상이 되었다.113) 그러나 사찰은 절수를 통해 오히려 지방관청의 개입을 막고 면세와 면역의 효과를 누릴 수 있었으며, 사위전은 개인의 소유가 아니었기 때문에 분란의 가능성이 매우 낮았다. 이러한 양측의 이해가 맞아떨어져 사찰에 대한 절수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먼저 왕실의 사찰 절수에 대하여 살펴보자. 왕실의 원당을 지정하고 원당을 복호하거나 많은 시주를 하는 일은 이미 조선전기에 많은 예를 찾을 수 있다. 조선전기의 왕실 원당은 주로 죽은 왕실 인물의 명복을 빌거나 그 능원을 관리하는 재사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또한 세조의 원당에서 보이듯이 국가와 왕실을 위한 기도처로서의 성격을 지닌 원당 또한 많았다. 정리하자면 조선전기의 왕실 원당은 신앙의 발로였다고 볼 수 있다.114)

그러나 조선후기의 왕실 원당은 주로 경제적 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 이유는 16세기 왕실재정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中宗代에 내수사의 장리활동이 금지되었고, 명종대에는 왕실에 대한 직전 지급이 종료되었다.115) 임진전쟁의 결과 국가에서 파악할 수 있는 토지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렇듯 궁방의 재정적 곤핀상황이 심각해지자 국가는 왕실에게 다른 방식으로 수익을 보장해주어야 했다. 특히 선조의 경우 16세기의 다른 왕들보다 자손이 많아 상대적으로 더 많은 재원을 확보해야 했다.116)

때문에 임진전쟁 이후 왕실의 사찰 절수 급속히 확대 되었다. 사찰이 절수의 대상이 된 것은 명종대 내원당 사위전의 절수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 명종대 문정왕후가 발원한 內願堂이 혁파되자, 내원당의 寺位田으로 설정된 토지들이 문제가 되었다. 관료들은 이 토지를 모수 환수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명종은 이 토지를 모두 내수사로 절수하여 왕실의 재용으로 삼았다. 이렇게 마련된 내장토가 바로 조선후기 궁방전의 기원이 되었다.117) 명종대의 경험을 바탕으로 궁방과 원당의 관계는 종교적 관계에 경제적 관계가 개입된 복잡한 관계로 바뀌어갔다.  

 

사신은 논한다. 난리 후에 公私가 탕갈되었는데도 으레 吉禮都監을 설치하여 儀物의 융성함이 평시보다도 더하였다. 그런데 도감의 관원은 公事를 빙자하여 私利를 꾀하였으므로 해로움이 市民에게 미쳤다. …… 왕자 臨海君 李珒은 宮奴를 풀어 보내어 山澤을 멋대로 차지하였고, 財貨가 많은 시장 사람은 죄가 있다고 칭탁하여 얽어매어 매우 괴롭히다가 시장 사람이 銀布를 많이 바친 연후에야 놓아주었다. …… 내가 일찍이 白蓮寺에 (楊州에 있다.) 간 적이 있는데 중 智浩가 ‘임해군의 願堂이 모두 15곳이나 된다.’고 하므로, 내가 ‘임해군이 반드시 시주하기를 좋아하는 탓이다.’ 하니, 그 중이 ‘임해군은 오히려 절에서 시주를 받아간다. 山菜 등의 물건을 그의 궁에 끊이지 않고 대어야 한다.’ 하며, 그 중은 매우 괴로워하였다.118)

 

사료 2-5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임해군은 많은 山林川澤과 함께 15곳의 원당을 절수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원당은 시주를 받거나 免役·免稅의 혜택을 받았지만, 임해군 원당의 경우 각종 물건을 臨海君房에 바쳐야했다. 각종 물종을 궁방에 바치는 것은 비단 위의 사례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119) 이를 통해 우리는 임진전쟁 이후 원당이 단순한 신앙의 목적으로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궁방의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설치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임해군의 경우뿐만 아니라 다른 왕자군이나 부마들 역시 원당이라는 명목으로 많은 사찰을 절수하였다.120)

궁방이 사찰을 절수하면 사찰 소유의 토지인 사위전은 궁방에 稅를 납부하게 되었다. 즉 사위전이 궁방전이 되는 것이다. 사위전은 유토 궁방전으로 알려져있는데,121) 그 내용을 살펴보면 구체적으로는 2종 유토 궁방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2종 유토 궁방전의 특징은 첫째 절수나 사여에 의해 형성되며, 둘째 국방 소유의 토지가 아니라 민유지와 마찬가지로 수조권을 분급하는 것이며, 셋째 진폐되어도 이정이 불가능하며, 넷째 수취체계상 국가를 거치지 않고 궁방의 도장이나 궁차 혹은 수령을 통해 궁방으로 송납한다는 것이었다.122)

내수사에 소속된 속사는 位田에서 나온 소출에 대한 稅를 내수사에 바쳐야 했다.123) 또한 내수사는 총섭이나 주지 등의 차첩을 구관하였고,124) 사찰의 주지 소임을 마음대로 교체할 수 있었다.125) 이는 2종 유토와 무토 궁방전의 수세를 담당하는 도장을 궁방에서 임명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현상이라고 보인다. 승직 차첩의 발급을 예조에서 시행하여 승려를 통제하고 궁방과의 결탁을 막으려고 했던 시도가 있었으나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126) 또한 사찰에 소속된 토지니 이정이랑 애초에 불가능하였고, 실제 소유자는 사찰이지만 유토 궁방전으로 편입되었다는 점에서 2종 유토 궁방전의 특징을 그대로 보인다고 하겠다.

사찰이 원당이 되면 세를 궁방에 바치고 또한 궁방에서 요구하는 각종 물종을 바쳐야했지만 이것이 사찰에 결코 불리한 것 많은 아니었다. 內需司에서 관리하는 회암사는 일시적으로 잡역이 감해지기도 하였으며,127) 원당에서 벌이는 수륙회는 궁가의 시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128) 승려가 내수사나 궁방의 노비와 결탁하여 방납을 하거나129) 백성의 토지를 강탈하는 경우도 있었다.130) 게다가 왕실의 위엄을 업고 지방의 이서나 토반, 토호들의 침어에 맛설 수 있었으며 자사에 주어진 역을 면제받거나 다른 사찰에 전가시킬 수도 있었다. 또한 원당이 되면 의례히 내려오는 도총섭 등의 승직을 통해 불교계 내부에서는 높은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헌부가 아뢰기를, “鹽田의 土稅와 商船의 浦稅, 寺刹의 差役은 바로 그 고을 수령의 소관이어서 감영이나 수영에서 마음대로 침범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억지로 각 고을에 명하여 세를 받아 營에 들이기 때문에 으레 이중으로 징수하는 폐단이 있습니다. 사찰 역시 그러한데 畿甸의 사찰은 여러 宮家의 願堂이라고 일컬어 본 고을에서 차역하는 일이 있으면 京邸人이 宮家로부터 책망을 받는 것이 끝이 없습니다. 일체 금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131)

 

위 사료는 왕실의 절수속사가 되면 면세와 면역의 혜택이 주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기사이다. 이처럼 절수속사가 된다는 것은 免役과 免稅를 통해 국가의 수취 즉 국역체제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왕실이나 아문으로부터 시주와 같은 후원을 받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군현의 부역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이기도 하였다. 승역이 여러 분야에서 확대되는 가운데 궁방이나 아문에 절수되는 것은 급격히 늘어나는 승역을 줄일 수 있고 사세를 확대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식이었다.

한편 아문의 사찰 절수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아문과 사찰의 관계에 대해서는 왕실에 비하여 비교적 자료가 적지만, 전반적으로 17세기 아문의 둔전 운영 및 어염 절수와 맥락을 함께 한다고 추정할 수 있다. 아문이 사찰을 절수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물종과 효과가 둔전 및 어염의 경우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어염을 절수할 수 있는 아문은 천신이나 제향과 관련있는 아문, 국가적 차원에서 우대해야 할 아문, 국방과 관련된 아문이나 營鎭 및 공물 진상과 관련된 지방의 各營과 各官에 한정되었다.132) 현재 사료로 확인할 수 있는 사찰을 절수한 아문과 이와 비슷하다.

 먼저 제향에 관련된 사찰을 살펴보자. 사찰은 산에 있었기 때문에 나물이나 과실 및 목재와 종이를 공급하기에 유리하였다. 때문에 祭需를 마련해야 하는 아문이 이를 명목으로 사찰을 절수하였다고 보인다. 성균관이 곤양의 多率寺를 절수하였던 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133) 이 밖에 各陵에 소속되어 제수를 담당했던 조포사와 돈으로 대납하였던 조포속사의 경우도 여기에 속한다고 하겠다.

국가적으로 우대해야 하는 아문의 경우에도 절수속사를 가지고 있었다. 조금 뒤의 일이긴 하지만 현재 耆老所가 사찰을 절수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134) 종친부 역시 사찰을 절수 받아 여기서 각종 물종을 받아내었다.135) 지방의 감영과 병영도 사찰을 절수하였다. 현종 원년에 경상도어사가 보고한 경상도의 절수속사는 모두 44개로 궁가에 속한 것이 3개, 경아문에 속한 것이 3개, 감영에 속한 것이 20개, 좌병영에 속한 것이 18개였다.136) 과연 이것이 절수속사 전체인지는 의문이지만, 지방 각영에 속한 절수속사가 상당히 많았다는 것은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지방 군현은 어염의 경우와 달리 절수속사를 보유하였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절수속사는 군현이 담당한 공납이나 役을 어렵게 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밖에 종이와 관련된 관아도 사찰을 절수하였다. 校書館의 경우 많은 종이가 필요하기 때문에 숙종 23년(1677) 영산의 법화사를 절수하였으나 숙종 44년 어사의 別單으로 혁파되었다. 그러나 종이가 많이 필요한 교서관의 특성 때문에 이를 還屬해 주길 청하자 이것을 허락되었다.137)

관청에 속하는 사찰들은 해당 관청에 종이 등의 물종을 계속 바쳐야 했지만 그 액수는 상대적으로 적었다.138) 때문에 궁방 절수속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투속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아문과의 절수속사 관계가 혁파되었을 때, 승려들은 스스로 속사 관계를 복원시켜 줄 것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교서관의 속사였던 法華寺가 혁파되었다가 다시 환속된 이유에는 승려의 호소도 포함되었으며,139) 성균관의 속사였던 다솔사의 승려들 역시 스스로 환속을 요청했던 것이다.140)

그런데 절수속사의 확대는 중앙 및 지방재정에 손해를 입혔을 뿐만 아니라 17세기 활발하게 논의되던 국가재정의 변통 논의에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1장에서 살펴보았듯이 국가는 승려를 활용하는 두 가지 방법, 즉 중앙의 관리를 통해 力役에 동원하는 것과 군현에 부속시켜 쇠퇴한 관영수공업을 보조하고 지방재정에 보태게 하는 것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절수속사의 확대는 국역체제에 편입되기 시작한 승려와 사찰을 국역체제에서 제외시키고 사적 재정인 왕실재정을 부속시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절수속사에 대한 혁파논의가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17세기 국가재정의 가장 큰 문제가 된 것은 공납제였다. 전세수입이 고정된 상태에서 늘어나는 국가재정이 의지할 수 있는 부분은 공물이었다.141) 그러나 16세기부터 시작된 공납제의 문란은 국가재정을 어렵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생의 해가 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대안이 등장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인 공안을 개정하고 궁방 등 왕실재정을 국가재정에 포함시켜 불필요한 낭비를 막자는 공안개정론이었고, 또 하나는 공물을 전결에 미포로 부과하되 공물주인의 역할을 인정하며 지방각관의 재정을 국가재정 안에 포함시키는 대동법이었다.142) 전자는 주로 김집이나 송준길 등 山林계열과 관련이 깊었고, 후가는 김육, 이시방 등 관료계열과 관련이 깊었다.

공물변통논의와 연결되어 관료들, 특히 산림들이 강하게 주장했던 것이 내수사 및 궁방의 혁파였다. 이 주장은 전통적으로 국왕에게 요구되는 節用을 강조하는 한편, 왕실의 운영에 드는 여러 비용 중 많은 부분을 浮費로 규정하고 이를 삭제하는 한편 왕실 공상의 드는 비용을 모두 국가재정으로 편입시켜 貢案을 개정하려는 목적을 띄고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절수속사뿐만 아니라 宮房田·屯田·鹽盆·漁場·山林·蘆田·船隻 절수의 혁파가 왕에게 요구되었다.

김육 등 대동법 시행론자들에게도 절수속사는 혁파되어야 할 대상이었다.143) 대동법의 시행 후 공물이 전결화된 상황에서 사위전이 궁방으로 절수되는 것은 국가재정을 곧바로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다.144)

그러나 광해군이나 반정 이후 즉위한 인조 모두 절수의 혁파는 용납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래 사료에서 보이듯 절수속사 때문에 궁방과 중앙관청의 갈등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 “이번에 내수사가 비변사에 회답한 公事를 보건대, 내용이 매우 사리에 어긋나고 거만하여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대체로 都總攝이란 바로 先朝의 난리 초기에 묘당이 품지하여 僧將에게 내려준 칭호입니다. 그 뒤에 폐지하기도 하고 그대로 두기도 하면서 만일 중에게 역사를 시킬 일이 있을 경우 總攝을 정하여 역사하는 諸僧을 관장하도록 해서 지금까지 시행하고 있음은 누군들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감히 ‘총섭이라는 칭호가 어느 곳에서 나온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하였으니, 이는 大臣을 업신여기고 희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長城縣監의 牒報를 따른 것이라 하더라도 그들로 하여금 첩보대로 시행하게 한 것은 비국의 논의였습니다. 그런데도 감히 ‘일개 중의 우두머리가 지휘하여 갑자기 시행하도록 했으니, 크게 일의 체모를 손상시켰다.’ 하였으니, 이는 대신을 꾸짖으며 욕을 한 것입니다. …… 내수사 公事 次知官員을 잡아다 국문하고 형률을 상고하여 엄중히 다스려서, 한편으로는 조정의 체면을 조금이나마 부지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近侍의 교만하고 방자한 버릇을 징계하도록 명하소서.”145)

 

위 사료는 광해군대 내수사와 비변사의 갈등을 보여주는 기사이다. 비변사의 명을 내수사가 따르지 않는 내용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드러나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총섭 등 승직의 명칭이 나오는 것을 보아 그것이 승려와 관계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비변사에서 장성현감의 첩보에 따라 도총섭을 시켜 역승을 동원하여 役事에 부리려고 하였는데, 내수사에서 이를 거부하였던 것이다. 아마 비변사가 부리고자 한 절은 내수사가 주지를 임명한 한 절수속사였을 것이다. 절수속사를 혁파하고자 하지 않은 왕의 의지를 업고 궁방과 비변사가 대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수사 등의 궁방과 국가기관이 대립하는 상황이 연출될 수 있었는가? 그 이유는 절수속사의 지정 과정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아래의 <도표 2-1>은 절수속사 중 왕실에 속하는 사찰의 절수속사 지정 과정을 정리하여 일반화한 것이다. 절수속사 지정의 발의가 누구이냐에 따라서 특히 국왕 및 대비·왕비의 경우는 아래 도표와 조금 다를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필자가 설명하고자 하는 내용과는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보다 일반적인 경우를 상정하였다.

 

도표 2-1. 왕실 절수속사의 지정 과정146)



 

위 도표에서 보이듯 절수속사 지정철차의 첫 번째 단계는 사찰에서 내수사나 궁방에 자신들을 해당 궁방에 소속시켜 달라는 소지를 올리고 소지를 접수한 곳이 궁방일 경우 내수사에 수본을 올리는 것으로 시작된다.147) 만약 발의자나 국왕이나 대비·왕비 및 그에 준하는 인물일 경우 국왕이 직접 관련 절차를 밟을 것을 내수사에 명령한다.148) 내수사에서는 국왕에게 직접 단자를 올리게 되는데 여기까지가 절수속사 지정의 上向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단자를 받은 국왕은 판하하여 내수사와 비변사에 통보한다. 내수사에서는 다시 해당 궁방에 이를 이관하고 해당 사찰에는 납세조건이 내려간다. 한편 비변사에서는 절수속사가 생겼다는 내용을 국법상 승도를 관리하는 예조에 이보하고 해당 감영에 절목이 포함된 관문을 보내고 감영에서는 해당 군현에 다시 절목을 보낸다. 한편 비변사에서는 결정된 절목을 해당 사찰이 보내며 해당 사찰이 역을 부담하고 있는 여러 아문에서는 해당 역을 감면한다는 완문을 내리기도 한다. 이것이 절수속사 지정의 下向과정이다. 149)

이상에서 살펴본 절수속사의 지정과정을 살펴보면 사찰에서 국왕까지 올라가는 상향과정에 비변사·예조·감영·군현 등 국가기관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며 하향과정에서 일방적으로 통보를 받을 뿐이다. 내수사는 국왕의 명령을 직접 봉행하기 때문에 국가기관의 간섭을 거부했던 것이다. 반면 국가기관은 왕실의 절수에 관하여 어떠한 개입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직접적 이해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군현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은 특기할만하다.

인조반정 이후 국가재정 변통 논의가 활발한 가운데 궁중·부중의 일치를 위해 관료들이 내수사 및 궁방의 절수와 원당 사찰 및 각 아문 屯田의 혁파를 청하는 경우가 늘어났음은 이미 위에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절수속사는 <도표 2-1>에서 보이듯 국가재정의 간섭을 전혀 받지 않을 수 있고 내탕 및 궁방에서 확대할 수 있었던 부분이었기 때문에 국왕이 이를 수용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공납제 변통에 별다른 의지를 모이지 않았던 광해군은 물론이고, 반정으로 즉위한 인조 역시 절수의 혁파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었다. 인조 4년(1626) 양사가 합계한 願堂 혁파의 논의에도 끝내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150) 효종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헌부가 원당을 혁파할 것을 청하였지만 왕이 따라주지 않아 사간원에서 이를 크게 책망하는 응지상소를 올렸다.151) 그러나 군영의 확대에 따른 군사비 지출이 확대되는 가운데 군영의 사찰 절수를 줄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절수속사의 폐해가 커지자 이를 언제까지나 그냥 방치하기는 어려웠다.

절수속사의 확대에 따른 지방 군현의 재정의 피해가 막대하였다. 위의 도표에서 보았듯이 사찰의 절수는 군현의 입장을 배제된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분정된 막대한 양의 지역을 부담해야했고, 각종 관수를 사찰로부터 공급받았던 군현으로서는 절수속사가 생길수록 지방재정을 지탱하기 어려웠다.152) 서천군의 경우 궁가가 절수한 토지와 충훈부와 훈련도감이 절수한 토지, 원당사찰이 된 千房寺가 邑弊가 되었다. 효종도 서천군의 절박한 사세를 듣고 천방사를 본읍에 돌려줄 수 밖에 없었다.153)

효종 9년(1658)에는 전국에 암행어사가 파견되었다.154) 효종은 다음해에 붕어하지만, 이 때 경상도 어사가 치계한 내용은 다음 대인 현종대 절수속사의 혁파의 바탕이 되었다.155) 현종은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기 때문에 효종에 의해 중용되었던 산림계 인물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당시 가장 심각한 문제였던 공납제 변통 논의를 주도하였다. 더군다나 현종대는 즉위년부터 흉년이 이어져서 절용의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되기도 하였다.156) 현종 원년 본래 계획되었던 호남 山郡의 대동법이 연기되자, 절용을 강조하는 전통적 변통 논의가 대두되었다.157) 절수속사의 혁파는 이러한 분위기에서 제기되었다.

혁파 논의의 계기는 현종 원년(1660) 경상도관찰사 홍처후의 절수속사 혁파를 청하는 초기에서 시작되었다.158) 홍처후는 경상도 내 여러 읍의 사찰을 조사하여 여러 宮家와 각 아문에 소속되어 있는 것들은 모두 停罷시키고 본읍에 도로 소속시킴으로써 紙地 등의 役에 이바지하게 하자는 내용으로 覆啓하여,159) 이를 이조가 草記하였다. 더불어 이조에서는 내수사에서 담양의 옥천사를 절수하고자 하는 내용을 防啓하고 이를 혁파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현종은 민감하게 반응하여 모든 읍의 원당을 금지한 전례가 있는지, 또한 이조가 내수사의 계를 마음대로 막아도 되는 것인지를 승정원에게 조사하게 하였다. 이 때 승정원에서는 효종 9년(1658)의 어사 파견 때 여러 궁가와 각 아문과 사대부의 屯庄·鹽盆·漁箭·船隻·願堂 등 폐단을 끼치고 있는 일체의 사건을 모두 확인하고 살펴 사실대로 보고하라는 어명이 있었다고 하여 이조와 경상도관찰사의 복계를 정당화 하였다.160)  

절수속사 혁파의 문제가 이조의 초기 문제로 비화되자 산림이 나서게 되었다. 당시 송시열은 낙향해 있었기 때문에 송준길이 입대하여 선왕인 효종의 말을 인용하며 궁가와 아문에 소속된 사찰 혁파의 정당성을 논하였다.161) 산림세력의 청에 밀려 현종은 곡절을 잘 몰랐다는 변명을 하면서 각처의 사찰을 혁파하자는 경상도관찰사의 복계를 윤허하였다. 그러나 상주의 대승사와 담양의 옥천사가 그대로 각각 동평위와 흥평위의 원당으로 절수되는 등 실제로는 명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162)

같은 날 현종이 備局의 諸臣을 引見한 가운데, 영의정 정태화, 이조판서 홍명하, 부제학 유계, 대사간 이경억이 다시 한 번 원당의 혁파를 주청하였다. 그러나 柴場의 혁파를 받아들인 현종도 원당의 혁파만은 난색을 표했는데, 정태화가 강하게 다시 청하자 결국 明禮宮을 제외한 다른 궁가의 원당을 혁파토록 하였다.163) 명례궁은 인조대 인목대비의 內帑을 담당했던 궁방으로 그 이후로 대비와 중전의 내탕을 담당했으며 여러 宮房의 致斃와 관계없이 永存한 1사 4궁 중의 하나였다. 현종대에는 중전의 내탕을 담당하는 궁방이었기 때문에164) 원당 혁파의 대상에서 제외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절수속사의 혁파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궁방 및 아문뿐만 아니라 절수속사가 되어 군현의 역을 피하던 승려들도 강하게 반발하였다. 효종대 이미 원당 혁파가 명해진 천방사는 사실 현종 원년까지 계속 원당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금 본읍에 소속시키려는 관아의 영이 떨어지자 천방사의 승려들은 무력으로 관아의 영에 저항하였다.

 

충청도 千房寺 승려가 관아의 영을 따르지 않자 감사 이익한이 겸임 한산군수 申嵩耉로 하여금 그 우두머리 승려를 잡아들이게 하였다. 그러자 절의 승려 수백 명이 조총을 갖거나 활을 지니고서 험지에 웅거하여 저항하였다. 그 뒤 화약으로 그 절을 불사르고 또 침노한 벼슬아치의 집을 불질러 그 분을 풀었다. 이익한이 그 소문을 듣고 조정에 품신하지 않은 채 지레 공주 영장 양일한을 한산에 보내 공격하여 붙잡게 하였다. 이에 일한이 한산과 임천 등지의 군병을 징발하여 붙잡았다. 한산과 임천은 이미 우영장의 소관이 아닌데다 일한은 또 치계도 하지 않고 병사에게도 보고하지 않은 채 그 곳의 군병을 멋대로 징발하였다. 승려들을 붙잡은 뒤 익한이 모조리 囚禁을 해놓고, 효시하여 그 악을 징계할 것을 계청하였다.165)

 

위의 사료는 사찰이 절수속사가 되려는 의지가 얼마가 강한지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러나 현종대의 절수속사 혁파로 대부분의 사찰은 다시 군현에 부속되었으며 군현에서 부과하는 각종 역을 지어야했다.

현종대의 혁파로 절수속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물론 아니었다.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군현의 差役을 피하기 위하여 원당이 되려는 시도는 계속되었다. 한편으로는 사찰의 이해와 관계없이 궁방이나 아문이 사찰을 절수하려는 일도 계속 일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숙종 및 영조와 정조대에는 한 차례 절수속사의 혁파, 심지어 능찰의 혁파까지 명하였던 것이다. 그때마다 사찰은 본관에 속한다는 원칙이 재확인 되었다.166)

그러나 현종대의 절수속사 혁파는 사찰이 궁방과 아문에 절수된 이후 처음으로 시행된 대대적인 정리였다. 무엇보다도 혁파 논의의 과정에서 “(원당을 혁파하고) 전적으로 본읍에 소속시킴으로써 紙役의 일에 도움받을 수 있도록 할 것”167), “여러 궁가 또는 각 아문에 소속되어 있는 것들을 모두 정파하고, 다시 그 읍에다 소속시켜 紙地 등의 役을 제공하도록 할 것”168) 등의 논의가 나와 사찰이 기본적으로 군현에 부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에 큰 의미가 있다. 대동법 등 중앙재정이 확대되고 강화되는 과정에서 사찰은 지방재정을 보충하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3. 승려의 국역체제 편입과 지방 부속

  1) 僧侶의 戶籍 등재와 승려의 半公民化

이상에서 국가의 승려 동원인 임시적이고 비정규적인 형태에서 항상적이고 정규적인 형태로 바뀌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의승방번제를 통해 승려들은 공민의 군역 부담과 마찬가지의 역을 지게 되었다. 승려는 조선 개국이라 처음으로 국역체제 안으로 편입되고 있었던 것이다.

승려의 국역체제 편입은 호적의 승려 등재를 통해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면 호적은 본질적으로 국역 운영을 위한 기초 장부였기 때문이다.169) 승려의 호적 등재는 승려가 국역체제 안에 완전히 편입되고 국가와 지방의 파악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숙종 원년에 이루어진 승려의 호적 등재 논의가 실제로 호적 작성에 반영되었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남아있는 여러 호적 자료를 통하여 알 수 있다.

먼저 숙종 원년 승려의 호적 등재가 이루어지게 전 국가의 승려 인식은 어떠했는지부터 알아보도록 하겠다. 17세기 초반 국가가 승려가 피역의 무리나 왕화되지 않은 불안정한 무리로 인식했다는 사실은 이미 앞서 밝혔다. 그러나 효종 연간 의승방번제와 같은 정규적 승역이 시행되면서 17세기 초반과 같은 단순한 인식에 변화가 일어났다. 즉 승려를 공민과 마찬가지로 분류하고 관리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그러나 승려는 근본적으로 ‘물속의 물고기와 같이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 이들’이라고 인식되어서170) 호적과 같은 정리된 형식을 갖춘 일종의 ‘승적’ 작성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그 관리는 주로 지방에 이관된 것으로 보인다. 아래 <표 3-1>을 통해 그 일면을  파악할 수 있다.

 

표 3-1. 효종 3년 『해남대흥사절목』에 나타는 국가의 승려 분류171)

高僧類

(세상을 잊고 염불하는 이들)

일찍 禪敎를 알고 책을 내려놓고 수도하는 자

본사의 수승과 삼보 등이 존경하며 항상 보호할 일.

禪旨를 叅詳하고 벽을 향해 마음을 觀하는 자

오로지 경전의 가르침을 따르고 서방을 향해 염불하는 자

善僧類

(國法을 어기지 않고 僧道를 지키는 자들)

경문을 전수하는 자

本寺 수승과 삼보 등이 일일이 적발하여 본관과 도총섭에게 보고하고 직을 맡길 수 있는 자에게 상직을 주며 侵魚받지 말도록 보호할 일.

국가의 일에 마음을 다하는 자

스승의 전수한 것을 공경하고 존숭하는 자

공경히 스승을 모시는 자

노인에게 공순한 자

계율을 지키고 마음을 조어하는 자

자비롭고 마음이 착한 자

가난하고 병든 이를 간호하는 자

동료들과 화합하며 좋아하는 자

항상 승복을 입는 자

사람을 만나면 예를 갖추어 절하는 자

凡僧作罪類

왕의 백성으로 법령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

최근 국가의 일로 승역이 많은데 負卜供饋까지 너무 큰 폐가 되니 이를 금지할 일.

도내의 3성 수직승장 등은 관료를 받아 성을 지키는 것에 불과한데 별도로 순행이 없는데도 각사에 부담시키는 것이 많으니 차사원 등이 각사를 횡행하는 것을 엄금할 일.

 

수학한 스승을 전혀 돌보지 않는 자

자신을 길러준 스승을 영원히 간호하지 않는자

연로한 어른을 능멸하고 욕하는 자

동료와 불화하며 힘을 믿고 악행하는 자

승려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모습으로 행동거지가 황당한 자

스스로 배우지 않고 또한 제자를 가르치지 않는 자

남의 상좌를 불러 자기의 상좌로 삼는 자

거짓된 일을 꾸며 동료를 모함하는 자

여자와 통간하고 여색을 다투어 죽이고 다치게 하는 자

불을 질러 사람을 죽이고 벌을 길러 살생하는 자

부처를 팔아 저을 짓고 음악을 연주하고 술을 마시는 자

권선하여 얻은 재물을 임의로 사사로이 쓰는 자

마음의 도령이 작고 좁으며 심히 경박한 자

사찰에 모여 활을 쏘고 사중에 말을 기르는 자

길에서 귀하거나 천한 자를 만나도 곁눈으로 보며 절하지 않는 자

不從衣冠戒類

머리에 벙거지를 쓰고귀에 말털 귀마개를 덮는 자

허리에 활이나 칼을 차고 사폭바지를 입고 색띠를 두른 자

걸을 때 행전을 벗고 정강이까지 이르는 가죽신을 묶는 자

잠잘 때 요강과 뿔 베개와 붉은 이부자리를 쓰는 자

首僧의 지시를 거역하고 듣지 않는 자

橫行作弊僧俗類

각 사찰의 삼보 등으로서 자기를 살찌게 하고자 온갖 계책으로 관리를 속이고 본형을 침범하는 승려 일족

경아문에 의탁한 자로서 그 몸을 살찌우려고 장사를 하면서 함부로 각 사찰에 세금을 거두어 만 가지 폐단을 끼치는 자

居士社堂頑悖類

촌민을 많이 유혹하여 지나치게 참회하도록 하는 자

 

거짓으로 의술을 칭탁하여 침을 잘못 놔서 살상하는 자

化主라고 칭하면서 물건을 얻어 사사로이 먹는 자

스승과 제자 및 동료의 처와 간통하고 거처를 빼앗는 자

불당에 무리지어 모여 세상일의 탐욕으로 업으로 삼는 자

입으로 염불하지 않고 시비하면서 남의 악을 비방하는 자

 

표 3-2. <표 3-1>에 바탕한 승려 분류

高僧

高僧類

凡僧

善僧類

凡僧作罪類

不從衣冠戒類

橫行作弊僧俗類

居士 및 社堂

居士社堂頑悖類

 

<표 3-1>의 전거가 된 『海南大興寺節目』은 감영에서 발급한 것이기 때문에 이 분류가 당시 국가의 입장을 모두 반영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문서의 몇 가지 특징으로 보아 관찰사가 한 사찰에만 발급한 것이 아니라 다수의 사찰을 대상으로 발급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먼저 이 문서는 목판으로 간행한 것으로 상당히 많은 양을 한 번에 인쇄하거나 장기간 같은 내용을 반복하여 인쇄할 수 있도록 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 문서의 발급자를 표시하는 문서 말미 부분 또한 겸순찰사와 도사의 명의가 목판으로 인쇄되어 있지만 어느 도에서 발급된 것인지는 표기되지 않은 상태이다. 이는 대흥사가 위치한 전라도 외에 다른 도에서도 같은 내용의 절목을 발급했을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다. 이 두 가지 내용에 근거하여 살펴볼 때 이 절목은 대흥사라는 한 사찰의 특수한 사례가 아니라 사찰 다수를 상대로 한 일반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는 문서라고 볼 수 있다.

『海南大興寺節目』은 주로 승려의 선악 여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국가의 승려 분류에만 초점을 맞추어 <표 3-1>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며 <표 3-2>가 된다. 국가는 승려를 고승·범승·거사 및 사당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 중 고승은 수도에 전념하는 이들로 수승 같은 승직을 맡은 승려가 보호해야 할 이들이며 이들은 승역 동원에서 상당부분 제외될 수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범승은 고승을 제외한 일반 승려로 이들 중 선승은 수승 및 삼보와 같은 승직을 맡을 수 있었으며 그 외의 죄를 짓거나 의관과 계율을 지키지 않은 자들은 단속의 대상이 되었다. 善僧類條의 ‘국가의 일에 마음을 다하는 자’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승역의 담당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거사와 사당은 출가하지 않았으나 절에 머무르고 있는 자들이다. 이들은 역을 피해 사찰로 들어와 승려를 참칭하며 시주를 받아들이기도 하였고 각종 도참을 퍼트리기도 하였기 때문에 단속의 대상이 되었다. 각종 호적자료에서는 거사와 사당 같이 사찰에 머무는 이들을 居士 혹은 居寺로 따로 처리하고 있다.172)

국가에서는 이와 같이 역에서 제외되는 승려, 역을 부담하는 승려, 피역의 목적으로 사찰에 투속한 인물로 분리하여 분류하였다. 그렇다면 이 분류에 바탕한 승려의 관리와 통제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위에서 열거한 범승작죄류, 부종의관계류, 횡행작패승속류, 거사완패류의 승려들은 각사 수승과 삼보 등이 일일이 적간하여 본관에 고하여 다스리고, 또 도총섭에게 보고하면 즉 上司에 보고하여 경중에 따라 형을 가하도록 하였다.173) 이처럼 승려의 관리 및 통제는 지방 관아와 도총섭의 이중 구조를 통해 이루어졌다. 효종 3년이라는 시기를 고려해볼 때 아직 국가의 승려에 대한 통제력이 완전치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이러한 이중적 구조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듯 불완전했던 국가의 승려 통제는 숙종 원년에 이루어진 승려의 호적 등재를 통해 보다 발전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승려의 호적 등재는 숙종 원년(1675)에 윤휴의 건의로 시작되었다.174) 윤휴가 승려의 호적 등재를 추진한 이유는 당시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인다. 윤휴는 도체찰부를 설치하고 都體察使의 주둔영으로 개성의 대흥산성을 축조하였다. 산성에 승군을 주둔시키던 당시의 관행으로 미루어보건데, 승려의 호적 등재는 軍額을 확보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였다고 보인다. 윤휴의 본래 목적은 승려를 작대시켜 군사로 활용하는데 있었기 때문이다.175)  그리하여 『慶尙道丹城縣戶籍臺帳(이하 丹城戶籍)』에는 숙종 4년(1678)부터 승려가 등재되었으며, 대구·언양 등 다른 호적도 대략 17세기 후반인 숙종 재위 초반에 승려가 등재되기 시작하였다.

호적에 등재되는 승려는 전토를 소유하고 있는 승려에 한정되었다. 승려는 ‘물 속을 돌아다니는 물고기’와 같아서 그 소재를 파악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토지 소유 여부가 호적 등재의 잣대가 된 것이다.176) 이는 승려들을 작대시키고 장수를 정하여 군사로 활용하기 위해 소재가 일정하고 파악하기 쉬운 이들을 호적에 올리기 위해서였다.

호적에 올라온 승려의 호는 上座가 師僧과 함께 한 戶를 이루고 있다. 이는 승려의 토지 상속이 절반은 上座에게로 이어지는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인다. 그러나 시대가 내려갈수록 한 명의 승려가 각각 호주가 되어 戶數와 口數가 대체로 일치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177)

주목할 점은 승려의 직역부분이다. 승려의 이름 앞에는 일반적인 호적 기재 방식과 마찬가지로 良人僧, 寺奴僧, 驛吏僧 등 다양한 직역이 기재되었다. 이러한 직역 구분의 기준은 출가 이전의 신분이라고 생각된다. 함께 기재되어있는 2조 내지 4조의 직역과 승려의 직역이 대체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즉 승려는 그 자체가 신분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었으며 국가에서 양천을 파악하여 역을 부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승려의 직역을 파악했던 것이다.

승려의 호적 등재율은 당시 일반적 양민의 등재율과 같은 50% 정도로 추정된다.178) 다만 18세기 이후로는 호적에 등재되는 승려의 절대적인 수가 점차 줄어들고 있으며, 기재되는 사찰의 수도 줄어들었다.179)승려의 인신을 모두 파악하겠다는 본래 윤휴의 계획과는 달리 승려의 수는 국가에서 필요한 총액만큼만 기재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총액을 바탕으로 승려가 의무적으로 부담해야 하는 의승방번역을 군현에서 조정하여 분정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180) 실제로 단성과 대구, 언양 호적에서 큰 변동 의외에 승려의 戶數는 거의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181)

호적에 등재됨으로써 승려가 국역체제에 편입되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렇다면 국가에서는 국역체제에 들어온 승려를 어떻게 대우하고 있었는가? 17세기 중반 이후 국가의 승려 인식은 여전히 이단을 섬기는 자, 피역의 무리라는 인식을 완벽하게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점차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승려에 대해서 역시 백성이라는 인식이 생기면서 이들에 대해서 조금씩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그 기저에는 역시 국역체제의 한 축을 이루게 된 승역이 있었다.

 

3-1 전답을 사유한 승려가 사망한 후에 전토는 諸族屬에게 귀속시키고 雜物은 諸弟子에게 전승된다.182)

 

3-2 僧人田畓은 사촌 이상의 친족이 있으면 上佐와 더불어 절반을 분급하고 상좌도 없고, 사촌인 자도 없으면 속공하되 그 전답을 本寺에 仍給하여 승역을 돕는다.183)

 

사료 3-1은 효종 8년에 시행된 승려의 토지 상속에 관한 令이다. 이를 통해 17세기 승려의 토지 소유가 가능해졌다는 알 수 있다. 그러나 한 편으로 이 법령을 통해 승려가 자신의 상좌에게 토지를 상속하거나 사찰로 토지가 귀속되는 것을 방지하였다. 즉 사료 3-1은 여전히 승려를 비생산적인 집단으로 보고 공민으로서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현종 15년 시행된 법령인 사료 3-2의 내용을 보면 비로소 승려가 자신의 상좌에서 토지를 상속할 수 있도록 바뀐 사실을 알 수 있다. 속가의 혈족들과 불가의 제자들의 권리를 똑같이 인정함으로서 불가 내부의 질서를 인정해주었던 것이다. 또한 토지가 속공되는 가운데에서도 사찰의 권리를 일부 인정하여 승역을 돕기 위한 자금으로 삼도록 하였다. 승려에 대한 인식 변화가 제도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무엇보다도 승려의 호적 등재가 이루어진 숙종 연간 이후의 인식 변화가 두드러진다. 특히 유교정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경연 자리에서 경연관들의 승려에 대한 언급이 눈에 띈다.

 

3-3 (시독관) 이희무가 아뢰기를 “사원가 승니는 폐가 되기 때문에 폐하고 금한 것입니다.” 이희무가 아뢰길 “장미는 굽히는 것으로 供副를 삼았지만 (周)세종은 공과 충으로써 그를 대하지 않았습니다. 신하된 자는 마땅히 뜻을 굽혀 承順해서는 않됩니다.” ... 이희무가 아뢰기를 “우리나라의 승려는 役이 있고 중원의 승려는 役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는 중원의 승려 많은 것과 같지 않습니다.” 상이 말하길 “승도는 모두 군역을 피하는 자이다.”184)

 

 3-4 참찬관 권지가 아뢰기를 “외방 각 營門에 소속된 폐단은 다만 둔전의 설치, 염분, 어전뿐만 아닙니다. 호남·영남 같은 데는 종이가 사찰에서 생산되는데 이 사찰 중들을 各營에 分屬시킨 자도 있습니다. 분속시킨 사유를 물어 보니 이들은 진상할 箋文을 油芚으로 싸는데 소중한 바탕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실제 타도에는 있지 않는 것입니다. 營門에서 대략 그 값을 주지만 징수하는 바는 倍蓰뿐 아니며 營屬 무리들이 문서를 빙자하여 억지로 빼앗아 감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관에서는 누구인지 감히 말하지 않습니다. 이로써 僧徒들이 지탱하지 못합니다. 옛 巨刹이 오늘날 무성한 풀로 변하였고 승도가 부역을 도피하는 것은 나쁜 짓인 듯합니다. 義僧의 番上, 僧軍의 調發, 紙地의 添納에 이르러서는 또한 비로소 국가를 위한 부역이 아님이 없습니다. 요즘 사찰을 혁파하고 승도를 조발하는 것은 다 이러한 데 있으니 조정에서도 마땅히 긍념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만약 각영에 분속하는 규정을 혁파하여 본관에 전속시켜 국가의 부역에 제공하게 되면 이것도 또한 혁파하는 중의 한 가지입니다. 이런 이유를 감히 아룁니다.”185)

 

위 사료는 모두 경연의 자리에서 나온 경연관의 발언이다. 공통되는 점은 승려가 모두 역을 지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료 3-3에서 보이듯 시독관 이희무는 『자치통감강목』을 강하는 과정에서 불교로 인한 중국의 폐정을 논하고 있지만 조선의 경우는 중국과 다르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흔히 불교의 폐해를 논할 때 중국의 고사를 논하는 방식과는 정반대의 인식이다. 사료 3-4에서 참찬관 권지 역시 義僧·僧軍·紙納이 모두 국가의 부역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절수속사 혁파를 주장하고 있다. 승려는 경연을 준비하는 유신들로부터도 역을 담당하는 백성의 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18세기 국왕의 의례적 은전의 대상에 승려가 포함된 것은 바로 이러한 인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186)

승려가 역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발급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僧帖·空名僧帖이다. 승첩은 그 직위에 따라서 嘉善帖이나 通政帖으로도 불리고 있었다.187) 모집의 대가로 승려에게 주어지던 도첩은 현종 연간까지 지속적으로 발급되었지만 당대에 이미 폐지된 법으로 이야기되고 있었다.188) 도첩이 효력을 잃게 되면서 승려를 모집할 때 그 반대급부로 지급할 새로운 대안이 마련되는데 그것이 바로 승첩이었다.

 

3-5 (병조판서) 김석주가 아뢰기를 “남한산성의 남단사는 다 기울어지고 무너졌는데, 지금 장차 개수하려 하지만 이미 오로지 승려 무리에게만 맡길 수 없게 되었으며 본청의 物役으로는 또한 도울 수 없습니다. 또한 각처의 건물을 수선하는 일은 계속되어 그만둘 수 없는데 지난 해 조정에서 성급한 승·속의 통정첩은 지금 또한 이미 다했습니다. 이 첩문 수백장을 다시 해조로 하여금 성급하게 하여 재료와 힘을 수합하게 하는 방법이 어떻습니까?” (영의정) 허적이 말하길 “매작은 비록 폐가 있지만 일이 부득이 하므로 또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승·속 통정첩 각 200장을 특별히 성급하도록 하심이 마땅합니다.”189)

 

승첩은 일반 공명첩과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발급되었다. 사료 3-5에서 보는 바와 같이 주로 국가의 재정을 보용할 목적이었다. 그러나 공명첩과는 달리 각종 공사에 부역하거나 산성에 거처할 승려를 모집하는 데에 활용되기도 하였다.190) 그러나 모승을 통한 공사가 점차 줄어들면서 숙종대 후반으로 갈수록 주로 진휼이나 환자의 마련 같은 목적의 승첩 발급이 승려 모집을 위한 경우를 능가하게 되었다.

승첩은 효종대에 등장하여 현종과 숙종대에 집중적으로 발급되었다. 국역체제에서 벗어나 사환권이 박탈된 승려가 명예직으로나마 당상의 품계를 지니게 되는 일은 이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승려가 국역체제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 사료 3-5에서 보이듯 승·속의 공명첩이 함께 발급되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숙종대 이후 가선 혹은 통정의 품계를 지닌 승려들이 늘어나는 것이 여러 사료에서 발견된다.191)

그러나 이를 가지고 승려가 완벽하게 공민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료 3-3에서 보이듯 승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여전했다. 비록 국역을 지게 되었지만 이단을 신봉하는 무리라는 점에서 유교국가인 조선의 완벽한 공민이 되기엔 부족함이 있었던 것이다. 승려가 완전히 국가의 공민으로 인정되는 것은 갑오개혁과 광무호적의 작성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즉 승려는 국역체제 안에 들어왔지만 여전히 半公民의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승려의 국역체제 편입은 호적 등재를 통해 완성되었다. 승려의 역부담이 증가함에 따라 국가의 승려에 대한 인식이 점차 긍정적으로 변모하지만 17세기 중반까지 승려를 관리·통제하는 데에는 지방관과 도총섭이라는 이중의 경로를 통해야만 했다. 그러나 숙종 원년, 승려가 호적에 등재되면서 지방관을 통한 국가의 승려 통제가 가능해졌다. 승려는 출가 이전의 신분으로 파악되었으며 군현에 분정된 정액에 따라 등재되었다.

승려가 국역체제 안으로 들어오면서 토지의 상속과 같은 일정한 권리가 보장되었다. 경연을 담당하는 대표적인 유신들 역시 승려에 대한 부정적 발언만 하지는 않았다. 승려에게 품계를 주는 승첩의 발급 또한 국역체제 안에 들어오면서 달라진 승려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승려는 여전이 이단을 신봉하는 무리이기 때문에 국가의 완벽한 공민이 아닌 半公民의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2) 應役屬寺의 郡縣 附屬과 寺刹役

위에서 승려가 국역을 담당하게 되면서 국가의 半公民으로서 일부나마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승려의 국역체제 편입과 반공민화는 결국 어떻게 귀결되게 되는가? 그 결과는 역시 사찰의 군현 귀속 강화라고 볼 수 있다. 승려는 국가에 군역을 부담하게 되지만 나머지 요역 및 공물에 있어서는 국가에 직접 납부하기보다는 군현에 납부하여 지방재정을 보용해주는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이는 단순히 지방재정을 보용하는 것을 넘어 지방에서 중앙으로 납부하는 재화를 무리 없이 마련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기 때문에 중앙의 입장에서도 사찰이 지방에 부속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192)

이는 조선후기 부세제도의 변화와 연관되는 것이다. 즉 17세기 공납과 요역이 토지에 부과되면서 부세가 地稅化 되고, 부세의 수취량이 정액화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지방관청은 중앙정부의 하위파트너가 되어 정해진 양의 부세를 중앙에 납부한다. 지방이 국가의 재정업무를 분담하는 만큼 조세징수와, 운방, 재원분배 등 조세 물류에 드는 재정수요가 증가했는데, 이 재원을 마련하는 방법은 지방의 자율에 맡겨졌던 것이다. 때문에 조선후기 지방재정은 계속 팽창하고 있었다. 국가는 안정적 부세 수취를 위해서라도 지방의 재정을 보완해줄 방법을 마련해야 했고, 그 중 하나가 사찰을 군현의 응역속사로 하여 필요한 재용을 보충토록 하는 것이었다.

  현종대 이후 대동법으로 대부분의 물자가 米布 등으로 상납되게 되었다. 이에 따라 紙所를 비롯한 대부분의 지방 관청 소속 수공업기관도 혁파되거나 사라지게 되었다.193) 그러나 종이의 경우에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종이를 무납할 경우 세폐 등 사대에 쓰이는 종이의 품질을 보장할 수 없고, 품질이 일정하지도 않았다. 때문에 아래 사료에서 보이듯 종이만은 그대로 각관에 부담시키기로 하였다.

 

3-6 호조판서 정치화가 계하기를 “앞서 全南大同事目을 마련할 때 歲幣에 쓰이는 大好紙·小好止·白綿紙는 아울러 大同作米 중에 넣고 本邑에 상납시키지 않기로 하고, 京中에서 사서 쓰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京中 종이의 품질이 각관에서 바치는 것과 같지 않으니 앞으로 장래에 사는 일의 근심을 면하는 것이 극히 가련하게 되었습니다.” 우의정 원두표가 말하길 “당초 신들의 뜻은 미리 이 폐단을 우려하여, 종이는 본읍에게 상납하게 하고자 하였으나 대동을 주관하는 신하가 시험 삼아 경중에서 무납하였습니다. 지금에 이르러 그 폐가 이와 같으니 호조판서의 말이 진실로 그러합니다.” 상이 말하길 “내년부터 시작하되, 종이는 아울러 본읍에게 상납할 일은 분부하는 것이 가하다.”194)

 

종이를 전부 지방에 부담시키는 조치는 숙종 26년(1700)에 변화하였다. 즉 필요한 종이의 절반은 그대로 지방에 부담시키되, 나머지는 상인을 통해 貿紙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 이유는 대동법의 시행 이후 현물상납이 중단되고 미포를 대신 납부했기 때문에 楮田이 모두 논밭으로 변하여 닥나무를 구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195) 따라서 군현에서는 민영수공업과 상업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196) 즉 지방관청에서 官營紙所를 운영하기 보다는 紙庫를 통해 비용을 마련하고 民營紙所나 상인에게서 종이를 구입해 납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전·지계를 통합 종이 무납은 많은 부분 사찰에 지가를 지급하고 비납하게 하는 것이었는데 지방관청의 협력이 없이는 사실상 비납이 불가능했기 때문에197) 사찰에서는 여전히 이를 役으로 여기게 되었다. 또한 세폐·방물지 외에 진상지·관수지 등은 그대로 지방에 분정되어 19세기까지 사찰에 계속하여 종이를 부담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지금까지 사찰의 紙役에 대해서 살펴본 이유는 그것이 사찰의 가장 큰 역임과 동시에 사찰을 군현에 부속시켜 응역속사로서 應役하게 만든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찰이 지방 군현에 바쳐야하는 역이 종이 하나만은 아니었다. 관청에 쓰이는 크고 작은 물건은 물론 지방의 築城이나 향교, 서원의 수리 같은 각종 역에도 동원되어야 했다. 이처럼 승역이 군현단위에서 활발하게 활용되면서 역 부과의 단위도 사찰로 자연스럽게 고정되어갔다. 군현의 사찰에 대한 장악력은 계속 높아져 18세기에는 군현이 각 사찰로부터 받아들이는 각종 잡역이 『부역실총』을 통해 정식화되게 되었다.198)  

사찰이 군현에 부속되는 모습은 호적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호적에 승려는 사찰을 기본단위로 등재되었다. 주목할 만한 점은 『단성호적』과 『대구호적』의 경우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寺刹이 각 면 혹은 리와 분리되어 따로 기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찰이 실제 위치하는 面里와는 관계없이 분리되어 기재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숙종 원년(1675)와 吾家統事目에서 면리제를 강조하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199)

호적은 해당 군현의 지방관을 중심으로 서리 등의 직역자로 이루어진 이정과 감고에 의하여 작성되고 갱신된다.200) 그러나 승려의 경우에는 어떤 경로를 거쳐 호적에 등재되었는지를 알려주는 戶口單子나 准戶口와 같은 문서가 남아있지 않아 그 등재 경위가 불분명하다.

『丹城戶籍』의 1678년 호적에는 각 면의 호적이 끝나는 곳에 호적 말미의 도이상조와 마찬가지로 간략한 합계가 ‘已上’으로 기재되어 있고 끝에는 해당 면의 도윤과 부윤의 이름이 적혀있다.201) 사찰과 재궁의 승려를 기재한 내용은 호적 기재 순서 상 마지막 面인 法勿也面 뒤에 있는데 법물야면의 已上條는 사찰과 재궁 다음에 기재되어 있으며 도윤과 부윤의 이름 역시 마찬가지이다. 특히 법물야면의 已上條에는 승인이 같이 기재되어 있다.

그렇다면 법물야면에 모든 사찰과 재궁이 속해있는가? 『丹城縣邑誌』를 검토해보면 율곡사는 신등면에 용흥사는 북동면에 위치해있으며 은선암과 재궁은 알 수 없다.202) 분명한 점은 법물야면에는 사찰이 없었다는 것이다. 왜 법물야면의 이상조에 사찰과 승려가 기재되어 있는지 단순히 기재상 순서에 따른 것인지 혹은 필사자의 오기인지는 1678년 이후로는 面의 이상조가 사라져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히 알 수 있는 점은 사찰이 일반적인 군현-면-리의 지방행정제도에서는 벗어나 있었으며 승려는 일반 양역의 액수와 분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호적 작성의 과정에서 사찰이 기존 면리와 분리되어 군현으로부터 독자적으로 파악되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호적에 나타나는 승려의 수와 연령 변화를 통해서도 사찰의 군현 부속의 상태를 알 수 있다. 『대구호적』과 『단성호적』 모두 전체 승려의 호수가 시기별 큰 변화만 제외하면 비슷하게 유지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승려의 구수는 약간의 변화를 보이는데, 특이한 점은 승려의 연령대 중 老와 壯의 증가율이 서로 반비례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壯에 속하는 승려 구수가 줄어들면 老에 속하는 승려 구수가 증가하는데 그 수가 자연스럽기보다는 전체 구총에서 변화하는 인위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203) 앞서 언급했듯이 승려의 실재 호적 등재율이 50% 내외였다는 사실까지 고려한다면 군현에서는 상당히 자유롭게 승려의 수를 조절할 수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만약 군현에사 가좌책을 작성했다면 실제 승려의 호적 등재 여부와는 관계없이 승려의 수를 정확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18세기 초반에 이르면 각 군현에서 완전히 사찰과 승려를 장악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알 수 있는 사건이 바로 남원과 구례 사이에 있었던 승려 쇄환문제이다. 영조 12년(1736) 남원에서는 구례 화엄사로 도망간 승려 3명을 쇄환을 구례에 요구했는데 오히려 구례에서는 천언사 소속 승려 8명을 쇄환해달라고 남원에 요청하게 된다. 그리고 구례에서는 쇄환을 요구한 승려 8명의 친족을 구금하여서 구례와 남원간의 갈등이 발생하게 된다.204) 결국 군현에서 호적 작성을 통해 승려의 친족관계를 파악했던 것이 군현에서 승려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는 결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에서 언급한 군현의 승려 장악은 결국 사찰을 기본단위로 해서 이루어졌다. 호적의 승려 등재도 사찰별로 이루어졌으며, 의승방번역과 紙役 역시 사찰별로 분정되는 것이었다. 군현의 승려 관리도 남원과 구례의 경우에서 보이듯 사찰로 고정되고 잇었다. 즉 조선후기의 승역은 그 부과 단위가 승려의 요역 동원에서 보이는 인신에서 사찰이라는 단위로 즉 일종의 호역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사찰이 어느 권력기관에 부속되어 그 역을 담당하는 속사로써 존재하는 형태가 17세기 후반 이후 조선후기 승역의 대체적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사찰이 역 부과의 단위가 되고 승려가 사찰 안에 고정되는 사찰역이 일반화 된 것이다.

사찰역은 해당 사찰은 屬寺가 되고, 승려는 그 속사에 소속되어 역을 부담하는 것을 의미한다. 屬寺는 屬寺刹이라고도 하며 국가기관 혹은 서원 및 사우와 같은 국가가 인정하는 특별한 기구에 소속되어 役을 부담한 사찰을 말한다. 의승방번제로 상징되는 군역은 모든 승려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속사 고유의 역에서는 제외된다. 군역 외에 국가기관의 공납·진상·공상 및 요역에 해당하는 각종 역이 속사에 부과된다. 그리고 역의 부과 주체에 따라서 자연히 속사의 성격도 차이를 보인다.

역의 부과 주체에 따라서 속사는 크게 2가지로 대별될 수 있다. 하나는 국역체제 안에서 움직이는 속사이고, 또 하나는 국역체제를 벗어나 왕실의 사재정에 속하는 속사이다. 기본적으로 승려의 국역체제 편입에 따라 사찰은 국역을 수행하는 속사가 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 그 역이 과중하면 이를 벗어나기 위해 궁방이나 아문 등에 부속되는 것이다.

속사 중에 국역체제 안에 포함된 사찰은 應役屬寺라고 부르고자 한다. 응역속사는 국가의 역체계 안에서 할당된 役이나 貢納을 담당하는 사찰이다. 절대 다수의 응역속사는 앞서 살펴보았듯 원칙적으로 군현에 부속되어 있었다고 보인다. 이들은 국가에 전세를 납부하면서 동시에 국가에 필요한 공물과 진상을 마련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공물과 진상 마련은 군현이나 各營에서 담당하기 때문이다. 이들 사찰은 국가 재정에 필요한 재화를 조달하는 데에서 나아가 지관관청의 雜役205)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군현에 소속된 응역속사 외에  몇 가지 특수한 성격의 속사가 있을 수 있다. 이들 다수는 주로 경기지역에 위치한 사찰들인데, 陵園에 직접 소속되어 제수를 마련하고 능침을 수호하는 造泡寺와206) 남북한산성 및 각 산성에 소속되어 성을 수호하는 사찰들이 그것이다. 이들 사찰은 국가의 역체제 안에 소속되어 있다는 점에서 응역속사의 일부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조포사는 각 능원에, 산성의 사찰은 군영에 각각 고정적으로 소속되면서도 직접적인 국가의 관리를 받았다는 점에서 일반적 응역속사와는 구분된다. 이능화 역시 이러한 특징에 주목하여 이들 사찰을 軍泡寺刹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하였다.207) 군포사찰은 결국 국가에 부속되어 응역하던 사찰이므로 필자는 이를 軍泡屬寺로 칭하고자 한다.

應役屬寺와 대비되는 사찰로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궁방과 아문의 원당이 있다. 필자는 특별히 願堂을 대신하여 折受屬寺라는 단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願堂에는 국가와 왕실의 수복강녕을 비는 종교적 의미도 있지만, 본고에서 다루고자 하는 17세기의 사료에는 거의 宮房 및 京衙門에 절수되어 稅와 물종을 바치는 사찰로 나타나고 있다. 국가가 원당의 문제를 다룰 때면 항상 어염·선척·노전 등과 함께 절수의 문제를 지적하는 범주에 속해있으며 이들 사찰 역시 결국 어느 기관에 부속되어 있는 사찰이기 때문에 이들을 절수속사라고 불러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국가 혹은 왕실의 속사가 아니라 사족의 힘을 빌려 국역체제에서 벗어나려는 사찰도 있었다. 서원의 속사나 양반사족의 願堂·齋宮으로 기능했던 사찰 승려의 경우 17세기 초반에는 국가에서도 이들을 함부로 동원할 수 없었다. 사찰 역시 사족의 위세를 등에 업고 官의 침어를 막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들 사찰들 역시 소재한 지방 관아와의 관계에서 완전히 독립적일 수는 없었다. 군현제와 면리제가 강화되는 가운데 국가의 향촌사회 개입이 더욱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이 밖에 속사가 아니더라도 국가 혹은 사족과의 특수한 관계를 바탕으로 존립하였던 사찰도 존재한다. 표충사, 대흥사, 보현사의 경우는 義僧軍大將이었던 유정과 휴정의 사액 사우가 있었기 때문에 지방 관아와 사족의 侵魚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즉 유교질서를 충실히 이용하는 사찰이 등장했던 것이다.

절수속사와 응역속사는 같은 시기에 중복되어 나타나지만 서로 대립되는 성격을 지닌다. 절수속사는 免稅ㆍ免役의 대상이 되어 국가의 역체제에서 빠져나가려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비하여, 응역속사는 사찰이 국가의 역체제에 포함되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차이는 문서행정 상으로도 찾아볼 수 있다. 사찰이 왕실이나 아문에 절수되면 곧 해당 사찰에 관련된 기관의 完文과 禮曹의 시행 節目이 내려온다. 완문이라는 문서의 특권적 성격208)과 감역 내지 면역이라는 문서의 내용을 생각해볼 때, 절수속사가 된다는 것은 곧 일종의 특권사찰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절수속사가 받을 수 있는 특권도 시대에 따라서 변화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17세기의 절수속사가 지방 군현과 완전히 분리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비하여,209) 고문서를 통해 보이는 18세기 이후의 절수속사는 지방과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기 때문이다.210) 반면 의례히 附屬되는 응역속사는 이러한 특권을 인정하는 문서를 받지 못하였다.

요컨대 승려의 국역체제 편입은 곧 사찰을 역 부과의 기본단위로 하는 사찰역으로 완성되었다. 그리고 사찰역은 기본적으로 사찰이 군현에 부속되어 국가와 지방의 재정을 보용하는 응역속사의 형태를 띠는 것이었다. 이후 18~19세기의 사원경제는 바로 이러한 제도적 기반 위에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결론

 

17세기의 변화를 거쳐 18세기의 승역은 사찰역으로 고착되었다. 승역을 무너져가던 요역제를 대신하게 위해 운용하던 경향은 18세기 후반에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211) 그러나 사찰은 여전히 지방 군현의 각종 잡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잡역이 정규적인 잡역세로 전환되자, 사찰역의 일부는 잡역세로 전환되어 역 대신 미·포·전을 대납하는 금납화의 길을 걸었으나, 갑오개혁까지 일부 잡역은 잡역세로 전환되지 않은 체 계속 사찰에 직접 부과되었다.

중앙재정은 지방재정의 안정을 유지시켜 부세 수취를 지속하는 한편, 현물로 상납받아야 하는 물종들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아야 했으므로 사찰에 대해서는 별다른 통제책을 취하지 않았다. 궁방과 같은 왕실재정이 사찰을 절수하여도 지방재정에 필수적인 부분은 양보해야 했다. 정조가 국왕이 직접 통솔할 수 있는 군영을 만들기 위하여 장용영을 설치하고 용주사의 승려들을 장용영의 승군으로 포함시키는 동시에 오도규정소를 설치해 전국의 사찰과 승려를 직접 통제하려고 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즉 조선후기 중앙정부의 완벽한 직접적 사찰 통제는 성공하지 못했고, 지방과 사찰의 관계는 갈수록 긴밀해졌던 것이다.

사찰역은 사찰의 존망과 관련된 것이기도 했다. 상급기관의 역을 담당 할수록 불교계 내부에서 사찰의 위상 또한 높아졌으며, 그 사찰에 할당된 역을 다른 사찰에게 전가시킬 수도 있었다.212) 사찰역은 곧 사세 확장의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지방관은 사찰을 유지시키기 위하여 직접 化主가 되어 사족 및 이향층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키기도 하였다.213) 사찰역이 정착될수록 사찰과 군현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던 것이다.

17세기 국가는 국역체계에 들어온 승려들을 백성의 한 부류로 평가하였다. 그럼으로써 국가재정 특히 지방재정을 補足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18세기 사찰은 지방의 중요한 한 주체로 자리잡았으며, 균역법의 시행을 통해 피역처로서의 매력이 반감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방 여러 세력과의 관계를 통해 寺勢를 유지시켜나갈 수 있었다.

본고에서 다루지 못한 사찰과 諸 지방세력 및 국가와의 관계는 추후의 연구를 기약하겠다.

 

 

 

 

 

 

 

 

 

 


1) 

2) 조선후기 사찰은 대략 1500 여 개소 내외의 개수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與地圖書』에 나타나는 사찰은 폐사된 곳을 제외하고는 총  1537개소이다. (이병희, 1997,「조선시대 사찰의 수적 추이」,『역사교육』61.) 현전하는 『與地圖書』는 부분적 결책이 있기 때문에 국사편찬위원회 영인본에 補遺된 읍지까지 합쳐 계산했을때의 숫자이다. 영조대 편찬된 『伽藍攷』에는 1450 여 개의 사찰이 수록되어 있고 정조대에 편찬된 『梵宇攷』 1400 여 개의 사찰이 수록되었다. 이능화의 『朝鮮佛敎通史』에는 1478개소의 사찰이 수록되어 있다. 몇 곳의 산내암자가 수록되거나 그렇지 못한 곳이 있어 정확한 개수의 차이는 있겠으나 대략 1500 여 개소 내외일 것으로 생각하여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참고로 『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재된 사찰은 총 1658개소인데, 壬辰倭亂 때 삼남지방의 사찰이 거의 전소된 사실을 고려해볼 때 조선 전후기의 사찰 개수의 차이는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3) 田川孝三, 『李朝貢納制硏究』, ; 강제훈

4) 그러나 조선전기 사찰이 토지를 소유한 경우가 완전히 없었던 것은 아니다. 15세기 후반 세조~예종 연간에 주로 이루어진 사찰에의 토지 하사가 대표적인 사찰의 토지 소유의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토지는 왕실의 비호를 받으면 復戶 대상이었기 때문에 궁방전과 마찬가지로 공물·요역의 부과 대상은 아니었다.

5) 

6) 

7) 조선후기 승역에 대한 연구는 아래 연구가 참고 된다. 
    차상찬, 1947, 「조선승병제도」, 『朝鮮史外史』, 명성사 ; 이종영, 1963, 「僧人號牌考」, 『동박학지』17  ; 정광호, 1974, 「조선후기 사원 잡역고」, 『사학논지』; 조명기, 1981, 「조선후기 불교」, 『한국사론』4, 국사편찬위원회 ; 박용숙, 1981, 「조선조 후기의 승역에 관한 고찰」, 『부산대학교 논문집』31 ; 여은경, 1983, 「조선후기 사원침탈과 승계」, 경북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 윤용출, 1984, 「조선후기의 부역승군」, 『부산대학교 인문논총』26 ; 윤용출, 1989, 「18세기 초 동래부의 축성역과 부역노동」, 『한국문화연구』2. ; 김형기, 1990,「조선후기 계방의 설치와 운영」, 한양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 김왕직, 1998,「조선후기 관영건축공사의 건축경제사적 연구」, 명지대학교 건축학과 박사학위논문 ; 김숙경, 2003, 「조선후기 東萊지역의 관영공사에 관한 연구」, 부산대학교 건축공학과 박사학위논문 ; 박성봉, 2005, 「조선후기 승역에 관한 연구 - 지역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석사학위논문 ; 윤용출, 2007, 「조선후기 동래부 읍성의 축성역」, 『지역과 역사』21 ; 윤용출, 2009, 「17세기 후반 산릉역의 승군 징발」, 『역사와 경계』73. ; 윤용출, 2011, 「17세기 후반 산릉역의 승군 부역노동」, 『지역과 역사』28 ; 이형우, 2011, 「朝鮮後期 玉泉寺의 御覽紙 製紙 硏究」,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헌관리학과 석사학위논문.

8) 조선후기 사찰제지업에 관해서는 아래의 논문이 참고된다.
    이광린, 1962, 「이조후반기의 사찰제지업」, 『역사학보』17 ; 송찬식, 1974, 「三南方物紙契貢考(상)·(하)」, 『진단학보』37·38 ; 박용숙, 1981, 앞의 논문 ; 하종목, 1984, 「조선후기의 사찰제지업과 그 생산품의 유통과정」, 경북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 김삼기, 2003, 「조선후기 제지수공업 연구」, 중앙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9) 김덕진은 민영 제지업에 관한 연구에서는 사찰 제지업의 역할을 크게 평가하지 않았다.
   김덕진, 1993, 「조선시대 지방관영지소의 운영과 그 변천」, 『역사학연구』12 ; 김덕진, 1996, 「조선후기 잡역세 연구」, 전남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 김덕진, 2003, 「조선후기 지방관청의 지고 설립과 운영」, 『전남사학』18 참조.

10) 조선후기 승군역에 관해서는 아래의 논문이 참고된다. 
   우정상, 1959, 「이조불교의 호국사상에 관하여 - 특히 의승군을 중심으로」, 『백성수박사송수기념 불교학논문집』 ; 우정상, 1963, 「남북한산성 의승방번전에 대하여」, 『불교학보』1 ; 김갑주, 1984, 「정조대 남북한산성 의성방번전의 반감」, 『素軒南都永博士華甲記念 史學論叢』, 태학사 ; 여은경, 1987a, 「조선후기의 대사찰의 총섭」, 『교남사학』3 ; 여은경, 1987b, 「조선후기 산성의 의군총섭」, 『대구사학』32 ; 김갑주, 1988, 「남북한산성 의승번전의 종합적 고찰」, 『불교학보』25-1 ; 김갑주, 1989, 「조선후기의 승군연구」 『龍巖車文燮華甲記念 조선시대사연구』, 신서원.

11) 조선시대 왕실 원당에 관해서는 아래 논문이 참고된다.
    탁효정, 2001, 「조선후기 왕실원당의 유형과 기능」, 한국학중앙연구원 역사학과 석사학위논문 ; 박병선, 2002, 「조선후기 원당 연구」, 영남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 탁효정, 2012, 「조선시대 왕실원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2) 김용태, 이종수, 오경후

13) 후술하겠으나 이후 요역과 군역은 점차 분리되고 국가의 요역 동원은 점차 소멸되는 한편, 군역은 의승방번역으로 정비되었다.

14) 조계종 교육원, 『조계종사 : 고중세편』, 2004, 조계종출판사,

15) 朱熹, 『大學集註』 大學章句序

16) 김성우,

17) 국역이 고역이라는 인식이 강해지면서 승려는 국역체제에서 배제시킨다는 국가의 원칙이 역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세조와 같은 호불지주는 역역을 통해 수 만명의 승려에게 도첩을 발급했으며, 명종대 문정왕후 역시 이와 비슷한 방법을 통해 승려의 출가를 사실상 도와주었다.

18) 

19) 단 이는 중앙의 승려 동원만 해당되며 지방정부와 사찰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조선전기와 사찰과 군현 및 지방각관과의 관계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그러나 세조 3년 발급된 寺刹減役敎旨에는 국왕이 관찰사와 수령에게 사찰의 雜役을 除減해 줄 것을 명령하고 있어 지방에서 승려를 잡역에 동원하는 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전기 요역의 운영 방식과 그 실제에 있어서는 여러 입장이 대립하고 있으며, 중앙의 所耕徭役과 지방의 雜役이 다른 성격을 지닌 다는 의견과 所耕徭役과 雜役은 같은 것이라는 의견이 양존하고 있어 아직 사찰과 지방관아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단정된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상태이다.  

20) 한우근, 1991, 「문종-세조조에 있어서의 대불교시책」, 『한국사학』12.

21) 한우근, 1993, 「예·성종조에 있어서의 대불교시책」, 『유교정치와 불교』, 일조각.

22) 조선전기 요역에 대해서는 아래 논문을 참조.
    有井智德,, 1985, 『高麗李朝史の硏究』, 圖書刊行會 ; 김종철, 1986,「조선초기 요역부과방식의 변화」,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석사학위논문 ; 강제훈, 1989,「15세기 경기지역의 요역제」, 고려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 윤용출, 1986, 「15·16세기의 요역제」, 『釜大史學』10 ; 강제훈, 1995, 「조선초기 요역제에 대한 재검토」. 『歷史學報』145.

23) 千寬宇, 1979, 「반계 유형원 연구」,『근세조선사연구』, 일조각, 2쪽.

24) 윤용출, 1998, 앞의 책, 133쪽.

25) 김성우, 2001, 앞의 책,

26) 『仁祖實錄』 권22, 8년 4월 11일 경신

27) 『宣祖實錄』 권42, 26년 9월 11일 기미  

28) 『顯宗實錄』 권17, 10년 6월 11일 신사  

29) 

30) 남한산성의 경우는 『宣祖實錄』권159, 36년 2월 18일 을사. 수양산성의 경우는 『宣祖實錄』권184, 38년 2월 23일 정묘, 파사산성의 경우는 『宣祖實錄』권188, 38년 7월 11일 계미 기사에서 볼 수 있다.

31) 『宣祖實錄』권46, 26년 12월 16일 을축 ;『宣祖實錄』권53, 27년 7월 8일 갑신

32) 『宣祖實錄』권71, 29년 1월 28일 을미

33) 『承政院日記』 217책, 현종 10년 12월 23일 임오

34) 『宣祖實錄』권83, 29년 12월 8일 경오

35) 윤용출, 1998, 앞의 책.

36) 『仁祖實錄』 권39, 17년 10월 8일 신묘

37) 

38) 

39) 예컨대 숙종 연간에 이루어졌던 동래부의 금정산성 축성도 동래부사에 의하여 읍별 승군 모집을 통해 역승을 모집해 이루어졌다. (윤용출, 1989, 「18세기 초 東萊府의 築城役과 賦役勞動 」, 『한국문화연구』2.)

40) 『仁祖實錄』 권40, 18년 4월 4일 을묘

41) 승려들의 부역일은 10일에서 40일 등 다양한데 각 경우에 따라 달랐던 것 같다.

42) 

43)『光海君日記』中草本 권130, 10년 7월 4일 경인

44) 

45) 물론 상황과 사정에 따라 승려나 역군들에게 약간의 식량을 지급하는 경우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진휼적 성격을 띠는 것이었으며 정규적으로 지급되는 것은 아니었다.

46) 

47) 

48) 『仁祖實錄』 권7, 2년 10월 16일 정유 ; 『仁祖實錄』 권39, 17년 10월 8일 신묘

49) 

50) 시대가 내려갈 수록 도총섭의 지위 하락하였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본고 제2장 1절을 참고.

51) 

52) 홍희유, 1989, 『조선 중세 수공업사 연구』, 지양사(복간), 254쪽.

53) 『속대전』에서는 각사의 장인 중에 요긴한 장인 중 결원이 잇으면 군사, 보졸, 관속, 공천을 불구하고 적임될 인물로써 충정한다고 하고 있다.

54) 조선전기 관영수공업에 대해서는 아래의 논문이 참고된다.
   홍희유, 1989, 앞의 책 ; 강만길, 1961, 「조선전기 工匠考」,『사학연구』12 ; 강만길, 1981, 「수공업」, 『한국사』10, 국사편찬위원회 ; 유동원, 1982, 「상공업의 개관」, 『한국사론』11,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전기 제지수공업에 대해서는 아래의 논문이 참고된다.
    이광린, 1958, 「이조초기의 제지업」, 『역사학보』10 ; 하종목, 1984, 앞의 논문 ; 김덕진, 1993, 「조선시기 지방관영지소의 운영과 그 변천 -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 『역사학연구』12 ; 김삼기, 1997, 「15~16세기 관영 제지수공업 연구」, 공주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 한정수, 1999, 「조선전기 제지 수공업의 생산체제」, 『역사와 현실』33 ; 전영준, 2001, 「조선전기 관찬지리지로 본 楮·紙産地의 변화와 사찰 제지」, 『지방사와 지방문화』14-1 ; 김인규, 2003, 「朝鮮 明宗代 星州地域 寺刹의 製紙活動」, 『전통문화논총』1.

55) 하종목, 1984, 앞의 논문.

56) 한정수, 1999, 앞의 논문.

57) 한정수, 1999, 앞의 논문.

58) 『선조실록』 권78, 29년 8월 13일 무신
    承文院寫字官文繼朴上疏 略曰 我國之莫重者 事大也 …… 且置造紙一局 專造諸般紙地 以備文書之用 經亂之餘 百具墜廢 事多草率 無復有模樣 而不爲更張 臣未見其可也 今者 尋常諸司 皆復如前 而獨此造紙 廢而不復 表咨之紙 委之於外方 紙品麤惡 擣鍊不精 …… 且紙匠之善手不多 若募僧人善造紙者 每一人給奉足三四名 使居本署之傍 開楮田於閑曠之野 和賣自食 官收稅楮 時兼紙匠之任 或助砧軍之役 而一切完戶 則漸有成效之理也

59) 김삼기, 2003, 「조선후기 관영지소의 변화」, 『중앙사론』17, 6~7쪽.

60) 『승정원일기』 5책, 인조 3년 4월 19일 병신

61) 『승정원일기』 15책, 인조 4년 8월 4일 계묘 ; 『승정원일기』, 현종 10년 3월 25일 무오 ; 『승정원일기』, 숙종 8년 12월 25일 무술

62) 『승정원일기』, 현종 10년 3월 25일 무오

63) 『備邊司謄錄』 147책, 영조 41년 3월 7일

64) 송찬식, 1973, 「관청수공업의 민영화과정」, 『이조후기 수공업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83쪽.

65) 송찬식, 1996, 「삼남방물지공고」, 『조선후기사원경제사의 연구』 일조각; 홍선이, 2012, 「17-18세기 초 조선의 對淸 歲幣ㆍ方物 규모와 조달 방식」, 고려대학교 교과교육학과 석사학위논문.

66) 『備邊司謄錄』 13책, 인조 27년 3월 28일

67) 송찬식, 1973, 앞의 논문.

68) 한정수, 1999, 앞의 논문.

69) 송찬식, 1996, 앞의 논문

70) 『備邊司謄錄』 14책, 효종 원년 12월 10일

71) 김삼기, 2003, 앞의 논문.

72) 『세종실록』 권109, 27년 9월 1일 신미 ; 『세조실록』 권9, 3년 9월 23일 갑신

73) 『쇄미록』 ;

74) 『顯宗實錄』 권18, 11년 10월 7일 신묘
執義申命圭 掌令朴贄 持平李宇鼎 …… 又曰 民徭莫重於白綿等紙 而各邑皆責辦於僧寺 僧力有限 不宜偏侵 全羅監營例納之紙 不爲不多 而近來又創新規 一年每捧 大刹八十餘卷 小刹六十餘卷 僧徒逃避 諸刹蕭然 此而不革 害將及民 請令本道監司 亟罷各寺疊捧之弊 上皆從之

75) 『효종실록』 권9, 3년 12월 7일 을사

76) 『顯宗實錄』 권2, 원년 3월 5일 경신

77) 김덕진, 1996, 앞의 논문, 123쪽.

78) 물론 상인과 민영수공업자를 통한 貿紙가 계속 확대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승려들도 종이를 파는 상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김갑주, 2007, 「승려의 산업활동」, 『조선시대 사원경제사 연구』, 경인문화사 참조)

79) 『備邊司謄錄』 21책, 현종 2년 10월 2일

80) 다만 軍이라는 글자가 연군의 軍과 마찬가지로 일꾼의 뜻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81) 『승정원일기』 324책, 숙종 13년 9월 22일 정유. 
李師命啓曰, 上年秋, 江華留守申晸, 以江華義僧事, 陳達於筵中, 其時領敦寧金壽恒, 以爲當初南漢築城時, 以僧徒赴役, 故仍爲設置七寺, 以諸道僧人, 分定入番, 而今此江都形勢, 與南漢有異, 外方義僧入番之際, 其弊不貲, 姑以京畿屬邑及一行缺 以此意馳報備局, 而群議皆以爲, 南漢義僧, 爲弊已極, 今又設置於江都, 無益守護, 而反有其害云。大臣今方入侍, 更爲定奪分付, 何如? 上曰, 此事, 如何? 南九萬曰, 小臣, 亦見其公事, 而南漢義僧, 雖分定八路, 貽弊猶多, 今此延白及南陽·豐德等, 皆是野邑, 僧徒本小, 以數小僧人, 輪回入番, 必不得力, 而徒爲貽弊之歸, 臣意則決不可爲矣。

82) 김갑주,

83) 『승정원일기』 144책, 효종 8년 1월 9일 임자
泰淵曰, 水原事, 小臣到任之後, 庶可周旋爲之, 而臣曾爲守禦使從事官時見之, 則前者義僧之聚集於城內者, 爲其南漢之守護, 而近來義僧之自鄕聚會之事, 不如往日, 故將無以守護云, 是可慮也。外方諸事, 以僧爲軍者, 其數甚多云, 以此充定於義僧, 則似爲便當矣。臣欲言此意于守禦使處矣。上曰, 義僧事, 亦有貽弊者, 甚多, 卿其往見守禦使, 相議爲之, 可也。

84) 『승정원일기』 244책, 숙종 원년 1월 19일 무인 
   錫胄曰, 南漢城七寺, 各分屬八道, 先臣, 爲守禦使時, 加一寺爲八寺, 使各道義僧, 自備糧立番于山城之寺, 其役甚苦, 而湖南義僧, 分爲六番, 某月立某寺, 一年一寺所立之僧, 常不下百餘名, 一如軍士上番之例, 而上番義僧之來也, 受其道各寺之資, 送義僧之役, 其實, 一道之僧, 皆當之也。

85) 『승정원일기』 322책, 숙종 13년 5월 16일 계사 
趾善曰, 臣伏聞善山府使趙持恒, 疏請以嶺南義僧, 移定他道, 而廟堂, 不許其請, 只減善山·柒谷兩邑義僧云。臣不得不略辨其不然也。南漢義僧分定, 在於己巳年, 至于今六十年之間, 曾無以邑有山城, 而有所頉減, 雖或有不得已減數之邑, 元額則不爲永減, 移定於道內他官, 自是流來古例, 到今豈可以持恒之一言, 而有所輕議哉? 慶尙·全羅兩道, 分殘盛元定南漢義僧, 而且以各邑僧徒, 守直於道內山城, 亦如南漢義僧之例, 公洪·黃海·京畿等道, 則雖有山城, 勿定守直之軍, 而南漢義僧, 與造紙署擣砧軍, 磨鍊分定, 當初均役之意, 實非偶然, 若以有山城而許減義僧, 則各道有山城之邑, 擧將紛紜爭請, 朝家, 將何以防塞其路耶?

86) 『증보문헌비고』 권, 병고

87) 『인조실록』 권28, 17년 1월 10일 무진

88) 『인조실록』 권39, 17년 12월 10일 임진

89) 『비변사등록』 67책, 숙종 40년 9월 27일. 이 기사에서 남한산성의 의승 수는 400 여 명 정도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수는 북한산성에도 의승이 입번하게 됨에 따라 약간 조정되었다. 『중정남한지』와 『북한지』의 기록에 따르면 숙종 40년 이후 남한산성의 의승은 356명, 북한산성의 의승은 350명으로 남한산성의 의승은 40~50 명 정도가 줄어든 것이다. 그러나 남한산성의 경우 원거승 138명이 있었기 때문에 이 정도의 감액은 감당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전체 의승의 수가 400 여 명에서 700 여 명으로 늘어났기 때문에 의승방번제에 대한 부담은 크게 늘어났을 것이다.

90) 『승정원일기』 244책, 숙종 원년 1월 19일 무인

91) 『증보문헌비고』

92) 『승정원일기』 178책, 현종 4년 4월 16일;

93) 『승정원일기』 218책, 현종 11년 1월 6일 
     金佐明曰 今之僧人 雖曰居山 身役則亦皆有之矣

94) 윤용출, 1998, 「17세기 이후 승역의 강화와 그 변동」, 『조선후기의 유역제와 고용노동』, 서울대학교 출판부, 150쪽.

95) 

96) 17세기 중반 조정에서는 도첩제를 다시 시행하길 청하고 있으나 국왕나 묘당에서 거부하는 모습이 보이고 있다. 후술하겠으나 17세기 후반 등장하는 승첩·승공명첩은 바로 사라진 도첩제를 대체하는 수단으로 생각된다. 『승정원일기』

97) 

98) 김갑주,

99) 『승정원일기』 244책, 숙종 원년 1월 19일 무인

100) 『승정원일기』 244책, 숙종 원년 1월 19일 무인  

101) 『신보수교집록』 호전 잡령

103) 『비변사등록』 122책, 영조 27년 2월 26일

104) 『승정원일기』 숙종

105) 김갑주, . 17세기 이후 승려의 개인 토지 소유가 허용되었지만 역시 사찰 및 승려 소유 토지의 운영은 사찰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찰 소유의 토지가 승려의 이름으로 등록된 경우도 있었으며, (김갑주, 앞의 논문) 무엇보다도 승려 개인 소유 토지가 사찰로 시주되는 일이 매우 많았다. 전국의 많은 사찰에 승려의 토지 시답 사실을 밝힌 자료가 상당히 남아 있으며 (김상현, ) 이중 숙종 10년 세워진 『충주청룡사위전비』의 내용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아직 이에 대한 구체적 연구가 진행되지 못해 조선후기 사찰의 토지 소유 현황과 승려 소유의 토지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적다. 이는 필자의 추후 연구 과제로 삼고 싶다.

106) 의승방번역이 호역으로 부과되었다는 사실은 18세기 중반 시행되는 의승방번전의 부담 주체가 누구였는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순천향교 소장의 『順天府紙所矯弊節目』에 따르면 순천부의 지고에서 얻는 수익의 일부는 중앙에 의승방번전을 납부하는 데에 쓰였다. 그런데 이 의승방번전은 순천의 대찰인 송광사와 선암사가 각각 육상궁의 원당으로 절수되면서 혁파된 것이었다. 즉 의승방번전의 최종 부과 단위는 사찰이었고, 이 것이 면제되었을 때는 군현에서 책임지어야 함을 알 수 있다.

107) 김성우

108) 『宣祖實錄』권212, 40년 6월 7일 무술  

109) 당시 궁방전의 확대에 관해서는 아래의 논문을 참조.
    박광성, 1970, 「궁방전의 연구」, 『인천교육대학교 논문집』5 ; 박광성, 1974, 「속궁방전의 연구」, 『인천교육대학교 논문집』9 ; 김옥근, 1974, 「이조토지제도연구」, 『부산수산대학교 논문집』12 ; 박준성, 1984, 「17·18세기 궁방전의 확대와 소유형태의 변화」, 『한국사론』11 ; 조영준, 2008, 「조선후기 궁방의 실체」, 『정신문화연구』31-3.

110) 송양섭, 2001, 「朝鮮後期 軍 ·衙門 屯田의 經營形態 硏究」, 고려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이욱, 2002, 「조선후기 어염정책 연구」, 고려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11) 박병선, 2008, 앞의 논문, 74쪽.

112) 손병규, 2004, 「조선후기 재정구조와 지방재정운영」, 『조선시대사학보』25, 123쪽.

113) 『효종실록』 권9, 3년 12월 7일 을사

115) 박준성

116) 『현종실록』 권 , 4년 12월 기미; 『비변사등록』 책, 숙종 14년 4월 15일  

117) 송수환, 1992, 「조선전기의 사원전」, 『한국사연구』79.

118) 『宣祖實錄』권160, 36년 3월 9일 을축  
    史臣曰 亂後公私蕩然 而例設吉禮都監 儀物之盛 甲於平時 而都監之官 憑公營私 害及市民 …… 王子臨海君珒 散遣宮奴 占擅山澤 市人多貨者 托於有罪 綁梱極苦 市人優納銀布 然後放 又養鵝鴨 千百爲群 朝必驅出賣米坊 塵埃揚起 放唼人米 不敢呵逐 少有所忤 必厚徵其債 余嘗過白蓮寺(在楊州) 僧智浩曰 臨海願堂 凡十五刹也 余曰 君必好施矣 僧曰 君反責施於寺 山菜等物 絡繹於厥宮 僧甚苦之

119) 왕실의 절수속사는 종이나 제수로 쓰이는 표고, 나물, 위패에 쓰는 栗木 등을 바쳐야 했다. 박병선, 2005, 앞의 논문 참조.

120) 『顯宗實錄』 권2, 원년 3월 경신

121) 조영준,

122) 이영훈,

123) 『光海君日記』中草本 권73, 5년 12월 17일 경자

124) 『仁祖實錄』 권4, 2년 7월 23일 을해

125) 『光海君日記』中草本 권73, 5년 12월 16일 기해  

126) 上同.

127) 『宣祖實錄』권188, 38년 6월 4일 정미

128) 『宣祖實錄』권200, 39년 6월 2일 기해  

129) 『仁祖實錄』 권4, 2년 8월 13일 을미

130) 『仁祖實錄』 권45, 22년 6월 12일 무진

131) 『효종실록』 권2, 즉위년 10월 29일 갑인
     憲府啓曰 鹽盆土稅商船浦稅寺刹差役 乃是地土官所管 非監兵水營所可橫侵 而近來勒令各官 收稅納營 故例有疊徵之弊 寺刹亦然 而畿甸寺刹則稱以諸宮家願堂 本官有差役之擧 則京邸人之受責於宮家 罔有紀極 請一切禁斷 上從之

132) 이욱, 2002, 「인조대 궁방 · 아문의 어염절수(魚鹽折受)와 정부의 대책」, 『역사와 현실』46.

133) 『영조실록』 권84, 31년 4월 18일 신유
    金尙魯言 各處願堂 寺刹 曾因朝令 一竝罷革 而其中成均館所屬多率寺 初不擧報以致見漏 後乃發覺一體革罷矣 國子長之居然筵奏 强爲還屬 事體未妥 且太學之有屬寺尤涉不正 請大司成徐命臣重推 見屬寺刹依前革罷 上可之
    이 기사는 영조대의 것이지만 성균관의 다솔사 절수는 이미 이전이 시행되었다고 생각된다. 성균관이 원당과 속사를 혁파할 때 다솔사를 고의로 누락시켰다가 발각되어 이를 혁파당하였는데, 다시 환속시켜달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134) 탁효정, 2011, 앞의 논문, 123쪽.

135) 종친부의 사찰 절수는 각 사찰에서 전래되고 있는 고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필자는 고성의 옥천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완문에서 이를 확인하였다.

136) 『顯宗改修實錄』 권2, 원년 3월 28일 계미

137) 『備邊司謄錄』 71책, 숙종 44년 윤8월 6일

138) 이광린,1962, 「이조후반기의 사찰제지」, 『역사학보』17·18, 210쪽.

139) 『備邊司謄錄』 71책, 숙종 44년 윤8월 6일

140) 『備邊司謄錄』 128책, 영조 321년 4월 13일

141) 김성우; 이정철, 2004, 「17세기 조선의 공납제 개혁논의와 대동법의 성립」, 고려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 이정철, 2010, 『대동법 : 조선 최고의 개혁』, 역사비평사.

142) 이정철, 2010, 앞의 책.

143) 『승정원일기』 14책, 인조 4년 윤6월 8일 무신 

144) 『仁祖實錄』 권12, 4년 3월 16일 기미

145) 『光海君日記』 中草本 권22, 원년 11월 26일 계묘
      司憲府啓曰 …… 今者竊見內需司回答備邊司公事 辭極悖慢 不覺驚駭 夫都摠攝 乃在先朝亂初 廟堂稟旨 賜僧將之號也 厥後或廢或仍 如有役僧之事 則定以摠攝 管役諸僧 至今行之 人孰不知 而乃敢曰 摠攝之號 未知出於何處 是侮弄大臣也 雖因長城縣監牒報 使之依報施行者 備局之議也 而乃敢曰 一髡首指揮 遽爲施行 大傷事體 是詬辱大臣也 …… 內需司公事次知官員 請命拿鞫 按律嚴治 一以扶朝廷一分事體 一以懲近侍驕肆之習

146) 위 도표는 18세기의 자료인 『대구파계사연잉군방완문』(소위 어필완문),  『대구파계사어의궁완문』, 『대구용천사비변사절목』, 『진주옥천사비변사절목』을 기초로 하여 정리하였고 17세기의 상황을 반영하기 위해 『현종실록』 및 『승정원일기』의 내용으로 보충하였다. 이중 『대구파계사연잉군방완문』과 『대구파계사어의궁완문』은 파계사가 소장하고 있는 자료이며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불교기록유산아카이브사업단이 제공하였다.

147) 승려가 올리는 소지가 반드시 승려들의 의사를 반영한다고만 볼 수는 없다. 궁방에서 사찰을 절수하는 과정에서 아래로부터의 의사를 받아들였다는 명분을 위해 작성되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148) 『대구파계사어의궁완문』; 『대구파계사원당사적기』

149) 국왕과 관계된 과정에서 모든 문서는 승정원 내지 승전색을 통하지만 위 도표에서는 생략하였다.

150) 『仁祖實錄』 권12, 4년 3월 16일 기미;  『승정원일기』 12책, 인조 4년 3월 16일 기미; 『승정원일기』 12책, 인조 4년 3월 19일 임술; 『승정원일기』 12책, 인조 4년 3월 22일 을축

151) 『효종실록』 권2, 즉위년 11월 20일 을해

152) 지금 발견되는 원당 관련 문서는 거의 18세기 이후의 것이다. 여기에는 왕실 원당이 될 경우 거의 잡역을 혁파하라는 내용이 실려 있어 지방재정과 원당의 관계를 대략적으로 추정할 수 있게 해준다. 『현종실록』 권2, 원년 4월 3일 정채의 기사를 보면 내수사에서 부마의 원당을 정하며 잡역으로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하여 17세기에는 그러한 관계가 성립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런데 17세기 관찬사료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원당은 잡역을 모두 혁파받아 군현이 개입할 여지를 없애고 있는 것에 비하여 18세기 고문서로 확인되는 지방 군현과 왕실 원당의 관계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의 연구 과제로 삼고자 한다.

153) 『효종실록』 권9, 3년 12월 7일 을사

154) 『효종실록』 권20, 9년 2월 28일 을미

155) 『顯宗改修實錄』 권1, 즉위년 6월 8일 정유

158) 『顯宗改修實錄』 권2, 원년 3월 28일 계미

159) 『顯宗改修實錄』 권2, 원년 4월 3일 정해 2번째 기사

160) 『顯宗改修實錄』 권2, 원년 3월 28일 계미

161) 『顯宗改修實錄』 권2, 원년 4월 2일 병술

162) 『顯宗改修實錄』 권2, 원년 4월 3일 정해 2번째 기사

163) 『顯宗改修實錄』 권2, 원년 4월 3일 정해

164) 조영준, 2008, 「19세기 왕실재정의 운영실태와 변화양상」,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박사학위논문, 제1장 ; 조영준, 2008, 「조선후기 궁방의 실체」, 『정신문화연구』31-3.

165) 『顯宗實錄』 권9, 5년 12월 13일 경오
    忠淸道千房寺僧人不遵官令 監司李翊漢 使兼任韓山郡守申嵩耉 捉致其首僧 寺僧數百人 或持鳥銃 或持弓矢 據險以拒之 其後以火藥燒其寺 又以大焚其見侵官人之家 以泄其憤 李翊漢聞之不稟朝廷 而經送公州營將楊逸漢于韓山, 使之掩捕 則逸漢調發韓山林川等郡兵以捕之 韓山林川旣非右營將所管 而逸漢又不馳啓 亦不報兵使 擅發其兵 僧輩就捕之後 翊漢竝皆囚繫 啓請梟示 以懲其惡

166) 『숙종실록』 권17, 12년 3월 28일 임오; 『비변사등록』 59책, 숙종 34년 2월 30일

167) 『현종개수실록』 권2, 원년 3월 28일 계미

168) 『顯宗實錄』 권2, 원년 4월 3일 정해

169) 김석형, 1941, 「이조 국역편성의 기저」, 『진단학보』14; 권내현, 2006, 「조선 후기 호적, 호구의 성격과 새로운 쟁점」, 『한국사연구』135, 282쪽.

171) 표 2-1은 최근 발견된 『海南大興寺節目』(담양 용흥사 소장.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불교기록유산아카이브사업단 제공)의 내용 중 승려와 관련된 부분을 정리한 것이다. 이 자료는 2012년 담양 용흥사의 고서 조사 과정에서 발견된 것으로, 절첩본으로 보관되어 있는데, 문서의 첫 면이 훼손되어 정확한 문서명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문서 안에 이를 절목이라고 언급하는 부분이 있으며 말미에 발급자가 兼巡察使로 되어 있고, 兼巡察使의 署押이 있다. 순찰사가 관찰사의 例兼職이라는 것을 볼 때 이는 전라감염 절목이 관문 혹은 전령의 형태로 사찰에 발급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소장 경위를 살펴보면 해당 문서가 본래 대흥사에 소장되어 있었던 것이 확실시되며 조사처에서는 『순치 9년 관부문서』로 가제를 붙였다. 그런데 해당 문서가 필사본이 아니라 목판본으로 여러 사찰에 동시에 보내기 위해 만들어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렇다면 문서에 나타난 규정 역시 1개 사찰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전라도 지역 전체의 사찰에 모두 해당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해석은 이종수, 2012, 「용흥사의 역사와 소장 불교전적의 학술적 가치」,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구축(ABC) 사업 학술대회 자료집: 불교기록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33~35쪽의 내용을 참고하였다.

172) 『경상도단성현호적대장』의 1717년 호적에는 법물야면 다음에 직역이 居士인 이들이 사찰별로 기재되어 있고 그 다음에 僧人들이 각 사찰별로 기재되어있다. 그리도 都已上條에는 居士는 居寺로 표기되며 승인과 다른 존재들로 파악되고 있다.

174) 『肅宗實錄』 권3, 원년 5월 9일 정묘

175) 『肅宗實錄』 권3, 원년 5월 13일 신미

177) 장경준, 2006, 「조선후기 호적대장의 승려 등재 배경과 그 양상」, 『대동문화연구』54.

178) 이영숙, 2008, 「17세기 후반 호적대장의 승려등재비율에 대한 고찰 -丹城縣 戊午式年(1678) 호적대장의 栗谷寺를 중심으로-」, 『민족문화논집』40. 
    이 연구는 栗谷寺에 전래되는 畵記 자료를 토대로 숙종 4년 율곡사의 실제 승려 숫자와 『단성호적』에 등재된 율곡사 거주 승려의 수를 비교하였다. (참고로 율곡사는 당시 원당 등 절수속사가 아니었다.) 그 결과 당시 율곡사의 실제 승려 수는 109명인데 비하여 호적에 등재된 승려는 54명에 불과하여 등재율에 절반에 미치지 못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이와 비슷한 현상은 18세기의 『대구호적』에서도 목격된다. 호적에 등재되는 전체의 숫자가 줄어듦과 동시에 승려가 거주하여 廢寺되지 않았던 사찰의 승려 수가 없는 것으로 기재되는 것이다. (장경준, 2005, 「조선후기 호적대장의 승려 등재와 그 양상」, 부산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참조. 저자는 호적대장에서 승려가 없다고 표기되는 몇몇 사찰을 폐사되었다고 보지만, 실제로는 계속 사세를 유지하고 있던 사찰이 많았다. 예컨대 부인사의 경우 호적에서는 승려가 없다는 기재되는 해 이후에도 불사가 일어났음을 알려주는 기록들이 남아있어 실제로는 부인사가 폐사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79) 장경준, 2005, 앞의 논문 제3장 참조.

180) 아직 시론적인 이야기이지만, 호적의 승려 등재가 불교계 내부에 미친 영향도 보인다고 생각된다. 앞서 서술했듯이 호적에 등재된 승려는 전체의 50% 내외로 추정된다. 그런데 호적에 등재되는 승려는 그 고을에 친족이 머물고 있거나 토지를 소유한 승려들, 즉 일정한 사찰에 머무는 이들로 한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호적 등재 대상이 되는지 여부에 따라서 승려가 분화되었을 가능성도 고려해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승려의 호적 등재 시점에 사판승과 이판승이 분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수행, 특히 禪에 힘쓰는 이판승들은 여러 선원을 찾아 혹은 하안거·동안거 등을 보내기 위해 여러 사찰을 돌아다니는 경우가 많다. 반면 사찰의 사무를 담당하는 사판승들은 사찰을 옮기는 경우가 흔치 않다. 결국 토지를 소유하며 일정한 사찰에 머물러 있는 승려는 사판승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해남대흥사절목』에서도 보이듯이 국가는 고승과 범승을 분류하여 생각하고 있다. 역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높은 고승은 주로 수행에 전념하고, 수승과 삼보 등 승직 즉 사판승의 자격을 받는 선승은 역의 대상에 포함될 가능성이 높은 범승에 속하다는 것을 보아도 이 시기 사판승과 이판승의 분화가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181) 장경준, 2005, 앞의 논문.

182) 『신보수교잡록』, 호전 잡령 (효종)

183) 『신보수교잡록』, 호전 잡령 (현종)

184) 『승정원일기』 377책, 숙종 24년 3월 14일  
    喜茂曰, 寺院僧尼有弊, 故廢之禁之矣。喜茂曰, 張美, 曲爲供副, 而世宗, 不以公忠待之, 爲人臣者, 不當曲意承順矣。... 喜茂曰, 我國僧則有役, 中原僧則無役, 故我國, 不若中原之多僧, 而中原有度牒, 我國則無之矣。上曰, 僧徒, 皆避軍役者也。

185) 『비변사등록』 59책, 숙종 34년 2월 30일

186) 『영조실록』; 『정조실록』

188) 『현종개수실록』 권22, 현종 11월 1월 6일 갑오  

189) 『승정원일기』 268책, 숙종 4년 1월 18 
    錫胄曰, 南漢山城南壇寺, 盡爲傾頹, 今將修改, 而旣不可專委於僧輩, 本廳物役, 又無以相助。且各處廨宇修繕之事, 隨續不絶, 頃年朝家成給僧俗通政帖, 今亦已盡矣。此帖文數百丈, 更令該曹成給, 以爲收合材力之地, 何如? 積曰, 賣爵雖有弊, 而事在不得已, 則亦不可不爲也。僧俗通政帖各二百丈, 特令成給, 宜當矣。

190) 『승정원일기』 170책, 현종 2년 10월 3일;  『승정원일기』 258책, 숙종 3년 1월 23일; 『승정원일기』 286책, 숙종 7년 12월 26일;  『승정원일기』 291책, 숙종 8년 6월 23일;  『승정원일기』 303책, 숙종 10년 3월 14일;  『승정원일기』 316책, 숙종 12년 6월 29일;  『승정원일기』 341책, 숙종 16년 5월 13일;  『승정원일기』 348책, 숙종 18년 6월 23일;  『승정원일기』 421책, 숙종 30년 10월 20일;  『승정원일기』 456책, 숙종 36년 10월 10일;  『승정원일기』 460책, 숙종 37년 5월 10일

192) 조선후기 재정사 연구에 있어서 국가재정은 중앙재정과 왕실재정, 지방재정으로 나뉠 수 있다. 이들은 서로 자율적으로 움직이며 이해가 상충하면 대립하기도 한다. 중앙재정과 왕실재정은 각각 府中과 宮中으로 표현되는데 부중과 궁중이 일체가 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독립적으로 존재하여야 하는 가에 대해서 17~18세기에 걸쳐 논쟁이 진행되었다. 
     한 편 지방재정은 중앙재정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는데, 지방재정은 중앙재정을 위한 업무를 수행하면서 동시에 각사자판의 원칙에 따라 지방관청의 운영비를 확보하여야 했다. 중앙재정은 정해진 액수의 재화와 노동력을 징발한다는 조건 하에 그 수취의 방식은 지방관청의 자율에 맡겼다. 그리고 지방관청에 분배된 중앙재정 사무를 수행하기 위한 재원 역시 지방관청의 자율에 맡겨졌다. 즉 지방재정은 중앙재정과 긴밀한 연관관계를 맺으며 중앙재정의 입장에서도 안정적인 재화 확보를 위해 지방재정의 재원을 일정 부분 확보해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방재정의 ‘자율성’이 때로는 중앙재정과 대립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데, 이른바 삼정의 문란이 그 대립이 표면화 된 것이다. 이 삼정의 문란을 지방재정의 ‘문란’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혹은 ‘자율’로 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손병규, 2008,『조선후기 재정시스템의 재별견』, 역사비평사 및 그에 대한 아래의 서평 논문들을 참조. 
   이욱, 「또 다른 시점(視點)에서의 지방재정사 연구, 『조선왕조 재정시스템의 재발견』(손병규, 역사비평사, 2008)」, 『역사와 현실』70 ; 장동표, 「조선왕조 재정사의 재인식을 위한 새로운 모색 -(손병규, 『조선왕조 재정시스템의 재발견-17~19세기 지방재정사 연구-』, 역사비평사, 2008)」, 『지역과 역사』23 ; 권기중, 2008, 「서평 : 손병규 著, 『조선왕조 재정시스템의 재발견-17~19세기 지방재정사연구』역사비평사, 2008」, 『역사교육』108.

193) 홍희유, 1989, 앞의 책 ; 강만길, 1965, 「분원연구 - 17~8세기 조선왕조 관영수공업체의 운영실태 -」,  『아세아연구』8-4 ; 강만길, 1966, 「조선후기 수공업자와 상인과의 관계」, 『아세아연구』9-3 ; 김덕진, 1993, 앞의 논문.

194) 『備邊司謄錄』 21책, 현종 2년 10월 2일 
    戶曹判書鄭致和所啓 前者全南大同磨鍊時 歲幣所用大好紙·小好紙·白綿紙 竝入於大同作米之中 不以本色上納 而貿用於京中矣 京中紙品 不如各官所納 前頭將未免生事之患 極爲可慮矣 右議政元斗杓曰 當初臣等之意 預慮此弊 紙地則欲以本色上納 而大同主管之臣 試貿於京中 到今其弊如此 戶判之言誠然矣 上曰 自明年爲始 紙地則竝以本色上納事 分付可也

195) 『備邊司謄錄』 51책, 숙종 26년 1월 21일

196) 김덕진, 1996, 앞의 논문.

197) 송찬식,

198) 윤용출, 1998, 앞의 책, 163~164쪽.

199) 『備邊司謄錄』, 숙종 원년 9월 26일

200) 호적의 작성 방식에 대해서는 권내현, 2001, 「조선후기 호적의 작성과정에 대한 분석」, 『대동문화연구』39 참조. 그러나 승려의 호적 등재 방식에 대해서는 연구가 없는 실정이다.

201) 면의 도윤과 부윤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는 호적은 1678년의 것이 유일하면 이후 식년의 호적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도윤과 부윤의 이름을 기재한 이유는 필사와 성책의 과정에서 각 면 호적의 책임 소재를 밝히기 위한 것으로 추측되지만 정확한 이유는 할 수 없다. 참고로 각 면의 도윤과 부윤은 아래 표와 같다.

式年

元堂面

縣內面

北洞面

悟洞面

都山面

生比良面

新燈面

法勿也面

寺庵

1678

都尹

幼學

權大有

忠義衛

朴世琦

業儒

都衛夏

幼學

柳貴●

幼學

金安鼎

幼學

周南敷

幼學

柳之老

幼學

金尙鍙

副尹

業儒

李周英

業武

韓弘達

忠義衛

李之相

業儒

崔宇益

幼學

梁震翰

幼學

李暻

忠義衛

李顯奭

幼學

尹起莘

202)  『丹城縣邑誌』 불우조

203) 장경준, 2005, 앞의 논문

204) 『남원현공사』 4책

205) 잡역과 잡역세는 보통 지방 각관에서 정규로 부과하는 것 이외의 역과 세를 말한다. 그러나 17세기 대동법의 시행 이후 잡역세는 각 군현에 의하여 정규의 세액이 된다. (김덕진, 1996, 「조선후기 잡역세 연구」, 전남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6) 조선후기에는 산릉에는 齋宮의 역할을 하는 원당사찰 대신 제사에 필요한 祭需를 공급하는 조포사나, 현물 대신 錢을 납부하는 조포속사가 생겼다. 이에 대해서는 탁효정, 2012, 앞의 논문 ; 탁효정, 2012, 「『廟殿宮陵園墓造泡寺調』를 통해 본 조선후기 능침사의 실태」, 『朝鮮時代史學報』61 참조.

207) 『조선불교통사』 권하,

208) 김혁, 2005,「조선시대 완문에 관한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헌관리학과 박사학위논문.

209) 현재 남아있는 대부분의 사찰 완문은 18·19세기의 것이며 아직 17세기의 것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절수속사에 관한 연대기 사료의 내용을 살펴볼 때, 17세기의 절수속사는 지방 군현과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보이며, 지방 군현에서 해당 사찰에 지우던 役을 다시 받기 위해서는 절수의 혁파가 따라와야 했다. 자세한 내용은 본고의 본문 3장을 참조.

210) 18세기 이후의 절수속사는 응역속사와 중첩되어 나타난다고 보인다. 왕실의 원당이나 중요 아문의 절수속사가 되어도 지방관아와의 관계가 완전히 청산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18세기 작성된 사찰의 감역·면역 완문에는 존질이라는 명목으로 사찰이 계속하여 부담해야 할 역이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17세기 속사의 성격과 대비되는 18세기 속사에 대해서는 본고에서 다루는 범위를 벗어나기 때문에 이에 관해서는 추후의 연구를 기약하겠다.

211) 윤용출, 1998, 앞의 논문.

212) 전영근, 2011, 앞의 논문.

213) 『南地藏寺尊崇錄』 정조 14년(1790) 작성된 이 책은 당시 聖主 徐某가 주도가 되어 거의 모든 이향층과 사족들을 동원해 남지장사를 중수하는 비용을 시주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밖에 관찰사와 수령이 주도가 되어 사찰계를 만들고 存本取利하여 불사에 보태주는 일도 있는데, 이는 지방관과 사찰의 상보적 관계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