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논문

붕당정치론 비판 (김용덕,『정신문화연구』9, 1986)

同黎 2012. 7. 16. 02:51

붕당정치론 비판 (김용덕,『정신문화연구』9, 1986)

요약발제문

1. 서언

변태섭교수가 최근 한국사통론을 저술하면서 소장학자 이태진의 붕당정치론을 받아들였다. 근데 붕당정치론이 성립하려면 그 성립기인 선조대에 붕당은 상대세력과의 공존과 상호비판·견제를 원리로 해야 하며 기축옥사 같은 역옥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변태섭은 기축옥사에 있어서 정여립의 역모를 사실로 봐야 할 것이라고 하여 붕당정치론에 의거해 기축옥사를 해석하고 있다. 이에 나는 10년전에 내가 쓴 논문을 다시 봤는데 그 결과 한자의 첨삭도 팔요없는 쾌심의 작임을 재확인했을 뿐이다. 이대로 있으면 기축옥이 사실이라는 오해가 확산되고, 당쟁사의 긍정적인 면을 강조한 바 있는 나로는 이태진의 논조에 동의할 수 없다.

2. 기축란의 진상

붕당정치라는 새로운 용어를 쓰려면 그에 대한 명확한 개념 규정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결여되어있는 ‘붕당정치’란 개념으로 선조 8년 ~ 영주 원년의 150년을 카바할 수 없다. 이태진과 석정수복이 붕당정치기로 설정하고 있는 시대 가운데, 숙종·경종대에 들면 당쟁은 붕당정치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변질되었다. 그렇다면 당쟁의 태동, 과도기인 선조대에 당쟁이 붕당정치적 이여야 할 것인데, 선조 22년의 기축옥의 참상을 보면 비판과 견제가 얼마나 실제와 동떨어진 미화인가를 통감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기축옥의 진상이 붕당정치론의 성립여부를 가늠하는 요점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변씨가 역모를 사실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정여림은 사실 새로운 민권 사상의 선구자로 재평가되어야 한다. 그는 율곡의 제자였다가 동인으로 반부하여 서인의 지탄을 받았다. 그는 주자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불사이군의 절의를 부정하며 천하는 공물이라고 주장하는 특이한 정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세습군주제의 모순을 지양하고자 했던 선각자적 식견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역심이 있다고 하더라고 구체적인 역모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축옥의 구화자는 송익필과 정철로, 송익필은 동인측의 주장으로 할머니가 천인임이 밝혀져 환천되어 이발 등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이때 정여림의 대동계를 빌미로 서인에게 복수하고자 했는데, 대동계는 역모와는 관계가 없었고, 오히려 모든 신분을 포함하는 자치적 계의 하나일 뿐이었다. 송익필은 황해도로 가서 정감록과 정여립을 연결시키며 향반토호로 허세있는 자를 정여립의 문하에 출입하도록 시켰고, 이를 바탕으로 역모를 고변했으나 그 실상은 매우 허술했고, 조정에서도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 정여립이 도피하고 자살하여 역모가 사실로 받아들여졌는데, 실은 이는 서인측의 금부도사와 지방관이 그를 살해한 것이다. 이러한 정황은 정철의 행동에서도 추리할 수 있다. 기축옥은 조작이었다.

기축옥은 다스림은 참혹했다. 정철은 별소 이기자, 불열자는 모두 역도로 몰아갔다. 역적을 비호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역모로 돌아갔다. 당쟁에 있어서 결정타를 날리기 위해 역옥 조작은 관용되는 일이었다. 이를 볼 때 상대방과 공존을 기하는 따위의 붕당정치는 사실과 유리된 환상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3. 붕당정치론 비판

당쟁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은 이미 성호 이익이 하였다. 벼슬자리는 없는데 과거는 자주 있어 급제자는 많아 모순이 생겼다는 것이다. 또 원칙없이 인사이동을 빈삭해 벼슬에 대한 욕심만 자극하는 것이 당쟁의 원인이라 하였다. 석정수복도 당쟁이 자리다툼이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다만 그는 이 시대를 지배하는 정신은 이학이며, 붕당정치를 일관하는 절대 권위는 송학적 의리이며, 理法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의리에 대한 표방을 과대평가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광해군의 축출도 정치역학적 문제인 것이다. 안확이 근대정치와 당쟁을 비교하며 긍정하는 의견도, 식민사관에 안티테제를 제시한 공은 있느나, 당쟁과 근대정치학의 정당을 혼동하고 있다. 석정수복은 붕당의 출현과 전개를 왕권과 밀접한 것으로 파악했는데, 국왕이 귀족의 권력 독점을 꺼리므로 지방하층 귀족세력인 이학파가 새로운 혁신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해서, 여러 세력이 각축하여 세력 균형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당쟁의 메커니즘은 절대적 심판자인 왕권의 강화에 이바지한다. 왕은 양파를 번갈아 직권케 하여 당쟁의 형세를 조절했던 것이다. 즉 당쟁은 초월적 진보를 향한 것이 아니라 왕권을 위한 국왕의 조종인 것이다. 때문에 역옥이 사용되었고, 그 처리가 참혹한 것이다.

이태진은 부정론 일변도의 당쟁사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나는 동아일보에 ‘당쟁의 효용’이라는 글을 썼다, 그 내용은 당쟁이 왕권강화에 일조하고 일당독재와 부정부패를 막았다는 것이다. 이를 왜 이태진이 언급하지 않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결국 나는 단쟁의 명안양면을 모두 인정하는 것이고 붕당정치론은 긍정적인 면만 확대 강조하고 있다.

4. 결어

나는 당쟁사에 있어서 어두운 면과 긍적적 면을 모두 인식하는 것이 역사의 유기적, 발전적 이해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부기

내한한 전천효삼씨한테 석정수복에 대해서 물었는데, 그는 전천씨의 후배인데 교수한테 인정받지 못해 교수는 안되고, 전후 극우적 국수천황제주의자가 되어 강연여행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 김용덕의 본고는 붕당정치의 긍정적인 면만 지나치게 강조하는 이태진의 주장을 기축란을 대표적인 예로 들어 비판한 글이다. 붕당정치가 내발론적 입장에서 지나치게 당쟁의 긍정적인 면만을 강조하고 있다는 본고의 지적을 옳다. 그러나 김용덕이 사용한 몇가지 논거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기축옥사의 진실은 좀 더 상고되어야할 것이다. 기축옥사로 무고한 동인들이 많이 제거되었고 이것이 붕당정치론으로 설명되지 않고 있음은 이미 다른 논문에서도 토론하였다. 그러나 정여립의 사상이 과연 세습군주제를 부정하는 것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좀더 정치한 논증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16~17세기의 정치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공론과 의리문제를 적절하게 설명하는 대신 과대평가하고만 이야기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의리문제가 당대 정치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간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