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버스를 타고 교토 북쪽의 고려미술관으로 간다.
그 동안 지리를 자세히 알지 못해 찾아가지 못했는데 의외로 가기 쉬운 곳에 있었다.
카미가모신사 가기 조금 전 남쪽에 있는데 4, 9, 46번 버스를 타고
카미가모츄갓코마에(카미가모중학교전)에서 내리면 길 건너 거의 바로 위치해 있다.
정류장 건너편 잘 보이는 곳에 이렇게 대형 표지판이 있다.
골목을 따라 조금만 들어가보면
이렇게 한국 석물들이 있는 집이 나온다.
이것이 고려미술관연구소
그리고 그 건너편엔 고려미술관이 위치해있다
대문 앞에 거대한 무인석 한 쌍이 있는데 왕릉에서 옮겨온 것 마냥 거대하다.
무인석 자체가 드문 편인데 어디서 어떤 사연으로 일본으로 건너온건지 궁금하다.
고려미술관 입구
고려미술관(高麗美術館)은 재일조선인 사업가였던 정조문에 의해 1988년 개관하였다. 정조문을 옆에서
바라봤던 친구이자 현재의 관장인 교토대학교 명예교수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에 의하면 이미 60년대
정조문은 일본에 흘러들어온 조선의 유물들을 수집하고 박물관을 설립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경상도 예천 출신이었던 정조문 관장은 8살에 조국을 떠나 초등교육도 완전히 받지 못했단다.
사업으로 성공했던 37살의 젊은 정조문은 어느날 골동품 상점에서 본 조선백자를 보고
강렬한 충격을 받아 고국의 미술품을수집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모든 1700여 점을
모두 재단으로 만들어 고려미술관과 고려미술관연구소를 설립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재일조선인"이다. 이들은 해방 후 대한민국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선택하지 않은 "조선"적의 동포들이다. 정조문 관장이 재일조선이었다는 점, 박물관의 설립 목적이
조국의 통일에 이바지했다는 점은 그의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준다고 생각한다.
아마 그렇기에 평생 고향인 낙동강변에 한번도 돌아가지 못했으리라. 지금이야 일본 내에서 재일조선인과 재일한국인이 과거보다 상대적으로 이질감이 사라졌지만 성공한 경상도 출신 사업가였던 정조문이
어째서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려 했던가 그 이유에 대해서 궁금해진다.
입장료는 500엔, 대학교 학생증을 제시하면 400엔이다.
현재 운영이 쉽지는 않은 것 같다. 연간회비 1만 엔으로 유지회원을 모집하고 있는데 여유가 있는 분은
후원해도 좋을 것 같다. 일본에서 한반도를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소중한 공간이다.
고려미술관 홈페이지
입구 옆에 불로문이라는 돌문이 있고 그 안에는 석등과 석탑이 있다.
안내문
불로문이라는 돌문의 현판
창덕궁 후원의 불로문이 있는데 이것이 조선에서 유행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불로문 안쪽은 어느 무덤을 지키고 있었을 문인석과 장명등에 둘러쌓여 오층석탑이 서 있다.
고려시대의 것이라고 전한다.
불로문 바로 뒤에는 한 쌍의 또 다른 무인석이 서 있다.
대문 앞의 것보다는 좀 작지만 칼집의 표현까지 꽤나 세밀한 작품이다.
각종 문인석과 장명등 등의 석물들이 벽을 기대고 서 있다.
이제 불로문을 나선다.
현관 앞에 있는 석양
또 어느 집안을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이제 바다 건너 멀리까지 왔다.
그나마 다행히도 고국의 후손에게 거두어졌다.
안에서는 조선의 여성 복식과 생활에 관한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위의 저고리는 한국의 덕온공주(순조의 딸) 당의를 복제한 것이다
안내문
1층 전시관 풍경
그래도 한국의 박물관들과 교류를 하면서 전시회를 개최하고 있는 듯하다.
2층으로 올라간다.
여기저기서 수집해온 옹기와 석물들이 늘어서있다.
한국의 어느 장독대를 보는 것 같다. 이제 한국에서도 보기 힘든 장한 모양새의 장독들도 보인다.
2층은 1층보다 편안한 분위기의 공간이다.
한켠에는 정조문씨와 고려미술관의 역사를 설명한 공간도 보인다.
설립자 정조문씨
홈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중요 유물을 가져왔다.
청동기시대의 다뉴세문경
평양 부근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이 거울은 교토 오야마자키(大山崎)에 거주했던 근대기 사업가
카가 쇼타로(加賀正太郎)가 20세기 초, 평양 방문시 현지에서 구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후기의 청자
청자에서 분청사기로 넘어가는 시기의 도자기이다.
흰 달항아리
정말 달처럼 흰 아름다운 항아리다.
고려미술관의 마스코트인 철화 백자이다.
만선을 기원하는지 철화로 배와 물고기를 거친 바탕 위에 쓱삭쓱삭 그려냈다.
이 배 그림은 현재 고려미술관의 로고이기도 한데, 조선 민중의 힘찬 기운을 나타내는 작품이라고
정조문씨가 가장 애장했던 물건이라고 한다.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목조 삼존 불감
안의 도금은 잘 남아있다. 비슷한 불감이 통도사나 천은사에 종종 남아있다.
1569년이라는 제작연도가 남아있는 조선전기의 치성광여래도이다.
가운데에는 북극성을 신격화한 치성광여래가 있고 그를 중심으로 북두칠성 각각을
보살과 도교의 도사로 형상화하여 협시하게 하고 있다. 그 사방으로는 전통적으로 중요시되던
28수라는 28개의 별자리를 나타내고 위쪽에는 십이지가 있다.
불교과 도교의 신앙을 적절히 배합하여 붉은 비단 위에 금채로 그려 내었다. 좀처럼 보기 힘든 불화이다.
달마도로 유명한 김명국의 백로도이다. 김명국을 술에 취해 순식간에 그림을 그려내는 신필로 유명하다.
그 대신 술만 주면 그림을 그려 작품의 양이 많고 명작만큼 태작도 많다는 평이 많다.
그래도 이 그림은 명작에 속한다.
이 그림 위쪽에 붙어 있는 찬은 일본 성리학의 대가인 하야시 라잔의 글씨이다.
김명국은 통신사의 동행 화원으로 일본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일본에 전해지는
그의 그림이 많은데 이 작품은 하야시 라잔이 소장했던 중요한 것이다.
이 용호도는 16세기의 화가 이정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그림은 왕이 도화서에 그리게 하여 신년에
신하들에게 하사하는 세시화에 해당한다. 이 그림이 이정의 것이라는 것은 용도 오른쪽에 있는 글자로
알 수 있다. 도쿠가와 막부의 어용화가인 가노 탄유(狩野探幽)는 깃카와 가문의 요청으로 그들의 소장품을
감정하였다. 그는 이 그림을 이정의 것으로 감정하고 신품이라 평가했는데 그 기록과 이 그림이 일치한다.
조선의 것들이 넘어가서 이렇게 하나 둘 이야기를 가지게 되었으니
이런 것은 꼭 한국만의 문화재라고 하기도 어렵겠다.
자수로 연꽃과 새를 그린 병풍이다.
소의 뿔을 오랜 처리를 거쳐 얇게 피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린 화각장이다.
이 정도로 크고 보존상태가 완백한 것은 찾기 어려운 명품이다.
나전칠기로 만든 바둑판
바둑은 선비들의 몇 안 되는 놀이인데, 한껏 사치를 부렸다.
이제 박물관을 나선다. 망주석도 보인다.
박물관 앞은 담장 기와. 고려 자가 선명하다. 수키와 위에 못을 박은 것은 일본식이다.
일본 땅에서 조선식 기와까지 구워내어 장식하는 정성에 다시 한 번 탄복하고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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