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원생의 일상

근황 13.04.13

同黎 2013. 4. 13. 03:23

근황 13. 04. 13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마음이 편한 나날입니다. 이제야 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제 하려는 이야기를 마음 편하게 하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한달간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시간만을 낭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나브로 다소 마음이 진정되고 이제는 새로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처음 논문 발표를 한 학기 미루기로 결정했을때 겉으로는 담담한 척 했지만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누구의 강요도 아닌 제 선택이었지만 그 동안의 힘든 생활을 지탱했던 끈이 끊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터널의 저 편에 보이는 빛이 끝인 줄 알고 달려왔는데 실은 가로등이었고 바깥 공기를 마시고 햇볕을 쬐고 싶다는 희망이 강제로 연기되었을 때의 느낌이 아마 그럴까요.


고백하건데 2월 중순부터 3월까지 제가 그렇게 힘들었던 가장 큰 이유는 역사학의 열정을 잃어버렸었기 때문입니다. 처음 공부를 선택했을때의 그 느낌, 주제를 선택하고 사료를 잃어나갈때의 즐거움은 어느새 사라지고 형식적으로 사료를 취사선택하여 골라 읽고 적당히 남의 논문을 선택해서 짜집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공부는 재미없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주제에 꿈은 너무 컸습니다. 목표는 원대하면서도 그 과정은 요행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공부는 농사와 같아서 수 많은 손길이 더해지지 않고는 결코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 그걸 알면서도 자라는 싹을 억지로 뽑아 내어 겉으로 보기엔 많이 자란 듯하지만 뿌리는 썩고 있는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말만 원대하고 행동은 굼뜬 자가 되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놀고만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일을 해야했고, 다른 일들로 신경써야 했습니다. 의미를 잃은 공부와 생활인으로서의 삶은 병행하는 것이 너무 괴로웠고, 논문만 끝나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심정으로 글을 썼습니다. 생각해보면 석사 논문이 다른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이 아니라 어떠한 일의 끝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거기에 교만과 매너리즘이 더해지면서 어느새 학자로서의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논문을 미루기로 하고 무엇보다도 죄송했던 분들은 저를 지켜봐주신 세 분의 선생님입니다. 내용적 측면을 가장 많이 봐주시는 권내현 선생님과 틱틱거리지만 사실 누구보다도 큰 관심을 기울여주시고 계신 강제훈 선생님께 죄송했습니다. 그리고 대학원에 입학하기도 전 무작정 박물관장실로 찾아온 학부생에게 직접 학계의 원로 선생님들을 소개해주시고 직접 전화까지 걸어주신 조광 선생님을 뵐 면목이 없었습니다. 항상 베풀어주신 큰 은혜를 글로 갚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선생님들의 은혜와 보살핌마저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근 한달간의 시간이 지나고 이제는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서 글을 새로 쓰고 있습니다. 17세기의 실록을 꼼꼼하게 읽으면서 시대를 이해하고 그 터 위에 집을 지으려고 합니다. 순간순간의 아이디어에만 의지하기보다는 가장 보수적인 방법으로 공부를 다시 해내가려고 합니다. 그렇게 석사논문이라는 튼튼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박사논문이라는 기둥을 올리고 언젠가는 공부하는 집을 완성하고 싶습니다.


사람의 삶은 한계가 있고 그 삶 속에서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은 더 짧습니다. 인간은 사유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고 인문학은 사유 속에서 완성됩니다. 남들보다 늦은 육개월이 헛되지 않토록 더 악착같이 사유해야 합니다. 그동안의 선생님들과 선배들이 해주신 애정어린 쓴 말들이 약이 될 수 있도록 죽자고 더 사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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