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무제

유서. 2013.05

同黎 2013. 5. 11. 01:18

유 서

 

인간의 역사는 인과관계로 이루어져 있지만 삶과 죽음만은 예상치 못한 우연입니다. 저 역시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저는 제가 어떤 방식으로 삶을 마치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의 죽음 이후에 남아있는 일만은 깨끗하게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이렇게 유서를 남깁니다. 만일 제가 사고로 혹은 병이나 선택으로 삶을 마친다면 유서 원본은 제 후배 유제훈에게 전달 될 것입니다. 제 마지막 가는 길은 제훈이가 정리해주면 좋겠습니다. 이 유서는 20135월 작성되었으며 상황에 따라 수정될 것입니다.

따로 벌어놓은 재산이 없기 때문에 딱히 드릴 것은 없습니다. 다만 제가 진 경제적 채무는 부모님께 부탁드리기 바랍니다. 그 정도의 경제적 능력은 있을 것입니다. 제가 남길 것은 책 밖에 없습니다. 제가 가진 모든 책의 목록은 컴퓨터에 파일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모든 책은 후배 ○○○○○○에게 남깁니다. 부족한 선배를 따라와준 고마운 후배들입니다. 제가 남긴 책으로 열심히 공부해주길 바랍니다. 다만 목록에서 잃어버리거나 아직 제본하지 못한 책이 있으니 천천히 채워줬으면 좋겠고, 가능한 책들이 산실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남길 것은 없고 후회되는 것은 많지만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하던 공부를 끝마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 뜻이 있다면 제가 하던 사원경제와 국가재정, 향촌사회와의 관계를 계속 해주시길 바랍니다. 언젠가 그런 분이 나타난다면 제가 가졌던 모든 책은 그분에게 전달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몸이 크고 무거워서 관이 들기 어려울까봐 걱정입니다. 영정은 제훈이가 들어줬으면 좋겠고, 관은 ○○○, ○○○, ○○○, ○○○, ○○○, ○○○, ○○○, ○○○이 들어주길 바랍니다. 만약 사람이 부족하다면 뭐 알아서 해주시고요. 화장은 싫고 가능한 매장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매장한다면 외따로이 산 위에 봉분을 만들어주시고 빗돌 하나만 세워 주세요. 만약 화장한다면 개운산 나무 한그루 아래에 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납골당은 싫습니다.

마지막으로 고마운 사람들에게 한마디씩 남기려고 합니다. ○○, 너는 내가 무슨 일이 있을 때 가장 솔직히 이야기할 수 있었던 친구였다. 고맙고 미안하다. ○○, 여자친구한테 좀 잘해라. 그래도 너랑 다시 만나서 좋았어.○○야, 너와 안건 얼마 안되지만 속깊은 이야기 나눌 수 있어 다행이다. ○○, ○○, 너희한테는 항상 부끄럽고 고맙다. 앞으로도 열심히 살아주렴. ○○, ○○, 너희가 없었으면 어떻게 학교를 살아갔을까? 너희가 내 동기여서 자랑스럽다. ○○, 너는 마음을 나눈 몇 안되는 친구였다. 부디 잘 살아. 현식아, 너는 참 듬직한 친구다. 뭘 해도 잘 될 거다. ○○○○, ○○○○, ○○○○ 나에게 좋은 기회를 줘서 고마웠어요.

○○, 너가 파일럿이 되면 같이 여행다니고 싶었는데, 아쉽다. ○○, ○○, 대학원생의 고충을 나눌 수 있는 친구여서 고마웠다. ○○, ○○야 예쁘게 잘 사귀어라. ○○, 가기 전에 한번 보고 싶었는데 아쉽다.

○○○○, ○○○, ○○○○, ○○○○, ○○○○, ○○○○, ○○○○ 고맙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 ○○아 너희와 더 공부하지 못해 아쉽다. 좋은 연구자가 되어주렴.

○○, 좋은 대표자가 되어주렴. 너는 생각보다 훨씬 능력 있는 사람이다○○아, 너 같은 후배를 만나서 다행이다. 너는 참 좋은 사람이다. 부담스러울 수 있는 이야기까지 들어주어서 고마웠다. 계속해서 좋은 사람으로 남아주렴. ○○, 너한테는 항상 미안하다. 너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았을 텐데. 너는 착한 사람이니까 복받을 거야. ○○, 항상 사람을 챙기는 너가 감탄스럽다. ○○, 나를 좋아해줘서 고맙다. 조금만 더 이기적으로 살아도 될거야. ○○, ○○, ○○, ○○, ○○아 너네가 있어서 작년이 즐거웠다. 앞으로도 반에서 좋을 역할 해주길 바래. 그 밖에 많은 후배들아 너희와 더 많은 이야기를 못해서 안타깝다. 그저 나 같은 사람이 있었다고만 기억해주렴.

이렇게 삶을 정리하면서 참 후회되는 일이 많습니다. 하지만 즐거웠던 인생이었던 만큼 이 세상에 태어났던 것을 후회한 적은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부탁드리지만 제가 살아왔던 기억만 남겨주시고 나머지를 잘 정리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행복했습니다.

 

20135

박세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