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일본 여행기 10차

간사이대원정 1일 - 교토히가시야마1 (교토료젠고코쿠신사京都霊山護国神社1)

同黎 2016. 5. 16. 22:08



이제 택시를 타고 교토의 고코쿠신사(호국신사)로 간다.

고다이지로 가는 길 바로 옆, 산으로 난 길이 바로 교토의 야스쿠니신사

교토료젠고코쿠신사(京都霊山護国神社)로 가는 길이다.


길 앞에는 유신의 길이라고 쓰인 비석이 놓여 있다.

메이지 연호 100주년을 기념하여 료젠현영회에서 세운 비석이라고 한다.


비석 아래에서 비석의 유래를 적은 표지판이 서 있다.


여기서 더 올라가면 교토료젠고코쿠신사라는 표석이 나온다.


경내 안내도

특히 도쿄전범재판에서 유일하게 전원 무죄를 주장한

인도인 라다비노드 팔 박사의 현영비 위치를 부착시켜 놓았다.

이 이야기는 조금 이따가 하도록 하고


교토료젠고코쿠신사는 본래 일본 불교의 한 종파인 시종에서 만든 신사였다.

그러다가 메이지 유신이 진행 중인 1868년 교토에서 존왕양이파로 활동하며 봉기했던

텐추구미(天誅組)를 위로할 신사를 짓도록 메이지천황이 지시하고 이에 감격한 교토의 공가와

야마구치, 고치, 후쿠이, 돗토리, 구마모토 등 여러 번에서 교토의 료젠(영산)에 작은 신사를

각각 지은 것이 시작이다. 즉 야스쿠니신사보다 더 오래된 신사이며, 전국 호국신사의 원조이다.

1949년 내무장관포고에 의해 지금의 이름으로 개칭되고 확장되었다가 전후 교토신사로 개칭하였지만

미군정이 끝난 후 다시 원래대로 개칭하였고, 지금은 명목상 신사본청과의 관계를 끊고 독립 신사로 있다.

이 뒤에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무덤이 있는데 이는 곧 이 신사가 신으로 모시고 있는 인물들이다.

여기에는 사카모토 료마와 유신 삼걸 중 하나인 기도 다카요시(木戸孝允),  가츠라 고고로

(桂小五郎)도 포함된다. 이른바 유신지사, 양이지사라고 불리는 1356명이 신으로 모셔져 있는데,

뭐 여기까진 그렇다 치더라도 이후 청일전쟁, 러일전쟁, 태평양전쟁의 전사자 73000여 명이

추가되어 교토의 대표적인 우익 상징이 되었다.


안내판


한국어로 대동아전쟁이라고 써 놓고 비범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중국어로도 대동아전쟁이라고 써 놓고 있다. 미친 거 아닌가


신사 배전 풍경


좌측의 사무소


경내에는 여러가지 기념물이 가득하다.

무슨 포병 53연대의 기념비


특공용사의 상


여기서 말하는 특공용사는 카미카제 같은 몸빵들을 말하는 것이다.

전국에 걸쳐 건립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하는데, 군국주의에 휩쓸려

개인의 희생을 강요한 구역질나는 행위를 미화시키고 있다.


이것도 기병 위령비


역시 야포병 전우회의 현영비

옆에는 말을 기리는 비석도 서 있다.

 


육군 카미카제 기념비


지조의 비라고 한다.

파푸아뉴기니 라바울 요새를 지켰던 이들을 기리는 비석


라바울의 돌

파퓨아뉴기니의 섬으로 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 일본군이 점령해

이마무라 히토시 대장의 지휘 아래 동남 방면의 거점 요새로 건설된 곳이다.

총 9만명의 일본군이 자급자족하며 지켰고 호주군에 의해 재점령될 때 큰 저항이 있었다고 한다.

이걸 지조의 징표로 가져왔나보다.

거 참...


본사 배전


충자가 크게 써진 비석도 옆에 서 있고


진혼의 탑이라는 표석 옆에는 종이학 다발도 걸려있다.


사무소에는 사카모토 료마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본전 좌우에는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의 전몰자 위령비가 서 있다.


한 곳에는 천황의 친필인 보병연대의 군기를 묻은 곳도 보인다.

아마 일본군이 해산되면서 군기를 사용할 수 없기에 이렇게 무덤으로 만들었나보다.


이제 료젠고코쿠신사의 무덤으로 가볼 차례이다.

300엔을 내야 들어갈 수 있다.


단순히 사카모토 료마의 무덤 정도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안내도를 보니 어마어마하게 크다.


가츠라 코고로(가쓰라 고고로, 가츠라 고고로, 카츠라 코고로 여튼 일본어 외래어 표기법은 어렵다.)가

기도 다카요시와 동일인물이라는 설명

주로 메이지유신 이전 양이지사로 살던 시기 이름인 가츠라 고고로가 유명하니

일본인들도 이 둘이 동일인물인지 잘 모르나 보다.


올라가는 길에 찍은 신사 배전과 뒤편의 본전


멀리 료젠역사관이 보인다.


경내가 하도 넓어서 안내판이 군데군데 서 있다.

팔 박사 현영비는 결국 안 갔는데 여기서 설명만 간단하게 하겠다.


이게 팔 박사의 현영비

라다비노드 팔 박사는 인도의 재판관으로 도쿄 전범 재판에 판사로 파견되었다.

이 사람은 전범 재판에 적용되는 국제법은 전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소급할 수 없다며

대부분의 전범에게 무죄를 주장하였고, 또 홀로코스트나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나 똑같다며

전범 재판을 서양 제국주의의 일방적인 일본 심판이라고 하고, 난징대학살도 부정하는 등... 여러모로

일본 극우들에게는 찬양받는 골 때리는 사람이다. 여기와 야스쿠니신사에 현영비가 세워졌다.

인도의 독립과정을 보면, 인도 독립의 아버지인 찬드라 보세 같은 경우 영국을 몰아내기 위해 일본과 협력하기도 하는 등, 아시아주의적 입장이나 인도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이해가 안되는 부분은 아니지만... 우선 이 양반 자체가 영국의 부역자였고 전쟁 자체를 미화하는 건 절대 있어서는 안된다. 참 골치아픈 사람이다.


거대한 청동비

돌아 나오면서도 보았는데 무슨 비인지는 잘 모르겠다.

기도 다카요시에게 정1위를 증직하는 것을 기념하는 비인 것 같긴 한데... 확신이 없다.


올라가는 길

계단도 많다


가다보면 쇼와의 사라는 신사 안의 신사가 보인다.

여기는 조금 이따가 보기로 하고


올라가다 보니 구 토사번 초혼사라는 표석이 보인다.


토사번(도사번)은 현제 시코쿠의 고치현으로 바로 사카모토 료마의 출신지이다. 조슈와 사츠마번이

대립하는 과정에서 나름 중재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번 내에서 농민봉기가 있기도 했고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의 초소카베씨의 무사들과 그 이후 들어선 야마우치씨의 무사들 간 갈등을 해결하고자 야마우치씨의

무사를 상급무사로, 조코나베씨의 무사를 하급무사인 향사로 하는 이중구조를 만들었으나 상급무사와

하급무사의 갈등이 발생하는 등 나름 구체제를 전복시키고자 하는 인물들이 많이 나올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토사번의 군사들은 프랑스의 극동함대 제독들을 공격하는 사카이 사건 등 존왕양이 활동도

활발하게 일으켰다. 토사근왕당이라는 조직이 번주를 공격하여 암살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신정부 수립 이후 토사번은 조슈번과 사츠마번의 투쟁 가운데 소외되었고,

토사 출신에 대한 차별도 심했다. 이 결과 일본 최초의 공산당선언 번역자이자

(우리가 쓰는 단결이라는 단어를 처음 고안한) 대역사건에 휘말려 사라져간 일본의 대표적인

무정부주의자 고토쿠 슈스이 같은 반항아들을 낳기도 한 곳이 토사라는 사실도 우리는 잊으면 안 된다.


고치현 초혼사의 유래 안내판


토사번 진혼사 바로 옆에는 텐추구미의 수장인 요시무라 토라타로(吉村虎太郎)의 무덤이 있다.


정4위 추증 비석


텐추구미(誅組)는 막번체제에 반감을 가진 교토의 공경 나카야마 타다미츠(中山忠光)와

토사번의 무사 요시무라 토라타로가 함께 만든 조직으로 나라현 지역을 다스리던 막부의 직할기관인

고조다이칸(五條代官所)을 공격했지만 막부군의 공격으로 결국 실패했던 집단이다.


옆에는 이름 모를 비석이 서 있고


텐추구미에 가담한 이들의 묘비만 말없이 나란히 서 있다.


토사번 초혼사 바로 옆에 있는 휴게소에서 교토를 내려다 본다.


메이지시대 이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의 목숨을 걸었을까?

이러한 역사에의 자발적 이용당함은 과연 우리에게는 없는 것일까? 참 무서운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