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일본 여행기 12차

단풍의 간사이 - 8일 교토 히가시야마1 (묘호인 妙法院)

同黎 2017. 9. 1. 23:57



나는 묘호인으로 간다.

잠시 지나는 만쥬지. 여기를 지나 도후쿠지역에서 시치조역으로 간다.


사실 시치조역에서 교토국립박물관으로 가는 길, 또 그 근처는 절과 신사들이 밀집되어 있다.

산쥬산겐도, 지샤쿠인, 호쥬지, 요겐인, 묘호인, 이마히에신궁, 도요쿠니신사, 호코지 등등


그 중에서도 산쥬산겐도와 박물관을 지나는 큰 길 정면에 있는

지샤쿠인과 묘호인은 관광객들이 잘 안 가는 곳이다.


묘호인 정문

이곳은 개방하지 않고 측면으로 들어가야 한다.


묘호인 일반 입구

일반 공개를 하지 않아 국보로 지정된 서원과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서원, 그리고 역시 중요문화재인

보현보살 정도만 볼 수 있지만 그래도 역사가 깊은 곳으로 한 번 왔었다.



국보 묘호인 대고리

묘호인(妙法院, 묘법원)은 천태종 사찰로 천태종 오문적에 속하는 격이 높은 사찰이다. 천태종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성격상 총본산 엔랴쿠지 외에는 아무리 큰 사찰도 대본산이 아니다. 도호쿠, 간토 이렇게 지역별 대본산이 있을 뿐. 그러나 오대문적은 황실과 관련있는 사찰로 총본산 다음가는 위상을 지닌다.

묘호인은 다른 문적들처럼 히에이잔에 있던 엔랴쿠지의 작은 숙방 중 하나로 시작하였고, 헤이안시대 언제 쯤 이곳으로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묘호인이 본격적으로 커진 것은 고시라카와천황이 출가해 원정을 하면서부터이다. 고시라카와천황은 양위 후 출가해 법황이 되어 원정을 하고 근방에 호주지전이라는 이궁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호주지의 진수사로 히에이잔 아래의 히요시대사를 권청해와 그 담당사찰(별당)으로 묘호인을 지정한다. 그 결과 묘호인은 광대한 사역을 지니게 된다. 또한 고시라카와천황 스스로가 문적에 취임하면서 대대로 황족이 주직을 맡는 문적사원이 된다.

묘호인의 제2의 전성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때 왔다. 천하를 통일한 히데요시는 호코지 대불전을 완성하고 8종(천태, 진언, 율, 선, 정토, 일련, 시, 일향)의 승려 천 명을 불러 대법회를 열었는데 이 때 이들을 먹이기 위해 만든 건물이 바로 국보인 대고리이다. 이후 묘호인은 호코지와 산쥬산겐도, 이마히에신궁을 관할하는 대사찰이 되었다. 이후 각자 분리하지만 그래도 대사원의 면모를 지금도 지니고 있다.

다만 대부분의 관광객은 100번 버스 타고 지나가다가 저긴 또 어딘가 하는 곳이지만


저편에는 중요문화재 서원으로 들어가는 대현관이 있다.


먼저 국보 대고리로 간다.


사무실에 가서 납경을 받았더니 기념품으로 만쥬도 하나 준다.


자갈이 깔린 묘호인 앞마당


고리 입구


안내판


이렇게 입구만 공개한다.


정면의 모습


이제 현관 쪽으로 간다.


현관, 중요문화재


당문


현관과 서원은 에도 막부 2대 쇼군인 히데타다의 딸이자

고미즈노오천황의 황후인 도후쿠몬인이 쓰던 건물을 하사한 것이다.


메이치천황이 왔었다는 기념비


칙사문


서원 안쪽


멀리 보현당이 보이고


한쪽에는 칠경비와 신전이 있다.


칠경비는 이른바 칠경의 낙향 사건을 기념하는 것으로 막말기에 막부와 공무합체파인

아이즈번, 사츠마번에게 신변을 위협당해서 초슈번으로 몸을 피한 사건을 말한다.


이후 조슈 토벌의 명이 떨어지지만 삿쵸동맹을 통해 메이지유신이 이루어진다.


신전

공경 일곱 명이 여기서 모여 길을 떠났다고 한다.


보현당


신전 정면


보현당은 18세기 후반의 건물로 큰 가치는 없지만 본당에 해당된다.


안내판


내부에 모셔진 본존 보현보살상은 창건 당시인 헤이안시대 후기의 것으로 중요문화재이다.


멀리서 보는 서원


칙사문


대고리의 모습


나가는 길에는 돌 바닥에 호코지의 흔적이 있다.


이러한 문양은 히데요시가 호코지를 지을 때 돌을 바친 각 다이묘들이 자신들의 표시를 해 놓은 것이다.


히데요시의 사세구와 같이 나니와의 영화는 꿈같이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