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첫날. 어제 음주의 여파로 모두 늦잠을 잤다. 아침 9시에 일어난 우리는 교토행을 취소하고
서둘러 아스카로 향했다. 도착하면 10시 반이 넘을 것이었기에 서둘렀다.
다시 타는 오사카 지하철
여기서 난바역으로 가서 킨테츠선을 타고 한참을 가서 야마토사이다이지로 간 다음 환승을
해야 한다. 이제야 쉽게 찾아갈 수 있지만, 이 땐 그저 동민이 형이 시키는대로 갈 뿐이었다.
마침내 도착한 아스카역. 역 바로 옆에는 책과 기념품을 파는 가게가 있다.
가서 아스카의 절과 신사에 관한 책을 샀는데, 이후에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아스카는 아주 시골동네이다. 우리로 치면 부여 정도?
날씨도 좋고 한적하여 이 날 기분좋게 10km 정도를 걸어다닐 수 있었다.
첫 목적지인 키토라 고분(キトラ古墳).
일본 본토엔 벽화고분이 거의 없다. 키토라 고분이 발견되기 전까진 다카마쓰 고분이 유일했다.
그러나 키토라 고분에서 사신도가 확인되면서 일본 혼슈의 두 번째 벽화고분이 되었다.
(규슈 지방에는 벽화고분이 몇 개 있다고 한다.)
고분이라고 해서 봉분을 기대했는데, 이상한 가건물이 나오더니 도착했단다. 응?
알고보니 아직 발굴이 진행 중이었다. 발굴이랄 것도 아니고 보존처리? 키토라 고분이 발견된
것이 1983년인데, 아직 사람이 봉분 안의 석실로 진입하지 않았다. 대신 벽화의 완벽한 보존을
위해 수십 년에 걸쳐 조금씩 보존처리를 하는 중인 것 같다. 아직도 내시경을 넣어 벽화를
확인하고 있는데, 전모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천정에는 천문도가 나왔고, 사면 벽에는
사신도와 십이지상이 있다고 한다.
설명문
주위를 순시하는 중
키토라고분은 일본에서도 몇 안 되는 특별사적이다.
실내 벽화고분이 일본 본토인 혼슈에서 발견된 것은 다카마쓰즈카고분 이후 2번째이다.
천문도
십이지상
고구려, 백제의 고분벽화와의 유사성이 주목되고 있다.
내부 구조도
측면
살짝 어이가 없었으나 안전한 발굴을 위해서는 이게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곧 정신을 수습하고 다카마쓰 고분으로 간다. 다카마쓰즈카(고송총) 고분이 정식 명칭이다.
아스카는 이런 한적한 시골이다. 부여만큼 시골인 것 같다.
아스카 순환 버스가 있지만 유료인데다 시간대도 맞지 않아 그냥 걸어다니기로 한다.
다카마쓰즈카 고분까지 15분정도 걸린다.
보통 다카마쓰 고분(高松塚古墳)부터 아스카 관광이 시작되지만 우리는 반대로 왔기 때문에
고분공원 뒷문으로 들어왔다. 사진의 고분이 그 유명한 다카마쓰즈카 고분이다. 보통 사진을
보면 봉분 위로 나무가 무성한데 하나도 없다. 왜 이럴까? 사실 지금 고분의 봉분은 한 번
헐고 새로 만든 것이고, 안에는 석실이 없다. 국보인 벽화가 습기로 인해 상해가고
곰팡이가 피자 2010년 고분의 석실을 드러내서 도쿄국립박물관으로 옮겨
보존처리한 뒤 보관하기로 했단다. 그러니까 현재 저 안에는 벽화가 없다.
어차피 볼 수 없는 것이지만 좀 허무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1차 여행기
3차 여행기
15차 여행기
일반적으로 사진에 나오는 고분은 봉분 위에 나무도 있고 하지만
지금은 벽화 해체 후 싹 정비되어있다.
측면
현재 벽화는 1년에 한 번 도쿄국립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아스카 지역은 거의 전체가 역사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다카마쓰 고분 옆에는 여러 고분들이 있다. 그 중 몇 개는 천황릉으로 비정되어
있는데, 그 중 몬무천황(문무천황)릉이 다카마쓰 고분 가까이에 있다.
몬무천황은 덴무(천무)천황과 지토(지통)천황의 손자로 42대 천황이다.
그러나 젊었을 때 사망하여 별로 알려지지는 않았다.
고고학적 정식 명칭은 히노쿠마노아코노아카노에노미사사기(檜隈安古岡上陵)
일본 천황릉은 메이지시대에 일괄적으로 정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실제 천황릉인지는 알 수 없다. 발굴도 금지되어 있다보니...
경내에 들어가서 낚시나 사냥을 하거나 나무 등을 베지 말라는 궁내청의 안내문
모든 천황과 황후 및 황족들의 무덤에 공통적으로 걸려있는 문구이다.
정면
도리이가 있어 신성한 구역임을 알려주고 있다.
전반적으로 상원하방형의 고분이다.
실제 천황릉은 고분군공원 안에 있는 나카오야마고분(中尾山古墳)이라는 설이 더 많다.
다카마쓰 고분군 아래 있는 벽화관으로 간다. 250엔을 내고 입장하면 벽화와 고분 내부
모형이 있는 벽화관에 들어갈 수 있다. 사진은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의 모형.
이미 발견 전에 도굴된 상태이기 때문에 별 건 없었다.
벽화 배치도. 천정에는 천문도가 있고, 사면벽에 사신도와 남녀 군상이 있다.
주작만 없는데, 원래 없던 것은 아니고 발굴 전 도굴에 의하여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벽화 모형. 다카마쓰 고분의 벽화는 고구려 고분 벽화와 유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백호와 여인도
청룡과 여인도, 행렬도
현무도
천정의 별자리
고분 발굴 당시의 석실 모형
사진에서 보이는 구멍이 도굴구멍이다.
고분 축조법 설명. 석실 위에 흙을 올리고 나무판을 올려서 다진 뒤
다시 흙을 올리는 것을 반복하는 판축법이라 한다.
고분벽화의 도상을 정리한 것
고분벽화의 인물들의 옷 색깔과 당시 율령에서 규정된 신분별 옷 색을 비교해 놓은 표
남녀군상의 사람들을 실제로 재현해 본 모습
벽화관을 나와 이제 이시부타이 고분쪽으로 길을 잡는다. 버스를 타려 했지만 역시나 시간이 맞지
않아 걸어가기로 한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이날 아스카데라까지 거의 20키로미터를 걸어다녔다.
가는 도중에 덴무-지토천황릉이 있다. 고고학적 정식명은 히노쿠마노오오치노미사사기
(檜隈大内陵)이다. 부부의 합장묘이다. 덴무천황은 다이카 개신(대화개신)을 일으킨
덴지천황(천지천황)의 동생으로 임신의 난을 통해 형의 아들이자 조카인 고분천황
(홍문천황)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물로 세조를 연상케 하는 왕이다.
덴무천황은 일본의 율령제를 사실상 완성한 천황으로 평가받는다. 평생 대신을 두지 않고
독재정치를 했으며 관제개혁, 불교진흥, 씨족제 정비 등을 해내왔다. 그전까지 왜라고
불리던 국호를 일본으로, 대왕이라고 쓰던 왕명을 천황이라는 단어로 처음 바꾸기도 했다.
지토천황은 그의 부인이자 덴지천황의 딸로 아들이자 덴무천황의 차남인 구사카베 황자(몬무천황의 아버지)를 천황으로 만들기 위해 천황에 즉위하였다. 이후 몬무천황에게 양위하나 죽을 때까지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천황이다. 덴무-지토천황릉은 기록이 명확해 천황릉임이 확실시되지만
부장품은 이미 가마쿠라시대에 한 번 도굴되었다고 한다. 원래는 위는 팔각원형,
아래는 사각형의 상원하방의 적석총인 것 같은데 지금은 오래되어 봉분이 되어있다.
1차 여행기
3차 여행기
6차 여행기
15차 여행기
길 옆에 나 있는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천황릉 전경
궁내청의 안내판
측면에서 들어가봤다. 나무만 무성하다.
봉분 주변을 철망으로 둘렀다.
왠지 좀 으스스한 기분이다.
'日 > 일본 여행기 1차' 카테고리의 다른 글
入倭求史記 - 4일 오사카2 (스미요시대사住吉大社, 시텐노지四天王寺) (0) | 2013.11.14 |
---|---|
入倭求史記 - 4일 사카이 (다이센고분大仙古墳, 닌토쿠천황릉仁徳天皇陵) (0) | 2013.11.14 |
入倭求史記 - 3일 교토3 (니조성二条城·고류지広隆寺) (0) | 2013.11.14 |
入倭求史記 - 3일 교토2 (산쥬산겐도三十三間堂·리츠메이칸 대학立命館大学) (0) | 2013.11.14 |
入倭求史記 - 3일 교토1 (지온인知恩院·헤이안신궁平安神宮) (3) | 2013.11.14 |
入倭求史記 - 3일 오사카 히라카타 (백제왕신사百済王神社·백제사지百済寺跡) (0) | 2013.11.14 |
入倭求史記 - 2일 아스카4 (아스카데라飛鳥寺) (0) | 2013.11.14 |
入倭求史記 - 2일 아스카3 (오카데라岡寺) (0) | 2012.07.29 |
入倭求史記 - 2일 아스카2 (타치바나데라橘寺·이시부타이 고분石舞台古墳) (0) | 2012.07.29 |
入倭求史記 - 1일 첫 일본행 (3) | 2012.07.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