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일본 여행기 13차

일본불교미술답사기 - 8일 교토 후시미1 (후시미이나리대사伏見稲荷大社)

同黎 2018. 6. 8. 04:01



후시미 지역으로 내려왔다.

후시미이나리대사로 가는 길


문전에 사람이 가득하다.

역시 관광지


가득한 포장마차와 인파를 지나면


후시미이나리대사(후시미이나리타이샤, 복견도하대사, 伏見稲荷大社)

물론 몇 번 왔었다.



하타씨의 씨족 신사로 처음 세워졌다. 제신은 우카노미타마로 스사노오의 딸이라는 곡물의 여신이지만

사실 이나리신과 우카노미타마가 동일시된 것은 무로마치시대에 와서이다. 아마 하타씨와 함께

도래한 도래계 신으로 생각된다. 주신 외에 4신이 더 있는데 모두 유서를 찾기 어려운 신들이다.

여우신사로도 유명하지만 여우들은 신의 사자로 이나리신의 아래에 속하는 신이다.

헤이안시대에 홍법대사 구카이와 이나리신의 여우가 만났다는 기록이 있어 도지가 이곳의 신궁사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도지 근처에 이나리신사의 신려소, 이를테면 분사가 있는데 매년 이곳으로 이나리신이 왔다가 가는 제사를 벌였다. 또한 이나리신은 복신으로 인기가 높아 헤이안시대 이래 크게 융성했다.

가마쿠라시대에는 신불습합을 이루면서 주신은 십일면관음으로 나머지 본전의 배신들도 본지불이 생겼다.

이나리신과 다키니천이 동일시된 건 또 다른 이후의 이야기이다.

무로마치시대 고하나조노천황의 칙명에 의해 산 위에 있는 신사가 아래로 내려오게 되었다. 지금의 신사 자리는 본래 후지모리신사의 섭말사로서의 조난구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를 계기로 이전했다고. 그러나 곧 오닌의 난이 터지고 이곳은 호소카와씨의 진지가 되면서 대부분 소실되었다. 이후 잇키가 일어나며 도지가 소실되자 임시로 애염사라는 사찰을 지어 신궁사를 대신하였다. 교토에서는 의외로 도지를 중심으로 한 동밀(진언종)보다는 엔랴쿠지를 중심으로 한 태밀(천태종)의 힘이 더 셌다. 이후 황족과 공경 중심의 태밀이 이들의 몰락으로 점차 약해지고 무사들이 신봉했던 동밀이 무사세력의 확대와 함께 번지면서 이나리신앙과 구마노신앙 같은 동밀 중심의 신앙도 함께 크게 번졌다.

이후 여러 인물들의 후원이 잇따랐고 결정적으로 후시미성을 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크게 중흥시키면서 지금의 규모를 가지게 됐다. 그 후 상업의 신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상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폐불훼석과 신불분리의 여파로 사내의 불상들이 모두 사라지고 신궁사가 훼철되었고, 메이지유신의 여파로 원래 면적의 1/4만 남게 되었다. 이후 전후 신사본청이 만들어질 때도 이세신궁을 총본산으로 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아 따로 독립한 종교법인을 설치한다.


누문

좌우에 딸린 남북회랑과 함께 중요문화재이다.

모모야마시대의 건물


안내문


내부에는 즈이신상이 있다.


신을 지키는 신


외배전

중요문화재

19세기에 재건한 것



뒤로 내배전이 보인다.


내배전

이건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


뒤편에 본전이 있다.


주인소에서 납경


뒤편 본전은 중요문화재로 무로마치시대 건물이다.


납경


본전의 모습


권전

에도시대 초기의 건물로 중요문화재이다.



말사인 장자사

중요문화재


하타씨의 조상신을 모셨다.


카다사

이곳의 신관으로 대대로 있었던 카다씨의 씨족 신사이다.

중요문화재



오사상전

다섯 신을 모신 곳으로 중요문화재

에도시대 초기



양궁사

이세신궁의 내외궁 신을 한꺼번에 모신 곳이다.

중요문화재

에도시대 초기



센본도리이가 시작하는 곳에 있는 오궁(오쿠미야)

이나리신을 모신 곳이다.



백호사

신의 사자인 두 마리의 여우신을 모신 곳이다.

역시 에도시대 초기의 건물로 중요문화재



오차야는 고미즈노오천황이 하사한 곳인데 보여주진 않는다.


기도하는 신관


이제 다음 신사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