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일본 여행기 13차

일본불교미술답사기 - 8일 교토 우지1 (뵤도인平等院)

同黎 2018. 6. 8. 21:02



우지 뵤도인에 왔다.

늘 오던 서쪽 표문이 아니라 남문으로 들어간다.


박물관 쪽 문으로 들어가는 길

뵤도인도 여러 번 왔다.



뵤도인(平等院, 평등원)은 대표적인 헤이안시대 귀족사원을 보여주는 사찰이다.

에도시대 이래 천태종과 정토종 탑두에서 공동으로 운영했으나 현재 본사는 그냥 단립사찰로 남아있다.

어차피 본방이 없어서 탑두들이 절 노릇을 하지만

현재 뵤도인 부지는 미나모토씨를 거쳐 11세기 후지와라씨의 최대 권력자였던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우지 별장이었다. 그의 사후 아들인 관백 후지와라노 요리미치가 별장을 바쳐 사찰로 고치면서 뵤도인이 시작되었다. 지금은 봉황당과 관음당 정도가 남아있지만 본래는 우지강변에 본당이 있었다고 하며 그 밖에도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뵤도인 봉황당은 아미타여래를 모시는 데 이때는 곧 말법시대가 시작되어 불법이 사라진다는 정토신앙이 강하게 퍼지고 있었다. 이래서 전국 곳곳에 정토당이 세워지는데 봉황당은 그 중에서도 건축양식이 전래를 찾기 어렵고 빼어난 귀족적 건축이다. 본래는 화려한 단청에 내부는 금과 나전, 유리 등으로 장식되어 있으나 현재는 많이 퇴색했다. 이는 헤이안시대 후기 귀족 사원 중 유일하게 남은 건축이다.

남북조시대에 쿠스노키 마사시게와 아시카가 막부군이 이곳에서 전투를 해 뵤도인을 비롯한

우지 일대 사찰이 대부분 불탔는데 봉황당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남문

후시미성에 있던 문으로 이후 옮겨진 것이다.

문화재 지정은 안 됐다.



들어가면 탑두가 보이는데

담 너머 보이는 건물이 중요문화재이다.

양림원 서원

모모야마시대



탑두 정토원


구세선승관음상


에도시대 작품으로 배를 타고 있는 독특한 도상이다.



멀리서 본 모습


부동당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의 무덤


헤이케가 정권을 잡았을 때 고개를 숙여 살아남은 미나모토씨로 타이라노 키요모리 생애 후반에

각지에서 미나모토씨가 다시 들고 일어나는 계기가 된 모치히토왕의 난에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우지 뵤도인 전투에서 져서 죽었다.

그래서 무덤이 여기 있다.


탑두 최승원


고리와 현관


당문 형식의 현관


등롱


가마쿠라시대의 등롱으로 춘일형 등롱 중 오래된 것에 속한다.


이른바 고사리 석등이라고 한국에 대량으로 들어온 석등이 이것이다.


탑두를 지나


아래로 내려간다



십일층석탑


가마쿠라시대

원래 여기 있던 것은 아니고 일본 기업가가 희사한 것이라고



비석


우지차의 아버지라 불리는 칸바야시 치쿠안의 100주기 기념비이다.

지금도 후계자가 칸바야시 슌쇼 본점이라는 이름으로 영업 중이다.


봉황당 미랑의 박공


얼마 전 해체보수공사가 끝나서 번쩍번쩍한다.


봉황당을 뒤에서 본 모습


봉황의 모습


익랑


측면의 모습


정면


봉황

실물은 박물관에


반대편


정면


확대


본존상

이렇게 크다


우리도 들어가려고 옆으로 가는 중


10엔짜리 동전 모델


옆으로 간다


30분에 1번 정해진 인원만 들어간다.


경내도


관음당

가마쿠라시대 초기의 건물로 중요문화재


모서리 조심


본존상

헤이안시대 후기의 전설적 불사라는 정조의 유일하게 남은 작품이다.

높이 284미터의 거상


국보로 별도 지정된 당내 벽화와 채색화


단청의 모습


본존과 천개, 운중공양보살상


정면

공양보살상은 52구인데, 가끔씩 유출된 것이 발견되어 실제로는 더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천개도 따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천개 내부

자개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법당 앞 석등


헤이안시대의 것

강 건너편에 또 한 구의 석등이 있다.


이제 박물관으로 가는 길


국보 범종

특이하게 비천상이 새겨진 종으로 한반도와의 연관성을 추측 중이다.


벽화 복원도


아미타내영의 모습


밖에는 국보 종의 복제가 걸려있다.


잠시 여기서 차 한 잔 하고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