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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여행계획

날짜 지역 일정 비고 9월 27일 오사카 간사이공항 입구 - 숙소 체크인 - 오사카성 - 오사카 동양도자박물관 - 시텐노지 - 한큐 고서점가 - 오사카 스카이빌딩 공중정원 오사카 주유패스 확장판 오사카 동양도자박물관 조선백자 특별전 시텐노지 보물관 특별공개 9월 28일 교토 도지 - 후시미 월계관 기념관 - 다이고지 - 긴카구지, 신뇨도, 호넨인 - 고다이지 - 기요미즈데라 도지 보물관 특별공개 고다이지 제외가능 9월 29일 오쓰 이시야마데라 - 미이데라 - 히에이산 케이블카, 엔랴쿠지 - 비와호 - 미무로도지 9월 30일 교토 란덴 아라시야마역, 덴류지, 노노미야신사, 조잣코지, 니손인, 기오지, 세이료지, 다이가쿠지 - 고류지 고류지 계궁원 특별공개 10월 1일 교토 교토역 - 산비 도착, 진고지, ..

入倭求史記 - 2일 아스카3 (오카데라岡寺)

이시부타이에서 한참을 걸어 오카데라(강사, 岡寺)로 향한다. 언덕 위의 절이라는 이름처럼오카데라는 비교적 산 위에 위치한 절이다. 특히 높은 곳에 위치한 삼층 목탑이 오카데라의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오카데라는 아스카시대 덴지천황 때 세워졌으며, 관음도량으로 유명하다.킨테츠선에 오카데라역이 존재하지만 한참을 가야하고, 우리는 도로를 따라 걷다가 언덕을 넘고다리를 건너는 고생을 해서 도착했다. 본래 이름은 류카이지(용개사, 龍蓋寺)라고 한다. 1차 여행기https://ehddu.tistory.com/69 6차 여행기https://ehddu.tistory.com/972 13차 여행기https://ehddu.tistory.com/1638 멀리 목탑이 보인다. 오카데라의 인왕문. 중요문화재이다. 에도시대 초기 ..

入倭求史記 - 2일 아스카2 (타치바나데라橘寺·이시부타이 고분石舞台古墳)

덴무-지토 천황릉을 지나 이시부타이 고분쪽으로 길을 잡는다.그러던 중에 타치바나데라(귤사)라는 절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들리기로 했다.결과적으로는 매우 잘한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밥 먹을 곳이 없다는 것.너무 시골이라서 편의점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30분을 넘게 걸었을 때 겨우 세븐일레븐 하나를 발견했다. 거기서 급히 식사를 해결한다.첫 일본 편의점 도시락은 나쁘지 않았다. 반찬은 한국과 비슷한데 밥의 수준이 현격하게 달랐다.한국 편의점 도시락은 밥이 푸석푸석한데, 여긴 정말 탄력이 있었다. 내내 먹을 만했다. 타치바나데라로 가는 길에 카와라데라(천원사)라는 절터를 만났다. 절은 거의 사라지고 유적만 남아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거의 정보가 없다.아스카시대의 유적 위에 현대 미술품 같은 것을..

고석규, <19세기 전반 향촌사회 지배구조의 성격: 수령-이`향 수탈구조를 중심으로>, <<외대사학>>2

첫째, 이·향층에 편입될 수 있는 요호부민과 그렇지 못한 요호부민의 차이점은 어디서 기인하는가? 같은 요호부민층이 어떻게 분절되어 수령과 결탁할 수 있는 측과 그렇지 못한 측으로 나누어질 수 있는가? 만약 요호층의 이러한 분열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경제적 측면보다는 경제외적 강제에 의한 것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필자는 요호층이 분리되는 경제외적 강제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고 있다. 둘째, 19세기의 이·향층은 과거의 향리계층과 분절성을 강하게 가지는가? 필자는 조선후기에 고려부터 이어진 土姓의 吏族이 약화되고 양민층 출신의 假吏가 급격히 늘어나서 기존의 향리층을 대신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조선후기 가리층의 수가 증대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새로운 세력이 假吏로 등장하였다고 했을 때, 이것이 필자의 주..

書/논문 2012.07.28

근황 12.07.28

근황 12.07.28 힘든 나날입니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우울한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노조 탄압을 전담하는 기업이 생겨서 용역깡패를 동원해 투쟁 사업장을 덮쳤다는 소식입니다. 너무나 분하고 억울해서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하지만 저는 조교이기에 또 준비해야 할 세미나가 있기에 학교로 걸음을 옮겨야만 했습니다. 공부하는 것이 뭔지 한참 고민하게 만드는 하루였습니다. 펜이 총보다 강하다는 말도, 학문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말도 모두 거짓입니다. 실천을 담보할 수 없는 학문은 그냥 허울 좋은 자기만족의 다른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써야 할 글의 방향을 다시 돌이켜 봐야겠습니다. 논문이 목적의식으로 쓰여지면 않되겠지만, 연구자가 목적의식을 잃으면 결국 아무것..

일제시대 경복궁에 모인 유물들

지금은 경복궁 복원사업이 한창입니다만 예전에는 경복궁이 절반 이상이 잔디밭이었습니다. 그리고 광화문 앞에는 육중한 조선총독부 건물이 있었고, 뒤편에는 민속박물관 근처에는 전통공예전시관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는 육중하고 권위적인 건물이 또 하나 있었죠. 그리고 넓은 경복궁 잔디밭에는 탑과 석등, 부도 등등의 석조 문화재들이 널려있었습니다. 지금은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 하나만 빼고 모두 용산의 박물관이나 본래 있던 지역의 국립박물관으로 옮겨졌지만 지금도 경복궁이라고 하시면 잔디밭에 널려있던 석조물들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경복궁이 일제시대에 훼손되었고, 잔디밭의 석물들이 일제에 의해 옮겨왔다는 것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정확한 사연을 아시는 분은 별로 없을 것 같..

史/근현대 2012.07.28

한(漢)과 흉노. 독립된 천하

한(漢)과 흉노. 독립된 천하 동양에서 천자(天子)를 칭한다는 것은 곳 자국을 중심으로 한 천하관을 세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국의 황제들이 그러했고, 고구려와 백제의 대왕(大王)이 그러했으며, 일본 역시 천황(天皇)을 칭하며 자신들을 중심으로 한 천하관을 확립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한(漢)대에 중앙아시아를 주름잡았던 흉노의 선우 역시 황제와 동등한 자신만의 천하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야만민족이라는 선입관이 덧씌워진체 인식되는 흉노가 사실 당시 아시아를 양분하는 강력한 세력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글에서는 사기의 흉노열전을 중심으로 흉노와 한이 각각 서로를 바라보는 시각과 그들이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는 천하관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한(漢)이 보는 흉노(匈奴)에 ..

史/동양사 2012.07.28

양반과 노비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쓰여진 일기인 쇄미록을 통해서 양반과 노비의 관계를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미야지마 히로시의 의 일부분을 발췌 정리하였습니다. 쇄미록은 조선 선조 때의 양반인 오희문의 일기입니다. 일기는 임진왜란 1년 전인 1591년에서 시작하여 1601년 까지 쓰여지고 있습니다. 오희문은 해주 오씨로 집안은 벼슬을 한 양반가였지만 본인은 벼슬을 하지 못했고, 아들이 출세하여 말년에 선공감감역이라는 명예직만 하였습니다. 그는 1591년 전라도로 여행을 떠났는데, 이는 시집간 누이를 방문하고, 외방노비의 신공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이 여행도중에 임진왜란이 터졌고, 원치 않은 피난생활에 들어가게 됩니다. 오희문은 피난 생활을 하면서 거의 매일 일기를 썼는데, 이 것이 쇄미록입니다. 쇄미..

史/조선 2012.07.28

합리적 정치운영 : 조선과 대한민국

합리적 정치운영 : 조선과 대한민국 흔히 근대를 이성의 시대라고 합니다. 합리성에 기초하여 전근대적인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개조하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적용되는 법제도, 정부조직, 경제구조 등을 만든 것이 바로 전근대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라보면 근대는 합리성의 시대, 전극대는 비합리성의 시대라고 흔히 이해되어 왔습니다. 특히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의 상태를 가장 이상적인 삶으로 착각하기 쉬운 인간의 보수성 덕분에 "역사는 진보하고 있으며, 과거는 불행한 시대, 내가 살고 있는 현재는 꽤 괜찮은 시대"라고 흔히들 생각하는 것이 전근대=비합리, 근대=합리라는 공식을 사람들의 머리 속에 뿌리깊게 자리잡게 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에 대한 의문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

史/조선 2012.07.28

윤용출, 「15·16세기의 요역제」, 『부대사학』10

윤용출, 「15·16세기의 요역제」, 『부대사학』10 박세연 요역은 민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징발하는 수취제도로 전세, 공납과 함께 민호의 사유지에 부과되는 세몫의 하나였다. 요역은 노동력을 징발한다는 특징 때문에 군역·신역과도 관계를 맺고 있었고, 지방에서는 공물·진상의 마련, 생산, 운송이라는 문제 때문에 공납제와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그러나 요역은 민호를 대상으로 하는 戶役이었지만 군역은 특정의 인신을 대상으로 부과하는 身役이었기 때문에 노동력 징발의 기준과 방식에서 요역과 군역은 구별되는 것이었다. 요역은 雜役·雜徭·所耕雜役·戶役·力役·賦役 등의 용어로도 표현되고 있다. 雜役·雜徭라는 단어는 요역이 지방의 여러 조건과 사정에 따라서 다양한 모습을 띄며, 지방의 필요에 따라 수시로 차역하고 징..

書/논문 2012.07.28

미술사, 구성된 역사

미술사, 구성된 역사 1. 들어가며 : 낮선 역사, 미술사. 역사학(특히 문헌사학)을 공부하는 이에게 미술사는 어떤 의미일까? 어느 문화권이나 사회든지 미술 역시 사회의 상황을 반영하는 하나의 거울이며, 또한 의미 있는 사료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한국의 역사학 전공자들에게 미술사는 낯선 영역일 뿐만 아니라 완전히 다른 체계를 가진 학문이다. 문헌역사학과 고고학, 미술사학은 해방 후 학문의 체계가 잡히고 있을 때부터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학 전공자는 미술사를 편협한 학문이라고 혹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미술사는 분명 역사의 한 갈래이며, 역사학에 존재하는 이데올로기 역시 미술사에 그대로 존재하기 마련이다. 역사학에서 오랫동안 서구중심주의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자리잡..

史/그 외 2012.07.27

프랑스의 한 마을을 통해 본 중세유럽

가장 일반적으로 역사를 배우는 방법은 어떠한가? 보통 우리는 시대순으로 각 시대에 일어나 굵직한 정치사를 중심으로 역사를 파악하며 공부한다. 사람은 본래 어떠한 것이든지 일반화시키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큰 것을 중심으로 정리하여 익히는 것이 이해하기도 쉽고, 인관과계를 설정하기도 용이하기 때문이다. 이후 맑스의 공헌으로 경제사가 역사 이해에 필수적이 되었으나 여전히 역사의 하나의 법칙으로 설명하거나, 계량화를 통해 일관적인 경향을 찾아내려는 방식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러한 식의 역사 연구는 분명 역사학이 호사가들의 이야깃거리나 신의 의지를 설명하는 도구에서 벗어나 사회구조를 설명하는 하나의 과학(科學)으로 발전하는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한 편으로 이론의 범람은 역사학의 가장 근본적인 조건인 실증(..

書/서평 요약 2012.07.27

우리집 족보는 진짜일까?

족보는 아직까지 많은 관심의 대상입니다. 우리 집 족보가 과연 진짜일까? 우리 조상은 진짜 나의 조상일까? 족보가 있으면 양반이라는데 나는 과연 양반일까? 이러한 질문들은 신분제사회가 철폐된지 10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꽤 많은 관심의 대상이며, 우리 사회에는 의외로 종친회, 대종회 등등이 꽤 강력한 집단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족보와 성에 관해서 아주 간략하게 다루어 볼까 합니다. 이번 시간에 다루지 못한 내용은 다음 강의에 이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래 姓과 氏는 다른 의미입니다. 고대 중국에서 성은 일종의 종족을 의미합니다. 주나라 왕족의 성은 희(姬)이고, 태공망의 성은 여(呂)인데, 이는 종족을 의미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씨는 성보다는 아래의 개념이지만 꼭 하위개념이라..

史/조선 2012.07.27

부석사의 미투리 생산

조선시대 승려들은 왕실과 연결된 사찰을 제외하고는 (혹은 왕실과 연결된 절이라고 할 지라도) 대부분 자급자족하여야 했기 때문에 농업은 물론이고 수공업과 상업에도 종사하여야 했습니다. 농업은 조선시대의 가장 기본적인 산업이기 때문에 승려들 역시 당연히 농업에 종사했지만, 수공업과 상업도 이루어졌다는 것이 특이합니다. 조선시대 사원은 대부분 국가에 공물을 부담하여야 했습니다. 지리지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원 부담의 공물은 종이, 미투리, 고사리, 도라지, 잣, 밤, 화살대용 대나무, 목기, 버섯, 머루, 홍시, 으름 등입니다. 그 중에서도 종이는 국가와 지방관청이 사원이 부담시키는 가장 보편적인 물건이었습니다. 대부분의 큰 사찰에서는 종이를 만들어 중앙 관청이나 지방 관청에 납부하였습니다. 지금도 그..

史/조선 2012.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