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6

긍지의 날 - 김수영

긍지의 날 김수영 너무나 잘 아는 순환의 원리를 위하여 나는 피로하였고 또 나는 영원히 피로할 것이기에 구태여 옛날을 돌아보지 않아도 설움과 아름다움을 대신하여 있는 나의 긍지 오늘은 필경 긍지의 날인가보다 내가 살기 위하여 몇 개의 번개 같은 환상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꿈은 교훈 청춘 물 구름 피로들이 몇 배의 아름다움을 가하여 있을 때도 나의 원천과 더불어 나의 최종점은 긍지 파도처럼 요동하여 소리가 없고 비처럼 퍼부어 젓지 않는 것 그리하여 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 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 그러할 때면은 나의 몸은 항상 한치를 더 자라는 꽃이 아니더냐 오늘은 필경 여러 가지를 합한 긍지의 날인가보다 암만 불러도 싫지 않은 긍지의 날인가보다 모든 설움이 합쳐지고 모든 것이 설움으로 돌아가는 긍지의 날인가보..

文/詩 2013.06.21

죄와 벌 - 김수영

죄와 벌 김수영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우리들의 옆에서는어린놈이 울었고비오는 거리에는사십 명 가량의 취객들이모여들었고집에 돌아와서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아는 사람이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아니 그보다도 먼저아까운 것이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文/詩 2013.06.17

너를 잃고 - 김수영

너를 잃고 김수영 늬가 없어도 나는 산단다 억만번 늬가 없어 설워한 끝에 억만 걸음 떨어져있는 너는 억만개의 모욕이다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꽃들 그리고 별과도 등지고 앉아서 모래알 사이에 너의 얼굴을 찾고 있는 나는 인제 늬가 없어도 산단다 늬가 없이 사는 삶이 보람있기 위하여 나는 돈을 벌지 않고 늬가 주는 모욕의 억만배의 모욕을 사기를 좋아하고 억만인의 여자를 보지 않고 산다 나의 생활의 원주(圓周) 우에 어느날이고 늬가 서기를 바라고 나의 애정의 원주가 진정으로 위대하여지기 바라고 그리하여 이 공허한 원주가 가장 찬란하여지는 무렵 나는 또하나 다른 유성(遊星)을 향하여 달아날 것을 알고 이 영원한 숨바꼭질 속에서 나는 또한 영원한 늬가 없어도 살 수 있는 날을 기다려야 하겠다 나는 억만무려(億..

文/詩 2013.06.17

거대한 뿌리 - 김수영

거대한 뿌리 김수영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남쪽식으로도사리고 앉았다 그럴 때는 이 둘은 반드시이북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팔이오 후에 김병욱이란 시인은 두 발을 뒤로 꼬고언제나 일본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그는 일본대학에 다니면서 4년 동안을 제철회사에서노동을 한 강자다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 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천팔백구십삼년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왕립지학협회 회원이다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남자들이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남자로서 거기를 무단통행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내시, 외국인의 종놈, 관리들 뿐이다 그리고심..

文/詩 2013.06.09

죄와 벌 - 김수영

죄와 벌 김수영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놈이 울었고 비오는 거리에는 사십 명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文/詩 2013.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