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조선 47

조선 世宗代 초반 朝日交涉에서 九州探題의 역할과 위상

조선 世宗代 초반 朝日交涉에서 九州探題의 역할과 위상 박세연 머리말1. ‘己亥東征’과 朝日關係의 변화2. 戰後 조일교섭과 九州探題의 역할변화 1) 사신의 왕래와 九州探題의 중재 2) 九州探題를 중심으로 하는 朝日通交의 재편3. 九州探題의 약화와 對馬島州로의 교섭 창구 일원화맺음말 머리말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는 14세기 한반도 전역에 출몰했던 왜구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내고 유력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한반도의 정치세력에게는 일본을 어떻게 방어하고 통제하느냐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중국 역시 지속적인 왜구의 노략질에 시달렸고 명의 초기 황제들 역시 일본 정벌을 생각할 정도로 왜구 문제에 민감하게 대응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세종 원년에 일어난 대마도 정벌 즉 ‘己亥東征’은 ..

史/조선 2019.03.21

표충사 소장 고문서 해제

표충사 소장 고문서 해제 박세연 Ⅰ. 들어가며 밀양의 표충사는 사명당 유정의 출생지인 밀양 무안에 광해군 2년(1610) 사우를 건립하여 제향하게 한 데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후 사우가 무너지고 제사가 끊겼는데, 그 후 밀양의 사림과 유정의 5세 법손인 남붕의 노력으로 사우와 영당을 재건하고 경종 원년(1721) 표충사라는 이름을 받고 감영으로부터 제수를 지급받아 일반 사액서원에 준하는 대우를 받게 되었다. 남붕은 영조 14년(1738)년 중창불사를 완료하는 한편 휴정과 영규를 표충사에 합사하고 표충비를 건립하여 표충사의 위상을 공고히 하였다. 이 과정에서 남붕은 밀양과 경상도의 재지 양반뿐만 아니라 조정 중앙의 관료들과 교류하면서 휴정과 영규의 합사운동을 성사시킨다. 이러한 저력을 통해 표..

史/조선 2016.04.28

조선후기 부세수취 관행과 '중간비용' 연구발표회 후기

조선후기 부세수취 관행과 '중간비용' 박세연(중세2분과) □ 일시: 2015년 5월 30일 토요일 1시 □ 장소: 성균관대학교 600주년기념관 첨단강의실 □ 주최: 한국역사연구회·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 후원: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0. 총론: 조선후기 재정구조 상의 '雜費' 발표: 손병규(성균관대학교) 1. 조선후기 전결세 징수와 중간비용 연구 발표: 임성수(고려대학교) 2. 조선후기 拯劣米의 부과와 징수제도의 변화 발표: 문광균(충남대학교) 3. 대동법 시행 이후 중간비용의 처리양상과 科外別役의 문제 발표: 최주희(한국학중앙연구원) 4. 조선후기 糧餉廳의 둔전수취구조의 변화와 雜費 운영 발표: 박범(건양대학교) 5. 조선후기 환곡 이자의 수취와 추가징수의 문제 발표: 문용식(전주대학교) ..

史/조선 2015.08.17

17~18세기 僧軍役 운영방식의 변화와 義僧防番錢制의 시행 (조선시대사학회 발표문)

17~18세기 僧軍役 운영방식의 변화와義僧防番錢制의 시행 박세연 (고려대 박사과정) 머리말1. 17세기 전반 국가의 승군 활용2. 17세기 후반 義僧役의 시행과 승려 조발 방식의 변화3. 17세기 말~18세기 地方 僧軍의 증가와 義僧防番錢制의 시행결론 머리말 조선은 성리학의 이념으로 건국되였다. 일찍이 성리학자들에 의해 허무적멸의 도로 지목된 불교는 조선전기 사위전·사사노비 屬公을 통해 위축되었다. 또한 출가한 승려는 職役을 지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는 國初부터 백성이 승려가 되는 것을 통제하려 하였다. 『經國大典』에서 度牒을 발급할 때 丁錢을 징수하거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 도첩을 3개월 이상 받지 못할 경우 환속시켜 본래 직역으로 돌려보내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1)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가는 승려를 일..

史/조선 2015.05.27

경세유표의 중앙관제 구상안(표)

*경세유표의 중앙관제 구상안의정부삼정승·삼찬성이조호조예조屬衙門비고屬衙門비고屬衙門비고승정원原 독립아문한성부原 독립아문태상시本 봉상시종친부原 독립아문육부原屬 한성부통례원의빈부原 독립아문육학原屬 예조전유사本 사직서사실상 승격돈녕부原 독립아문전자서신설전묘사本 종묘서사실상 승격사옹원전생서原屬 예조수릉사本 각릉신설사도시原屬 호조사축서原屬 예조제례감신설내자시原屬 호조평시서사간원原 독립아문내섬시原屬 호조사록창本 광흥창홍문관규장각·예문관 합설사선감本 사재감原屬 호조사회창本 군자감시강원의영고原屬 호조사향창승격本 용산 별영양향청 합설태사원本 춘추관사실상 승격능인서本 빙고原屬 예조직공사本 선혜청原 독립아문교서감종부시상평사本 상평청原屬 선혜청국자감本 성균관관상감原屬 예조평부사本 균역청原屬 선혜청장악원내의원原屬 예조판적사原 호조..

史/조선 2015.03.08

전근대 친족 집단의 경제적 부조

전근대 친족 집단의 경제적 부조- 조선의 族契와 스페인의 마요라즈고(Mayorazgo) 비교를 중심으로 - 한국사학과 조선후기사전공박사2 박세연 머리말1. 조선 족계의 성격2. 카르티야 마요르고(Mayorgo)의 성격3. 족계와 마요르고의 공통점과 차이점맺음말 머리말 어느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한 개인에게 가장 기본적이고 또 밀접하게 기댈 수 있는 집단은 혈연을 공유하는 친족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사회에 있어서는 그 중요도가 다소 떨어지지만 전근대 사회에서 개인이 가장 믿을 수 있었던 집단은 역시 자신과 혈연을 공유하며 또 비슷한 시간적 공간적 환경에서 살았던 친족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친족집단이 중요한 이유는 감정적 유대감이나 서로에 대한 의지의 측면도 있을 테지만, 경제적 이유 또한 크다고 ..

史/조선 2015.01.20

반계 유형원과 다산 정약용의 토지제도개혁론

磻溪 柳馨遠과 茶山 丁若鏞의 토지제도개혁론 조선후기 박사2박세연 머리말 1. 반계 유형원의 公田制 1) 토지 사유의 폐지 2) 結負法의 폐기와 頃畝法의 사용 3) 職役에 따른 토지 분급과 兵農一致 4) 1/10 稅制의 실현 2. 다산 정약용의 井田制 1) 閭田制 2) 이상적 정전제 구상 3) 公田 설치와 1/9세제 시행 방안 3. 유형원과 정약용의 공통점과 차이점 1) 공통점 ⅰ. 토지 사유에 대한 부정적 태도 ⅱ. 세제의 개혁 ⅲ. 병농일치 2) 차이점 ⅰ. 不農者에 대한 토지 분급 ⅱ. 지주-전호제에 대한 태도 ⅲ. 상공인에 대한 태도 맺음말 머리말 반계 유형원과 다산 정약용은 17세기 이후 조선에서 이어진 경세론을 집대성했다고 평가받는 대표적인 '실학자'이다. 유형원은 비록 남인이었지만 그가 저술한..

史/조선 2014.10.24

궁방의 역할과 종류

궁방(宮房)이란 궁과 방을 함께 이르는 말입니다. 궁(宮)이 방(房)보다 격이 높지만, 하는 역할은 비슷합니다. 예컨대 왕이나 대비·중궁·세자·세자빈을 위한 것 혹은 왕의 생모에 해당하는 후궁의 것은 대부분 궁(宮)이라고 합니다. 명례궁·선희궁·저경궁·육상궁 등등이 그 예입니다. 반면 일반적인 후궁이나 대군·왕자군·공주·옹주·군주·대원군·부원군 등을 위한 것은 방(房)이라고 합니다. 양녕대군방·덕흥대원군방·온빈방·화평옹주방 등등이 그 예가 됩니다. 궁방은 모두 왕실에 필요한 물건을 공급하는 왕실재정의 역할과 왕실각족들에 대한 제사를 담당하였습니다. 조선후기 왕실재정의 중심이자 숱한 문제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 바로 궁방입니다.궁방은 대략 16세기 말에 생긴 것으로 추정됩니다. 궁방이라는 단어 자체는 ..

史/조선 2014.08.29

내수사의 역할과 조직

내수사는 이조의 속아문으로 수장이 정5품에 불과한 정5품 아문이지만 전체 왕실재정을 관리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본래 고려는 국가재정과 왕실재정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고 왕실재정은 사장고(私藏庫)에서 관리했습니다. 국가의 공적 시스템이 완전히 미칠 수 없는 곳이었죠. 왕실 사장고는 다른 권문세족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농장을 경영했고, 국가재정의 수입을 저해하기도 하였습니다. 때문에 조선은 건국하면서 바로 이 사장고를 혁파해버립니다. 재정의 완전한 공공화를 선언한 것이죠. 이는 유교의 이념상 국가의 재화 중 왕의 것 아닌 것이었기 때문에 굳이 독자적인 기구를 만들 필요가 없다는 명목상의 이유가 있으나, 사실은 왕실재정의 지나친 확대를 막고 이를 국가통치 시스템 안에 끌어들임으로써 일종의 견제..

史/조선 2014.08.22

왜 조선시대 왕실재정인가?

2004년 교수신문은 11명의 학자가 참가한, 근대적 역사학이 한국에 도입된 이래 가장 치열했던 지상(紙上) 논쟁으로 뜨거웠습니다. 논쟁의 주된 대상이 된 인물은 바로 고종. 서울대의 이태진 교수가 고종을 긍적적으로 재평가해야 한다는 『고종시대의 재조명』이라는 책을 출판했고, 그에 대하여 이른바 뉴라이트라고 불리는 낙성대 경제연구소의 주축 중 한명인 전남대 경제학과의 김재호 교수가 교수신문에 반박하는 서평을 게재하면서 논쟁은 시작되었습니다. (*첨언하자면 저는 낙성대 경제연구소가 이른바 뉴라이트라고 불리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입니다. 이들이 신고전학파 경제학(주류 경제학)의 시장주의에 매우 충실한 경제사학자들이며 전통적인 한국의 보수주의적 경제정책인 ‘큰 국가론’를 비판하고 ‘작은 정부론’을 주장한다는 면..

史/조선 2014.08.21

AKSE 발표문 초고. 또 하나의 작은 정부, 18세기 왕실재정기구 내수사의 구조와 운영

유럽한국학협회 지원 발표문 초록 또 하나의 작은 정부, 18세기 왕실재정기구 내수사의 구조와 운영 내수사(內需司)는 국왕과 국왕의 혈연들을 위한 특별한 재정운영기구였다. 조선은 고려를 극복하며 건국하였다. 그 과정에서 이전까지 공적 재정운영에 포함되지 않았던 왕실재정기구를 유교적 관료조직에 포함시키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렇게 하여 탄생한 재정운영기구가 바로 내수사였다. 조선은 왕과 그 가족의 재산 운영을 관료조직에 공개함으로써 재정운영에서의 투명성과 공공성을 확보하려고 하였다.내수사는 각각의 독립된 4개의 기구, 즉 ‘戶房’·‘禮房’·‘刑房’·‘工房’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구성은 정부의 6개의 공식 조직, 즉 ‘六曹’에서 인사와 군사를 담당하는 2개 조직을 제외한 것으로, 마치 작은 정부와 같이 각각..

史/조선 2014.08.03

각궁가 각아문 절수지 혁파에 관한 비변사의 계

비변사등록 숙종 34년 12월 30일 아뢰기를"여러 궁가(宮家)와 각 아문(衙門)에서 절수(折受)한 곳으로 백성의 폐해가 되고 있는 곳을 여러 도(道)로 하여금 계문(啓聞)하게 하여 혁파하는 일로 이미 전교가 있었으므로 각도의 장계가 도착되기를 기다려 묘당의 여러 신하들과 이제야 비로소 검토 확정하였습니다. 무진년 (숙종 14년 (1688)) 이후에 절수한 곳은 모조리 혁파한 뒤에 호조에서 돈을 주어 전답(田畓)을 사게 하고 이 뒤로는 영원히 절수하지 않기로 을해년 (숙종 21년 (1695)) 에 탑전에서 결정한 바 있었으나 지금 각 도의 장계와 어사(御史)의 서계(書啓)를 보니 무진년 이후에 새로 절수한 곳이 숱하게 많았는데 이는 여러 궁가의 도장(導掌)의 무리가 탑전에서 결정한 본의를 알지 못하고 잘..

史/조선 2014.07.30

을해정식자료 3

숙종실록 21년 8월 3일 임진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유상운(柳尙運)이 이 해가 흉년듦을 가지고 청하기를,“경술년(현종 11) 의 전례에 의거하여 어공(御供)의 물건 및 종묘(宗廟)의 천신(薦新)에 쓰는 소목(燒木)과 각사(各司)의 공물의 값을 감하고, 경아문(京衙門) 및 외방(外方)의 각 영문(營門)의 저축(儲蓄)한 은(銀)·포(布)·미곡(米穀)의 수(數)를 실지대로 상문(上聞)케 하여 이를 취하여 씀에 대비(對備)하며, 경외(京外)의 영선(營繕) 및 무릇 백성을 소요(騷擾)케 하는 일은 일체 정지하소서. 문수 산성(文殊山城)의 창고(倉庫)의 역사(役事)와 낙선군(樂善君) 이축(李潚)의 묘소에 돌을 끄는 역사 및 경외의 추노(推奴) ·징채(..

史/조선 2014.07.30

을해정식자료 2

숙종실록 21년 7월 28일 무자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세화(李世華)가 상소하여 연사(年事)가 크게 흉년든 상황을 진달하여 말하기를,“원컨대, 성상(聖上)께서는 부지런하시고 주심하사 자주 신료(臣僚)를 접하시어 그 듣고 본 것을 하순(下詢)하시고, 전주(田疇)의 경색(景色)과 여항(閭巷)의 질고(疾苦)를 모두 마음속에 간직하여 부화(浮華)를 물리치고 절약(節約)에 힘쓰시며, 무릇 민생(民生)을 증구(拯救)하고 국맥(國脈)을 부지(扶持)하는 도리를 다하지 않음이 없이 해야 합니다. 또 궁가(宮家)의 절수(折受)가 오늘날의 막대한 폐단이 되는데, 전번에 대신이 탑전(榻前)에 진달하여서, 허다한 처리하기 어려운 일들이 이미 한결같이 타당(妥當)한 방법으로 돌아갔으니, 신은 그윽이 기쁘고 다행스럽게 여깁니다...

史/조선 2014.07.30

을해정식자료 1

비변사등록 숙종 21년 7월 24일 또 아뢰기를"신양(申懹)이 강원감사로 있을 때에 궁가(宮家)의 절수(折受)에 대하여 사계(査啓)하였으나 그때에는 제도의 순무사로 하여금 이 폐단을 상세히 살피고 오라고 하였기 때문에 순무사의 복명을 기다려서 회계하려고 하였는데 연이어 일이 있어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제도의 감사와 순무사의 장계를 보니 난처한 사단이 많았습니다. 경상감사의 장계에는 백성들이 비록 문권(文券)이 있다고 말하나 믿을 수 없으니 차라리 절수의 연한을 정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시행하지 못할 바가 있으니 연한이 차기 전에는 아무리 분명히 주인이 있는 땅이라 하더라도 내줄 수 없고 연한이 지난 뒤에는 의당 절수할 땅이라 하더라도 그대로 둘 수 없으니 이는 공사간에..

史/조선 2014.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