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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醉不歸 - 허수경

不醉不歸 허수경 어느 해 봄그늘 술자리였던가 그때 햇살이 쏟아졌던가 와르르 무너지며 햇살 아래 헝클어져 있었던가 아닌가 다만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은 없다 마음들끼리 서로 마주 보았던가 아니었는가 팔 없이 안을 수 있는 것이 있어 너를 안았던가 너는 경계 없는 봄그늘이었는가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몽생취사하길 바랐으나 가는 것이 문제였던가, 그래서 갔던 길마저 헝클어뜨리며 왔는가 마음아 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더는 취하지 않아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만 없다 [출처] 허수경 - 不醉不歸|작성자 봄

文/詩 2014.06.01

너무 많이 사랑해 버린 아픔 - 김동규

너무 많이 사랑해 버린 아픔 김동규 딱, 고만큼만 사랑하려 했었다때로는 잊고 살고 그러다 또 생각나고만나서 차 마시고, 이따금 같이 걷고,그리울 때도 있지만 참을 수 있을 만큼고만큼만 사랑하려 생각했었다 더 주지도 말고 더 받지도 말고더 주면 돌려받고 더 받으면 반납하고마음 안에 그어 놓은 눈금 바로 아래 만큼만나는 너를 채워두리 마음먹었다 우연히 주고 받은 우리들의 생각들이어쩌면 그리도 똑같을 수 있느냐고,약속한 듯 마주보며 행복하게 웃을 만큼고만큼만 너를 사랑하려 했었다 너의 안부 며칠째 듣지 못 해도펄펄 끓는 열병으로 앓아눕지 않을 만큼고만큼만 나는 너를 사랑하려 했었다딱, 고만큼만딱, 고만큼만[출처] 김동규 - 너무 많이 사랑해 버린 아픔|작성자 봄

文/詩 2014.06.01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 정희성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정희성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네그대와 함께 한 빛났던 순간지금은 어디에 머물렀을가?어느 덧 혼자 있을 준비를 하는시간은 저만치 우두커니 서 있네그대와 함께 한 빛났던 순간가슴에 아련히 되살아나는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나부끼네

文/詩 2013.11.27

목숨 - 조정권

목숨 조정권 마음의 어디를 동여맨 채 살아가는 이를사랑한 것이 무섭다고 너는 말했다두 팔을 아래로 내린 채 눈을 감고오늘 죽은 이는 내일 더 죽어 있고모레엔 더욱 죽어 있을 거라고 너는 말했다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 틈에서 마음껏사랑하며 살아가는 일이 세상 여자면 누구나 바라는 아주 평범한 일아무것도 원하지는 않으나 다만보호받으며 살아가는그런 눈부신 일이 차례가 올 리 없다고 너는 말했다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오늘 오늘 오늘의 연속이제까지 이렇게 어렵게 살아왔는데 앞으로도이렇게 어렵게 살아가야 된다면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길이 쉬운 거라고 너는 말했다버림받고 병들고 잊혀지는 일이 무섭다고 너는 말했다잊혀져가는 것이라고 했다꽃과 나무와 길들로부터세상 모든 이들로부터 잊혀져 가는 것이라고 너는 말했다잊혀진 일은 ..

文/詩 2013.11.27

스팀목련 - 강연호

스팀목련 강연호 내가 다니던 대학의 문과대 건물 옆엔스팀목련이 한 그루 있다 해서진달래 개나리보다 한참은 먼저 핀다 해서해마다 봐야지 봐야지겨울난방 스팀에 쐬여 봄날인 듯 피어나는정말 제철 모르고 어리둥절 피러아는철부지 목련을 꼭 봐야지벼르고 벼르다 졸업을 하고벼르고 벼르다 후딱 심년도 넘어버린나는 늘 봄날을 놓치고엎치락뒤치락 추위와 겯고트는때 아닌 스팀목련도 놓치고내가 대학 다니던 청춘도 놓치고내가 대학 다니던 청춘도 놓치고채 피지도 못하고 시들어버린나는 늘 나도 놓치고

文/詩 2013.11.27

햇볕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 - 이문재

햇볕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 이문재 햇볕에 드러나면 짜안해지는 것들이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에 햇살이 닿으면 왠지 슬퍼진다 실내에 있어야 할 것들이 나와서 그렇다 트럭 실려 가는 이삿짐을 보면 그 가족사가 다 보여 민망하다 그 이삿짐에 경대라고 실려 있고, 거기에 맑은 하늘이라도 비칠라치면 세상이 죄다 언짢아 보인다 다 상스러워 보인다 20대 초반 어느 해 2월의 일기를 햇빛 속에서 읽어보라 나는 누구에게 속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진다 나는 평생을 2월 아니면 11월에만 살았던 것 같아지는 것이다

文/詩 2013.11.27

너는 아프냐, 나는 무섭다 - 임영준

너는 아프냐, 나는 무섭다 임영준 너는 삶이 아파서 어찌 했더냐 세상이 아프고 힘겨울 때 무엇이었더냐 반응이 없는 하늘을 향해 대갈하고 눈 부른뜬 채 새벽을 맞이했더냐. 어둠속에서 모반에 떨다가 재만 남았더냐 하고 싶다 라는 말 대신에 피끓는 시 한편 남겨놓았더냐.시인으로서 카랑카랑하게 제대로 된 화두 하나 던져 놓았더냐 풀리지 않는 매듭을 보면 너는 어떠냐, 나는 무섭다 행동하지 않고 입만 나불거리는 너와 내가 늘 무섭다

文/詩 2013.11.27

내 인생의 中世 - 기형도

내 인생의 中世 기형도 이제는 그대가 모르는 이야기를 하지요 너무 오래되어 어슴프레한 이야기 미류나무 숲을 통과하면 새벽은 맑은 연못에 몇 방울 푸른 잉크를 떨어뜨리고 들판에는 언제나 나를 기다리던 나그네가 있었지요 생각이 많은 별들만 남아 있는 공중으로 올라가고 나무들은 얼마나 믿음직스럽던지 내 느린 걸음 때문에 몇번이나 앞서가다 되돌아 오던 착한 개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는 나그네의 깊은 눈동자를 바라보았지요

文/詩 2013.11.27

꽃 - 백무산

꽃 백 무 산 내 손길이 닿기 전에 꽃대가 흔들리고 잎을 피운다그것이 원통하다 내 입김도 없이 사방으로 이슬을 부르고향기를 피워 내는구나그것이 분하다 아무래도 억울한 것은네 남은 꽃송이 다 피워 내도록들려줄 노래 하나 내게 없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내 가슴을 치는 것은너와 나란히 꽃을 피우는 것은 고사하고내 손길마다 네가 시든다는 것이다 나는 위험한 물건이다돌이나 치워주고햇살이나 틔워 주마사랑하는 이여

文/詩 2013.11.27

그대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 이정하

그대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이정하 그대 굳이 아는 척 하지 않아도 좋다 찬 비에 젖어도 새 잎은 돋고 구름에 가려도 별은 뜨나니 그대 굳이 손 내밀지 않아도 좋다 말 한 번 건네지도 못하면서 마른 낙엽처럼 잘도 타오른 나는 혼자 뜨겁게 사랑하다 나 스스로 사랑이 되면 그 뿐 그대 굳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文/詩 2013.10.10

나무가 흔들리는 것은 - 이재무

나무가 흔들리는 것은 이재무 나무가 이파리 파랗게 뒤집는 것은 몸속 굽이치는 푸른 울음 때문이다 나무가 가지 흔드는 것은 몸속 일렁이는 푸른 불길 때문이다 평생을 붙박이로 서서 사는 나무라 해서 왜 감정이 없겠는가 이별과 만남, 꿈과 절망이 없겠는가 일구월심 잎과 꽃 피우고 열매 맺는 틈틈이 그늘 짜는 나무 수천수만 리 밖 세상 향한 간절함이 불러온 비와 바람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저렇듯 자지러지게 이파리 뒤집고 가지 흔들어댄다 고목의 몸속에 생긴 구멍은 그러므로 나무의 그리움이 만든 것이다

文/詩 2013.10.06

서울로 가는 전봉준 - 안도현

서울로 가는 전봉준 안도현 눈 내리는 만경들 건너 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 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 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 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 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 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 주지 못하였네 못다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나라 풀뿌..

文/詩 2013.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