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산문 5

짧은 여행의 기록 中 - 기형도

무등(無等)은 날이 흐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가까운 검은 산들을 거느리고 회색의 구름 숲 속에 무등은 있었다. 나는 지금 충장로와 중앙로를 가로지르는 금남로 3가와 4가 사이 '충금' 다방 2층에 앉아있다. 광주고속터미널은 내가 본 그 어느 대도시 터미널보다 초라하고 궁핍했으며 무더웠고 지친 모습이었다. 땀이 폭포처럼 옷 사이로 흘러내렸다. 지금은 저녁 6시. 광주에 도착한 지 2시간이 흘렀다. 터미널에서 부산이나 해남 혹은 이리 방면의 차표를 끊으려 예매처를 기웃거렸으나 너무 혼잡하고 더러워서 터미널을 버리고 길을 건너 신문들을 한 뭉치 샀다. 내가 써두고 온 기사가 나와 있었다. 갑자기 욕지기가 치밀었다. 수퍼마켓에 들어가 필름 한 통을 샀다. 어디로 갈 것인가. 보도 블록 위에 주저앉았다. 황지우..

文/산문 2013.05.05

레베카 솔니트,「희망을 점령하는 것에 대한 편지」중에서

나는 당신에게 이 놀라운 1년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절망의 힘에 대해, 희망의 크기에 대해, 그리고 시민사회의 연대에 대해. 당신의 삶은 짧았지만 죽음의 의미는 거대했고 '아랍의 봄'을 통해 많은 독재자들이 몰락하게 하는 촉매가 되었다는 사실을 당신이 알았으면 합니다. (……) 힘없고 희망 없는 현실에 절망하며 몸에 불을 붙인 당신이지만, 하나의 작은 희망을 놓고 떠났습니다. 넉넉한 수입을 올리거나 경찰에게 공정한 대우를 받을 힘은 없었지만 당신은 저항할 힘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희망은 많은 이들의 꿈이었으며 99%의 꿈이었기 때문에 힘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튀니지인들이 들고 일어나 정권을 전복시켰고 이집트, 바레인, 시리아, 예멘, 리비아로 불이 옮겨 붙었습니다. 튀니지의 벤 ..

文/산문 2012.12.16

김규항의 문장론

나의 문장론 이따금 “문장론이 뭐냐”는 식의 질문을 받는다. 그런데 나는 글을 쓰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내가 글 쓰는 사람이라는 현실에 익숙하지(하고 싶지) 않아서 늘 대답을 흐리곤 한다. 사실 나는 어떤 문장론을 갖고 글을 쓰진 않는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즉 내가 단어와 단어를 꿰고 이어 붙여 사람들에게 보이는 이유는 단지 세상에 대한 생각을 나누기 위해서다. 나는 글의 소재를 얻기 위해 세상을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세상을 들여다보기 위해 글을 쓴다. 어쨌거나, 문장론이 있든 없든, 내가 초고를 써놓고 퇴고를 거듭하는 걸 보면 나에게도 문장에 대한 어떤 태도는 있는 것 같다. 아마도 그건 두 가지일 것이다. 간결함과 리듬. 내가 쓰는 글의 8.5할쯤에 해당하는, 공을 들여 쓰는 글은 초고를 쓰면 ..

文/산문 2012.12.02

대중적 글쓰기에 대하여

" ... 물론 내가 쓰는 책은 연구서가 아니라 대중서다. 학술 이론을 생산하는 게 아니라 이미 생산된 이론을 쉽게 가공해 많은 독자들에게 확산시키는 게 목적이다. 사실 이런 글쓰기는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의 두 가지 방향에서 이뤄질 수 있다. 첫째는 전문 학자의 몫이다. 학자와 대중서라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 듯 싶지만 그렇게 여겨지는 건 우리 사회에 팽배한 학문적 엄숙주의의 탓이다. 스티븐 호킹 같은 위대한 물리학자가 라는 현재 물리학의 '대중서'를 쓰고 움베르토 에코 같은 세계적인 기호학자가 같은 '소설'을 쓴 의도를 생각하면 왜 학자들이 이 분야에 참여해야 하는 지 알기 쉽다. 둘째는 지식 보급자의 몫이다. 지식 보급자는 학자만큼 해당 주제에 해박하지 못하지만 학자보다 폭넓은 시각에서 크로스 오버가..

文/산문 2012.07.25

보임소경서(報任小卿書)

소경족하(少卿足下) 지난번에 보내주신 편지에서 저에게 사람들과의 관계를 원만히 하고 인재를 천거하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하시는 뜻이 너무도 간절하였습니다. 아마도 제가 당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속된 사람들의 말에 따른다고 생각하시고 책망하시는 듯합니다만 저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비록 보잘것없는 존재이기는 하나 군자들의 가르침만은 거듭 귀에 담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저 자신은 비천한 처지에 빠진 불구자입니다. 행동을 하기만 하면 남의 비난을 받으며, 더 나아지고자 하나 도리어 더 나빠질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홀로 우울하고 절망하여 함께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습니다. 속담에 말하길 '누구를 위해 하는가, 누구더러 들으라고 하는가‘ 했습니다. 종자기(種子期)가 죽고 난 후 백아(伯牙)는..

文/산문 2010.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