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논문 24

최성환, 2009, 正祖代 蕩平政局의 君臣義理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

영조대 후반 大義理의 확정과 이를 자임한 세손의 등극최성환, 2009, 「Ⅱ. 영조대 후반 辛壬·壬午義理 확정과 정국동향」, 『正祖代 蕩平政局의 君臣義理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박세연 들어가며 숙종 후반에서 정조에 이르는 기간은 國是로써 각종 의리가 중심이 되어 정치명분으로 떠오른 시기였다. 특히 이 시기 정치의리는 단순한 당파의 정치 명분이 아니라 국왕의 계승을 둘러싼 의리로 충역시비가 갈리는 매우 민감한 정치 명분이었다. 때문에 기존 18세기 정치사 연구는 주로 정국의 동향이나 국왕과 각 당의 대립과 조제보합 등을 중심으로 놓고 연구해왔다. 특히 기존 붕당정치론에서는 당파 간 공존이 무너지는 붕당정치기의 와해, 몰락기로 숙종대 이후의 정치사를 규정하였고, 탕평정치는 강력한 국왕권을 중심으로 ..

書/논문 2019.06.11

英祖가 주도한 少論蕩平에서 老論蕩平으로의 재정립

英祖가 주도한 少論蕩平에서 老論蕩平으로의 재정립정만조, 1986, 「영조대 중반의 정국과 탕평책의 재정립」, 『역사학보』111 박세연 1. 들어가며 숙종의 환국기를 거치며 붕당 간의 대립은 격화되었고 그 중에서도 경종과 영조의 왕위계승을 둘러싼 소위 신임의리는 국왕이 역옥에 관계되는 초유의 사건으로 영조의 즉위 이후에도 戊申亂 등의 일대 사건을 겪어야 했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대립을 조정하면서도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여 신임의리를 확정하여야 했다. 그리하여 기유처분, 경신처분, 신유대훈이라는 國是가 내용을 달리하며 발표되었고 그 과정에서 국왕과 신료들의 미묘한 절충과 정국을 악화시키지 않기 위한 탕평책이 추진되고 있었다. 이 글은 이러한 정치의리의 조정과 변화에 대해서 국왕과 각 붕당 및 탕평파의 입..

書/논문 2019.06.11

영조대 집권세력(탕평파) 정치운영론의 기초와 국가·국왕 중심의 권력구조 재편

영조대 집권세력(탕평파) 정치운영론의 기초와 국가·국왕 중심의 권력구조 재편 이근호, 2016, 「탕평파의 정치운영 및 권력구조개편론」, 『조선후기 탕평파와 국정운영』, 민속원 박세연 1. 들어가며 이 글은 영조대 집권세력이었던 탕평파의 정치운영론이 어디에 기초하고 있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정국운영과 제도개혁에서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고찰하고 있다. 이근호는 탕평론의 기원을 『서경』의 홍범구주와 이이의 조제론, 박세채의 황극탕평론에서 찾으면서 탕평론의 실체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영조대 집권세력이자 정치주도세력인 탕평파의 정치이념과 현실대책이 사림정치기의 그것과는 다르며 이러한 성격을 규명해 탕평정치의 성격을 분명히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렇게 영조대 탕평파의 연구 대상을 정치운영과 권력구조개..

書/논문 2019.04.09

정치운영론을 넘어선 개혁이념으로서의 蕩平論

정치운영론을 넘어선 개혁이념으로서의 蕩平論김성윤, 1997, 「제1장 1절 蕩平의 개념과 蕩平論의 대두」 「3절 蕩平論의 추이」, 『朝鮮後期 蕩平政治 硏究』, 지식산업사 박세연 1. 들어가며 대부분의 탕평 연구는 국왕과 붕당들의 정치세력을 중심으로 한 調劑保合의 정치운영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김성윤은 이러한 기존의 연구를 인정하는 가운데 탕평정치의 이념, 정책적 지향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아 18세기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정치사가 연계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탕평은 변화하는 국가사회의 질서를 새롭게 정립하고자 한 개혁적 정치이념이고, 정치적 조제보합론은 그 실현방법 중 하나임을 역설하였다. 즉 탕평의 개념은 단순한 정치운영론이 아니라 하나의 개혁이념으로 설정하고 탕평을 주도했던 인물..

書/논문 2019.03.25

黨爭에서 朋黨으로 패러다임의 전환

黨爭에서 朋黨으로 패러다임의 전환 石井壽夫, 홍순민 譯, 1985, 「후기 이조당쟁사에 관한 일고찰」, 『조선시대 당쟁의 재조명』, 범조사이태진, 1985, 「조선시대 정치적 갈등과 그 해결」, 『조선시대 당쟁의 재조명』, 범조사 박세연 정치사는 정치권력의 형성·유지·대체·소멸의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며 그에 따라 정치제도와 정치세력, 정치운영의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조선시대 정치사는 주로 정치세력과 그 세력의 정치운영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1) 조선의 정치사에서는 15세기를 제외하면 士林이라고 불리는 세력이 주인공을 차지하고 있다. 16세기 사화의 과정을 거쳐 17세기 정치의 중심을 차지한 사림은 다시 갈라져 붕당으로 대립하며 조선의 정치를 이끌어갔다. 이들 정치세력과 이들의 정치운영에 ..

書/논문 2019.03.21

정병욱, 2009, 「자소작농 김영배, ‘미친생각’이 뱃속에서 나온다」, 『역사비평』87

정병욱, 2009, 「자소작농 김영배, ‘미친생각’이 뱃속에서 나온다」, 『역사비평』87 조석후기 박사2박세연 식민지배 하에서 민중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생활했을까? 단순하게 생각하면 식민 지배의 억압에 신음하는 민중과 일제에 영합하는 일부 친일파라는 간단한 공식을 만들 수 있겠지만 과연 그렇게 사람들이 단순할까? 친일 논쟁에서 독립운동을 한 몇몇을 빼고는 국민 천체가 친일파였다는 식의 논리는 제국주의 부역 혐의를 물타기 하려는데 지나지 않지만, 실제 생활인이었던 민중 다수에게 엄격한 항일·민족자주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 또한 옳지 않다. 중요한 것은 식민지 정권이 조선의 민중들을 통제·관리하는 방식으로 어떤 것을 선택하였으며 또 그것이 실제로 민중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이다. 또한 그 통지의 영역 아래..

書/논문 2014.11.04

영조대 초반의 정국과 탕평책의 추이 (정만조,『진단학보』56, 1983) 토론문

영조대 초반의 정국과 탕평책의 추이 (정만조,『진단학보』56, 1983)토론문 정만조의 본고는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붕당정치의 원리가 차츰 붕괴되고 19세기 세도정치로 향하는 가운데 18세기 탕평책의 시작인 영조대의 정치사를 밝힘으로써 탕평정치의 실제를 분석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가장 큰 의문은 준론과 완론이라는, 기존의 붕당질서를 벗어난 세력이 어떻게 형성될 수 있었는가 이다. 특히 완론은 의리보다는 정국의 안정을 위한 조제보합에 치중하고 완론의 일부 인사는 공론이나 공의 자체에 비판적인 의견을 가지기도 하는데, 이러한 현상은 어떠한 원인에 기반하고 있는지 본고는 잘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당색에 우선하는 준론과 완론의 형성은 왕에게 부합하여 권력을 얻으려는 자와 그에 반..

書/논문 2012.12.30

대한제국기 한성의 도시건축

대한제국기 한성의 도시건축 흔히 건축은 시대를 담는 그릇이라고 표현된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건축은 그 양식(樣式)과 기능을 변화시키며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는 시대의 변화를 건축에서 읽을 수 있다. 또한 건축물 각각의 형태를 넘어, 건축물을 배치하는 도시 구조는 근대 이후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 되는 도시에 반영된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시대를 읽을 수 있는 하나의 사료(史料)로써의 의미를 지닌다. 때문에 중세와 근대의 이행기라고 할 수 있는 대한제국시기, 대한제국의 (모든 면에서의) 중심지인 한성의 건축과 도시구조를 읽는 것은 동시에 대한제국의 근대화 노력의 한 단면을 읽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봉희 선생의 「근대도면자료와 대한제국기 한성부 도시, 건축의 변화」는 규장각에 소장된 통감..

書/논문 2012.12.30

대원군 집정의 성격과 권력구조의 변화 (연갑수,『한국사론』27, 1992)

대원군 집정의 성격과 권력구조의 변화 (연갑수,『한국사론』27, 1992)토론문 연갑수의 본고는 대원군 집정의 성격과 대원군의 권력 장악 과정을 실증하고 있는 논문이다. 본고에 따르면 대원군 정권은 김병국 등을 중심으로 한 유력가문세력들과 공존하면서 권력을 재분배하는 성격을 띠었다. 이는 세도정치 기간을 통해 그러나 차츰 대원군이 정권 장악하려고 시도하면서 비변사를 의정부로 바꿔가며 삼군부 설치를 중심으로 무반들을 포섭하였고, 재정권을 장악하였고 결국 고종 9년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권력을 장악하였으나, 유력가문세력들의 반발로 인하여 고종 11년 국왕의 친정 선언을 계기로 권력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연갑수의 논리를 그대로 따르면, 대원군 집정기는 여전히 세도정치의 그늘이 드리워진 시기였다. 대원군의 집권 ..

書/논문 2012.12.30

박시형,「이조전세제도의 성립과정」,『진단학보』, 1941.

박시형,「이조전세제도의 성립과정」,『진단학보』, 1941. 1. 공법이전의 수세법조선초 田租에 관한 법제는 공양왕 3년에 결정된 과전법 중의 모든 공사전조는 水田 매 1결 마다 조미 30두, 旱田 매 1결 마다 잡곡 30두로 한다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이 때 능침, 창고, 궁사, 공해, 공신전 외의 모든 유전자는 모두 稅를 수전은 1결에 백미 2두, 한전은 1결에 황두 2두를 낸다라는 조항이 있는다. 조와 세는 어떻게 다른가 하면 조는 일반전에 대한 본래의 공과고, 세는 특정한 사인에게 수조권 또는 경작권을 준 전에 대하여 국가가 전연 이를 방임하지 않고 걷어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곧 구별 없이 쓰여서 경국대전에는 租를 사용하지 않았다. (1)양전법먼저 결로 따지는 양전법을 살펴보자. 고려는 땅을..

書/논문 2012.12.26

채웅석, <고려전기 사회구조와 본관제>

1. 들어가며 채웅석의 를 중심으로 나말여초 지역사회의 변동과 이를 바탕으로 탄생한 국가의 지방통치정책인 본관(本貫)제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고려전기 국가가 지방을 어떻게 장악해갔는지를 추론하고 있다. 채웅석은 타 시대와 비교되는 고려시대의 가장 큰 특징인 지방제도, 특히 지역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던 호족(豪族)-호부층(豪富層)의 근원과 통일 이후 고려 중앙정부의 이들에 대한 대응과 지방통치전략을 사회사적 연구 방법에서 접근함으로써,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정치사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지역 공동체 내부의 변화 모습도 추론해 볼 수 있다. 2. 지역 자위공동체의 성립 후기 통일신라 사회는 더이상 이전에 간직하고 있었던 지역 공동체를 유지할 수 없었다. 지역공동체는 이전에는 농업 생산에 있어서 공동경작을 근..

書/논문 2012.12.21

이병도, <퇴계·율곡과 동시대의 성리학>, <<한국유학사>> 제11장

한국유학사 제11장 퇴계·율곡과 동시대의 성리학 석사4 박세연 명종, 선조 시대에는 많은 학자들이 이기와 심성의 학문을 발달시켜 유학의 전성기를 열었다. 그 중에서도 으뜸은 李滉과 李珥였다. 이황(1501~1570)은 경상도 예안 출신으로 29세인 중종 24년(1529년) 문과 급제 이후 여러 직을 거쳤으나 전원을 동경하고 학문에 충실하기 위해 진퇴를 거듭하였다. 만년에 도산에 서당을 세우고 공부하니 여러 학인들이 모여들었는데 이이 역시 23세에 퇴계에게 도를 물은 바 있다. 이황의 근본사상은 程朱를 철저히 따르는 것이었는데, 특히 이기이원론은 주희의 해석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주희는 이기 양자의 불잡성과 불리성을 동시에 말했으나 이기를 二物로 보았다. 이황은 형이상적인 理와 형이하적인 氣가 하나일 수..

書/논문 2012.12.21

김용흠, 19세기 전반 세도정치의 형성과 정치운영

19세기 전반 세도정치의 형성과 정치운영 (김용흠,『한국사연구』132, 19) 토론문 김용흠의 본고는 19세기 세도정치의 원류를 찾고, 그로부터 세도정치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밝혀내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사회경제적 변동으로 성장한 신분, 혹은 도태된 신분들의 불만이 나타나는 가운데, 변통론과 의리론을 중심으로 한 세력들이 대립하였고, 변통론에 영향을 받은 왕은 국왕 중심의 탕평정치를 시도하였으나 궁극적으로 주자학적 의리론을 부정하지 않아서 정조 사후 대반격으로 실학파를 비롯한 개혁파들이 제거당함으로써 결국 탕평정치의 부정적 유산이 세도정치로 이어졌다고 보고 있다. 논문의 대략을 그림으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변통론·탕평론의 계보 (진보)조광조 - 이이 - 이귀·최명길 - 박세당..

書/논문 2012.12.16

권오영, 19세기 초 안동유림의 유회와 활동

19세기 초 안동유림의 유회와 활동 1. 머리말19세기 초 세도정치기 소수 특정 가문을 제외한 유림들은 재야 세력으로 남게 되면서 중앙 정치세력으로 참여하지 못하였다. 그러다 보니 재야 유림들은 향촌사회에서 학계와 사회적 주도권을 잡기 위해 호락논쟁·병호시비 등의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 중 영남 유림들은 병호시비·한려시비·청회시비 등 유림시비와 각 문종의 종통시비, 적서갈등 등 첨예한 대립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안동유림은 크게 서애학맥과 학봉학맥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학봉학맥은 17세기부터 19세기 중엽까지 이현일·이사정·유치명 등을 중심으로 큰 학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19세기 초 안동 동부 유림은 유범휴의 주도 아래 이상정의 학통으로 결속하였고, 김시온을 추모하는 사업을 벌이며 더욱 결속을 다졌..

書/논문 2012.12.10

오영교, 「17세기 향촌대책과 면리제의 운영」, 東方學志85, 1994.

오영교, 「17세기 향촌대책과 면리제의 운영」, 東方學志85, 1994. 박세연 오영교의 본고는 임진왜란 이후 국가재조론의 관점에서 국가가 재지사족의 지방자치적 성격을 억누르고 지방 군현을 장악하기 위하여 面里制를 강화시키는 모습과 그 과정에서 面任·里任의 기능이 어떻게 수행되고 있는지를 서술하고 있다. 임진왜란 이전부터 조선은 공식적으로 법전에서 면리제를 채택하였으나 실제로는 고려의 유제인 任內가 잔존하였고 자연촌을 중심으로 재지세력에 의하여 지방 말단단위가 장악되어 있었다. 수령은 재지세력 특히 사족의 도움 없이는 임지를 장악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복구를 위한 국가재건책이 강력하게 추진되고 생산력의 발달과 그에 따른 村의 성장, 행정단위로서 面의 실물화, 民의 의식 향상에 힘입어..

書/논문 2012.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