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산문

짧은 여행의 기록 中 - 기형도

同黎 2013. 5. 5. 22:59

무등(無等)은 날이 흐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가까운 검은 산들을 거느리고 회색의 구름 숲 속에 무등은 있었다. 나는 지금 충장로와 중앙로를 가로지르는 금남로 3가와 4가 사이 '충금' 다방 2층에 앉아있다. 광주고속터미널은 내가 본 그 어느 대도시 터미널보다 초라하고 궁핍했으며 무더웠고 지친 모습이었다. 땀이 폭포처럼 옷 사이로 흘러내렸다. 

지금은 저녁 6시. 광주에 도착한 지 2시간이 흘렀다. 터미널에서 부산이나 해남 혹은 이리 방면의 차표를 끊으려 예매처를 기웃거렸으나 너무 혼잡하고 더러워서 터미널을 버리고 길을 건너 신문들을 한 뭉치 샀다. 내가 써두고 온 기사가 나와 있었다. 갑자기 욕지기가 치밀었다. 수퍼마켓에 들어가 필름 한 통을 샀다. 어디로 갈 것인가. 보도 블록 위에 주저앉았다. 황지우(黃芝雨)형에게 전화를 넣을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시간은 많다. 

망월동 공원 묘지를 찾아갈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 저사람에 물어도 망월동행 차편을 모른다고 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물어물어 25번 버스가 간다고 알 수 있었고 25번 버스를 타기 위해 현대 예식장으로 택시를 타고 갔다. 이 사람들이 모두 죽음의 공포를 겪었던 사람들일까. 어찌보면 그랬다. 어두웠고 흐미하였다. 거리는 복잡했지만 힘이 없이 늘어져 있었다. 망월동까지 버스는 달렸고 그곳은 외곽지대였다. 버스기사는 나에게 내려서 걸어가라고 했다. 가게집 아낙네는 1시간을 걸어야 한다고 무덤덤하게 이야기했다. 망월동 3거리에 봉고차가 있었다. 공원 묘지까지 운행하는 셔틀버스였다. 차가 왔다. '묘지 가실랍니까?' 그는 시내로 퇴근하는 길이었는데 나 때문에 한 번 더 운행하겠노라 했다. 땀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가게 집에서 산 카스테라와 비비콜을 먹으며 나는 봉고차에 혼자 앉아 묘지로 깄다. 가는 도중 묘지에서 내려오는 한떼의 대학생들을 보았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플래카드를 든 방송대학생들이었고 봉고차는 이윽고 묘역에 도착했다. 나는 가지 말라고 당부하고 제3묘원을 올랐다. 만장같은 격한, 그러나 햇빛에 바삭바삭 마르고 있는 수십개의 붉고 검고 흰 현수막들과 무덤들이 있었다. 나는 꽃 한송이 소주 한 병 없이 무덤 사이를 거닐었다. '여보 당신은 천사였오, 하늘나라에서 만납시다' 무명열사의 묘, 박관현의 묘, 묘비명 사이를 걸으며 나는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묘원은 아무도 없었고 나 혼자였으며 열사(熱沙)였다. 너무 뜨거워 화상처럼 달구어진 내 얼굴 위로 땀이 사납게 흘러 내렸고, 그것들이 내 눈 속에 들어갔다. 나는 눈물을 닦는 사람처럼 자꾸만 눈가의 땀들을 닦아 냈고 그것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마른꽃 다발과 뜨거운 술병, 금이 간 성모(聖母)상들을 넘어 간이 화장실을 들렀다. 변기속에는 죽은 구더기들이 가득 차 있었다. 

제3묘원을 나와 기다리고 있던 봉고차에 탔을 때 50대 후반(혹은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낙네가 서너 살 되어 보이는 소녀와 함께 봉고차에 올랐다. 퍼머 머리에 찌든 얼굴, 갈라진 두툼한 입술, 넓적한 코, 촛점이 흐린 눈동자, 검게 탄 피부, 가는 몸매, 흰 반팔 남방, 갈색 면바지, 굽없는 흰 샌들을 신은 촌부였다. "앞에 타세요." 운전사가 말했다. 50대로 보이는 기사가 나를 보며 말했다. "이한열(李漢烈)이 어머니에요." 나는 좌석 앞으로 옮아갔다. 여인이 힘없이 인사를 했다. "묘지 다녀가세요?" 나는 "한열이 선뱁니다. 연세대학교 선배예요." 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좋은 학교 보내면 뭘해요. 이렇게 돼 버렸는데." 여인은 말했다. "이따금 이곳에 다녀갑니다." 늙고 지친 얼굴이었다. 퍼머 머리의 절반이 백발이었다. "한열이 누이의 딸이예요." 봉고차는 그녀와 나만을 싣고 달렸다. "시내로 곧장 들어갈랍니다. 오늘은 퇴근하는 길이에요." 기사가 말했다. 3거리에 차가 닿았을 때 서너명의 대학생들로 보이는 청년들이 소리쳤다. "묘지갑시다!" "이런, 난 시내로 퇴근하려 했는데..."기사가 나를 쳐다보았다. "저희가 내리지요. 저들을 태워주세요." 나와 한열이 어머니는 내렸다. 봉고차는 또다시 묘지로 갔다. 우리는 25번을 기다렸다. 내가 가게에 들어가 음료수 캔 세 개를 샀을 때 버스가 왔고 나는 스트로도 받지 못하고 허둥지둥 버스로 올랐다. 나뭇가지처럼 깡마른 여인이 있는 곳으로 갔다. "이것 드세요." 나는 어쩔 줄 모르고 캔을 내밀었다. 고맙다고 했다. 나도 말이 없었고 여인도 침묵이었다. 지치고 피곤한 얼굴, 누군가 건드려도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햇빛에 검게 탄 촌부. 치산동에 산다고 했다. 버스가 서방시장에 섰을 때 한열이 어머니가 인사를 했다. 안녕히 가시라고. 나는 손녀딸의 손을 한번 잡아 주었다. 그들이 내렸고 버스문이 닫혔다. 갑자기 창 밖에서 한열이 어머니가 난처한 얼굴로 소리쳤다. 버스는 떠나고 있었다. 그와 함께 한 소년이 승강구 부분에서 무엇인가 주워 창 밖으로 던졌다. 흰색 맥고모자를 썼던 한열이 조카의 앙징맞은 고동색 샌들 한 짝이었다. 

버스는 달렸고 나는 금남로 입구에서 내렸다. 햇볕은 여전히 뜨거웠지만 무등은 구름 속에서 솟아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비오듯 땀을 흘리며 걸었다. 어깨에 둘러멘 가방이 대리석처럼 무거웠다. '충금'다방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가방을 던졌다. 커튼은 햇빛에 바랜 핏빛이었다. "1년 전이지요. 7월 5일이에요. 3남매중 큰 아들이지요." 한열이 어머니는 한숨을 토하듯, 그러나 힘없이 중얼거렸지만 멋 모르고 캔만 빨아먹는 어린 손녀딸의 손을 힘들여 쥐고 있었다. 그럴 수도 있다. 우리 어머니의 뒷모습과 너무 흡사했고, 그것은 감상(感傷)도 계시(啓示)도 아니었다. 망월동 공원묘지 제 3묘원은 찌는 듯이 무더웠고 그것은 고의적인 형벌같았다. 나는 아무런 감정의 변화도 없이 묵묵히 묘원의 인상만 자신없이 기억 속에 집어넣었다. 광주의 충장로와 금남로 교차로에 있는 이곳 '충금'다방에서 광주와의 첫 만남을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