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물론 내가 쓰는 책은 연구서가 아니라 대중서다. 학술 이론을 생산하는 게 아니라 이미 생산된 이론을 쉽게 가공해 많은 독자들에게 확산시키는 게 목적이다. 사실 이런 글쓰기는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의 두 가지 방향에서 이뤄질 수 있다. 첫째는 전문 학자의 몫이다. 학자와 대중서라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 듯 싶지만 그렇게 여겨지는 건 우리 사회에 팽배한 학문적 엄숙주의의 탓이다. 스티븐 호킹 같은 위대한 물리학자가 <시간의 역사>라는 현재 물리학의 '대중서'를 쓰고 움베르토 에코 같은 세계적인 기호학자가 <장미의 이름> 같은 '소설'을 쓴 의도를 생각하면 왜 학자들이 이 분야에 참여해야 하는 지 알기 쉽다. 둘째는 지식 보급자의 몫이다. 지식 보급자는 학자만큼 해당 주제에 해박하지 못하지만 학자보다 폭넓은 시각에서 크로스 오버가 가능하다. 때로는 이 부문에서 나온 상상력이 거꾸로 학술권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언론인 출신의 신채호가 쓴 '대중서'인 <조선상고사>(원래는 신문에 연재되었다가 그의 사후에 책으로 간행되었다)가 지금은 이두 해석의 권위 있는 '학술' 문헌으로 자리 잡은 게 그런 예다. 단, 그런 자리매김을 위해서는 지식을 교통정리하는 데서 더 나아가 독창적인 해석이 필요하다. 내가 지향해야 할 글쓰기의 방향은 이것이었다.
일기를 제외한 모든 글은 매체다. 즉 글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목적을 가진다. 매체란 그 자체로는 빈 그릇에 불과하며, 반드시 발신자와 수신자가 필요하다. 발신자(글쓴이)는 글이라는 매체를 통해 메시지를 발신하고 수신자(읽는이)는 같은 매체를 통해 메시지를 수신한다. 그렇다면 올바른 소통을 위해 필요한 것은 '대중적 글쓰기가 가능한 연구자' 혹은 '전문적 내용을 다룰 능력을 가진 대중적 필자'다. 전자가 아카데미즘에서 출발하는 소통이라면 후자는 저널리즘에 바탕을 둔 소통이다. 발원지는 달라도 목적지가 같은 만큼 양자는 서로 만나야 하고 또 만날 수밖에 없다. ..."
ㅡ 남경태, "내게 직업과 지식을 준 번역"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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