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산문

보임소경서(報任小卿書)

同黎 2010. 1. 11. 01:15

소경족하(少卿足下) 

지난번에 보내주신 편지에서 저에게 사람들과의 관계를 원만히 하고 인재를 천거하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하시는 뜻이 너무도 간절하였습니다. 아마도 제가 당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속된 사람들의 말에 따른다고 생각하시고 책망하시는 듯합니다만 저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비록 보잘것없는 존재이기는 하나 군자들의 가르침만은 거듭 귀에 담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저 자신은 비천한 처지에 빠진 불구자입니다. 행동을 하기만 하면 남의 비난을 받으며, 더 나아지고자 하나 도리어 더 나빠질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홀로 우울하고 절망하여 함께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습니다.


속담에 말하길 '누구를 위해 하는가, 누구더러 들으라고 하는가‘ 했습니다. 종자기(種子期)가 죽고 난 후 백아(伯牙)는 두 번 다시 금(琴)을 연주하지 않았습니다. 그 까닭은 무엇이었겠습니까.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행동하고 여자는 자기를 기쁘게 해주는 사람을 위하여 화장하는 것입니다. (士爲知己用, 女爲說己容)


그러나 저와 같은 사람은 신체가 이미 망가졌으니 아무리 수후(隨候)나 화씨 (和氏)의 구슬과 같은 재능이 있고 행동은 허유(許由).백이(伯夷)와 같이 개결(介潔)하다 할지라도 끝내 영예를 얻지 못할 것이며, 도리어 남의 비웃음이나 당하고 스스로 부끄러워하기에나 족할 따름입니다.


당신의 편지에 대해 마땅히 답을 올려야 했지만 마침 황제를 쫓아 동쪽 지방을 다녀왔으며 또 제 개인적인 일에 쫓겼습니다. 만나 뵌 지가 오래 되지는 않았지만 너무나 바빠서 저의 속마음을 아뢸 수 있는 틈이 잠시도 없었습니다. 지금 소경께서는 불측(不測)의 죄를 안고 계시는데 만 1개월이 지나 형을 집행하는 12월이 임박하였습니다.

저는 또 천자를 쫓아 옹(雍)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혹시라도 갑자기 당신께서 차마 말못할 일을 당하시고 저는 끝내 저의 분(憤)만을 가까운 사람에게 말할 수도 없게 된다면 당신의 혼백은 영원히 가고 저의 한(恨)은 끝이 없을 것입니다. 저의 고루(固陋)한 생각을 대략이나마 말씀드리고자 하며, 오랫동안 답장 올리지 못한 것을 허물치 말아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제가 듣건대, 자신의 몸을 수양하는 것은 지(智)의 표시이며,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것은 인(仁)의 실마리이며, 주고 받는 것은 의(義)가 드러나는 바이며, 치욕을 당하면 용(勇)을 결단하게 되며, 뜻을 세우는 것은 행동의 목적이라고 합니다. (修身者智之府也, 愛施者仁之端也, 取予者義之符也, 恥辱者勇之決也, 立名者行之極也)

선비는 이 다섯을 갖춘 후에야 세상에 몸을 의탁하고 군자의 대열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利)를 탐내는 것보다 더 참혹한 화(禍)는 없으며 마음을 상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런 슬픔은 없고, 선영(先塋)을 욕되이 하는 것보다 더 추한 행동은 없으며 궁형을 받는 것보다 더 큰 치욕은 없습니다.


형(刑)을 받고 살아남은 사람을 비교하고 헤아린 바는 없으나, 한 세대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오래 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옛날 위령공(衛靈公)이 환관인 옹거(雍渠)와 수레를 함께 탔기 때문에 공자는 그 곳을 떠나 진(陳) 나라로 갔습니다. 상앙이 경감(境監)의 주선을 받아 군주를 알현하자 조량(趙良)이 한심하게 여겼습니다. 조담(趙談)이 군주의 수레를 함께 타자 원사(袁絲)가 안색이 변하였습니다.


이처럼 옛날부터 사람들은 환관과 관계를 가지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습니다. 대개 중간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도 일이 환자(宦者)와 관련이 되면 기분을 상하지 않음이 없는데 하물며 강개(慷慨)한 선비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지금 조정에 아무리 사람이 없다고 한들 저같이 궁형을 받고 살아남은 사람 더러 천하의 뛰어난 인물을 추천하라고 하겠습니까.


저는 선친이 물려주신 사업으로 인해 군주의 수레바퀴 아래에서 벼슬하면서 죄 받기를 기다린 지 20여 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생각컨대, 위로는 충성을 바치고 믿음을 다하여 훌륭한 계책을 세우고 뛰어난 재능이 있다는 칭송을 들으면서 현명한 군주를 모시지도 못하였고, 다음으로 또 정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고 결여된 것을 메우며 어질고 재능 있는 자를 추천하거나 초야의 숨은 선비를 조정에 드러나게 하지도 못했습니다.


밖으로는 또 전쟁에 참여하여 성(城)을 공격하고 들에서 싸움하여 적장의 목을 베거나 적군의 기(旗)를 빼앗은 공도 없습니다. 아래로는 오랫동안 공로를 쌓아서 높은 지위, 후한 녹을 얻어 종족과 우인(友人)들에게 광영과 은총을 가져다준 적도 없습니다. 저는 이들 넷 중에서 하나도 이루지 못하였으니 조정에 구차하게 용납되어 아무런 일도 한 바가 없음이 이와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전에 저는 외람되이 하대부(下大夫)의 대열에 끼어 외정(外廷)에서 말단 의론에 참가하였습니다. 그 당시 올바른 기강을 이끌어 내지도 사려(思慮)를 극진히 하지도 못하고, 지금 이지러진 몸으로 소제나 하는 천한 노예가 되어 용렬하고 어리석음 속에 빠져 있는데 이제서야 머리를 들고 눈썹을 펴서 시비를 논한다면 조정을 가벼이 여기고 동시대의 선비를 치욕되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아, 저와 같은 인간이 이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이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嗟乎! 嗟乎! 如僕, 尙何言哉! 尙何言哉!)


또한 일의 본말은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어려서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정신을 자부하였지만 자라서는 향리에서 어떤 칭송도 받은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요행히 주상께서 선친의 연고로 저의 얕은 재주나마 받들어 궁궐 안을 드나들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릇을 머리에 인 사람은 하늘을 볼 수 없듯 (戴盆何以望天) 한마음으로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은 인사(人事)를 닦을 겨를이 없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빈객과의 사귐을 끊고 집안의 일도 돌보지 않고 밤낮으로 미미한 재능을 다하여 한마음으로 저의 직무를 다하여 주상께 총애 받고자 힘썼습니다만 결국 나의 뜻과는 전혀 달리 크게 잘못되기에 이르렀던 것이지요.


저는 이릉(李陵)과 함께 문하시중으로 있었지만 본디 서로 친밀하지는 않았습니다. 취향이 각기 달라서 함께 술을 마신 적도 없고 친밀한 교제의 즐거움을 나눈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 사람됨을 살펴보니 스스로를 지키는 뛰어난 선비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부모를 모시는 것은 효성스럽고 선비들과 사귀는 것은 신의가 있으며 재물에 대해서는 청렴하고 주고받음에 공정함을 지키고 상하의 분별함에 있어서는 겸양하였고 공손하고 검약하며 남에게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분발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나라의 위급함에 몸을 바칠 것을 항상 생각하였습니다. 그가 본디 마음속에 쌓아둔 바는 일국 (一國)의 큰 선비로서의 기풍이 있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대저 신하된 자로서 만 번 죽는다 해도 자신의 생명은 조금도 돌아보지 않는다 는 생각으로 나라의 위급함을 구하려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뛰어나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가 행한 일이 하나가 마땅치 않는다 해서, 자신의 몸을 보전하고 처자를 보호하는데에 급급할 뿐인 신하들이 서로 뒤이어 그의 잘못을 지어내어 모해하였으니 저는 진실로 마음속으로 통분히 여겼습니다.


또 이릉이 지휘하고 있었던 보병은 5천 명이 채 되지 않았는데 오랑캐의 땅에 깊숙히 들어가 왕정(王庭)을 활보하였고 마치 호랑이 입에 미끼를 들이대듯 강한 오랑캐에게 마구 도전하여 억만의 군사를 맞이하였습니다.

선우(單于)와 싸움을 계속한 지 10여일 만에 죽인 자는 반이 넘었고 오랑캐는 사상자를 구조할 수도 없었습니다. 털옷을 입은 흉노의 군장(君長)들은 모두 두려워 떨었으며 모두 그 좌우의 현왕(賢王)을 소집하고, 활 쏘는 사람을 모두 불러내어 온 나라가 함께 이릉의 군대를 공격하여 포위하였습니다.


이릉의 군대는 천 리에 걸쳐 싸우면서 물러나 화살은 다하고 길은 막다른 곳에 이르렀으며 구원병은 오지 않고 병졸의 사상자는 쌓이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릉이 한번 외쳐 군사를 위로하면 군사들은 몸을 일으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피로 얼굴을 씻고 눈물을 삼키며 다시 맨주먹을 불끈 쥐고 칼날을 무릅쓰며 북쪽을 향해 죽음으로 적과 싸웠던 것입니다.


이릉이 아직 적에게 함락되지 않았을 때에 군사(軍使)가 와서 보고를 올리자 한의 공경(公卿) 왕후(王侯)들은 모두 축배를 들며 황제를 축수했습니다.

그후 며칠 뒤에 이릉이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 때문에 황제는 음식도 들지 않고 조의(朝議)에서도 불편한 기색이었습니다. 대신들은 근심하여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저는 저의 비천함을 헤아리지 않고 주상(主上)의 슬픔과 번뇌를 보고는 저의 어리석은 충성을 다하려고 생각하였습니다.


제가 생각컨대 이릉은 평소에 부하들과 어려움도 함께 하고 작은 것도 나누어 가져 병사들이 죽음도 마다지 않게 하였으니 비록 옛날의 명장이라 할지라도 그보다 더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몸은 비록 패했으나 그 뜻을 보건대 장차 적당한 기회를 얻어 한에 보답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일은 이미 어찌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지만 그가 적을 무찌른 공은 역시 천하에 드러내기에 족한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생각을 갖고 아뢰고자 했으나 아뢸 길이 없었는데 마침 주상께서 하문(下問)하셔서 곧 이러한 뜻으로 이릉의 공적을 말하여 주상의 생각을 넓혀 드리고 다른 신하들의 비방의 말을 막아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을 다 밝힐 수 없었으며 주상께서는 제 뜻을 이해하지 않으시고 제가 이사장군(貳師將軍)을 비방하고 이릉을 위해 유세한다고 여기셨던 것입니다. 결국 저는 하옥되었고 정성스런 저의 충성을 끝내 밝힐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황제를 속였다는 죄로 마침내 하급관리의 재판에 굴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저의 집은 가난하여 형벌을 면할 수 있을 만큼의 재물이 없었고 사귀던 벗들은 아무도 나를 구하려 하지 않았으며 황제 좌우의 측근인물들은 나를 위해 한마다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 몸은 목석이 아닌데 오직 법리(法吏)와 마주하여 깊이 감옥 속에 갇혀 있으니 누구에게 내 사정을 하소연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은 실로 소경께서도 직접 겪으신 것입니다. 저의 처지가 어찌 이렇지 않겠습니까. 이릉은 살아서 항복함으로써 그 가문의 명성을 무너뜨렸고 저는 또 거세 되어 잠실(蠶室)에 던져져서 거듭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아아, 이런 일이란 속인들에게 상세히 말하기 용이한 것이 아닙니다.


저의 선친은 부부(剖符)나 단서(丹書)를 받은 공적도 없었습니다. 천문과 역법에 관한 일을 관장하여 점쟁이나 무당에 가까웠으며 본디 주상께서 희롱의 대상으로 여기시며 악공(樂工), 배우의 부류로 기르셨고 세속의 사람들이 경멸하는 바였습니다. 가령 제가 법에 굴복하여 주벌(誅罰)을 받는다 할지라도 아홉마리 소 중에서 털오라기 하나 없는 것 (九牛亡一毛)과 마찬가지일 따름이니 저와 같은 존재는 땅강아지나 개미같은 미물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리고 또 세상에서는 내가 죽는다 해도 절개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람과 동일하게 여기지는 않을 것이며, 다만 내가 지혜가 궁하고 죄는 너무나 커서 면할 수 없게 되어 마침내 죽었다고 여길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평소에 세워놓은 바가 그렇게 여기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본디 한 번 죽을 뿐이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기도 하고 어떤 죽음은 터럭만큼이나 가볍기도 하니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이 다른 까닭입니다. (人固有一死, 死有重於泰山, 或輕於鴻毛 用之所趨異也) .

사람에게서 최상의 것은 선조를 욕되이 하지 않는 것이며 그 다음은 자신을 욕되이 하지 않는 것, 그 다음은 자신의 도리와 안색(顔色)을 욕되이 하지 않는 것, 그 다음은 자신의 언사(言辭)와 교령(敎令)을 욕되이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몸이 속박되어 치욕을 당하는 것이요, 그 다음은 죄수복을 입고 치욕을 당하는 것, 그 다음은 손발이 묶이고 매질을 당하여 치욕을 받는 것, 그 다음은 머리를 삭발 당하고 쇠고랑에 얽매이어 치욕을 받는 것, 그 다음은 신체가 훼손되고 발이 잘려 치욕을 당하는 것이요, 최하가 부형(腐刑)으로서 가장 극형인 것입니다.


전하는 말에 이르길 "형벌은 상대부에게 까지는 미치지 않는다" (刑不上大夫)고 했으니 이 말은 선비는 절개를 지키기 위해 힘쓰지 않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나운 호랑이가 깊은 산중에 있을 때는 온갖 짐승들이 두려워하지만, 함정에 빠지게 되면 그 호랑이도 꼬리를 흔들며 음식을 구걸하는 것이니 (猛虎處深山, 百獸震恐, 及其在穽檻之中, 搖尾而求食) 이것은 점차 위세에 눌려서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에다 선을 긋고 감옥이라 하여도 형세는 들어갈 수 없게 되고, 나무를 깎아 형리(刑吏)로 삼아도 이러쿵저러쿵 거기에 대꾸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형벌을 받기 전에 결단을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손발을 얽어 판목(板木)이나 새끼줄에 묶이고 살갗을 드러내어 매질을 당하며 감옥속에 갇혔을 때에 옥리(獄吏)를 보면 머리는 땅에 닿이고, 감옥을 지키는 노예를 보면 마음은 두려워 숨이 막힐 지경이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형세가 위세에 눌렸기 때문입니다. 이런 지경에 이르고도 치욕을 당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뻔뻔스러운 것이며 사람들이 어찌 그를 귀하게 대접하겠습니까.


서백(西佰)은 백작이었지만 유리에 갇히는 몸이 되었고 이사(李斯)는 재상이었지만 다섯가지 형벌을 다 당하였습니다. 회음(淮陰)은 왕이었지만 진(陳)에서 묶이는 신세가 되었고, 팽월(彭越).장오(張敖)는 남면(南面)하여 왕 노릇을 하였으나 감옥에 갇혀 죄를 받았습니다. 강후(絳侯)는 여씨(呂氏)들을 타도하여 권력이 오패(五覇;五伯)를 능가하였으나 청죄(請罪)하는 방에 갇혔고, 위기후(魏其侯)는 대장(大將)의 몸으로 붉은 죄수복을 입고 목과 수족에는 고랑이 채워졌습니다. 계포(季布)는 주가(朱家)에 의탁해 목에 칼을 쓴 노예가 되었고, 관부(灌夫)는 거실(居室)에서 치욕을 당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왕후장상의 지위에 이르렀고 명성은 이웃나라에까지 알려졌지만 죄를 입어 판결이 내려졌을 때에 자결함으로써 스스로 결단하지는 못했습니다. 오욕(汚辱)에 처할 수 있음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러한 상황에서 어찌 치욕을 당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견지에서 말한다면 용기와 비겁, 강인함과 나약함은 형세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니 이상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대저 사람이 법에 의해 처벌되기 전에 일찌감치 스스로 결단하지 못하고 차츰 전락하여 태형을 당하기에 이르러서야 절개를 지키려고 한다 해도 이는 늦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옛 사람들이 대부(大夫)에게는 형벌을 내리는 것을 어렵게 여긴 까닭은 아마도 이때문인 듯합니다.


대저 살기를 애쓰고 죽기를 싫어하며 부모를 생각하고 처자를 돌보는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의리에 격발되기에 이르러서는 그렇지 않으니 그것은 부득이한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불행히도 일찍이 부모님을 잃었고 가까운 형제도 없으며 홀로 외로이 살아왔습니다. 소경께서 보시기에 제가 처자에 대해서는 어떻다고 여기십니까? 또 용기있는 자라고 해서 반드시 절개를 위하여 죽는 것도 아니며 비겁한 사내라도 의(義)를 사모하면 어떤 행동이라도 힘쓸 수 있습니다. 제가 비록 비겁하고 나약하며 구차히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나 거취(去就)의 분별 또한 잘 압니다. 어떻게 몸이 속박되는 치욕 속에 자신을 밀어 넣기에 이르겠습니까?


또한 저 천한 노복이나 하녀조차도 능히 자결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저와 같은 사람이 어째서 자결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고통을 감내하고 구차하게 더러운 치욕 속에 있으면서도 마다하지 않는 까닭은 제 마음속에 다 드러내지 못한 바가 있어, 비루(鄙陋)하게 세상에서 사라져버릴 경우에 후세에 문채(文彩)가 드러나지 않을 것을 한스러이 여겨서입니다. 옛날부터 부귀하였지만 이름이 마멸된 사람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탁월하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비상한 인물만이 일컬어질 따름입니다.


문왕(文王)은 갇힌 몸이 되어 주역(周易)을 연역하였고 공자(孔子)는 곤란한 처지를 당하여 춘추(春秋)를 지었습니다. 굴원(屈原)은 쫓겨가서 이소(離騷)를 썻고, 좌구(左丘)는 실명한 뒤에 국어(國語)를 지었습니다.

손빈(孫臏)은 발이 잘리고 병법(兵法)을 편찬하였고 여불위(呂不韋)는 촉(蜀)에 유배되어 여씨춘추(呂氏春秋)를 지었으며 한비(韓非)는 진나라에 잡히고서야 세상에 『세난, 고분』을 저술하였으며 시경(詩經)의 300편 시는 대개 성현이 발분(發憤)하여 지은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가슴속에 맺힌 바가 있어 그 하고자하는 바를 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서술하여 후세의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알아줄 것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좌구와 같이 눈이 없고 손빈과 같이 발이 잘린 사람은 끝끝내 세상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지만 물러나 서책(書冊)을 써서 자신의 분한 생각을 펴고 이론적인 문장을 세상에 남겨 자신을 드러냈습니다.

저도 감히 겸손치 못하게도 무능한 문장에 스스로를 맡기려고 하였습니다. 저는 천하의 산실(散失)된 구문(舊聞)을 수집하여 행해진 일을 대략 상고하고 그 처음과 끝을 정리하여 성패흥망(成敗興亡)의 원리를 살펴 모두 130편을 저술하였습니다. 저는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달하여 일가(一家)의 말을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초고(草稿)를 다 쓰기도 전에 이런 화를 당했는데, 나의 작업이 완성되지 못할 것을 안타까이 여긴 까닭에 극형을 당하고도 부끄러워할 줄 몰랐던 것입니다.


저는 진실로 이 책을 저술하여 명산(名山)에 보관하였다가 내 뜻을 알아줄 사람에게 전하여 촌락.도시에 유통되게 한다면 이전에 받은 치욕에 대한 질책을 보상할 수 있을 것이니 비록 만 번이나 주륙(誅戮)을 당한다 해도 어찌 후회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지혜로운 사람에겐 말할 수 있지만 속인에겐 말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빈천한 무리 속에 사는 것은 쉽지 않고 소인배들은 비방의 말이 많습니다. 제가 말을 잘못하여 이런 화를 만나 거듭 향리에서 비웃음거리가 되었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욕되이 하였으니 무슨 면목으로 다시 부모님의 산소 앞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 비록 백세(百世)의 세월이 흘러도 저의 수치는 너무나 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에도 아홉 번이나 애가 끊어지는 듯하고 집안에 있으면 망연자실하여 무엇을 잃은 듯하고 집을 나서면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를 못합니다. 이 치욕을 생각할 때마다 땀이 등줄기를 흘러 옷을 적시지 않는 적이 없습니다. 저는 지금 후궁(後宮)에 있는 신하에 불과하니 어찌 스스로를 깊은 바윗골 속에 숨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세월을 쫓아 부침(浮沈)하고 때에 따라 처신하며 미혹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소경께서는 저에게 훌륭한 인물을 밀어주라고 충고하시지만 그와 같은 일을 저의 속뜻과는 어긋나는 게 아니겠습니까. 지금 비록 스스로를 가다듬고 아름다운 말로 스스로를 꾸미고자 한들 아무런 유익함도 없을 것이며 세상에 믿어지지도 않고 치욕이나 얻기에 알맞을 것입니다. 죽을 날을 기다린 연후에야 옳고 그름은 판명되는 것입니다. 글로써 뜻을 다 전할 수는 없고 저의 고루한 생각을 대략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