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 12.06.12

 

근황 12.06.12

저는 비교적 잘 지내고 있습니다.

최근 석사 6학기 안에 논문을 내고 싶다는 과도한 욕심이 글을 병들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다급함이 약이 될리가 없겠지만, 질러놓은 것이 있어 잡문이나마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금 위안을 삼을까 합니다. 생각만하고 아무것도 못하는 것보다는 생산적이겠죠. 하지만 욕심만큼 글을 잘 쓰지 못하는 부분은 여전히 괴롭습니다.
...
글을 쓰다보면 많은 생각을 합니다. 수많은 논문을 읽으며 평가하고 갈무리하는 과정은 희열과 고뇌를 동시에 가져다줍니다. 나의 생각과 일치하는 부분을 찾으면 기쁘지만 동시에 어떻게 하면 이보다 더 효과적으로 이 내용을 글에 넣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됩니다. 나의 생각과 반대되는 부분을 찾으면 고민스럽지만 동시에 사료를 통해 남의 글을 비판할 수 있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에서 드는 생각은 선학에 대한 존경과 경외심입니다.

동국대에서 일한 지 2개월 만에 자료를 직접 손으로 만지고 검토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어제 국보로 지정된 왕실에서 발원한 불경을 세세히 검토했습니다. 작업의 일환이기는 하지만 손에 닿는 전적의 기분은 언제나 저를 들뜨게 합니다. 두꺼운 장지를 능화판 위에 놓고 홍두깨로 수 백 번 문질러 내었을 표지의 요철 무늬는 책의 격을 높였고, 목판본임에도 불구하고 보기 드물게 뚜렷하게 보이는 글자는 아름다웠습니다. 지금도 금고 안에는 수많은 책이 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몇몇은 유용한 자료가 될 것이고, 아마도 다수는 평생 이용하지 못할 것이지만 거기에 책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만으로도 가슴이 뜁니다.

9월 말 추석에 일본에 가기로 했습니다. 논문 작성중의 여행이 사실 도피임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일주일의 여행 기간이 사실 한 달 이상 공부에 방해를 줄 것이라는 사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역시 답답한 마음이 한 줄기 탈출구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여행인 것 같습니다. 지난 겨울 두 번의 여행이 주었던 추억은 이제는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가 되어 재미없는 현재의 삶에 희망이 되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방랑벽이 있는지 돌아다니길 좋아하더니 그 버릇을 여전히 고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우연히 만난 옛 동지에게 근황을 물으니 요사이는 푸코를 읽고 있다고 합니다. 농담 삼아 사회주의자가 대학원에 가면 다들 포스트모더니스트가 되는 거냐고 일갈하고 한바탕 웃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부쩍 그런 류에 대한 관심이 늘었습니다. 신념이 희박해진 것일까요? 아니면 늘 새로운 것에 목말라하는 연구자로서의 본능 때문일까요? 말로는 후자 때문일 것이라고 하지만 마음으로는 전자 때문 일 것이라는 생각에 목 안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답답합니다.

어느 선생님이 연구자가 사람을 좋아하면 성과를 내기 어렵다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을 만나지 않고 어떻게 인문학을 할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글이 좀 늦어지더라고 사람 안에서 부대끼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사람과 괴리된 역사학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것이 요사이 공부를 하지 않는 제가 스스로 만들어낸 변명입니다.

6월의 서울은 덥습니다. 더운 가운데에서 좋은 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