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그 외

미륵, 지배자의 이념에서 민중의 이념으로

同黎 2015. 5. 27. 03:41

 미륵, 지배자의 이념에서 민중의 이념으로 



선운사 도솔암 마애여래좌상 (보물 1200호) 가운데 하얗게 테투리가 처진 네모가 배꼽 입니다.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892년, 고창에 위치한 선운사에서는 여러 곳에서 모인 농민들의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선운사의 산내 암자인 도솔암 내원궁에는 거대한 절벽에 무려 17미터 높이의 마애불(절벽에 새긴 불상)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 마애불의 중간에는 구멍을 뚫었다가 막았던 흔적이 있고, 이것을 보통 미륵불의 배꼽이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이 마애불의 배꼽에는 때가 되면 나올 세상을 뒤집을 비결(秘訣)이 숨겨져있다고 전해지고 있었는데, 바로 지금 그 비결을 동학의 대접주인 손화중이 나서서 얻으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이 미륵불의 배꼽에 새로운 세상에 대한 예언이 있다는 소문은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래서 17989년 전라감사가 부임하자마자 이 배꼽을 열어보려고 했으나 손을 대자마자 뇌성벽력이 쳐서 놀라 비결을 꺼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에 봉기를 준비하던 손화중이 감히 열어보고 비결을 꺼내자 이 소문이 전라도 전역에 퍼져 수 많은 농민들이 손화중포 믿으로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그 비결은 선운사를 창건한 검단선사의 비결이라고도 하고, 다산 정약용이 지은 경세유표라고도 전해집니다. 

상기 내용은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중요한 사료 중 하나인 오지영의 <동학사>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 중 일부입니다. 하지만 <동학사> 자체에 과장되고 사실과 어긋나는 부분이 많아 이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인지는 불문명합니다. 특히 자세한 내용에는 배꼽 안에 뱀이 꽈리를 틀고 있었다던지, 하는 전설에 가까운 이야기들도 등장합니다. 그러나 매천 황현의 <오하기문> 등등 동학에 적대적이었던 여러 유생들의 기록에도 동학교도들이 비결을 얻었다고 소문을 내서 사람을 모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실제도 동학군 지도자들이 이러한 소문을 퍼트렸었고, 그에 따르는 이벤트를 했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기실, 이 마애불의 배꼽이라는 것은, 불상의 복장유물을 넣기 위해 구멍을 파서 공간을 만들고, 이후 다시 막은 것입니다. 복장이라는 것은 불상이나 탑, 불화 등에 신성(神性)을 불어넣기 위해 불경과 향, 오곡, 후령통(오색실과 오곡, 향 등을 탐고 주문을 적은 통) 등을 봉안하는 것을 의미하고, 불상의 경우 불상 속 빈공간에 이러한 것들을 안치하게 때문에 복장(腹藏)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복장유물을 넣고, 간단한 의식을 치뤄야지만이 불상이나 탑, 불화가 비로서 신앙의 대상으로 거듭난다고 믿고 있습니다. 마치 천주교에서 묵주나 성상에 축성을 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지요. 

하여튼 이 일화는 당시 민중에게 미륵이 어떠한 의미였나 잘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이전 강의인 보천교 편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당시 민중은 그 무엇이라도 세상을 바꾸어줄 구세주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동학농민전쟁같이 군사적인 해결책이 될 수도 있었고, 정감록 같은 예언 사상이 될 수도 있었고, 보천교에서 보여주듯, 종교적인 것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아니 이렇게 나누어서 이야기하는 편이 오히려 더 어색하네요. 결국 이 모든 것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니까요. 마찬가지로 조선 후기에는 미륵신앙이 성행하면서 새 세상을 만들어줄 미륵을 민중들은 기다려왔습니다. 그래서 지배층은 때로는 미륵신앙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서 민중을 동원하기도 하였고, 그 이용가치가 다 하면 가차없이 다른 신앙으로 옮겨가곤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어지러울 때면 어김없이 미륵신앙은 부활했습니다. 이번에는 한국사에서의 미륵신앙을 살펴보면서 미륵신앙과 역사가 가지고 있는 함수관계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미래에 도래할 미래불로 유명한 미륵은 본래 석가모니의 한 제자였습니다. 실존인물로 보입니다. 미륵에 대한 기록은 대승불교에서는 주로 미륵6부경이라고 불리는 경전에 의지하지만 실상 초기불교의 경전에 더 잘 나타납니다. 경전 내용을 종합해보면 미륵은 본래 주목받는 제자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주목받지 못했던 미륵이 후일 미륵의 제자들이 뜨면서 제자들에 의해 높여진 것이 아닐까 하는 추정도 해봅니다.) 함께 출가한 동료들은 모두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과(나한)에 이르는데 미륵 혼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석가모니불이 미륵에게 자신의 금란가사(금으로 짠 가사. 가사를 준다는 것은 수제자로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함.)를 주고, 미륵이 미래불이 될 것임을 예언합니다. 미륵이 죽어 도솔천에서 태어나 보살로서 있다가, 용화수 아래서 성불하고 56억 7천만년 후에 인간세상에 내려와 3번의 법회를 통해 각각 93억, 96억, 99억의 중생을 구제한다는 것이 미륵의 도래에 관한 주요 내용입니다. 시살 56억년이라는 긴 시간을 상정해놓고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해석에서는 이를 상징적인 숫자로 생각하기 때문에 미륵의 때가 언제가 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금동신묘명삼존불입상 (국보 85호) 고구려의 미륵불. 광배 뒤에 명문이 있습니다.


단석산 신선암의 거대 미륵불입상 (국보 199호) 김유신의 전설이 서려 있습니다. 신라


서산마애삼존불(국보 84호) - 백제. 오른쪽 반가사유상이 미륵보살인 것으로 대체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로 미륵신앙에 대한 인기는 높았습니다. 특히 삼국시대는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미륵 신앙에 대한 지배층의 선호도가 높았습니다. 특히 신라는 화랑도의 이념을 미륵신앙에서 두고 있었고, 미륵이 신라에 환생하였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진지왕 때 미륵의 화신이 신라로 내려온 미시랑이 신라의 화랑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삼국시대 신라의 미륵신앙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사진에 나오는 불상은 김유신이 칼로 바위를 갈랐다는 (요새 선덕여왕이 나오더군요) 단석산에 있는 거대한 미륵입상입니다. 백제의 미륵신앙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익산에 위치한 미륵사는 경주의 황룡사보다 더 큰 절이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경우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국보로 지정된 고구려 금동불상의 뒷면에 미륵부처를 조성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 역시 미륵 신앙이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87호) 신라 것이라는 설이 우세하나 아직도 논란이 많습니다.

여담이지만 반가사유상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위 사진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국보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입니다. 우리는 보통 반가사유상은 보통 미륵보살의 모습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반가사유상의 기원은 석가여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가 아직 속세에서 태자로 있을 때, 성 밖에서 생로병사의 모습을 보고 출가를 결심하기 까지의 고민이 기간이 있었습니다. 반가사유상은 바로 석가모니가 출가하기전 태자의 모습에서 따온 도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흔히 이를 태자사유상이라고 부르며, 석가여래의 도상으로 많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미륵보살이나, 관음보살이 반가사유상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대로 일본에는 불상의 명호(名號)가 기록된 반가사유상이 많이 전해지는데, 일본의 경우는 죄다 미륵보살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도 일본의 경우를 많이 참고하여 반가사유상을 거의 다 미륵보살의 상이라고 보고 있는데, 사실 반가사유상 중 명호가 적히 불상이 하나도 전해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미륵보살이 아닌 가능성도 있습니다. 일본의 초기 불교가 한반도에서 전래된 것을 생각하면, 그리고 여러 정황상 백제의 반가사유상은 미륵보살일 확률이 높겠지만 확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여러 미륵보살을 보여드리되 반가상은 예의 설명에서 제외하겠습니다.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 (국보 81호)

삼국통일 전, 삼국에서 각광을 받던 미륵신앙은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그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물론 신라 교종계 불교 중에 미륵불을 주존으로 하는 법상종이라는 종파가 있었고, 그에 따라 미륵신앙이 계속되기는 했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삼국통일 이전에 비하며 그 세력이 형편없습니다. 게다가 앞서 미륵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고 말씀드렸던 반가사유상도 통일 이후에는 거의 제작되지 않았습니다. 이상한 일이지요.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미륵불은 정확한 것은 삼국통일 직후에 만들어진 바로 이 불상이 유일합니다. 

대신 신라에는 아미타신앙과 화엄신앙이 대세를 이루게됩니다. 아미타신앙은 서방 극락세계의 교주인 아미타불에 대한 신앙으로 특히 원효대사에 의하여 많이 전파되었으며, 나무아미타불만 외워도 극락에 간다는 교리의 간단성과 기복성 때문에 불교 종파와 지역을 가리지 않고 광범위하게 신앙됩니다. 화엄신앙은 불교의 법주인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하는 것으로 특히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 하여 합일을 중시하는 원융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화엄신앙은 의상대사를 해동화엄종의 기원으로 하며, 국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특히 의상대사는 국방상 요지와 과거 백제, 고구려, 가야의 땅에 거대한 화엄사찰을 세움으로써, 정복지에 원융사상을 전파하는 한편, 정복지 감시의 역할을 수행도록해, 종교와 정치의 함수관계를 은밀히 비추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는 다른 강의에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새로운 세계를 설파하는 미륵신앙보다는 화합과 통일을 강조하는 화엄신앙이야말로 통일 이후의 신라 지배층들에게 진정 필요한 사상이었습니다. 


안성 국사암에 궁예미륵이라고 전해지는 불상 


금산사 미륵전 (국보 62호)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 (보물 219호) 왕건이 세웠다고 전해집니다.


충주 수안보의 미륵사지 석불입상 (보물 96호) 신라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만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다시 미륵신앙은 화려하게 부활합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각 지역의 호족세력이나 유력자들이 미륵 신앙을 후원함으로써 정치적인 기반을 갖추었다는 점입니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궁예는 스스로 미륵의 화신임을 자처했습니다. 정교일치라는, 독특한 정치체계를 내세운 태봉은, 그러나 개인의 카리스마로 움직인다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경기도 안성 국사암에는 궁예미륵이라고 불리는 전해지고 있으며, 포천 운악산에도 궁예성터라고 전해지는 곳에 궁예미륵이라고 불리는 불상이 전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견훤 역시 미륵신앙에 기대었다고 전해지는데, 앞서 소개한 적 있는 금산사는 오래된 미륵신앙의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견훤이 크게 후원하여 지어진 절입니다. 견훤 말년에 아들에 의해 감금된 아이러니가 있기도 한 금산사이지만 견훤이 크게 후원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갈망하는 민중의 염원에 호응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의 태조 왕건 역시 미륵신앙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후백제를 멸망시킨 후, 전승지인 논산에 거대한 절을 건립합니다. 그 절은 바로 개태사로, 개태사의 주존불은 거대한 석조 미륵삼존불입니다. 개태사를 창건함으로써 후삼국의 통일로 새로운 세상이 열렸음을 알리려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후삼국의 세력이 모두 미륵을 후워했을 뿐만 아니라 , 각지에는 나말려초의 거대한 석조 불상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어 지방세력이 불교를 후원했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라의 마지막 태자인 마의태자도 나라를 잃고 금강산으로 들어가던 중 만들었다는 미륵불상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보물 218호) 고려 광종때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소위 은진미륵이라고 불립니다.


안동 이천동 마애불입상 (보물 115호) 불두만 따로 조각했습니다. 이 자리에 절이 있었는데 제비원이라고 불려서 지금도 제비원 석불로 더 유명합니다. 무속에서 성주풀이를 할 때 성주신의 본향(本鄕)으로 지목되는 곳으로 영험함이 유명합니다.


파주 용미리 석불입상 (보물 93호) 고려 선종과 선화궁주가 이 불상을 조성하고 아들을 낳았다는 전설이 있어 득남 기원의 성지로 유명합니다.

고려 초기까지 각각 구백제, 경상, 경기 지역의 대표적인 지방화된 석불을 하나씩 골라서 보여드립니다. 모두 고려에 만들어진 높이가 10미터를 넘는 거대한 불상들입니다. 파주 용미리 석불의 경우 고려 선종이 아이를 얻기 위해 조성했다는 전설이 있기는 하지만 세 불상 모두 지방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통일신라 시대 경주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세련된 불상의 조성이 차츰 지방세력에 의해 모방되지만,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크기만 거대해질 뿐 그 세련미를 따라가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고려 건국 이후에도 상당기간 이러한 불상의 조성은 계속되는데, 특히 과거 백제 지역인 충청도 지역에서는 이 시기에 만들어진 가분수의 거대한 불상이 많아서 주목되고 있습니다. 충청도-전라도 지역은 탑이나 건축물에도 다른 지방과는 다른 모습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 불상들이 사실 미륵보살인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워낙 미륵에 대한 정형화된 도상이 없기 때문에 파악이 가장 힘듭니다. 사실 은진미륵으로 잘 알려져있는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의 경우 관음보살이 가능성이 더 크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단한 세상을 살고 있는 민중들에게는 모든 부처님이 미륵이었으며, 전국에는 이렇게 많은 석불들이 도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미륵불로 불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천 매향비 (보물 614호) 고려 우왕때 향계가 매향한 기록입니다.

당진 안국사의 배바위 매향암각 (충남기념물 163호) 당진 안국사지에 배모양의 바위에 매향 사실을 기록하였습니다. 고려말~조선초까지 수차례 매향의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 중, 후기에 이르면 다시 중앙에서의 미륵신앙은 사라지고, 선종이 크게 발전합니다. 화엄종 중심의 교종 역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지요.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중대형 실내 예배용 불상들이 꽤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미륵불은 하나도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다. 
고려 말, 즉 여말선초의 어지러운 상황,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과 정치적 불안이 계속되자 해안지방을 중심으로 미륵신앙이 성행하게 됩니다. 가장 주목한 만한 것은 향나무를 갯벌에 묻는 매향의식이 이 시기 널리 퍼졌다는 것입니다. 매향(埋香)이란 말 그대로 향나무를 갯벌에 묻는 것인데, 이 과정을 통하면 나무가 단단해져 건축재로도 쓸수 있고, 무엇보다도 향의 원료로 쓰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미륵세계가 오면 매장된 향나무가 쓰이길 바라며 향나무를 땅에 묻었습니다. 매향 의식 후에는 보통 기록을 근처의 바위에 새겨놓는데, 대표적인 것으 우왕 연간에 만들어진 사천매향비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무려 4100여명의 사람들이 계를 만들어 매향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매향 기록은 대단히 많이 퍼져있습니다. 이 시기에는 각 지방에서 많은 미륵불들을 조성하게 됩니다. 역시 모두 도상은 미륵에 속하지 않지만 미륵이라고 부리는 불상들이 대단히 많이 출현합니다. 


민불 - 영인신현리석불입상

민불 - 고창 용화사 미륵불상 (전북문화재자료 183호)

모두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민불(民佛)입니다. 조각은 소박하지만 당시 민중들의 염원이 담겨있습니다.

 

법주사 청동미륵대불 
법주사에는 본래 용화전이 있고 그 안에 거대한 미륵불입상이 있다고 전해지지만 흥선대원군이 당백전을 주조하기 위해여 녹였다고 합니다. 일제시대 이를 복원하기 위해 조각가 김복진이 거대 시멘트 입상을 세웠으나 균열이 가자 수십년에 걸쳐 김복진의 불상을 그대로 따서 청동미륵불을 만들었습니다. 높이는 기단 8미터, 불상 25미터입니다. 문화재적 가치는 없으나 근대 조각으로써의 가치는 있습니다.


조선시대가 되면 미륵신앙은 차라리 하나의 민간신앙으로 뿌리내리게 됩니다. 현실이 고단한 민중들은 근처에 있던 불상, 혹은 신이 내렸다고 여겨지는 바위(알고보면 청동기시대의 선돌이나 고인돌일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알모양의 돌맹이에 까지 미륵님이라는 호칭을 부르며 득남, 건강 등을 기원합니다. 때문에 각지에는 민불(民佛)이라고 불리는 불교의 형식에 전혀 맞지 않지만 민중들에 의해 세워지고 신앙되는 불상들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신앙의 힘으로 임진왜란 직후에도 미륵 신앙의 중심인 금산사와 법주사에는 거대한 미륵불상을 다시 세울 수 있었습니다. 

미륵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갈망은 강의 첫머리에서도 볼 수 있듯이 어지러운 조선 말기에도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권력을 잡은 지배층의 입장에서는 미륵신앙만큼 위험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미 공인된 지배층이 있는 세상을 혁파하고 나타나는 새로운 세계를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새로운 세력이 등장해 민심을 얻기에는 미륵신앙을 잘 이용해야 하였습니다. 이렇게 미륵신앙은 부침을 거듭했지만 민중들에게는 확고한 하나의 이념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동학군 손화중포의 일화입니다. 미륵이 오길 꿈꾸는 사람들의 꿈, 그것은 어쩌면 오늘날에도 계속되는 꿈이 아닌까요?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먼 미래 언젠가 올 새 세상이 아니라, 답답한 현실을 대신할 바로 지금이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