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호명의 의미
이번 강의는 문화재를 벗어나서 역사학의 쟁점 중의 하나를 다루어볼까 합니다. 바로 역사에서 호명의 문제, 즉 어떠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하여 어떻게 부를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다루어볼까 합니다. 지나간 과거의 일을 어떻게 부르냐가 무슨 큰 문제이냐고 반문하실 수도 있겠지만, 실상 과거를 어떻게 규정하는 가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현재의 우리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시간은 미래를 보고 달려가면서 흐르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서 부터 나와 미래로 흘리가기 때문이지요.
프랑스 공산당의 이론가이자 철학자였던 루이 알튀세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회에서 어떤 주체는 단순히 홀로 존재함으로써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 의해 호명됨으로써, 그 위치를 승인받게 된다고요. 이것이 호명(interpellation) 이론입니다. 나는 외부의 호명을 받고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구하며, 그 답을 바탕으로 사회를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호명이론이 개인 스스로의 주체성 형성을 무시하는 이론이라고 비판하지만 이는 알튀세르의 이론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지요. 알튀세르가 다루고자 했던 것은 개인의 철학적 사유가 아니라 사회 구조의 문제이니까요. 하여튼 호명이론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익히 던져졌었던 명제, 사람은 혼자 살 수는 없으며, 수 많은 사람들의 관계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입니다. 역사 또한 사람과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단순한 하나의 사실(fact)를 어떻게 부르는지 결정한다는 것은 실상 그 사건의 규정짓는 것과 다름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역사를 한다는 것은 단순히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부를 것이냐는 이전부터 첨예한 문제였습니다. 심지어 학계에서는 이 문제로 서로가 반목하고 학파가 갈라지는 경우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몇가지 예를 통하여 역사에서 호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동학농민운동>이라고 부르는 사실(史實)이 있습니다. 해방 이후 1960년대까지 이 사실을 사람들은 <동학란(東學亂)>이라고 불렀습니다. 조선시대, 농민들의 봉기는 조선왕조와 성리학적 세계관을 어지럽히는 반역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亂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학문적 연구가 진행되고, 여러 증언들이 채록되면서 이 사실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이루어지게되었고, 결국 이 사실은 동학을 중심으로 일어난 농민들의 반봉건, 반외세 운동이라는 의미의 <동학농민운동>이 이 사실의 명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를 지나면서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연구 성과가 쌓이면서 이 명칭이 부적합하다는 논의가 확산되었습니다. 우선 "운동"이라는 단어가 논란이 되었습니다. 운동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변화시키기 위한 움직임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실 운동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이 대단히 제한적이고 소극적이고, 삼남지방을 휩쓸었던 이 사실을 운동이라는 단어에 가두어두기에는 너무나 사회적 파장과 변화, 그리고 이 사실의 사상의 지배이념으로부터의 이탈이 컸기 때문에 운동을 대체할 다른 단어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두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전쟁" 과 "혁명" 이라는 단어가 후보선상에 올랐습니다. 아울러 "동학"이라는 단어 역시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 문제는 당시의 봉기에서 동학이라는 종교의 역할에 대한 문제입니다. 동학이라는 종교가 사상적 배경이 되었는가? 아니면 동학 교단의 포접제라는 독특한 지역 체계를 농민군이 이용한 것에 불과한가? 이에 대한 논쟁이 격화되면서 봉기가 출발한 해인 "갑오"라는 단어를 앞에 붙이는 것이 제안되었습니다.
지금 이 사실은 <○○농민○○>로 불리게 되는데 앞에 붙는 단어는 "동학", "갑오"가 되겠고, 뒤에 오는 단어는 "운동", "전쟁", "혁명" 이 되겠지요. 수학적으로 6가지의 명칭이 생기는 것이네요. 앞에 오는 두 단어는 앞서 말했듣이 동학이라는 종교의 역할에 대한 관점 차이가 문제일 것이고, 뒤에 오는 세 단어는 봉기의 성격에 대한 관점 차이가 문제일 것입니다. 사실 학계에서는 "운동" 이라는 단어는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운동이란느 단어가 가지는 소극성에도 문제가 있지만 이 명칭 자체가 자체가 박정희 정권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당시의 봉기를 과소평가하는 것이라는 의견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과서난 관(官), 혹은 이 봉기의 반외세, 반봉건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뉴라이트에서는 운동이라는 단어를 쓰고있습니다. 혁명이라는 반어는 이 봉기의 반외세, 반봉건성을 대단히 크게 평가하는 것이며, 갑오농민혁명을 이후 진행되는 반외세, 반봉건 싸움의 시작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주로 민족주의 사학 (민족주의 사학이라고 간단히 이야기했지만 사실 굉장히 복잡합니다. 유사역사학과는 질을 달리하는... 민족해방(NL :민족주의+ 유물사관)적 관점이라고 해야 명확하겠습니다.) 에서 주장했으며, 이를 통해 갑오농민혁명-3.1운동-항일독립운동-4.19-5월 광주-6워 민주항쟁-91년 5월투쟁으로 이어지는 일종의 민중적 전통을 중시하는 입장이지요. 반면 "전쟁", 적확히 표현하면 "농민전쟁" 이라는 단어를 제안하는 사람들은 봉기의 반외세, 반봉건성을 일부만 인정합니다. 혁명으로 볼 만큼의 근대성도, 혁명성도 아직 부족하다는 것이지요. "농민전쟁" 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당시의 경제적 상황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근대 자본주의가 이식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봉건제와의 모순이 결국 농민의 봉기를 일으켰고, 이를 프리드리히 앵겔스에 의하여 주목된 "독일농민전쟁"에 비유하는 것이지요. 독일과 조선의 농민전쟁을 획일적으로 비교하는 것에 대한 비판 이후에는 조선의 특수성을 보강하여 조선식 "농민전쟁" 이었다고 보는 관점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동학농민전쟁>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동학이라는 종교가 단순히 행정적 체계만을 제공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사실 남접과 북접의 사상적 차이가 전쟁 중 갈수록 심화되는데, 이 차이를 조경달 선생님은 남접을 "이단적 동학" 으로 보고 있으며 (나쁜 의미는 아닙니다.) 북접의 전통이 농민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보수화되어 결국 천도교로 귀결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큰 해답이 되었지요.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도, 당시의 봉기에서의 반외세, 반봉건 사상을 지나치게 강요하는 것은 실증적이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민중들 사이에서는 조선을 뒤엎는 개벽을 기다리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전봉준이나 손화중은 조정대신과 민씨 일파만 제거하는 왕조체제를 뒤집지 않는 개혁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지만 김개남의 경우 아예 조선왕조를 없애버리려는 혁명적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당시의 경제적 상황을 보더라도 "전쟁"이라고 보는 것이 옮다는 입장입니다.
다음 사례로 제주 4.3 사건과 여순사건을 보도록 하지요. 이 문제는 정통성의 문제입니다. 최근에 건국절 논쟁이 일어나면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논의가 많은데요, 이 두 사건은 여기에 결정적으로 연결되는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건국절 논쟁에서 문제가 임정이 정통이나 미군정이 정통이냐로 소급되기는 했지만 사실 개인적으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통성이라는 것은 왕조시대에나 유효한 것이지요. 근대 정치에서, 특히 입헌제에서 정권은 시민에 의해 좌우되는 것입니다. 비록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시민의 투효에 따라 오늘의 여당이 내일의 야당이 될 수도 있는 것이죠. 이러한 상태에서 누가 정통이라는 따지는 것 자체가 전근대적인 논쟁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정통이라고 하여도, 근대 정치에서는 시민에 의하여 국가 자체가 바뀔 수도 있는 것입니다. (헌법에도 시민 불복종은 명시되어 있지요) 더군다나 건국절 논쟁에서는 빠진 것이 있습니다. 해방 직후 가장 먼저 움직였고, 대중적인 지지 또한 임정에 못지 않았던 건국준비위원회 즉 건준과 건준의 후신인 인민위원회에 대한 내용이 쏙 빠져버린 것입니다.
건준은 거의 모든 지역에 도-시군-읍면-리 지역의 준비위원회를 결성했습니다. 그리고 여운형이 인민공화국을 선포한 이후에 준비위원회는 인민위원회로 전환합니다. 인민위원회의 성격에 대해서는 연구가 많이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지역에 뿌리내렸던 인민위원회의 성격과 구성인물에 대한 분석이 필수적인데, 당시 인민위원회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죽었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여튼 인민위원회는 입법과 사법과 행정이 일치된, 대의제가 아닌 주권자에 의해 직접 통치되는 직접민주주의 체제를 말합니다. 인민위원회는 일제의 지방행적체제를 동결하고 주민 스스로 지역정치를 장악하도록 하였습니다. 물론 인민위원회는 좌익에 의해 주도되었는데요, 이는 1930년대 이후 일부 임정의 우익인사나 강고한 기독교 우익(조만식 등)을 빼면 사실상 좌익만이 독립운동에 남게되면서, 우익 스스로가 초래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친일세력이 강한 곳이수록 인민위원회가 서기 어려웠다는 조사는 인민위원회의 성격을 짐작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군정은 건준과 인민위원회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남로당이나 전평(전국노동조합평의회) 같은 좌익단체를 불법화하면서 각 지역의 인민위원회 역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미소공위에 결렬되고 미군정과 남한단독정부수립론자들 줄여서 단정론자들(이승만 뿐만 아니라 초기에는 김구 또한 단정론에 찬성했습니다.)이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총선을 실시한 것입니다. 통일정부를 원했던 임정계열과 남한의 좌익들은 당연히 이에 반대하였고, 특히 제주에서는 총선 투표 거부의 움직임이 일어 총선 투표율이 극히 낮았고, 심지어 투표 무효가 선언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제주도민의 움직임을 통제하기 위해 미군정은 대동청년단 같은 백색폭력집단을 제주도로 보내서 온갖 포력과 테러가 일어나게 됩니다.
제주 4.3은 이러한 배경으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첫 시발은 남로당 제주도당과 제주도 인민위원회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우익청년단의 행패와 뿌리깊은 육지사람으로부터의 제주도민 수탈이 그 근본원인입니다. 거기에 분단정부가 아닌 통일 정부에 대한 염원이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제주 4.3을 최근까지 남로당이 일으켰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민국에 반하는 행위였다는 이유로 반란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제주도민들이 "반란"을 일으겼다지만 이 시기에는 대한민국이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반란은 정통에 도전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제주도민이 저항했던 정통은 "미군정" 밖에 없습니다. 이는 미군정을 대한민국 정부의 출발점으로 보고자 하는 뉴라이트와 다를 바 없는 관점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여기서 "정통"에 매어져있는 우리는 시각을 다르게 보아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폭력과 테러, 분단을 조장하는 세력과 이에 저항하는 세력 중 어느 쪽은 정통으로 보아야 할 까요? 저는 서울의 중앙청, 혹은 청와대를 차지한 세력이 꼭 "정통" 이어야 하는 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더군다나 4.3으로 제주도민의 1/3이 죽었습니다. 때문에 제주 4.3은 반란이나 단순하 사태가 아니라 봉기나 저항으로써 재평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흔히 <여순반란사건>이라고 불리는 사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건은 제주 4.3을 진압하기위해 여수와 순천에 머물러 있던 미군정 국방경비대 제14연대가 진압을 거부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당시 국방경비대 내부에 침투한 남로당원들의 계획에 의하여 일어났습니다. 사실 여순사건에 대하여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는 사실은 이정도 입니다. 여순사건을 반란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 것도 군인이 상부의 명령을 거역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상 여순사건은 단순히 군인의 반란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군인반란에 의하여 촉발된 전남 동부지역 전역의 광점위한 대중봉기가 이 사건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지역의 인민위원회는 곧 경찰과 청년단을 제압하고 사실상 지역을 통제합니다. 특히 이 지역은 넒은 농토로 지주가 많던 지역입니다. 소작인들은 남로당과 같은 좌익세력을 절대적으로 지지하여 인민위원회가 순식간에 복구되는 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게다가 친일파의 숙청, 주민을 괴롭히던 서북청년단 같은 우익청년단의 숙청, 식량 배급, 토지 분대등을 약속하자 당시 지역의 최고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학생들이 봉기에 합류하게 됩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여순사건이 단순한 군 반란이 아니라 학생들까지 합류할 정도로 대중적인 지지를 폭 넓게 받았던 봉기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반란을 일으킨 대상은 미군정이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여순사건 역시 함부로 반란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부르냐는 단순히 개인의 정치적 성향을 상회하는 문제입니다. 과거를 어떻게 규정할것이냐는 점은 현재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좌익이 항일, 반외세, 반친일, 반분단의 성격을 지녔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광범위한 좌익 마녀사냥과 민중 학살의 주역들이 지금의 정치 엘리트와 연결된다는 사실은 그들의 근간을 무너트리는 일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뉴라이트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등장하여 자신의 과거를 합리화하고 미화하며, 민족주의에 대한 불합리한 비판(민족주의에 대한 합리적 비판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뉴라이트의 민족주의 비판은 마치 우민(愚民)들을 꾸짖는 지배층의 것 그 이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을 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다나 한국의 우익은 개탄스럽게도 일본 우익의 논리를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남한 자본가와 정치엘리트의 형성이 일제시대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들로써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죠.
때문에 우리는 역사적 사실의 호명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호명은 단순한 이름부름이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함의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익숙해진 이름부름은 우리의 안쪽,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곳에서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만들어왔습니다. 사조의 모든 분들이 비록 제 강의 내용에 동의하지 못할 수는 있으니 역사의 엄격함과 어려움에 동감할 수 있는 시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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