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일본 여행기 17차

압축 일본답사기 - 5일 도쿄3 (노기신사乃木神社)

同黎 2020. 6. 23. 19:45



다음은 노기신사에 가기 위해 노기자카에 왔다.


롯본기 바로 옆으로 1번 출구로 나가면 바로 노기신사이다.


나가는 곳


노기 마레스케와 관련된 곳이 여러 곳이다.


노기신사(乃木神社, 내목신사)는 조슈 출신의 육군대장인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부부를 모시는

신사이다. 노기 마레스케는 에도에서 태어나 지금의 시모노세키에서 자랐으며 요시다 쇼인의 사후

쇼카손주쿠에 들어가 키도 타카요시, 타카스키 신사쿠,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과

알게 되었다. 이후 조슈 기병대에 들어갔으며 메이지유신 이후 육군에 들어가 서남전쟁 등에

참여했으나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군기를 빼앗기기도 했다. 

그러나 메이지천황의 신임을 얻어 승진을 계속해 청일전쟁에 참가 이후 중장으로 승진하고 대만

총독을 잠깐 지냈으나 대만인들의 반란이 계속되어 사임했다. 이후 러일전쟁에 대장으로 참여해

여순항 포위에 참전했는데 그 유명한 203고지 전투에서 무능한 모습을 보여 13만 군대 중 6만 명

가까이가 사상자가 되었다. 이 일로 노기는 여론의 대단한 비난을 받았고, 전후 돌아온 항구에서

유족들의 항의를 받았으나 맨 앞에 역시 203고지에서 죽은 자신의 두 아들 관을 앞세워 모면했다.

이 때 그는 책임감을 느끼고 메이지천황에게 자결을 청했지만 메이지천황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이후 군대에서는 은퇴하고 가쿠슈인의 원장이 되었으며 후일 쇼와천황이 되는 황태손 히로히토도

그의 지도를 받았다. 이후 1912년 7월 30일 메이지천황이 죽자 장례가 치뤄지기 3일 전인 9월

10일 황태자 히로히토를 알현해 마지막 인사를 하고 9월 13일 장례식 와중에 아내 노기 시즈코와

함께 상복을 입고 유언와 사세구를 남긴 채 할복한다. 그의 할복에 대해서 대부분의 언론은

전근대적인 일이라고 비난했으나 극우파의 지지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가 자결한 도쿄의

자택 부근에 1913년 작은 신사가 세워진 것을 시작으로 1923년 지금의 신사가 생겼다.

노기의 할복은 군국주의와 함께 더욱 강조되고 미화되었으나 도쿄대공습으로 소실되었던

것을 1960년대 재건하였다. 그의 집은 살아남았다. 이 밖에 전국에 4곳의 노기신사가 더 있다.


안내문


노기신사의 표석

현재 신사본청의 별표신사


노기신사라는 표석


노기 저택 일반공개 일정


경내도

뭐 사실 신사가 별 거 있나


여기도 수리 중


굴삭기가 보인다


저택 정문


멀리 목조주택이 보인다.


안내판


사전 방향으로 가면


보물관이 보인다


배전의 모습


배전에서 바라본 본전


배전은 문 형식인데 뒤로는 들어갈 수 없다.


섭사인 세이쇼신사

노기의 스승을 모신 곳


뒤편으로 가는 길


섭사 세이쇼신사


폐전 내부


본전이 보인다


멀리 보이는 본전


섭사 세이쇼신사


노기의 스승 타마키 분노신이 주신


그 조카인 요시다 쇼인도 함께 모셨다.


옆에 있는 다른 섭사

노기가 섬겼던 이나리신을 모셨다고


보물전으로 이동


보물전 입구


노기의 사진을 판다.


옆에 있는 도고신사의 도고 헤이하치로는 진짜 능력이라도 뛰어났지...


보물관 안에 있는 노기의 상


노기의 일생


러일전쟁 당시 미국인 종군기자가 개최한 미국 독립기념일 축하연의 메뉴

노기와 영국인 장군들이 참가했다는 기록이 있다.


노기의 말안장


메이지천황이 하사한 포도주


미국 뉴욕타임즈에 실린 그의 부고기사



노가 마레스케가 죽을 때 지은 와카


그의 부인이 지은 와카


러일전쟁 당시 그가 지은 죽은 병사들에 대한 제문



할복하기 직전의 노기 부부


노기의 유서


할복 직전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


노기의 친필

황위휘팔굉


그가 쓴 교육칙어


보물관에서 그의 자택이 살짝 보인다.


요런 건물이라고


이제 돌아서 나온다.


이제 마지막 목적지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