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동양사

야나기 무네요시와 모쿠지키불(木喰佛)

同黎 2013. 6. 22. 23:16

최근 덕수궁미술관에서 야나기 무네요시가 수집한 일본민예관의 소장품을 소개하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개인적으로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인물에 대하여 처음 접한 것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역사를 정리해 놓은 책을 통해서이다. 그 후 2006년 서울 동아일보사에 있는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문화적 기억_야나기 무네요시가 발견한 조선 그리고 일본>, 2012년 일본 오사카역사박물관에서 열린 <柳宗悦展―暮らしへの眼差し―> 그리고 이번 덕수궁 미술관의 <야나기 무네요시>까지 총 3번의 특별전을 통해 만났으니 인연이 꽤나 있는 편이다. 그의 영향을 받은 화가인 무나카타 시코의 특별전까지 보았으니 더욱 그렇다.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근대 일본 미술과 민속학에 큰 영향을 미친 민예연구가이며 미술평론가이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절 문화 담론을 이끌었고, 처음 민예(民藝)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일본과 한국의 민속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에서는 도쿄에 일본민예관을 설립하여 일본을 중심으로 조선·훗카이도·오키나와·대만의 민예품을 수집하였고, 조선에서는 경복궁 집경당에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하였다. 이 때 수집한 유물들은 훗날 국립중앙박물관에 편입되어 현재 유물번호로 ‘민족’을 부여받았다. 한국에도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야나기 무네요시를 거론할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조선의 미(美)를 비애와 한(恨)의 정서로 규정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규정은 식민사관의 정체성론·타율성론과 연결되어 조선의 미학을 왜곡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조선 민속학에 공헌한 그의 공로를 높게 평가하는 한편, 다른 일각에서는 그 역시 일제의 하수에 지나지 않고, 역동적인 조선의 정서를 비애미로 한정시켰다는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번 덕수궁미술관의 전시에는 이러한 부정적 평가에 대하여 일언반구의 언급도 하지 않아 비판을 받고 있다.


조선의 미학을 왜곡했다는 비판을 일견 타당하지만 일견으로는 오해도 섞여있다. 먼저 야나기의 관심은 왕실이나 양반 사대부의 미(美)가 아니라 철저히 민중의 미에 있었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신분질서라는 법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넘을 수 없는 벽 안에서 살고 있는 민중들에게 비애와 한의 정서를 찾기는 매우 쉬운 일이다. 물론 그러한 정서에서 출발한 해학과 골계가 있는 것이고 그 점은 야나기도 부정하지 않았다. 요컨대 야나기의 관심이 민중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투박함 속에서 한과 비애에 주로 집중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알아야 할 점은 그가 조선의 정서만을 비애와 한으로 규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야나기는 일본의 민예(民藝)의 비애미 또한 예찬하였다. 즉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전근대사회 전반의 민중 정서에서 비애미를 읽어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야나기 이전에는 민예에 대한 의식이 아예 없다시피했고, 해방 이후에도 그의 입론이 한국미술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그의 미학에 대한 비판이 강화된 것 같다. 그를 식민주의자라고 몰기에는 야나기가 조선을 너무나 사랑한 것이 분명하다. 오히려 그에 대한 비판을 지나치게 홀대 받고 있는 조선의 민예를 승격시키기 위해 일본의 그것과 같은 비애의 정서를 지나치게 강조한 혐의에 두어져야 할 것이다. 즉 일본 특유의 쓸쓸함과 투박함을 특징으로 하는 와비사비(侘寂)의 정서를 조선의 민예에 투영한 것이다.


즉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한 비판지점은 굳이 따지자면 차라리 ‘일선동조(日鮮同祖)’론에 가까운 것여야지 정체성론에 두어서는 안된다. 실제는 야나기를 적극적인 제국주의자 혹은 식민주의자로 보기에는 좀 곤란한 점이 많다. 아스카시대에 만들어진 많은 불교미술품이 실은 한반도에서 도래한 이들의 작품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도 야나기이다. 물론 1940년대 총동원시기 제국의 찬양하는 글을 잇따라 게재한 것은 흠이 되지만 그의 일생을 보았을 때 그는 차라리 낭만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이 가장 옳은 듯하다.


야나기에 대한 또 하나의 비판지점은 그가 ‘민중적인 미학’을 고정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사라져가는 전근대시대의 ‘민중 예술’을 발견했고 이는 실로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직접적으로 문헌상에서 연결점을 찾기는 어렵지만 한국의 80년대 민중 미술까지 그 영향력이 이어졌다고 보인다. 대표적인 민중화가인 오윤의 판화작품은 목판화 특유의 투박함과 거침이 돋보이는 가운데 그 내용에서 민중의 비애와 한을 담고 있다. 야나기의 민예론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문제는 ‘민중적인 것’을 이렇게 고정시키면서 그 ‘민중 예술’의 소재 또한 고정시켰다는 것이다. 민중은 역동적이며 민중이 자신의 정서를 표현하는 소재와 재료는 수시로 바뀔 수 있다는 점을 망각하고 이를 전근대시대의 어떤 지점에 고정시키면서 ‘민중 예술’은 민중과 급격하게 이별하게 되었다. 야나기 미학의 가장 큰 비판지점은 민중적인 것을 고정시키고 또한 이를 지나치게 과정한 점이라고 하겠다.


어쨌든 간에 그전까지 버려지고 홀대받았던 생활용품과 미학적으로 완성되지 못한 투박한 미술품들이 ‘민예(民藝)’라는 이름으로 나름의 가치를 인정받고 보존되게 한 점에서 그의 공로를 무시할 수 없다. 또한 예술을 전문가집단만이 창작할 수 있는 대단한 무언가가 아니라 누구나 창작할 수 있는 것으로 규정했다는 점, 그리고 무심한 속의 미학을 찾았다는 점에서 그가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의 미학이 찾아낸 가장 위대한 예술품은 모쿠지키불(木喰佛)이라고 불리는 18~19세기에 걸쳐 일본 각지에서 만들어진 일련의 불교조각품이라고 생각한다.


모쿠지키불(木喰佛)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모쿠지키 쇼닌(木喰上人)이라는 스님(쇼닌은 덕이 높은 스님에 대한 존칭)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만든 불상이다. 모쿠지키불을 알기 위해서는 이와 거의 비슷한 엔코불(円空佛)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엔코(円空)는 에도시대 전기인 17세기 전국을 순례하던 스님인데 그가 조각한 불상이 현재 5000여 개 남아 있다. 엔코불의 특징은 한 덩이의 나무를 깍아내서 거칠고 투박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단순히 투박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나무의 본래 모습을 그대로 살린 파격적인 모습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쿠지키(木喰)는 18세기 후반의 사람으로 엔코와는 100년 이상 떨어진 시기에 활동하였다. 그러나 엔코와 마찬가지로 모쿠지키 역시 전국을 순례하였으며, 그 순례 도중에 수 많은 불상을 남겼다. 그의 죽음 이후 100년 이상 망각되었지만 야나기 무네요시가 처음 모쿠지키불을 찾아내고 이어지는 조사를 통해 300구 이상의 불상이 발굴되면서 모쿠지키에 대한 재평가가 진행되게 되었고, 덩달아 엔코의 불상 역시 주목받게 되었다.


엔코와 모쿠지키 불상의 특징은 나무를 덩어리째로 깍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세한 부분은 과감히 생략하였고 재료가 되는 나무 형태에 맞추어 전체적인 형태만 잡아 놓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양식은 시방삼세 어느 곳에서나 부처가 있다는 사상에 기반하여 나무나 돌에서 부처가 현신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실제로 나무 속에서 나오는 듯한 모습의 불처는 나무와 돌 같은 자연물에 불상을 조각하고 신성성을 부여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불상이다. 일본 특유의 신불습합(신도와 불교를 융합시키는 것)적 성격 때문에 이러한 불상이 탄생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엔코와 모쿠지키의 불상은 이전까지는 전혀 없었던 새로운 양식의 불상이다.


엔코불과 모쿠지키불이 가지는 동일한 또 하나의 특징은 거의 모든 불상이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이다. 동북아시아 삼국의 불교 전래 초반의 불상은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약간 어리숙해보이기까지 하는 미소를 짓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가 불교가 점차 국가불교화 하면서 대부분의 불상은 위엄을 갖추고 경외의 대상으로서 군림하였다. 부처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민중을 구제하는 보살까지 그러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데 에도시대로 접어들면서 다시 민중과 친근해지는 불상이 등장한 것이다.


지역적으로는 불교의 중심지였던 나라와 교토를 중심으로한 긴키(近畿)지방보다는 간토(關東)나 도후쿠(東北)지방에 이런 불상들이 더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중앙의 간섭에서 먼 곳, 그리고 차별에 시달리고 자연재해에 시달리며 부처가 누구보다도 필요한 곳에 살던 사람들에게 교토의 무서운 부처님 대신 나를 위로해주는 친근한 부처님이 더 좋았을 것이다. 국가권력에 편승하고 매너리즘에 빠진 불교 대신 교리는 없어도 진정 의지가 되는 불교가 나타난 것이다. 때문에 대부분 관습화된 에도시대의 불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생명력이 엔코불과 모쿠지키불에서 보이고 있다.


우리가 야나기 무네요시에게 진 빚은 그런 것이다. 이런 생명력 넘치는 소박한 예술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알려진 것은 바로 그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현재 엔코와 모쿠지키의 작품은 도쿄국립박물관과 도쿄의 일본민예관을 비롯하여 수 십 곳에 소장되어 있고, 많은 사람들이 이 에도시대의 불상의 미에 대해 느끼고 있다. 전근대의 것이 무조건 비판받고 사라지던 시기에 야나기 무네요시가 있어서 어쨌든 우리는 사람들이 손으로 만들어냈던 전근대시대의 생활품들을 지켜내고 그 가치를 재평가할 수 있게 되었다. 야나기가 있었기 때문에 야나기를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이 박정희정권시기 새마을운동이라는 조국 근대화로 많은 풍경을 잃어버렸던 것을 생각해보면 한국의 야나기가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엔코(円空)의 불상



양두숙라좌상(両面宿儺坐像)



약사삼존상


부동명왕 2동자상


금강역사


천조대신(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


닛코대권현 


모쿠지키(木喰)의 불상


자각상


지장보살상


여의륜관음상


천수관음상


자각상


지장보살


33관음


자안관음(子安觀音)




지장보살


비사문천


관음삼존상



허공장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