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동양사

한(漢)과 흉노. 독립된 천하

同黎 2012. 7. 28. 00:51

한(漢)과 흉노. 독립된 천하
동양에서 천자(天子)를 칭한다는 것은 곳 자국을 중심으로 한 천하관을 세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국의 황제들이 그러했고, 고구려와 백제의 대왕(大王)이 그러했으며, 일본 역시 천황(天皇)을 칭하며 자신들을 중심으로 한 천하관을 확립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한(漢)대에 중앙아시아를 주름잡았던 흉노의 선우 역시 황제와 동등한 자신만의 천하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야만민족이라는 선입관이 덧씌워진체 인식되는 흉노가 사실 당시 아시아를 양분하는 강력한 세력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글에서는 사기의 흉노열전을 중심으로 흉노와 한이 각각 서로를 바라보는 시각과 그들이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는 천하관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한(漢)이 보는 흉노(匈奴)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그들의 풍속은 한가할 때는 가축을 기르면서 새나 짐승을 사냥하는 것을 생업으로 삼고, 위급할 때는 모두가 싸움에 참여하여 침략하고 공격하는데 이것이 그들의 천성이다. 그들이 먼 거리에 쓰는 무기로는 활과 화살이 있고, 가까운 거리에 쓰는 무기로는 칼과 작은 창이 있었다. 싸움이 유리하면 앞으로 나아가고 불리하면 뒤로 물러서며 달아나는 것을 부끄러운 일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이익이 있으면 달려가 예의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군왕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이 가축의 살코기는 먹고 그 가죽은 옷을 만들어 입거나 침구로 썼다. 장정들이 살찌고 맛있는 고기를 먹고 노인은 그 나머지를 먹었다. 건장한 자를 소중하게 여기고 노약자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아버지가 죽으면 남아 있는 아들이 아버지의 후처를 아내로 삼고, 혀제가 죽으면 남아 있는 형제가 그 아내를 데려다 자기 아내로 삼았다. 그들의 풍속은 이름 부르는 것을 꺼리지 않으며, 성(姓)이나 자(字)가 없었다.”

이것은 사마천의 사기(史記) 중, 흉노(匈奴)열전의 첫머리에 나오는 글입니다. 흉노제국의 계보를 설명하기 이전에, 그 나라와 민족의 풍속을 설명한 글인데 사마천은 흉노가 한나라의 예의범절, 즉 삼강과 오륜을 전혀 지키지 않는 야만민족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중화(中華)가 북적(北狄)으로 여겼던 흉노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는 알려주는 가장 적나라하면서도 공식적인 기록입니다.  한의 흉노에 대한 경멸 내지 폄하는 흉노에 온 한나라 사자와 흉노에 귀순한 환관(宦官) 중항열(中行說)의 대화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한나라 사자는 흉노에서는 노인을 천대하는 풍습이 있으며 계모와 형수를 아들이나 동생이 취하는 것이 예의에 크게 어긋난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이 흉노를 단순히 야만민족만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는 사기의 여러 이민족에 관한 열전들, 즉 남월, 동월, 조선, 서남이, 대원열전과 흉노열전의 분량, 내용의 상세함만을 비교해 봐도 쉽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흉노는 중화(中華)가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는 야만족이 아니라 한나라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심지어 한나라 고조 유방은 흉노를 치러 갔다가 포위당하여 결국 한무제가 흉노를 정벌하기 전까지 한나라는 흉노와 막대한 양의 세폐를 보내면서 평화를 유지하게 됩니다. 사기 흉노열전에는 흉노의 여러 선우(單于) 중 가장 영웅적이라고 할 수 있는 묵돌선우(冒頓單于)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민족에 대하여 주로 무례함과 야만적임을 강조하고 있는 사기에서도 묵돌선우에 대해서는 군데군데 찬사를 보내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처럼 사기 열전에서 흉노의 용맹함을 자세히 적은 것은, 물론 흉노 열전 앞에 위치한 (흉노를 정복한) 장군 이광의 업적을 높이기 위한 의도도 있다고 보이지만 그만큼 한나라에 흉노가 위협이 되는 존재였다는 것은 반증합니다.

한나라는 자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천하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방의 오랑캐, 즉 북적, 서융, 남만, 동이라는 표현은 중화(中華)와 대비되는 야만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한나라 황제는 오랫동안 흉노의 선우를 황제와 동등하게 취급해야 했으며 많은 냥의 세폐를 주어야 했습니다. 이는 그동안 중국이 유지해온 천하관에 모순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한나라가 비판했던 흉노의 비례(非禮)는 농경민족국가와 전혀 다를 수밖에 없는 유목민족국가의 특징을 이해하지 못한 데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사기의 흉노열전에서 흉노의 형사취수제를 예법에 어긋나는 야만적인 것이라 비판하고 있으나 부여-고구려 계통의 민족에서도 형사취수제가 보이는 데 이는 유목민족의 특징인 듯 합니다.  

다음은 흉노(匈奴)가 보는 한(漢)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흉노 측의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아 이에 대한 직접적인 검증은 불구하지만 우리는 사기 흉노열전의 한자락에서 흉노의 한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흉노의 대선우는 황제에게 보내는 글에서 항상 “천지가 낳으시고 일월이 세워 주신 흉노의 대선우” 라고 칭하며 중국과 동등한 위치에 있음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는 사기 흉노열전 첫머리에 “흉노의 하후씨의 후손으로 순유라고도 한다.” 라고 밝혀 흉노의 기원이 하나라에 있음을 주장하는 -즉 강력한 흉노도 결국 한족의 한 분류라고 강변하는 - 사기의 기록과는것과는 상반되는 것입니다.

흉노가 오랫동안 중국과 동등한 위치에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한화(漢化)를 거부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한나라에 보내는 많은 세폐 중에는 정교한 귀중품과 비단 등이 많았는데, 흉노는 이를 받아들이되 어느 정도의 유흥으로만 생각했을 분 그것을 자신들의 문화에 융합시키려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문화적 이유도 있겠지만, 한나라에 의존하기 않으려는 경제적 자립의 목적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은 한나라의 환관으로 흉노에 귀부(歸附)한 환관 중항열이 선우에게 한 이야기에서 잘 나타납니다.

“흉노의 인구는 한나라의 군 하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강한 이유는 먹고 입는 것이 (한나라와) 달라 한나라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금 선우께서 풍속을 바꾸어 한나라의 물자를 좋아하게 된다면 흉노가 한나라 물자의 10분의 2를 채 쓰기도 전에 흉노 백성은 모두 한나라에 귀속될 것입니다. 한나라 비단과 무명을 얻어 옷을 지어 입고 말을 타고 풀이나 가시덤불 속을 달려 보십시오. 웃옷과 바지는 모두 찟어져서 못 쓰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백성에게 비단옷이나 무명옷이 털옷이나 가죽옷만큼 완벽하지도 튼튼하지도 못함을 보이십시오. 또 하나라의 먹거리를 얻게 되면 모두 벌서 그것들이 젖과 유제품의 편리함과 맛만 못함을 보이십시오.”

아울러 중항렬은 한나라 사신에게 하는 말에서 흉노 고유의 풍속이 모두 유목민족국가인 그들의 사정에 알맞게 되어 있는 것임을 알 수 잇씁니다.

“ (전략) ... 아버지, 아들, 형, 동생이 죽으면 그들의 아내를 맞아들여 자기 아내로 삼는 것은 대가 끊길까 염려하기 때문이오. 그래서 흉노는 어지러워져도 한 핏줄의 종족을 세울 수 있는 것이오. 지금 중국에서는 드러내 놓고 자기 아버지와 형의 아내를 아내로 삼는 일은 없지만 친족 관계가 더욱 멀어져 서로 죽이기도 하고, 혁명이 일어나 천자의 성이 바뀌기도 하는데 모두 이런데서 생기는 것이오.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예의만을 지키다 보면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원망만 하게 되오. 궁실과 가옥을 지나치게 아름답게 꾸미다 보면 생산할 힘을 다 쓰게 되오. 대체로 한나라는 밭을 갈고 누에를 쳐서 먹거리와 입을 것을 구하고 성곽을 쌓아서 자신을 방비하기 때문에 백성은 전시에 싸워서 공을 이루는데 서투르고 평상시에는 생업에 지쳐 있소. 슬프구나! 흙으로 지은 집에서 사는 한나라 사람들이여!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대로 말하지 마시오. 옷자락을 살랑살랑 움직이고 다니지만 옷과 관이 있다 한들 무슨 쓸모가 있겠소?”

여기에 대답하려 하는 한나라의 사신의 말을 중항열은 한마디로 막아버립니다.

"한나라 사자여!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시오. (중략) 보내는 물품이 갖추어지지 않았거나 질이 나쁘면 곡식이 익는 가을을 기다렸다가 기마를 달려 당신네 농작물을 짓밝아 버릴 것이오."

 유목민족의 나라에 농경민족의 풍속이 필요 없음을 잘 말해주는 것입니다. 흉노는 이러한 자신감과 주체의식을 가지고 중국과 대항하며 오랫동안 독자적인 세력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유목민족에 대하여 일종의 편견과 환상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유목민족은 잔인하고 문화가 발달할 수 없다는 것이 편견이며, 자연과 어울리는 순수한 사람들이라는 것이 환상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유목민족들의 선택은 자신이 처한 자연환경, 즉 농경이 불가항 초원지대에서 살기 위한 방편이며, 그것이 농경민족보다 우수하다고도, 열등하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흉노열전은 어느새 중화주의적 역사관에 물들어버린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깨우쳐줍니다. 당시 동아시아의 천하는 하나가 아닌 둘이었으며, 어느 것을 중심이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끊임없이 정통을 찾고 하나가 아닌 정통을 용납하지 않는 중화주의적 역사관이 아닌 새로운 관점으로 역사를 돌아보면, 지금의 우리 사회도 새롭게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